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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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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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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잔_핏빛 도리울

DUMMY

요귀와의 전투를 끝낸 도리울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서로를 부르며 생사를 확인했다. 핏빛 절규가 바다의 대기까지 가득 채웠다.


백사귀파는 부상자들 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바람벽 안에서 가루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백사귀들이었다.

요귀의 힘을 빌려 재물과 힘을 누리던 사람들은 근원을 잃고 풀잎처럼 쓰러졌다.


몸의 모든 구멍마다 피를 쏟았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도 않았다. 허우적대기만 할 뿐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병사들은 백사귀 중에 아는 얼굴이 보이자 걸음을 멈추었다.

잔인하게 자신들을 공격하던 이가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 성주원에서 생활하던 동료였다.


“대장! 대장이 왜!”

병사들은 분노에 치가 떨렸다.


전투에 참가한 거의 모든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부성주 차믜도 팔과 어깨를 다쳤으나 자신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부상자들을 모두 옮겨라!”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흐느낌 속에서 사로잔과 해무찬은 병사들을 도와 제단 위로 시체를 옮겼다.

아순치와 나루뫼는 움직일 수 있는 부상자들을 부축해 자리를 옮겨주었다. 수송용 마차가 오면 그들 모두 성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누리예는 배와 등, 양쪽 팔을 찔렸다.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교묘하게 공격을 피했어도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엎드려 병사들을 이끄느라 상처가 벌어진 탓도 있었다. 지혈 도구가 없기에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 내공을 모았다.


핏빛 도리울로 다루영이 뛰어올랐다.

처참한 광경에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곧 사로잔을 찾아냈다.


“사로! 반파홍귀는?”

“봉인했어. 아랑누가 왔었어.”

“내가 봤어야 하는데. 스승님의 원수를!”

다루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름사원의 망석은 그대로 있던데? 그건 뭐지?”

“정귀가 사라졌는데도 남아있다고?”

“그걸 만든 요귀가 반파홍귀가 아니었나?”


“그럴지도···. 망석도 숫자가 꽤 되던데.”

사로잔이 입술을 안으로 말아 꾹 다물었다.


“아이들은?”

“소사매님이 돌보고 계셔.”

다루영은 대답하면서도 도리울을 둘러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냈다.


“사로, 얘기는 나중에. 지금은 저쪽이 더 급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환자들이 신음하는 곳으로 뛰어갔다.


제단 아래에서 한 맺힌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장 부럼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죽은 사병대원들 앞에서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분이 풀리지 않자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부럼을 바라보며 사로잔도 같은 슬픔을 느꼈다. 아끼는 부하를 잃었을 때 자신 역시 살점이 뜯어지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망석이 그대로 있다는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싸워야 할 요귀가 남아있어.‘

떨리는 손으로 장검 모얀을 쓰다듬었다.


’분명 봉인했을 텐데···.‘

아랑누가 허공을 열고 나온 것만으로도 반파홍귀의 태도가 달라졌다. 요귀마저 압도하는 기운이 그 작고 여린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눈부신 빛의 폭발에 이어 하얀 공간이 기억났다. 그곳에서 보았던 한울과 낯선 목소리.

’그건 뭐였지?‘


그녀의 눈길이 어느새 한울을 찾아 움직였다.

제단 아래 앉아 숨을 고르는 한울이 보였다. 사라진 영력을 회복하기 위해 숨을 고르며 움직이지 않았다.


한울과 눈이 마주치자 사로잔은 고개를 돌렸다.


’나와 함께라면 뭐든 좋을 거라고 했잖아?‘

아무도 없는 하얀 공간에서 말한 이는 그녀가 아니지만, 또한 그녀이기도 했다.


*


아름사원 신녀의 방에서 고사나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을 긁는 듯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드디어! 드디어 내가 정귀가 되는 거야. 캬캬.”

사람이 알아서 반파홍귀를 끝장내주다니. 하늘도 날 돕는구나.


고사나는 창밖으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사원 입구를 지켰다. 성주원 병사들로부터 신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여간해서 풀리지 않는 최면이기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그동안 모든 일을 내가 처리하지 않았나. 나야말로 준비된 정귀라고.‘


사람이 요귀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한다. 그런 요귀 중에서 정귀를 고르는 것도 사람이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섬길 차례다.’


“반파홍귀를 따르던 백사귀는 필요 없어. 나를 위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지. 이미 줄을 섰잖아?”

찢어진 입을 내놓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기쁨과 환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 위로 타랑대귀의 모습이 언뜻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사원 주변에 뿌려놓은 연노란 가루의 효과는 강력했다.

최면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며 하나둘 사원으로 걸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씩 창과 칼이 들려있었다.


*


부상자를 돕던 나루뫼는 손을 멈추고 한울을 바라보았다. 안타까웠다.

’호위무사는 천인이 아니잖아? 너른벌에서 사람을 소환하다니 무리수를 뒀어. 어쩌려고.‘

자신이 공간을 열었다면 이미 여기 없을 목숨이었다.

그가 고마우면서도 측은했다.


한울은 구석에 앉아 기를 모았다. 천력은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사라져갔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앞을 보았다. 조금만 버티면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사로잔과 눈이 마주쳤으나 그녀는 그대로 돌아섰다. 물끄러미 사로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들숨을 따라 마로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따라왔다.


인간세로 내려오기 전, 마로는 장엄관문까지 나와 그를 붙잡았다.

’아랑누가 암귀모를 봉인했다면서? 설마, 사로잔을 위해 그녀를 소환하려는 건 아니지?‘

한울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자네, 정말 노각부줄을 포기했나? 우리는 천계의 호위무사이지, 천인이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 이러나?‘

’나는 한울이면서 한울이 아니야. 무엇이 두렵겠나. 난 지금까지 기다렸어. 이제 준비가 되었어.’

그는 마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오히려 마로를 위로했다.


핏빛 도리울, 전쟁터 같은 곳에서도 사로잔은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부서진 조각을 맞추듯 기력이 돌아왔다. 천력은 사라졌으나 몸을 지탱할 정도는 되었다.


그의 눈길이 허리띠에 매달린 단검 휼에 멈추었다.

’진유···?‘


단검의 손잡이에 봉인된 하얀 보석은 진유의 몸과 혼이었다. 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어쩌다가···.”


백진석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의 입 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래도 율명님이 널 많이 아끼시는구나. 나였더라도 너처럼 했을 거다. 내 주인을 위해서라면···.‘


*


부상자를 실은 수송용 마차가 한 차례 지나갔다.

도리울에는 여전히 부상자들이 많았지만 아순치는 손을 털고 사로잔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부성주에게 맡기고 우리 할 일을 하러 가자.”

“할 일이라니?”

“고사나를 처리할 방법을 찾아야지.”


“그럼. 그 망석이···?”

사로잔은 목에 무언가 걸린 듯 껄끄러웠다.

’그래서 여전히 망석들이 돌아다녔구나.‘


“아치가 목표물을 놓치다니 믿을 수가 없네.”

“사람들이 신녀를 지키고 있어.”

“그렇다면 아주 강한 최면에 걸렸을 거야.”


그들에게 다루영이 다가왔다.

“누리예 대장의 부상이 심해. 샛골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신녀 고사나가 살아있다면 아이들을 지켜야 해.”

아순치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로 가자. 신녀의 마차이긴 하지만.”

다루영이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


태양이 기울고 하늘빛이 흐려지자 사맟해 동쪽에 타랑대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빠르게 사널리로 다가왔다.


그를 견제하듯 서쪽에서 유령선이 나타났다.

유령선은 사널리로 다가오지 않고 수평선을 지켰으나 사람들에게는 모두 위협적인 존재였다.


바닷가에서 타랑대귀를 목격한 사람들이 서둘러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의 선봉에 선 이들은 아름사원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타랑대귀가 사널리를 불바다로 만들 거야.”

“위혼제를 끝내지 못해서 그래.”

“역시 신녀님이 아니면 안 돼.”


“성주가 요괴인 건 밝혀졌잖아? 우리 신녀님도 피해자라고!”

“사널리를 위해 제사를 마쳐야 해. 타랑대귀를 물리칠 분은 신녀님 뿐이야.”

소문은 소문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그들은 제물로 정해진 아이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시장이며 골목이며 광장까지 몰려다녔다.


“신녀님의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고? 어디로 갔소?”

“저쪽 솟을산 방향으로 가던데.”


“갑시다! 겹그믐이 되기 전에 위혼제를 끝내야 합니다!”

“맞소! 타랑대귀를 물리칩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 사널리를 위한다며 의기양양하게 솟을산을 향해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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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50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2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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