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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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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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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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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누_유체이탈

DUMMY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아랑누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비익정의 모든 사람이 깊이 잠들어 근처에서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아랑누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빛 속에 거대한 새가 서 있었다. 날개를 한 번 펼치니 비익정과 마당을 덮을 만큼 컸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색깔은 볼 수 없으나 짙고 깨끗한 눈동자, 빛나는 깃털, 어마어마한 크기는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이 시조새?”


거대한 새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아냈구나. 네가 세운 둥지에서 너를 기다렸다. 나를 찾아와라.”


아랑누는 손을 내밀었다.

“잠깐. 당신도 미사랑을 기다리나요?”


시조새가 맑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는 동안 새의 형상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꿈이 지워지자 잠도 사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시조새의 모습은 그대로 기억났다. 어딘지 위엄 있고 엄숙하며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가졌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호설이 알려준 말이 생각났다.

‘불라국 유리산을 찾아가라. 네 질문에 답해 줄 존재가 거기 있다.’


이제 답을 찾을 차례가 되었다.


*


아침이 되어도 아랑누는 일어나지 못했다.

반파홍귀를 봉인하느라 엄청난 영력을 썼는데, 공간을 넘어 다닌 것이 치명타였다.


아무리 천인이 소환했다 해도 너나족 사람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기운이 다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다.


운여가 약차를 들고 들어왔다.

“온설지는 보양식을 만든다더군요. 점심을 기대하라고 전해달랍니다. 저한테도 국물은 나눠주겠다던데요? 하하.”


자신을 위로하느라 애쓰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측은했다.

아랑누는 그 마음을 읽고 일어나 앉았다. 창백한 얼굴이 하얗게 떠서 습기가 없어 보였다.


“연이는 나갔나요?”

운여가 재빨리 약차를 따랐다.

“사냥꾼들을 따라 협곡 근처까지 갔다 온답니다. 어떻게 들어갈지 미리 알아본다고.”


“사람들이 다 떠났나 봐요? 아주 조용해요.”

“다들 떠났죠. 모두 유리산으로 간 건 아니지만. 지금은 우리 일행만 남았습니다.”


“운여님은 왜 안 가셨어요?”

“여기까지 동행했으니 끝까지 함께 가야죠. 아픈 사람 내버려 두는 냉혈한 아닙니다.”


아랑누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사냥꾼들이 보물을 다 가져가면 어쩌시려고요?”

숨이 가쁜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랑누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요? 전 서두를 것 없어요. 유리산이 날 기다리니까요.”


운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거지? 진짜처럼 말하는군.’

확실히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아랑누나 백호족 온설지나 대책 없이 용감한 꼬마까지.


“동행이라···. 운여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요?”

“예. 뭐든 물어보십시오.”


아랑누는 차 한 잔으로 마른입을 적셨다. 따뜻한 차가 들어가니 한결 나아졌다.

“그 목걸이, 원래는 팔찌였지요? 참나로 의식 때 매듭 가게에서 봤어요.”


“이거요?”

운여가 옷깃 사이로 삐져나온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매듭 끝에 홍요석이 달려있었다.

“팔찌는 일할 때 불편해서요.”


그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랑누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그것과 짝을 이룬 것은 여전히 팔찌겠군요?”


운여의 손이 딱 멈추었다.

상대가 귀령송환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모여사원의 귀령송환사는 마음도 읽는다던데.

“아···, 뭐···.”

그는 윤슬을 생각하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를 고치고 싶지 않으세요? 방법이 있는데.”

“예? 고칠 수 있나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연습하면 거의 비슷해질 거예요. 통증도 사라질 거고요. 어떤가요?”


운여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년 전, 그때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걸음만 똑바로 걷는다고 길이 열리겠어?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만 커지겠지.’


아랑누는 그의 눈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 다리를 묶은 걸 아는군요?”

그녀의 목소리도 쓸쓸해졌다.


“저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아랑누님이 빨리 나아야죠.”

“왜 포기하려고요? 그분은 어떤 마음인지 모르잖아요? 그렇게 바란다면 도망치지는 말아야죠.”

아랑누가 조근조근 말하자 운여가 벌떡 일어났다.


“알지도 못하면서 넘겨짚지 마십시오. 이건 제 일입니다!”

“네. 맞아요. 운여님의 일이죠. 그러니까 운여님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잖아요?”

아랑누가 배시시 웃었다.


“결심이 서면 알려주세요. 비법을 알려드릴 테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힘이 달려서 못하니까요.”

아랑누는 비스듬히 기대앉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창밖 풍경이 보인다는 듯이.


운여는 화낸 것이 미안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런. 죄송합니다.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내다니.’


“하월에서 만난 망령이 그랬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못 하고 죽은 것이 한이 된다고. 이렇게 일찍 죽을 줄 알았다면 더 많이 사랑해줄 것을···.”

아랑누는 자신이 보낸 망령을 위해 묵념하듯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운여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흰 지팡이가 날아와 아랑누의 손에 놓였다.


아랑누가 지팡이를 쥐자 주변의 공기가 출렁거렸다.

누구에게 말하는지 혼잣말을 뱉었다.

“사로, 유령선에 도착했어?”


그녀가 똑바로 앉자 뭉클거리는 투명한 막이 그녀를 둘러쌌다.

운여는 깜짝 놀라 그녀를 잡으려 했으나 공기의 막이 손을 밀어냈다.


‘이거 뭐야?’

운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온설지를 찾아 방에서 뛰쳐나갔다.


*


공간 너머 유령선이 보였지만 그곳까지 갈 수 없었다.

사로잔에게는 공간을 열 만한 영력이 없었다. 한울을 끌어들일 수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네 몸을 빌려야겠어. 미사랑의 검을 절대 놓지 마.”


아랑누는 자신의 검과 연결된 다른 반쪽을 찾아 모든 영력을 흘려보냈다. 이미 사로잔에게 흡수된 미사랑의 혼 조각이 힘을 보탰다.


마침내 아랑누의 영혼까지 그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 몸으로 보는 세상은 완전한 신세계였다.

강인한 몸과 또렷한 눈, 심장박동부터 모든 혈관의 움직임까지 건강하고 활기찼다. 그녀의 몸에 들어서자 영력이 두 배 이상 강해졌다.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 상태라서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수많은 세월을 떠돌았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길 잃은 영이여, 너를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라.”


한 망령이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정귀가 사라져도 망석과 사음귀, 쇳디는 사라지지 않아요. 자신을 놓아줄 손길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꼭 돌려놔 줄게. 망석과 쇳디는 천옥으로 보내고, 사음귀는 사람으로 돌려줄게.’


망령들은 빛 그물에 실려 영천옥으로 날아갔다.


이제 가련한 망령과 약속한 일을 해야 했다.

‘어디서든 사로와 만나야 해. 어디가 좋을까?’


사로잔에게 여륭으로 가라고 말하자마자 반쪽 검의 연결고리가 세차게 흔들렸다. 누군가 공기의 막을 거칠게 흔든 것이다.


*


이연의 목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누님! 누님! 정신 차리세요. 누님!”

애끓는 외침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누가 숨을 안 쉬는데?”

온설지도 몸이 바짝 굳었다. 설마 죽은 건가.


투명한 막이 걷히자 빳빳해진 아랑누의 몸이 만져졌다.

“어흐흑, 누님!”

이연이 통곡을 하며 엎드렸다.


“진짜 죽은 거야? 그런 거야? 안 돼!”

온설지는 아랑누의 뻣뻣한 몸을 끌어안았다.


“아누, 너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 날 두고 가지마!”

양손으로 잡고 흔드니 그녀의 머리가 앞뒤로 까딱거렸다.


숨을 헉 내뱉으며 아랑누가 손을 움직였다.

“아우,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온형. 내가 그렇게 좋아?”


“뭐야? 죽은 게 아니었어?”

온설지는 재빨리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아누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지. 깜짝 놀랐잖아! 다시는 그런 장난하지 말라고.”

“장난은 아닌데···. 하지만 온형의 요리를 못 먹고 죽을 수는 없잖아?”


“그렇지! 그렇지! 잠깐만 기다려. 얼른 가져올게.”

온설지는 부리나케 문밖으로 나갔다.


침대 옆에서 이연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얼마나 놀랐다고요. 누님,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아랑누는 이연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영안으로 보니 울고 있는 이연도, 놀라 서 있는 운여도 잘 보였다.

사로잔의 눈으로 본 세상만큼 화려하지도, 선명하지도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


이틀 만에 아랑누는 일어나 걸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 우리도 가볼까?”


이연이 앞을 막아섰다.

“누님, 지금은 유리산에 갈 몸이 아니라고요. 이러다 쓰러지겠어요.”

“하지만, 날 부르는걸. 나도 말을 탈 수는 있어.”


“지금쯤 사냥꾼들이 중요한 건 다 빼냈을 거야.”

온설지가 팔짱을 끼고 아득히 솟은 유리산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누, 호설은 왜 저기까지 가라고 한 거야?”


“질문에 답해 줄 존재가 있다고 했어.”

“저기 사람이 산다고? 음···, 적어도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데. 아직 무사하려나···”


운여도 다가와 온설지 옆에 나란히 섰다.

“여태까지 유리산에 올라간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런데, 저 산에 누가 산다고요?”


시조새가 산다는 전설은 있지만, 누가 산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산도 아니었다.


“운여님은 저기서 뭘 찾으세요?”

“일단은···. 아랑누님과 같은 걸 찾아보려고요. 그쪽이 구미가 당기네요.”


루월상단의 수행원이 말을 끌고 왔다. 나귀 보리는 비익정 마구간에 넣어두고 그들은 말 위에 올랐다.

협곡 너머 우뚝 솟은 유리산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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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2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4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5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3 0 12쪽
»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2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5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49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6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57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4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7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5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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