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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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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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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2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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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사로잔_작은 소망

DUMMY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시원하고 개운했다. 파도도 잠들어 잔잔한 물결 위에 나룻배만 삐걱거렸다.


망령이 사라지니 작은 나룻배만 남았다, 삭아서 가라앉기 직전이었고, 물풀이 잔뜩 끼어 나룻배의 원래 모습을 찾기도 힘들었다.


‘귀령송환사가 이런 거였어?’

사로잔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네 덕분에 나도 눈으로 세상을 봤어. 상상보다 아름다운 곳이구나. 고마워. 네가 사로잔이라서.’

‘그거 칭찬이야? 별 이상한 칭찬 다 들어보겠네.’

‘사로, 우리가 함께 갈 때가 되었어. 여륭으로 가자. 너른벌에서 영력이 가장 강한 땅이야.’

‘여륭?’


여륭은 유우대륙 가장 끝, 먼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이었다. 사람은 살지 않는 마른 땅이었다.


‘네가 가라면 가야지. 거기서 너와 하나가 되는 건가?’

‘아니. 난 아랑누로 살 거야. 네가 사로잔인 것처럼. 그래도 우리가 하나임은 달라지지 않아.’

‘어떻게 함께 하려고?’

‘필요할 때 부르면 돼. 넌 귀령송환사가 필요하고, 난 무사가 필요하니까.’


멀리서 소년의 애끓는 외침이 들렸다.

‘누님! 누님! 정신 차리세요. 누님!’

‘아누가 숨을 안 쉬는데?’

젊은 남자의 목소리도 바짝 굳어있었다.

‘어흐흑, 누님!’


아랑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난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길잡이 구름이 날 이끄니, 그걸 끝내고 갈게.’


다음 순간, 사로잔의 몸에서 아랑누의 영력이 사라졌다.

그 힘이 빠져나가니 몸이 무거워 커다란 바윗덩어리 같았다. 다리 한쪽의 무게가 짐수레 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대로 주저앉으니 누리예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너···, 넌···, 진짜···.”

세차게 고개를 젓고 사로잔을 다시 보았다.


“언제 그런 술법을 배웠어?”

“그건 내가 아니었어요. 잠깐 몸을 빌려준 거죠.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라고나 할까요.”

“넌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다 낡은 나룻배가 사로잔의 옆으로 와서 붙었다. 배에 붙어있던 물풀이 바람에 일어서며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뭐지, 얘들은?”

뱀처럼 길게 자란 물풀에서는 비릿한 향기가 나고 표면은 미끈거렸다.


사로잔은 물풀의 춤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 위해 물풀과 나룻배를 살펴보았다. 배 안쪽에 반짝이는 성물이 보였다.


사로잔이 손을 뻗는 순간, 누리예가 소리쳤다.

“여기 채찍이 있어!”

누리예가 물풀 한 줄기를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그것은 채찍이 되었다.

“아니···, 연검인가?”


끈이든, 채찍이든 연검이든 정체가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그것을 잡자마자 찌릿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저도 드디어 주인을 찾았군요.’

그것이 누리예에게 말을 걸었다.


“하늘의 성물이에요.”

사로잔은 성물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제야 누리예는 알 수 있었다. 백사귀들이 자신의 검에는 상처 입지 않았던 이유를.


“이름을 지어주세요. 언제 어디서나 언니를 찾아갈 거예요.”

“이름?”

누리예가 중얼거리자 손잡이가 꿈틀거렸다.


“자기 이름이 다물이라는데? 이건 나를 가르치는구나.”

“성물이 언니를 주인으로 삼았다면, 함께 싸워야 해요. 선택받았다는 건 위험도 함께 한다는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직 몰라요. 그저 각오하고 있을 뿐.”


사로잔은 혜부거 장군이 한 말을 되새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와 여기 있지 않은 공간에서. 혜부거 대장군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날과 시간은 모르나 늘 준비하고 있겠다고.”

”알겠어. 나도. 이 아이가 말해주는구나.”


누리예와 사로잔은 말없이 다물을 바라보았다. 다물은 이제 곧 싸움이 시작된다고 알려주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각오로 눈을 빛내는 사이 나룻배 바닥에 가라앉은 보석들이 사로잔의 주머니로 비집고 들어갔다.


*


소사매의 집은 조촐한 잔치를 마련하느라 부산스러웠다. 고생한 아이들을 위한 악사들의 마음이었다.

다루영과 나루뫼는 부엌에 틀어박혀 소사매와 함께 굽고 찌고 볶느라 정성을 기울였다.


성주원에서 열리는 축하연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들끼리의 식사가 오히려 마음 편했다.


사로잔과 해무찬은 마당에 앉아 잘 익은 고기를 썰어 접시에 담았다. 한울도 서툰 젓가락질로 나물과 장아찌를 나눠 담았다.


어설프게 사람을 흉내 내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사로잔은 계속 쿡쿡 웃음을 흘렸다.


골목 입구에서 아순치의 말 우듬이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아순치가 싸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깨는 축 늘어뜨리고 걸음은 질질 끌었다.


사로잔이 흘끗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누리예를 배웅하고 나서 삼보와 만난다고 했다. 거대상단에서 오는 삼인방 중에 이번에는 삼보 차례였다.

돈주머니를 들고 있으니 보석을 넘긴 것은 알겠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왜 그래? 아치? 무슨 문제 있어?”


아순치는 털썩 들마루에 주저앉았다.

“사널리 사람들 말이야, 벌써 요귀를 잊어버리다니 말이 돼?”

“이제 겨우 이틀 지났는데?”

해무찬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내 말이! 난 성주원의 연회가 요귀를 무찌른 기념인 줄 알았거든. 우리를 초청하지 않아도 사널리 사람들이 우선이니 우리끼리가 마음 편하다 생각했다고. 그런데!”

아순치가 숨을 몰아쉬었다.


“담덕을 죽인 가짜 성주를 무찌르고, 사널리를 점령하려는 도적 떼를 물리쳤다는 거야. 그 도적 떼 이름도 뭐라더라? 백사대? 그 사람들은 비술로 만든 약을 먹어서 괴물 같은 힘을 가졌다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신녀는?”

“신녀는 바다 괴물의 습격을 받아 죽었단다. 바다 괴물은 신녀의 독기 때문에 터져서 죽었고. 허! 반파홍귀에 대해서는 아주 깨끗이 지워졌어.”

아순치가 주먹으로 마루를 탕탕 내리쳤다.


“으흠. 그럼 그 이야기 속에 우리는 없겠네. 용신은? 용신은 기억해?”

사로잔이 입술을 쫑긋거렸다.


“다행히 용신은 기억하더군. 그 축하연이 사널리의 수호용을 기리는 잔치야.”

“그나마 그건 기억해서 다행이네. 적어도 산제물은 안 찾겠지.”


“사로. 나 소름 돋는다.”

해무찬이 진저리를 쳤다.

“넌 또 왜?”


“정귀가 두 마리 다 사라졌는데도 사람들 기억이 바뀐 거지? 그건, 그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어딘가 살아있다는 말이잖아?”


그의 말에 사로잔과 아순치는 숨을 멈추었다.

‘정귀가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끝날 줄 알았는데···.’


한울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사람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차라리 모르는 편이 행복하다.


그리고 이들은 조만간 아유라와 부딪쳐야 한다. 알리지 않아도 그때가 곧 올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싸우게 될까. 또 나는···.’


아유라의 공격에 목숨을 잃던 순간, 그 고통이 또렷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혼으로 남은 한울의 기억이지만 자신의 기억처럼 생생했다.


긴 침묵을 깨고 아순치가 중얼거렸다.

“그가 바로···. 우리가 상대할 적이구나.”


사로잔의 눈에도 빛이 서렸다. 혼령을 보내고 나서 아랑누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함께 갈 때가 되었어. 여륭으로 가자.’


‘그 말이 이런 거였어? 우리가 함께 싸울 상대를 말한 거였어?’

고기를 썰던 칼이 부르르 떨렸다.


*


밤이 깊어 샛골은 완전한 어둠에 묻혔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소사매는 아이들을 재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쌍둥이들도 한 식구가 되었다.


“조카가 둘이나 더 생긴 거지. 허허허.”

술기운이 도는지 나루뫼가 기분 좋게 웃었다.


다루영도 방문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로와가 무척 좋아해. 오빠가 둘이나 생겼다고. 하명이랑 희수는 몸집이 작아서 어린 줄 알았는데···. 부모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잘 됐지?”


“서늬 언니도 로와가 예쁘다고 난리였잖아? 며느리 삼고 싶다나? 벌써 그런 말을 하다니, 언니도 참.”

사로잔도 흐뭇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누리예가 돌아왔을 때 로와는 팔찌를 돌려주면서 만들어 놓은 목도리도 곱게 접어주었다.


도톰한 실로 뜬 목도리는 목을 두 번 감고도 남을 정도의 길이였다. 초록 실과 흰색 실로 무늬를 넣었는데, 한쪽에는 여자아이가, 한쪽에는 남자아이가 문양처럼 들어갔다.

‘가락국은 여기보다 더 춥대요. 이모, 이걸로 따뜻하게 보내세요.’


“그때 언니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똑똑히 봤거든.”

사로잔이 잔을 비우자 해무찬이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사로, 사널리의 일은 끝난 것 같은데, 다음은 어디야? 나침반 좀 꺼내 봐.”

“이제 나침반이 없어도 알 수 있어.”

의미심장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해무찬도, 아순치도 등골이 오싹했다.

‘이번엔 무슨 말을 하려고?’


“아랑누와 이어진 이상 그녀가 가는 곳으로 가면 돼. 여륭으로 갈 거야.”

“여륭? 거길 가겠다고? 사람이?”

아순치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거긴 말라붙은 땅이야. 사람이 살지 않아. 거기까지 가는 배도 없을 걸?”

“여하튼, 갈 거야. 거기 우리가 할 일이 있어. 아랑누는 따로 일이 있어서 그걸 마치고 온대.”


“그럼, 나루뫼는?”

해무찬이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팔의 무게를 못 이기고 나루뫼의 등이 구부러졌다.


“나도 목표가 있소. 그걸 완성해야지.”

“또 우리를 미행하는 건 아니고? 우연을 가장한 미행이라고 했던가?”

“이제 용병은 그만해야지. 혹시라도 당신들과 적이 되면 안 되니까, 그땐 바로 죽은 목숨일 테니,”


“하하, 나루뫼가 농담을 다 한다니.”

아순치가 소리 내어 웃다가 딸꾹 소리를 냈다.


“이제는 돈을 다 모았으니 그걸 해보려고. 금명원. 이름도 정해놨소.”

“금명원? 전당포인가?”

“장공거 같은 무술훈련소를 세울 거요. 큰누님을 모시고, 로와도 내가 키워야지. 아, 조카가 더 늘었지.”


“그럼 지금은 어디로 갈 거요?”

“월영국 혜부거 대장군에게 병법서를 구해올 거요. 그분의 서재에는 세상에 한 권뿐인 비서가 많거든.”


“자네한테 그걸 줄지가 미지수로군.”

해무찬이 싱글거리며 탁자 위 빈 잔에 모두 술을 채웠다.


다루영이 사로잔과 한울을 번갈아 보았다.

한울은 월영국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과묵해져 쉽게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아순치가 부채로 턱을 두드리다가 한울의 어깨를 쳤다.

“천인께서는 천계로 돌아가십니까?”


“나도 여륭으로 가겠소.”

한울이 사로잔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마음의 주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해무찬에게까지 마음의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도 그는 팔을 벅벅 긁으며 소매를 털었다.


아순치가 빙그레 웃으며 부채로 탁자를 두드렸다.

“헛! 그럼 우리 일행이 다섯 명이 된 건가?”

“땡! 한울은 악사가 아니라서 실격이야.”

해무찬이 팔짱을 끼고 허리를 세웠다.


“악기를 연주해야 한다면···.”

한울이 손목을 한 바퀴 돌리니 허공에서 요고가 나타났다.


작은 장구처럼 생긴 요고가 한울의 손에 들리니 더 작게 보였다. 마치 장난감 같았다. 그러나 소리는 아니었다.

양쪽 가죽을 번갈아 두드리는 손놀림을 따라 경쾌한 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퉁명스럽던 해무찬마저도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좋아! 그곳에 가면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어.”

사로잔이 외치자 아순치가 부채를 활짝 폈다.


“그래. 나도 전설을 완성해야지.”

술잔에 담긴 별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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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3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4 0 10쪽
202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3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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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아랑누_갈림길 22.08.03 57 0 12쪽
194 아랑누_비밀의 책 22.08.03 60 0 10쪽
193 아랑누_루월상단 운여 22.08.03 44 0 11쪽
»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8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190 사로잔_또 하나의 계획 22.08.02 47 0 13쪽
189 사로잔_핏빛 도리울 22.08.02 41 0 10쪽
188 사로잔_두 번째 봉인 22.08.01 43 0 13쪽
187 사로잔_위혼제 22.08.01 72 0 12쪽
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185 사로잔_새로운 다짐 22.08.01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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