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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2.05.11 10:21
최근연재일 :
2022.08.07 06:20
연재수 :
21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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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8
글자수 :
1,06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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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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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아랑누_시조새

DUMMY

아랑누의 영안을 가린 안개가 걷혔다. 그들은 알둥지 안에 있었다.

빛의 기운이 가득했으나 뜨겁지 않았다.


상재믈국 감항에서 만났던 신령수의 결계와 비슷했다. 여기 있으면서 저기에도 있는 것처럼 유리산 꼭대기이면서도 어딘가 다른 공간이었다.

시원하고, 맑고, 상쾌했다.


“여기 호설이 있나요?”

아랑누는 호설의 기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분명 흰 호랑이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힘의 흐름에 맞춰 영안으로 따라가던 그녀는 시조새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시조새는 분명 호설과 같은 기운이었다. 천사도 선사도 아니면서 너른벌에도 속하지 않은.


“당신이 호설인가요?”

“그것은 나의 조각이자 그만의 의지를 가진 다른 존재이다.”

“혼이 나뉘었나요? 미사랑의 혼 조각이 나뉜 것처럼?”


“사로잔이 태어난 이유와 비슷하지. 영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너나족 사람으로 태어난 이유. 계획대로라면 너 하나면 충분했을 텐데.”

“전···, 모르겠어요.”

“넌 몰라도 된다. 미사랑은 아니까.”


시조새의 몸집이 점점 줄어들었다.

아랑누보다 조금 큰 정도여서 목을 뒤로 젖히지 않아도 눈과 부리의 형상이 잘 읽혔다.


근엄하면서도 아름다운 눈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는 그대로였으나 가만히 보고 있으니 두려움이 점점 희미해졌다.


“당신은 누구죠? 왜 나를 불렀나요?”

“네가 나를 깨웠다. 차원의 틈에 갇혀있는 나를. 그때 넌 모르면서도 알고 있었지.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시조새는 천천히 읊조리듯 말했으나 아랑누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뭘 알고, 뭘 모른다는 거야?’


아랑누는 고개를 돌려 둥지의 다른 곳을 훑기 시작했다.

‘어딘가 단서가 있을 텐데···.’


영안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투명하게 빛나는 벽과 출렁거리는 둥지뿐이었다.

바닥에는 수많은 물방울이 찰방거렸다.

물방울인지 유리구슬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터졌다가 다시 모이니 분명 껍질을 가진 물방울이었다.


아랑누는 초조해져서 주먹을 계속 쥐었다 폈다.

‘혼 조각이든, 하늘의 성물이든 빨리 알아내고 도조를 보러 가야 해.’

도조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졌다.


산 중턱에서 갑자기 사라진 온설지도 찾아야 했다. 산 밑에서는 이연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시조새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전의 이야기를 읽는 듯이.

“너는 누구인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랑누는 눈앞의 커다란 새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이 뜬금없는 질문은 뭐야? 수수께끼를 좋아하나? 설마 스승님과 아는 사이?’


아랑누는 대답할 말을 고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모여사원의 귀령송환사? 미사랑의 혼 조각?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주술사? 요귀를 무찌르는 전사?’


시조새가 물방울로 가득 찬 바닥에 앉았다.

둥지를 이루던 물방울들이 수없이 튀어 오르며 무지개색으로 빛났다.


투명한 벽과 천장으로 햇살이 스며들어 보석처럼 빛났다. 물방울은 터지지 않고 공중을 떠다니며 둥지 안을 빛냈다.


“미사랑이 차원의 정수로 들어가는 순간, 차원의 틈에 구멍이 생겼지. 그 후에 그녀가 빛의 화살로 나를 깨웠다. 나는 인간세로 내려와 새의 모양을 입었다.”

시조새의 눈을 바라보자 아랑누는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


인간세의 대기는 떫고 썼다. 몸을 갉아 먹는 독기가 가득했다.

이쪽 차원에서 오색조의 몸으로 견디는 것보다 차라리 차원의 틈에 갇혀있고 싶었다.


이전 차원에서 전능했던 신력은 모두 사라지고 영력조차 희미했다. 그는 흰바위산에 숨어 웅크리고 소멸을 기다렸다.

몸을 웅크리고 고통을 참았다. 오래 묵은 상처가 낫지 않고 안쪽까지 곪아갔다.


슬픈 영혼을 위로하러 내려온 미사랑이 그의 아픔과 슬픔을 느끼고 흰바위산 동굴 속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암흑성이기에 천사와 선사가 다닐 수 없는 곳을 찾아다녔다.


미사랑은 오색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보지 못했고, 그도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오색조구나? 어디 아프니?’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자 그녀는 오색조의 아름다운 깃털을 쓰다듬었다.

‘너도 아픈 사연이 있구나. 내가 살펴볼게.’


미사랑이 손을 대자 뜨겁게 달아올랐던 열이 내렸다. 몸에 가득 찼던 독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옆구리의 상처를 보자 미사랑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이건···.’


안타까워하며 혀를 찼다.

‘차원의 경계가 부딪히면서 꽂혔나 보다. 불쌍하게도.’


그녀의 손길이 지나가자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까지 모두 아물었다.

차원의 틈에서 빠져나오며 깎이고 패인 자리도 회복되었다. 조각이 떨어져 나간 자리도 말끔히 사라졌다.


미사랑은 오색조의 등을 쓰다듬으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녀의 숨을 따라 맑은 기운이 흰바위산의 동굴을 채워나갔다.

‘널 위로해주고 싶지만, 말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괜찮아. 너무 괴로워하지 마.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돼.’


그녀가 손목을 돌리자 그들은 흰바위산 꼭대기로 옮겨갔다.


미사랑은 흙과 모래, 자갈뿐인 꼭대기에 둥지를 만들었다. 그 위에 타원형의 거대한 알을 올려주었다.

오색조가 쉴 수 있는 집이었다.

‘겉에서 보면 그냥 알 같지만, 햇빛을 받으면 반짝일 거야. 어디서든 집을 잘 찾아오겠지?’


미사랑은 바닥에 떨어진 깃털을 집어 들었다. 오색조의 날개에서 나온 여러 빛깔의 깃털이었다.

‘아름다운 깃털이구나.’


그녀는 여섯 개의 깃털을 양손에 나눠 잡았다.

어떤 것은 푸른빛이고, 어떤 것은 불그스름했다. 어떤 것은 하얀색에 황금빛 물이 들었다.


미사랑이 깃털에 숨을 불어넣었다.

여섯 개의 깃털은 날개 달린 사람이 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몸은 사람이었고, 등에는 날개가 달렸다.


‘와! 대단한 신력을 가졌구나! 난 작은 새를 만들어주려 했는데.’

미사랑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손은 가늘게 떨렸다.


비로소 그녀는 오색조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았다.

‘차원의 틈에서 온 방문자구나. 아유라와 비슷한···.’


오색조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를 차원의 틈에서 불러낸 존재였다.


그녀가 쏘아 올린 빛의 화살로 깨어났으며, 그녀의 간절한 부름에 따라 인간세로 내려왔다는 것을.

비록 미사랑은 자신이 불렀다는 것을 모르지만.


‘여기서 넌 외롭지 않을 거야. 저 아이들이 네게 소식을 전해줄 테니.’

미사랑은 날개를 접고 웅크린 오색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암흑성 미사랑이야. 만나서 반가워. 네가 계속 인간세에 머문다면, 다음에 만날 때 난 다른 모습일 거야.’

잠시 머뭇거리다 오색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물방울처럼 젖어있었다.

‘나를 도와줘. 언제가 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나를 기억해줘.’


미사랑은 오색조의 등을 토닥였다.


*


“그녀가 떠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영력을 되찾았다. 미약하나마 신력도 찾았지. 흰바위산을 유리산으로 만들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 알둥지는 비바람에 깎여 지금이 되었다.”


“미사랑을 어떻게 돕죠?”

“그건 나도 모른다. 이미 그 일을 했는지, 아니면 앞으로 생길지.”


“그럼 그때까지 유리산을 지킬 건가요?”

“내가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 그를 만나면 언제든 함께 돌아갈 거다. 그때까지는 지킬 것이다. 그녀가 내게 부탁했으니.”


“그 존재가 어디 있는데요? 어디로 돌아가나요?”

“이쪽 차원 어딘가에. 그것이 언제이든. 돌아가야지. 새로운 차원을 이루기 위해.”


“설마 그 말을 하려고 날 기다린 건가요?”

“전해야 할 것은 이미 넘겼다.”


아랑누가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뭘 줬다는 거지?


“곧 알게 될 거다.”

한 마디를 남기고 시조새는 사라졌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눈꺼풀이 닫혔다 열릴 사이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


시조새가 사라지자 알둥지에 숨겨진 미사랑의 혼 조각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른벌에 남아있던 마지막 조각의 무리였다.


혼 조각은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미사랑의 간절한 바람까지 녹아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아랑누의 몸은 폭발하는 영력을 이기지 못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더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의 몸도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심장조차 잠들었다.


바닥이 출렁거리며 가운데부터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튀어 올랐던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몸도 하얀 물방울을 따라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


유리산 아래를 돌아보던 이연이 걸음을 멈췄다.

하얀 유리벽에 투명한 막이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곤약처럼 물컹거렸다.

‘형님이 보았다는 입구가 여기구나.’


이연이 손을 대자 출렁거리며 막이 흔들렸다.

손을 집어넣으니 쑥 빨려 들어갔다. 안쪽은 시원했고, 그리고 강물처럼 일렁거렸다. 손이 축축하게 젖었다.


투명한 막 주변도 희미하게 출렁거렸다.

“이건···.”

이연이 놀라 유리산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이건 폭포. 그래, 그냥 폭포 입구일 거야.’

이연은 유리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포라고 생각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른 입구를 찾으려는데, 그 안에 숨은 넋이 꿈틀거렸다.

‘유리산이 곧 터질 거다.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무아의 넋이 하는 말이 똑똑히 들렸다.


이연은 다시 유리산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속은 산이 풍선처럼 터진다면!


황급히 운여를 불렀다.

“운여 형님! 큰일 났어요!”


다리를 절룩이며 가까스로 운여가 다가왔다. 몸은 이미 땀에 젖었고, 숨이 가빠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이연은 다짜고짜 그의 손을 막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운여가 놀라 손을 빼냈다. 손뿐만 아니라 소매까지 물에 젖어있었다.


“이게 뭐지?”

“물이에요. 이 산이 물로 되어 있다고요!”

“뭐라고? 이 산이 전부?”


운여는 산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가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길고 좁은 협곡이 거미줄처럼 드넓게 펼쳐졌다. 어디나 마른 바닥을 드러냈다.


“큰일 났어요! 산이 무너지면 이 주변이 모두 물에 잠긴다고요.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요.”

이연이 발을 동동 굴렀다.


“잠깐, 잠깐. 진정해. 유리산이 물이라는 것도 말도 안 되고, 게다가 오랜 세월 이 모습이었어. 이게 지금 무너진다고?”

“그건···. 누님이 들어갔으니까요!”


말이 안 되는데, 운여는 어쩐지 그 말이 믿어졌다.

생각할수록 더 말이 안 되는 것을 믿을지 말지 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몸이 움직였다.


그들은 서둘러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뛰었다. 운여는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있는 힘껏 달렸다.

비익정의 말과 마차,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마난과 주변의 사람들을 피신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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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아유라의 독백 22.08.06 46 0 7쪽
205 아랑누_해갈 22.08.06 43 0 13쪽
204 아랑누_삼신성의 재회 22.08.05 52 0 10쪽
203 아랑누_천계의 방문자 22.08.05 44 0 10쪽
» 아랑누_시조새 22.08.05 46 0 12쪽
201 아랑누_유리산 22.08.05 43 0 12쪽
200 아랑누_유체이탈 22.08.04 7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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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아랑누_마난 비익정 22.08.04 4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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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사로잔_작은 소망 22.08.02 47 0 12쪽
191 사로잔_용신의 출현 22.08.02 4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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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사로잔_한밤의 회담 22.08.01 4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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