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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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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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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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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DUMMY

샛골 소사매의 집은 도리울의 핏빛 전투와는 동떨어진 세상이었다.

솟을산 기슭에서는 꾸르륵 밤새가 울었고, 바람도 머뭇거리며 지나갔다.


사널리의 다른 곳보다 일찍 어둠이 찾아왔고, 소사매의 방은 어느 때보다 일찍 불이 꺼졌다.


손님을 위한 작은방에서 흐린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로잔이 누리예의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발랐다. 양쪽 팔에서 허벅지, 어깨와 등까지 찔리거나 베이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누리예는 입술을 꾹 다물고 신음도 내지 않았다.


’너른벌의 무기로 백사귀를 상대했으니 병사들의 상처도 심하겠구나.‘

사로잔에게는 그들도 자신의 부하와 다름없었다. 같은 목적으로, 같은 적을 상대로 함께 싸웠다.


도리울에서는 요귀를 두 마리나 상대해야 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귀가 아니었다면 그들에게 백사귀를 상대하라고 내몰지도 않았다.


누리예도 도리울의 전투를 되새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사나를 놓친 데다 백사귀들은 하나도 처리하지 못했어. 부상까지 입다니.‘

분노가 치밀어 눈자위가 빨갛게 번져나갔다.


다루영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방에 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닫았다.

“아이들은?”

“잠들었어요. 소사매님도.”


이번에는 다루영이 누리예의 상처를 살폈다. 약을 발랐으나 면포를 붙이기 전이었다.

“긴장이 풀어지니 맥을 못 추셔. 아이들도 바로 곯아떨어졌어. 든든하게 먹였으니까 내일은 종일 자도 괜찮을 거야.”


사로잔은 면포를 감는 그녀의 손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넌 괜찮아?”

“응. 망석들 쯤이야. 반파홍귀가 사라지는 걸 못 봐서 아쉬울 뿐이지.”


문밖에서 해무찬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로, 그 방에 우리가 다 들어갈 수 없잖아? 얼른 나와.”


사로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너 지금 꼭 놀러 나가자고 떼쓰는 아이 같다?”

“그 말은 내가 그만큼 순수하다는 거지?”

“허! 좋을 대로.”


*


누리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벅지의 상처 때문에 발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허벅지에서 허리까지 올라왔다. 사로잔의 부축을 받으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누리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의 통증 때문인지, 패배한 전투의 기억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백사귀파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검 끝에 힘을 주고 깊이 찔러도 죽지 않았다.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베인 자국은 이내 아물어 괴물처럼 다시 덤벼들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사람들의 무기는 달랐다.

해무찬의 검은 무성산에서도 보았다. 날이 갈려있지 않아도 모양은 장검이었다. 양날의 크고 묵직한 검.


사로잔은 짧은 단검 하나, 수정 막대기 하나였다. 나루뫼의 것도 모양은 검인데, 빛이 서려 있을 뿐 날이 갈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 부채는···.


’어떻게 된 거지? 내 검이 부채보다 못한 걸까. 아니면 내 무공이 부족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발이 점점 무거워졌다.


*


헛간에서는 아순치와 나루뫼가 일행을 기다렸다.

곡식과 살림살이를 모아놓은 곳이라 풀냄새와 고즈넉한 시간의 냄새도 함께 묻어났다.


이번에는 한울도 함께 있었다.

그는 구석에 앉아 조금이나마 회복된 영력으로 솟을산 주변의 기운을 살폈다.


“고사나를 잡으려면 아름사원으로 쳐들어가야 할까, 미끼를 던져야 할까?”

아순치가 부채를 살랑거리며 중얼거렸다. 다른 손으로는 유리구슬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사람들이 요귀를 따르니 쉽지 않을 거요. 최면에 걸리는 것도 소망과 반응하기 때문이니까. 사람들의 욕망이 뭉치면 천사도 쉽게 손댈 수 없소.”

한울이 좌정하고 앉아 묵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사로잔이 헛간 문을 열자 한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람들이 따라왔소.”


“어, 여긴 우리뿐인데?”

사로잔이 뒤를 돌아보았다.

누리예와 다루영도 문 앞에 멈춰 섰다. 그 뒤에서 해무찬도 걸음을 멈추었다.


“솟을산까지 몰려왔소. 분명 아이들을 찾으러 왔을 거요.”

한울이 검을 집어 허리에 찼다.


“그렇담 우리가 나가서 맞아야지.”

아순치와 나루뫼도 일어섰다.

“큰누님과 로와가 모르게 조용히 처리합시다.”


해무찬까지 뛰어나가자 사로잔도 돌아섰다.

“다루, 서늬 언니를 부탁해.”

“알았어. 너도 조심해.”

다루영은 누리예를 부축했다. 누리예는 애써 웃으며 사로잔의 어깨를 두드렸다.


*


솟을산 아래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무기를 들지 않았다 뿐이지 사람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무기를 쥔 주먹이 그들의 마음을 대신했다.


날 듯이 내려간 한울이 일행의 앞에 섰다.

해무찬, 아순치와 나루뫼, 사로잔도 그의 뒤에 비스듬히 펼쳐 섰다.


느닷없이 나타난 무사들을 보자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다.

“제물을 내놓으시오!”

“훔쳐 간 아이들을 당장 내놓으라고!”

주먹을 휘두르며 아이들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사로잔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데 한울이 팔을 뻗어 걸음을 막았다.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오.”


해무찬이 허리에 손을 얹고 어깨를 쫙 폈다.

“여러분! 가짜 성주를 보지 않으셨습니까? 요귀였습니다. 요귀를 따르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셨잖습니까? 이제 요귀를 위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주동자로 보이는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웃기는군! 지금 타랑대귀가 코앞까지 다가온 거 모르시오? 유령선도 나타났단 말이오. 그건 위혼제를 지내라는 하늘의 뜻이오!”


“사널리성을 지켜야 해요. 신녀님은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하신 분이에요. 제사를 안 지내서 흉년과 가뭄이 들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예요?”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감정이 격해 소리가 높아졌다.


해무찬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다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신녀 고사나도 요귀란 걸 모르시겠습니까!”


그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우리 신녀님이 가장 큰 피해자요. 당신들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신녀님은 우리가 지킬 거요. 내일 당장 제사를 올려야 하니 제물이나 내놓으시오.”


사람들이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왔다.

“제물을 내놓을 때까지 떠나지 않겠소. 이건 사널리 전체의 생사가 걸린 일이오.”

“위혼제를 올려야만 모든 사람이 다 살 수 있어요!”


아순치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니,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


나루뫼도 한숨을 쉬며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최면만 걸린 줄 알았더니 세뇌까지 당했군.”


“제대로 된 가르침은 판단하게 하지만, 세뇌는 생각을 못하게 만들지.”

한울이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십여 명의 주동자들을 한 명씩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대들이 정녕 제사를 원한다면, 제물은 우리가 직접 데려가겠소.”

“그걸 어떻게 믿고?”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면 어디든 숨을 곳이 없을 터. 내일 해 뜰 무렵 도리울로 가겠소. 신녀도 그 시각에 데려오시오.”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한울이 최면을 건 것을 아무도 몰랐다. 한울은 그들이 원하는 환상을 보여주었다.


제사가 끝나고 도리울이 밝게 빛나는 모습, 신녀 고사나가 사널리를 축복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만 돌아가시오.”

한울이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읊조렸다.


사람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어기적거리며 돌아섰다. 왔던 길로 조용히 돌아갔다.


*


일행은 헛간에 다시 모였다. 신녀 고사나를 처리할 방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예상보다 신녀에 대한 믿음이 너무 커.”

해무찬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누리예가 풀 더미에 몸을 기댔다.

“허황한 믿음이라도 한 번 믿으면 떨치지 못해. 잘못인 줄 알아도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내지. 자기 믿음을 합리화하려고.”


다루영도 그 곁에 앉았다.

“그릇된 믿음이 재앙을 만들지요.”


“한울, 그런데 아이들을 정말 데려가려고?”

사로잔은 그 제안이 탐탁지 않았다. 아이들을 다시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제물을 데려간다고 했지, 아이들을 데려간다고는 하지 않았소.”

“허!”

한울의 대답에 아순치가 외마디 숨을 뱉었다.


“알겠다. 살아있는 제물이면 되는 거 아냐? 그거라면 내가···.”

“아치, 그건 나와 다루영이 맡을게.”

“나도.”

누리예가 손을 들었다.

“난 지금 검을 들 수가 없소. 그래도 마차에 탈 수는 있으니까.”


“좋아. 그러면 아치와 내가 고사나를 상대하겠어.”

해무찬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찰싹 소리가 헛간을 울렸다.


“그럼, 타랑대귀는?”

“그건 내 몫인가?”

사로잔의 물음에 나루뫼가 코웃음을 쳤다.


“타랑대귀는 분명 요귀에게 조종당하는 다른 생물일 거야. 그냥 죽이면 안 돼.”

다루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나루뫼가 그 정도는 잘할 거야. 문제는 사람들이야.”

사로잔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신녀가 피해자라고 외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도리울에서도 사람들이 신녀를 막아섰어. 오히려 우리를 공격했지. 똑같은 방식으로 간다면 마찬가지일 거야.”

누리예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픔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렸다.


“신녀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시오.”

한울이 답을 아는 듯 느긋하게 말했다.


아순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소단주께서 혜윰을 가지고 있지 않소?”

“내 피리?”


홍석산에서 검은 털 괴물을 되돌렸던 운율, 그것을 혜윰으로 분다면?

아순치는 이미 승리한 듯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고사나, 이번에는 절대로 못 빠져나갈 거다.’


“내가 얘기해도 될까?”

다루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대로 두면 다른 요귀가 나타나 다시 신녀 행세를 할 거야. 한 번 최면에 걸리면 다른 최면에도 쉽게 걸려. 그러니 우리가 그걸 이용하자.”


“그게 무슨 말이야?”

“최면을 풀 만큼 강력한 주술을 쓰자고.”

“다루, 너 주술도 쓸 줄 알아?”


“사널리의 수호신으로 용신이 나오는 거야.”

“네가 변신하려고?”

“미신에는 미신으로 대응하자. 용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줄게.”


다루영이 굵은 목소리를 흉내 냈다.

“사널리의 백성들이여, 나는 어떤 희생도 원하지 않는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하다. 누구든 살아있는 제물을 바치는 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


해무찬은 물개처럼 손뼉을 쳐댔다.

“멋있어, 멋있어! 다루, 넌 정말 최고야.”

“어허, 이 친구. 또 맛이 갔네.”

사로잔이 해무찬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좋소. 타랑대귀는 내가 나루뫼와 함께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겠소. 소단주가 소태장군과 함께 신녀를 처리할 때 다시 합류하겠소.”

한울이 제안하자 사로잔이 차분히 계획을 정리했다.


“신녀가 사라지면 다루가 용이 될 테니, 찬이 다루 좀 살펴줘. 망석이나 백사귀가 남았다면 한울과 나루뫼가 아치를 도와주고.”


“응? 너는?”

해무찬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따져보고 남은 사람을 골라냈다.


“난 유령선을 처리하려고. 거기서 무언가 나를 기다린대.”

“설마···.”

해무찬은 하늘의 성물이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한울과 나루뫼, 누리예까지 있는 자리였다.


“그럼, 유령선에 가는 건 내가 도울게.”

누리예가 말했다.


“나도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사로 혼자보다는 나을 거야.”

“고마워요. 언니.”

사로잔은 애교 섞인 콧소리로 대답했다. 고양이 앞발을 흉내 내며 팔을 흔들었다.


해무찬은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지만, 다른 사람들은 땅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에 쌓인 먼지가 풀풀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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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4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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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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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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