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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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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3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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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누_참나로 의식

DUMMY

하월은 성문 앞 들판부터 호화로운 휘장이 펄럭였다.

흥겨운 북소리가 거리를 메워 지나는 사람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사람들 표정도 발그레 들떠서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볍고 활기찼다.


성문 앞 광장에 아만상단의 수레가 줄지어 멈춰 섰다. 아만상단은 이번 참나로 의식에서 서쪽 광장을 맡았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부녹은 색다른 물건을 더 내놓고 싶었다. 시장에서 손님의 반응을 알아보고 유우대륙 각 나라로 실어 나를 것이다.


부녹의 화려하고 우아한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누군가 다가왔다.


그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본 부녹도 부리나케 그에게 다가갔다.

“운여님 아닌가요? 어차피 하월은 루월의 것인데, 어찌 직접 오셨나요?”


그녀는 반갑게 운여의 손을 잡았다.

어린 그가 겪은 마음의 짐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하여튼, 거대상단이나 루월상단이나 이번 소단주들은 어째 순탄치가 않구나.’


어머니처럼 자신을 반겨주는 부녹을 보며 운여도 기쁘게 고개를 숙였다.

“단주님이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이번에는 직접 지휘하시나요?”


“웬걸요. 지나가는 길이죠. 남쪽으로 내려가 재가도에 들러야 하니까요.”

“소천국에서 가까운 그 재가도 말씀이세요? 휴양지로 유명하니 아만에서 관심 가질 만하네요. 하하하.”

운여는 활짝 웃으며 아만상단의 수레를 살펴보았다.


연회색 덮개로 덮여있어 무엇이 실렸는지 알 수 없지만, 두께로 보아 하월뿐 아니라 다른 곳으로도 가져갈 것들이었다.


“신기한 심부름꾼을 고용하셨다면서요? 소문이 자자합니다. 저도 보고 싶네요.”

“인연이 있으면 볼 수 있을 거예요. 친구랑 같이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왔군요. 곧 도착할 거예요.”


부녹은 운여의 일행을 눈여겨보았다.

확실히 축제를 지휘하러 온 차림이 아니었다. 수행원이 다섯 명, 간소한 여행 차림으로 짐도 단출했다.

‘하월을 거쳐 가는 길이군. 때마침 참나로 의식이라는 건가?’


“루월은 요즘 어떤가요? 지난번 구휼미 건은 저도 감동이었답니다.”

“물건을 쓰는 사람이 없으면 만들고 파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겠습니까? 그저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상대가 운여라면 좀 더 이야기할 가치가 있지만, 지금은 그녀나 운여나 갈 길이 바빴다.

“한가할 때 함께 담소를 나누면 좋겠네요.”


운여에게 인사하는데, 머리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휙 지나갔다.


‘도조?’

부녹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도조가 있다는 것은 아랑누도 왔다는 뜻이다.


소천국에서 엄청난 영력을 폭발시켰으니 기력이 많이 상했을 텐데, 여기까지 왔다면 거의 회복된 것이다.


“앞으로도 활약 기대할게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하세요.”

부녹은 운여의 팔을 다독이고는 돌아섰다.


운여도 아쉬워하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신비롭고 강렬하면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다정했다. 온화했던 어머니의 얼굴은 이내 윤슬의 방글방글한 미소로 이어졌다.


그는 이빨을 꽉 물고 돌아섰다.


*


참나로 의식은 스무 살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축제였다.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의식이 진행되고, 곳곳에서 공연과 연주가 열렸다.


올해 스무 살이 되는 사람들이 참가하는 그림대회, 노래와 무예 경연도 이어졌다. 상금의 규모도 커서 상금 때문에 참가하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거리 곳곳마다 스무 살이 되는 장인 후계자들의 전시도 줄지었다. 공예, 자수, 발명품 등 근방의 모든 스무 살이 참가해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었다.


참나로 의식에서는 하월의 저잣거리가 특색 있게 꾸며지는데 직접 농사지은 것, 시식 품평회, 저장식품 등 자신만의 비법을 자랑하고 판매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시작한 지 삼십여 년이 되어가니 어느새 불라국에서 가장 유명한 행사가 되었다.

이때가 되면 하월은 너른벌 세 개의 대륙에서 가장 젊은 성읍이 되었다.


아랑누는 왁자지껄한 거리 한구석에 앉아 길 잃은 망령이 떠다니는지 살폈다.

온설지와 이연은 그 옆에 앉아 저잣거리의 좌판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호박과 오이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아누, 이런 데서 망령이 돌아다닐까?”

“당연하지. 축제의 의미가 중요한 만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은 혼은 한을 가질 테니까. 사람의 믿음은 힘이 세거든. 미련이나 집착을 가지면 길을 잃기 쉬워.”


“이건 뭐, 생일잔치에서 장례식을 기다리는 기분이네. 아누랑 같이 다니며 각오하긴 했지만, 계속 장례식만 본 것 같아.”

“예전에 그, 해가림제는 어떻구요?”

온설지의 말에 이연이 투덜거렸다.


“그때도 누님이 망령을 보내느라 공연 못 봤잖아요? 길가온님과 사란야님이 특별 출연하는 공연이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맞아. 그건 많이 아쉬웠어. 그래도 두 사람이 만났으니 그것만으로도 기뻤어.”

“반월도의 힘은 정말 대단해요. 짝을 찾아가는 성물이라니···.”


도조가 폴짝폴짝 바닥을 구르며 아랑누의 눈앞으로 날아올랐다.

“제가 축제를 감시하겠습니다.”

“아후, 까망아, 여태까지 뭘 들은 거야? 길 잃은 영이 많을 거라고 누님이 그랬잖아?”

“까망이가 축제를 감시한단다. 아휴, 핑계도 좋아.”


이연과 온설지의 꾸지람에도 도조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순식간에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무슨 얘기? 난 못 들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던데?”

날개는 숨기고, 겉모습은 스무 살 정도의 남자가 되었다. 목소리만은 여전히 걸걸했다.


온설지와 이연이 동시에 헉 숨을 뱉었다.

“뭐야? 이제 얼굴도 바꿀 수 있어? 허!”


*


연이어 망령을 셋이나 보내고 아랑누는 일찌감치 숙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저녁이 되려면 멀었지만, 기운이 달려서 더 이상의 귀령송환은 무리였다.


그나마 성물이 도와주어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신령석과 지팡이 말고도 수호대와 비녀까지 아랑누를 지켜주었다.


온설지는 보양액을 물에 개며 걱정스레 아랑누를 바라보았다. 이연도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괜찮겠어? 이러다간 망령보다 아누가 먼저 가겠어.”

“그러니까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요. 아예 여기서 며칠 쉬는 거예요. 누님이 나을 때까지.”

“그것도 괜찮겠네. 겸사겸사 축제도 구경하고 말이지. 하하하!”

온설지의 웃음소리에 이어 속마음을 들킨 이연도 겸연쩍게 웃음을 날렸다.


“내일은 두 사람 다 축제 구경해. 난 쉴 테니까.”

아랑누가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그녀 역시 축제의 들뜬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지만, 몸을 추스르는 것이 먼저였다.


온설지가 보양액을 탄 찻잔을 건넸다.

“요즘은 호랑이로 변신할 일도 없고 재미가 없네. 태평성대에는 쓸 일이 없는 능력이었어.”

“온형, 말이 씨가 된다고. 없는 게 나아.”


아랑누는 찻잔을 비우고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실망하지 마. 우리 일이 아직 안 끝났으니.”


“형님, 저도 싫어요. 호랑이가 필요한 경우라면 그만큼 위험한 거잖아요? 그냥 지금이 좋아요. 이렇게 축제도 볼 수 있고.”

“맞아! 우리 야시장 보러 갈까?”

“오! 그래요. 저녁 공연도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흥분해서 떠들다가 아랑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어서 나가라고 손짓했다.

“제발 나갔다 와. 시끄러워서 쉴 수가 없어.”


아랑누가 다시 눕자 온설지와 이연은 눈을 빛내며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


하월의 저녁은 낮처럼 환하고 밝았다. 거리마다 등불이 가득해 하늘에 걸린 것이 반달인지, 보름삭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와, 여기 겹보름 축제만큼이나 화려한데요? 상재믈 감항이 제일 큰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은 넓어요.”

“꼬마가 세상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네. 하하, 이제 어디로 갈까?”

온설지는 화려한 거리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가슴을 폈다.


어디로 갈지 둘러보던 이연의 눈에 신기한 물건이 들어왔다.


알록달록 은은하고 예쁜 방패였다.

‘방패가 뭐 저렇게 예뻐? 장난감인가?’

어린아이 장난감이라 여기던 이연은 점차 입 꼬리가 바짝 굳었다.


“저거, 하늘의 성물이잖아요?”

“어디? 어? 진짜···.”

다음 순간 두 사람은 방패를 둘러멘 소년에게 달려가 어깨를 잡았다.


경운이 어리둥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거구의 백호족 용사를 보자 몸이 바짝 굳었다. 하얀 거인이 덮칠 듯 서 있으니 낯빛이 하얘졌다.


놀란 소년의 얼굴을 보고 이연은 재빨리 손을 놓았다.

“이거, 혹시 하늘의 성물?”


하늘의 성물을 알아보다니? 경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아세요?”

“우리도 하늘의 성물을 찾았거든. 모두 주인을 찾아 떠났지만.”


온설지가 두 소년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저기 가서 얘기하자.”

그들은 행인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골목으로 들어갔다.


걸으면서 이연은 방패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맞아요, 형님, 이루다가 그랬어요. 월영국에 있는 친구가 방패의 주인이라고요.”


다시 방패를 살펴보았다. 과연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음···, 그런데 분명 월영국이라고 했는데? 그건 아치대륙이잖아?”

“맞아요. 월영국 엄안에서 왔어요. 전 경운이에요. 이루다를 아세요?”

“그럼. 보라사막에서 처음 만났고, 상재믈 감항에서도 봤는 걸?”

“와아! 그럼 이루다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이루다가 여기 왔어?”


“혜부거 대장군님 약을 구하려고 같이 왔는데, 이루다를 놓쳤어요. 단주님 심부름하러 간다고 했는데···.”

“경운이라고 했지? 보통 사람이 이루다를 놓치는 건 당연해. 걱정 마. 그 아이가 널 찾아낼 테니.”


이연이 방패를 쓰다듬었다.

“이게 회생의 능력을 가진 방패라고?”


방패를 만지는 순간, 이연의 눈동자가 짙은 자주색으로 바뀌었다.

“네가 찾는 약은 유리산 아래에 있다. 마난 협곡 가장 안쪽에 동굴이 있으니 거기 핀 톱말풀을 찾아라.”


“예? 뭐라고요?”

경운이 뒤돌아섰다.


이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휴, 하늘의 성물을 만졌다고 무아가 나오다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여하튼, 아만상단이 어디에 천막을 쳤는지 아니까 데려다줄게.”

‘어쩌면 대모님을 볼지도 모르겠다. 이루다도 만나고.’

이연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경운은 이연을 따라가면서도 조금 전에 들은 말을 잊지 않으려 중얼거렸다.

‘유리산 아래, 마난 협곡 가장 안쪽 동굴, 톱말풀.’


온설지도 기대에 부풀어 이연의 뒤를 따랐다.

‘허, 이루다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녀석 얼마나 컸으려나?’


*


아랑누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해졌다. 짧은 잠이지만 깊이 잠들었다 깨어나니 효과가 좋았다. 혼자 조용히 있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거리는 밤을 맞아 더 화려해졌다. 오색의 등불이 빼곡한 거리에 여전히 음악과 노래가 가득했다.


두 사람에게는 쉬겠다고 했지만, 언제까지 누워있을 아랑누가 아니었다.

흥겨운 가락을 타고 창밖으로 망령이 지나가자 그녀도 천천히 일어났다.


아랑누는 혼령을 위로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로 나왔다.


*


운여는 흥겨운 가락이 들리지 않는지 어두운 얼굴로 밤거리를 걸었다.

루월상단의 상점이 어떻게 축제를 준비하나 확인하러 나왔지만, 어느새 걸음은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전 윤슬과 함께 걷던 거리에 이르자 그는 매듭 만드는 상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윤슬과 같이 매듭을 엮고 영원히 간직하자고 약속했다.


주인도 바뀌고 간판도, 장식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매듭을 함께 만드는 연인들로 가득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윤슬을 회상하며 운여는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어깨를 나란히 기대앉아 즐거워하는 연인들을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그의 눈길이 가장자리로 옮겨갔다.


모퉁이에 홀로 선 장님 여자는 노래를 부르는지, 혼잣말하는지 손목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짓이 멈추자 환한 빛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물처럼 오그라든 빛 덩어리가 그녀의 손짓을 따라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운여는 빛 그물을 쫓아 고개를 들었다.


다시 장님 여자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 반짝이는 허리띠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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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6 0 12쪽
207 공간을 열다 22.08.06 61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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