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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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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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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의 전사들 2

DUMMY

올뫼국 현월은 돌조각의 성지라는 명성을 되찾았다. 떠났던 사람들도 돌아왔다.


시장에는 홍석원이라는 약초 가게가 새로 생겼다. 월영국에서 건너온 젊은 장사꾼이 터를 잡은 곳이다.


주인이 직접 홍석산과 빛뜰산 남쪽에 자생하는 약초를 채취하였고, 그의 아내가 민가촌 옆 야산에서 재배하고 손질한 약초도 팔았다.

귀한 약초는 아만상단과 거대상단을 통해 아치대륙과 순단대륙으로 퍼져나갔다.


홍석원 주인 무휼의 붉은 머리카락은 점점 더 짙어져 자줏빛에 가까웠다. 어느 때 보면 현월을 내려다보는 홍석산의 붉은 머리와 똑같아 보였다.


민가촌 옆 시향여의 밭에서는 거대상단 소단주가 보낸 씨앗과 모종이 탈 없이 쑥쑥 자라났다.


시향여는 손수레를 끌고 뒤뜰로 들어섰다. 일꾼들이 야산 아래에서 말린 약초를 손질하고 있었다.

“마님, 벌써 나오셨어요?”

“이맘때는 잡초가 많이 나오잖아요.”

“저희도 이거 끝내고 갈게요.”


시향여는 손수레를 밀며 아주머니들이 풀을 매는 약초밭으로 올라갔다.

“새로 온 일꾼들이 꽤나 똘망하대? 현월 사람이 다 되었네 그랴.”

“그때 고향으로 안 가고 남은 사람들? 가면 뭐해? 가족도 없다며. 여기가 고향이지.”

“털거미는 그때 완전히 사라졌나봐. 소식도 없어.”


아주머니들은 손을 쉬지 않으면서 입도 쉬지 않았다.

“수백 마리나 되던 것이 죄다 사라져서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이제 중독될 일도 없고, 실종될 일도 없는 거니께.”


털거미 이야기가 나오자 시향여는 조용히 웃음 지었다.

사실을 말해줄 이유가 없었다. 털거미로 기억하는 편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그사이 손수레에는 싱싱한 이파리가 가득 찼고, 바구니에는 열매도 가득 찼다.


약초밭 아래로 두 노인이 낚싯대를 어깨에 메고 다가왔다. 무휼의 아버지 허신과 시향여의 아버지 창계였다.


“또 낚시하러 가세요? 약방은 어쩌시고요?”

시향여가 허리를 펴면서 야단치듯 투덜거렸다.


“놀멍쉬멍하는 거지. 누리약방이 쉬어야 다른 약방이 장사를 할 거 아니냐?”

창계가 대답하자 허신도 한 마디 거들었다.


“해질녘에 가면 물고기들도 밥 먹으러 나올 거다. 허허.”

“대어를 낚을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아버지도 참, 시냇물에서 무슨 대어를 찾아요?”


창계가 운영하는 누리약방에서 청소와 관리를 맡은 이후 허신의 건강은 더 좋아졌다. 그런데 두 사람이 죽이 척척 맞으니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의 말대로 누리약방이 쉬면 다른 약방이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시향여는 뭐라 할 말이 없어 손을 흔들었다.

허신도 들고 있던 통을 흔들었다.


“어서 다녀오세요. 너무 늦지 마시고요.”

“무휼은 아직 안 왔지?”

“예. 끝나는 대로 오겠지요.”

시향여는 손수레에서 내린 약초를 나누고 열매를 펼치며 쭉정이는 골라냈다.


선별작업이 거의 끝났을 때, 무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곡시단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시향여의 머리카락처럼 노랗게 솟아 나와 끝으로 갈수록 빨갛게 변했다.


시향여는 고개를 돌리고 피식 웃었다.

“뭐야···. 이거 또 동쪽 밭에서 딴 건 아니지?”

“어? 어떻게 알았어?”

“이 근처에서 곡시단 피는 곳이 거기밖에 더 있어?”


무휼이 얼굴을 붉히며 뒤통수를 긁었다.

시향여는 곡시단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어디서 따왔건 어차피 따서 말려야 하니까.


“앉아. 이번에 새로 조합한 향차 마셔보자. 이번에는 제대로 성공한 것 같아.”

시향여가 잎차가 든 작은 병을 열었다. 오묘한 향기가 훅 밀려왔다.


“오다 보니 누리약방은 문을 닫았던데, 어르신은 어디 가셨어?”

“어디 가시겠어? 두 분이 낚시하러 가셨어. 대어를 낚으신대.”

“대어? 하하. 실개천에서?”

시향여와 무휼은 툇마루에 앉아 차를 한 잔씩 따라 마셨다.


약초밭에서 아련하게 들리던 아주머니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꾼들도 약초밭으로 갔는지 주위는 고요했다. 바람 소리도 사라졌다.


모든 소리가 잠든 것처럼 적막했다. 무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이상하지 않아?”


그들 앞으로 구름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구름에 놀라 눈을 깜빡이는데 구름 아래 땅이 검게 물들었다. 땅바닥은 꾸물꾸물 구멍으로 바뀌었다.

검은 구멍에서 김이 모락모락 일어났다.


“그 순간이야!”

“드디어 왔구나!”

무휼과 시향여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은검과 장창이 들려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구멍으로 뛰어내렸다.


구멍 아래는 땅조차 불끈거렸다. 보이는 모든 바닥이 꾸물거렸다.

중심을 잡기 힘들었으나 하늘의 성물이 그들을 도왔다. 꿈틀거리는 바닥에서 요귀들이 서서히 일어섰다.


무휼은 장창을 꽉 잡았다. 시향여도 은검을 잡고 똑바로 섰다.


‘드디어 어머니의 복수를 끝낼 시간이야.’

그녀의 눈동자에 찬란한 빛이 어렸다.


*


올뫼국 주명산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청옥선원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광검국에서 존준이 보낸 부장이니 존준이 친히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애온 선사는 정문까지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아흔을 훨씬 넘긴 그의 수염은 풍성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흰빛이 눈부실 정도였다. 때를 맞춰 여러 대의 마차가 정문 앞에 다다랐다.


“대선사님이 직접 나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이곤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대선사에게 예를 갖추고 인사를 나누었다.


고애온은 젊은 부장 이곤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이건 분명 천계의 기운인데···.’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이곤을 살펴보았다.

과연 허리에 묶인 가늘고 긴 막대기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맑은 고드름처럼 보이는 빙검은 천계의 힘에 물의 기운까지 담고 있었다.


대선사가 이곤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늘의 성물이구나!”

“이것을 아십니까?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니 빙검도 기뻐하네요.”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오.”


고애온은 그를 집무실로 데리고 갔다. 광검국에서 온 다른 일행은 새인과 무추가 숙소로 안내했다.


집무실에 둘만 남게 되자 고애온은 빙검을 바라보며 기운을 살폈다. 빙검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신호를 더욱 자세히 읽을 수 있었다.


“때가 되었다네. 곧 문이 열릴 것이오.”

“혹시 거대한 전투에 관한 말씀이신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와 여기 있지 않은 공간이라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날과 시간은 모르지만 늘 준비하고 있으라는 충고도 들었습니다.”


고애온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장을 도와줄 사람이 가까이 오고 있소. 서북쪽에서 비슷한 기운이 내려오고 있으니, 서로 알아보겠군.”


그는 생각에 잠긴 이곤에게서 어두워지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허어, 온설지 이 녀석. 잘 지내겠지? 다시 볼 때까지 내가 살아있으려나···.’


온설지 역시 그 싸움 한복판에 설 것이다. 여전히 밤에는 호랑이로 바뀌는지, 아랑누에게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궁금했다.

‘그 숱한 이야기를 다 들으려면 몇 날 밤을 새워도 모자라겠구나. 허허.’


고애온은 아끼는 제자와 만날 날을 그리며 탁자 위 호랑이 조각을 쓰다듬었다.


*


이곤은 무작정 서북 방향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지 사흘이었다. 그 안에 만나지 못하면 청옥선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분명 하늘의 성물을 갖고 있을 거야.’

그가 가진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이틀 동안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튀사막 근처였다. 북쪽으로는 사막이지만, 남서쪽으로는 광활한 들판과 농지가 이어졌다.


그늘이 드리워진 샘물 옆에 아만상단의 행렬이 진을 치고 있었다. 천막마다 깃발이 펄럭여 산곡지부라는 것을 쉽게 알아보았다.


이곤이 다가가자 아만상단의 수비대원이 그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오?”

“지나가는 나그네요. 가는 길에 해가 저물어···.”

그가 설명을 마치기도 전, 빙검 은비가 부르르 소리를 냈다. 이곤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훈련복을 입은 여인이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대원이 그녀를 맞으며 이곤을 가리켰다.

“대장님, 이 사람이 머물 곳이 필요하답니다.”


누리예는 갑자기 나타난 나그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연검 다물이 우우웅 몸을 떨기에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본 사람이지?’


가락국 무성산에서의 일은 몇 달 전의 일이고, 깃털이 보여준 얼굴은 언뜻 지나간 그림이었다. 사람은 사람을 잊었어도 그들이 가진 깃털은 서로를 기억했다.


누리예의 천막에서 하얀 깃털이 날아올랐다. 이곤의 봇짐에서도 익족의 깃털이 비집고 나왔다.

두 개의 깃털은 춤을 추듯 맴돌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비로소 생각났다. 상대가 누구인지.

“누리예 대장님!”

“이곤 부장이시죠?”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놀라운 만남에 온몸이 찌릿 거렸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자 두 개의 깃털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곤과 누리예는 서로가 가진 하늘의 성물을 알아보았다.

‘이곤 부장도?’

‘누리예 대장이 그 사람인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오늘 밤은 여기서 쉬시죠. 우선 요깃거리를 내오라 하겠습니다.”

누리예가 자신의 천막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선택받은 용사에 대한 얘기군요? 저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리예는 사로잔이 들려준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선택받았다는 건 위험도 함께 한다는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저 각오할 뿐.’


“드디어 그날과 시간이 된 건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고애온 대선사를 뵙고 오는 길인데···.”

누리예가 천막의 가리개를 열었다.


천막으로 발을 들였는데, 그들은 이미 다른 공간에 가 있었다.

바닥도 없이 어둡고 텅 빈 허공이었다. 어둠 속에서 모든 색이 섞여 빙글빙글 휘돌았다.


이곤은 빙검을 뽑아 들었다.

“설명이 필요 없어졌군요.”


누리예의 연검은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몸을 풀어 그녀의 손으로 들어왔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부딪치는 것이 훨씬 낫지요!”


어둠 속에서 꾸물대며 요귀들이 몰려왔다. 누리예는 물결치는 연검을 쫘악 소리 나게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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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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