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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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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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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7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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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아직 남은 길

DUMMY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나서 사흘이 지났다.

아주 짧은 순간이어서 너른벌의 사람들은 그것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도 잊었다.


미세힌 흔들림에 그친 것은 여라함의 결계 덕분이었지만, 인간세에서 그것을 알 리 없었다.


사람들의 억측과 소문에는 아랑곳없이 다루영은 깨끗한 물과 수건을 들고 종종거리며 이 층 방으로 올라갔다.

“사로, 손 씻을 물을 가져왔어.”


방에는 아랑누가 죽은 듯 누워있고 사로잔이 그 옆을 지켰다.

졸다가 깨어나 눈꺼풀을 뜨지도 못하고 웅얼거렸다.

“아, 다루. 아직도 자고 있어. 벌써 사흘째인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닐까?”


“영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래. 우리 같은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힘이지. 그래도 오늘 밤만 넘기면 깨어날 거야. 기의 흐름이 안정되고 있어.”

다루영이 아랑누의 맥을 짚어보며 숨을 돌렸다.


사로잔은 수건을 물에 적셔 아랑누의 얼굴과 손을 닦았다. 손을 잡고 있으니 눈앞에 환상처럼 여러 장면이 스쳐갔다.

아랑누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었다.


눈이 없는 아기로 태어나 할머니와 단 둘이 살던 모습, 불타버린 마을에서 혼자 울부짖는 다섯 살의 아이가 보였다.

사원에서 수련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 귀령송환사로 망령을 보내는 열두 살의 아이도 지나갔다.

길 잃은 망령들을 송환할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애틋하게 망령을 대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사로잔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속삭였다.

‘아누, 이제 끝났어. 너만 깨어나면 돼.’


*


온설지와 아순치는 술잔을 앞에 두고 모험담을 펼치느라 밤이 깊은 것도 알지 못했다.


내일이면 아랑누가 깨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술잔부터 챙겨들었다. 해무찬이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분위기는 더 뜨거워졌다.


탁자 위와 아래에서 빈 술병이 구르는데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히야, 이렇게 밤을 보내는 날이 오다니 너 진짜 사람이 되었구나.”

“나 원래 사람이었거든?”

아순치와 온설지가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세 전사들의 이야기는 열린 공간에서의 싸움으로 넘어갔다.

온설지와 아순치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싸웠음에도 보고 들은 것이 달랐다.


해무찬은 다루영과 함께 싸웠으므로, 그들과 전혀 다른 혼돈 속에서 요귀들을 상대했다.

같은 시간을 지나왔어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누구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 뒤틀린 공간에서 엄청 오래 있었던 것 같지 않아? 그대로 갑판 위라니. 말이 되냐고?”

해무찬은 적당히 취기가 올라 기분 좋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너는 재가도 바닷가에서 깨어났다고 했지?”

“음. 눈 떠보니 부둣가였어. 아누도 꼬마도, 까망이도 함께.”

온설지의 눈앞에 바닷가의 풍광이 떠올랐다.


아랑누가 쓰러져있었기에 재가도의 옥빛 바다도, 황금모래도, 바닷가의 기암괴석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오로지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빨리 아랑누를 살려야 한다는 것.


다행히 의원이 탄 배가 바로 도착했다.

다루영은 아랑누의 상태를 금방 알아보았다. 보통의 약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지만, 역시 용족이었다.

그녀의 침술로 아랑누의 숨소리는 규칙적으로 돌아왔다.


온설지는 아랑누를 생각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됐어. 이제 다 잘 마무리된 거야.’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날카로운 호통이 울렸다.

“형님들! 너무 하세요. 아직 누님이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이연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초록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친 데다 눈에 힘을 주고 있으니 번개의 화신처럼 보였다.


해무찬이 벌떡 일어나 이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 너도 한 잔 하자. 이 좋은 날 같이 축하해야지.”


“누님이 일어난 다음에 해도 되잖아요?”

온설지는 그동안의 경험을 들춰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꼬마야, 아누가 일어나면 분명 무언가 할 일이 생길 거야. 그때는 이미 늦어.”


이연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여태까지 아랑누는 빈둥거린 날이 거의 없었다. 아플 때가 아니면 무언가 일이 생겼다. 망령은 언제나, 어느 곳에나 있으니까.

이연은 어느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무찬이 술을 한 잔 가득 따랐다.

“이연 아우, 반가워! 우린 이제 형제야.”


“어, 안 돼. 꼬마는 한 잔만 마셔도 곯아떨어진다고.”

온설지가 손을 뻗었지만, 이연은 어느새 술을 홀짝였다.


*


재가도의 바다는 어설픈 새벽빛에도 옥빛으로 빛났다.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모래사장도 바닷가의 별밭인 듯 황금색으로 찰랑거렸다.


너른벌 최고의 휴양지로 이름난 섬답게 호화로운 건물이 즐비했다. 알록달록한 등불이 은은하게 건물과 거리를 비추었다.


아랑누는 언제 아팠냐는 듯 말짱하게 일어났다.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았다.

깊이 숨을 쉬며 선선한 바다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들이 묵는 여관 나보로에서 바닷가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갑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살아있다고 느끼니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나보로를 돌아보던 아랑누는 낯선 기운에 걸음을 멈추었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또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반파홍귀를 봉인할 때 공간을 열어 자신을 소환한 천계의 기운이었다.


“한울···이시죠?”

한울은 밤을 지새운 듯 찬 기운이 가득했다.


“천력을 소모해서 노각부줄에 못 들어가시나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사로 때문에요?”


한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랑누는 이미 알고 있으므로 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랑누님은 정말 미사랑님을 많이 닮았군요.”

“고맙습니다. 아마도 미사랑의 혼 조각이 제게 더 많이 들어왔나 봐요.”


“정말 좋은 분이셨습니다.”

암흑성 미사랑이면서 미사랑이 아닌 너나족 여인을 바라보니 한울은 가슴이 쓰라렸다.


“저는 누구입니까? 이 혼은 제 것이 아니면서 또 제 것이기도 합니다.”


아랑누는 영안을 열어 한울을 살펴보았다.

천인은 아니나 천계에 속했던 한 영혼이 깊이 잠들어있었다. 또 다른 혼의 숨결이 그의 기억과 얽혀 지금의 한울이 되었다.


그 숨결은 어딘지 익숙했다. 돌과자 할머니와도 도사 틔움과도 비슷했다.


아랑누는 기쁜 마음으로 허리띠에 매단 영진성 돌조각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누구든 마음이 향하는 곳을 보세요. 사로와 함께 있어서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 순간을 기뻐하세요.”


마난의 비익정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누구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걸 너도 바라니까. 다시없을 소중한 시간이 될 거야.’


“지금의 한울님은 누군가의 소망으로 태어났어요. 그 소망이 지금 당신이 가진 소망이니 그것을 이루고 기뻐하면 돼요.”


아랑누는 영진성 조각을 풀어 한울에게 건넸다.

“이것이 위안이 될 거예요.”


돌조각을 받아들자 한울의 손끝에서 심장까지, 심장에서 온몸이 따뜻해졌다.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자신의 근원인 듯 평안하고 익숙했다.


천력을 잃은 이후 이토록 아늑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


아랑누의 쾌유를 축하하며 아침 식사는 모두 한 자리에서 먹기로 했다. 여덟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까마귀가 모였다.


손뼉을 치며 축하하며 왁자지껄 인사를 나누는데 도조가 눈을 깜빡였다.

“아랑누님! 그 허리띠···. 성물이 반이나 없어졌어요.”


도조가 꽥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니, 반이 뭐야? 왕창 없어졌는데요!”


“응. 이거? 불라국으로 갔어. 좋은 사람들에게.”

“뭐요? 성물을 사람의 손에 넘겼다고요! 카악.”

아랑누가 기분 좋게 웃는 것과는 반대로 도조는 시무룩해져서 자리에 내려앉았다. 마지막까지 성물을 빼앗기다니.


식사가 나오자 사로잔과 해무찬은 먹는 일에만 열중했다.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인 듯 진지했다.

다루영은 사로잔과 아랑누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건장하고 근육질의 사로잔과 왜소하고 가냘픈 아랑누는 전혀 다른 데도 어딘가 닮았다.


‘분명 사로와 영혼이 나뉘었다고 했는데···. 아누에 비하면, 사로는 백만분의 일정도?’

다루영은 혼자 내린 결정에 만족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랑누는 가만히 사로잔의 단검을 바라보았다.

손잡이의 백진석이 반짝거리며 자꾸만 영안을 잡아끌어 식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로, 잠깐 단검을 봐도 될까?”

사로잔이 단검 휼을 건네주자 아랑누는 백진석에 손을 얹었다.

하얀 돌은 아랑누의 손에 달라붙듯 떨어져 나왔다.


식탁에 모인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울은 백진석에 숨은 진유의 혼을 보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백진석을 손에 쥐자 아랑누는 진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반듯하고 진중한 무사였다. 말수가 없지만 주군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주군도 그를 소중히 여겼다.

‘진백성이 아끼는 수하이구나. 그럼 천계로 돌려보내야지.“


아랑누는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백진석을 허공으로 띄우니 하얀 보석이 꿈틀대면서 점차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마침내 진유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진유는 아랑누와 사로잔을 한참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다시 만날 때는 우리 기쁘게 마주하자.’

아랑누의 생각을 읽은 듯 진유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곧 하늘로 사라졌다.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녀의 능력을 알면서도 새삼 놀라웠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보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고 있었다.


*


식사가 끝난 후, 아랑누가 커다란 지도를 꺼냈다. 너른벌 세 개의 대륙이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온설지와 이연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지도를 바라보았다.

‘역시 일이 생길 줄 알았어,’

서로 눈빛을 마주쳤다.


“망령에게 들었어. 우리가 만난 덫은 극히 일부라고. 정귀가 사라져도 망석과 사음귀는 남아있어. 그들을 구해야 해.”

아랑누의 말에 한울이 수긍했다.

“그들이 너른벌 곳곳에서 실종된 사람들이오.”


사로잔이 흥분해서 탁자를 내리쳤다.

“당장 그놈의 덫을 제거해야 해!”

“망석은 죽음만이 해방되는 길이지만, 사음귀는 구할 수 있어.”

해무찬의 이마에 주름이 새겨졌다.

여태까지 만난 괴물을 떠올렸다. 아직도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니.


“요귀를 다 없애버리는 건 어때? 그럼 망석이나 사음귀가 생기지 않겠지.”

아순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귀는 사람의 탐욕과 원망에서 태어나니 사람이 있는 한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오. 정귀는 나타나지 못하겠지만.”

한울의 말에 아랑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늦게 출발하면 그만큼 그들의 고통이 심해질 거야. 흩어져서 모든 대륙을 살펴보자.”

아랑누가 지도 위에 네 개의 경로를 그렸다. 눈가리개를 하고도 정확히 방향을 짚어냈다.


“재가도에서 출발해서 동남, 동북, 서북, 서남 방면으로 가는 거야. 하늘의 성물을 얻은 사람들까지 함께 한다면 두 해가 지나기 전에 모든 덫을 없앨 수 있어.”


“조를 네 개로 이루어야겠군.”

온설지가 네 개의 경로를 훑어보았다.


지도를 중심에 두고 모든 시선이 고정되었다.


잠시 후 사로잔이 소리쳤다.

“좋았어. 난 동북을 맡을게. 한울! 나와 같이 갈 거지?”

“좋소. 바라던 바요.”

한울이 사로잔을 향해 두 손을 모으며 활짝 웃었다.


해무찬이 다루영의 손을 잡았다.

“다루, 우리는 서남 방면으로 가자. 용각국에 들러서 정식으로 혼례도 올려야지.”

그의 말에 다루영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그는 다루영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아랑누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

헛기침으로 목을 고른 후 고개를 들었다.


“동북 방면은 사로와 한울, 서남 방면은 다루와 찬, 서북 방면은 온형과 아치가 맡아. 나와 연이 동남 방면을 맡을게.”


“그럼 나도! 아랑누님과!”

도조가 훌쩍 뛰어올랐다.


아순치가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하하, 좋은 친구와 같이 하는 모험이라···. 재미있겠는 걸. 좋아! 서북 방면이면 거대상단의 교역로가 발달했으니 상단 일을 배우며 다닐 수 있어.”


온설지가 크게 손뼉을 쳤다.

“우리가 다시 함께 모험한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나?”


또 다른 사명이 주어졌다.

너른벌의 지도를 둘러싸고 나그네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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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인간세의 전사들 3 22.08.07 61 0 11쪽
209 인간세의 전사들 2 22.08.07 44 0 11쪽
208 인간세의 전사들 1 22.08.06 56 0 12쪽
207 공간을 열다 22.08.06 61 0 13쪽
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5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4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199 아랑누_소진된 영력 22.08.04 50 0 13쪽
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6 0 10쪽
197 아랑누_일행이 되다 22.08.04 53 0 12쪽
196 아랑누_참나로 의식 22.08.03 49 0 13쪽
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5 0 11쪽
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8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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