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여름 -화해-
다시 얘기하자던 그녀는 연락이 없었다. 먼저 연락을 해봤지만 전화도 안 받고 답장도 없었다. 정말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다음 날 출근했을 때 그녀는 여느 때처럼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았다. 그래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일하는 동안 그녀는 그전과 같이 대하는 것 같지만 뭔가 달랐다. 그 전에는 사무적인 모습에도 애정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둘이 남아 정리를 하는 동안에도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뒷정리를 하다가 가장 궁금했던 말을 슬며시 꺼냈다.
“저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물어도 되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뒷정리만 계속 했다. 대놓고 무시하니까 머쓱해져서 더 이상 물어보지 못 했다. 집에 가는 길에도 서로 말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말을 꺼냈다.
“편지 읽어 봤어요?”
잠시 말없이 있다가 응이라는 짧은 답만 하여 더 이상 뭘 물어보기가 힘들었다. 갈림길에서 안 데려다 줘도 되니까 가라는 말에 오기 부리며 데려다 주겠다며 같이 걸었다. 그렇다고 뭔가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집 앞에 가서야 '조심히 들어가'라는 짧은 인사만 건네고 들어갔다.
다음 날도 어제와 같은 하루가 계속 됐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둘이 뒷정리하는데 뭔가 대화가 필요할 거 같아서 이번엔 좀 쎈 질문을 했다.
“저번에 공원에서 기다렸을 때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 누구에요?”
그녀는 또 말없이 뒷정리를 하다가 계속 대답을 기다리며 보고 있자 짧게 말했다.
”전에 만났던 애“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어느 정도 둘러댈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쿨해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그 말이 왠지 모르게 서늘했다. 나도 언젠가 그녀한테 “카페에서 일할 때 만났던 남자”정도로 묘사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가 왜 왔는데요?”“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었나보지 뭐.”
“그래서요?”“그냥 알았다고 했어.”
그 말이 혹시 다시 만난다는 말인가 싶어 되물었다.
“그게 끝이에요?”
“응.”
대답이 애매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라면 그 남자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더 이상 말을 꺼내봐야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 이야기로 넘어갔다.
“누나 아직도 화 많이 났어요?”
“무슨 화가 나?”
“그때... 정말 미안해요. 내가 경솔했던 거 인정해. 하지만 누나한테 상처주고 싶지 않아요. 난 그 남자랑 달라.”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을 하지 않고 그릇을 정리했다.
“미안해요. 정말. 나 누나 많이 사랑해요. 근데 너무 제 감정만 앞섰나봐. 난 단지... 우리가 좀 더 진지하고 깊은 관계가 되고 싶었어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릇을 계속 정리했고 그런 그녀를 보며 어떠한 대답을 기다렸지만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하는 것 같았다. 뒷정리가 끝나고 아침에 볶은 커피가 담긴 통을 그녀에게 건넸다.
“커피 한 잔 내릴래요?”
그녀는 통을 받지 않고 내 얼굴만 빤히 쳐다봐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이거 갈아야 되지. 좀만 기다려요. 금방 갈아드릴게요.”
커피 분쇄기를 꺼내고 원두를 넣는데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만 본다. 분쇄기를 돌리려는데 원두가 자꾸 여기 저기 튀어버린다.
“으이구 화상아. 이리 줘.”
“아 내가 할 수 있는데.....”
그녀는 분쇄기를 빼앗아 능숙하게 갈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보니 사과를 받아준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 원두를 갈던 그녀가 슬쩍 쳐다보고 ‘뭘 쪼개냐’며 쏘아붙이지만 그녀의 화가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아 ‘와 완전 프로시네. 믹서기가 따로 없다.’며 너스레를 떠니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뜨거운 물을 올리고 필터와 글래스를 가져와 그녀 앞에 대령했다. 그녀는 다 갈린 원두를 필터위에 올려 얼른 끓는 물을 가져왔다. 그녀는 뜨거운 물을 조금씩 떨어뜨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너무 예뻤다. 그래서 더 미안해졌다.
“미안해요.”
그녀는 떨어뜨리던 물을 멈췄다.
“난 그 남자처럼 상처주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힐끔 보더니 다시 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나 살면서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없어요. 그래서 너무 내 감정만 앞섰나 봐요. 상처 많은 사람인줄 뻔히 알면서도...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 더 소중히 다루고 더 보듬어 줄게요.”
물을 떨어뜨리던 그녀가 이내 힘 조절을 못 했는지 물이 확 쏟아졌다. 혹시나 데지 않았을까 괜찮냐고 물으면서 눈을 바라보니 그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에 젖어있었다. 물을 들고 있던 손을 잡아 주전자를 내려놓게 하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가슴에 파묻힌 얼굴이 가녀리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로 얼마나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이거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잠시 안겨있다 조용히 밀쳐냈다. 그리고 다시 주전자를 물을 내리면서 말했다.
“나 앞으로 너랑 잘 생각 없어.”
“괜찮아요. 난 누나만 있으면 되요.”
“너랑 키스도 안 할 거야.”
화난 것처럼 말하지만 툴툴 대는 게 뭔가 귀여웠다. 그 모습을 보니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장난기가 들었다. 그럼 뽀뽀는 괜찮죠? 라고 말하고 대답을 하기 전에 그녀의 볼을 잡고 가볍게 입마추고 바라보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누가 뽀뽀 하랬냐며 성질을 냈지만 그 모습이 귀여워 한번 더 뽀뽀를 했더니 나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맞으면서도 실실 웃으니까 이내 그녀도 포기해버렸는지 다신 그러지 마라고 말했다. 다신 안 그러겠다며 그녀를 다시 안았다.
다음날 출근했을 때 그녀는 간만에 기분이 좋아보였다. 윤미랑 신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들뜬 상태로 나를 반겼다.
“왔냐?”
상처를 꿰맨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누나 오늘 왜 이리 신났어?”
“오정이 너 라이벌이 나타난 것 같더라.”
사장님이 웃으면서 그 말을 하는데 깜짝 놀랐다. 혹시 또 전 남친이라도 나타난 건가 싶었다.
“예? 뭔 소리세요?”
“글세 아까 어떤 남자가 새롬이한테 전화번호 주고 간 거 있지.”
“네?”
아니 어떤 새끼가 감히 내 여자를 넘보나. 지금 표정이 썩으면 안 되는데 여름철 음식물처럼 점점 부패된다. 신나있는 새롬누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뭐 보험 하나 파려고 하나보죠.”
“야 그런 거 아니거든?”
“어떤 남자가 나가면서 전화번호 적힌 쪽지 건내 주고 가더라구.”
그녀는 자랑스럽게 그 쪽지를 펴 보이면서 히죽거렸다.
“아님 교회 나오라고 하겠지.”
“자꾸 까불면 죽는다.”
그녀는 둘이 있을 때는 그렇지 않으나 이렇게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가끔 이렇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이것도 그녀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이다. 그녀가 매섭게 노려보자 윤미가 거기다 말을 보탠다.
“보니까 키도 크고 훈훈하게 생겼던데.”
“에이 키는 저도 안 밀리지.”
“너보다 커보였는데? 그리고 너는 별로 안 훈훈하잖아”
“훈훈은 무슨 난로불 쬐나?”
“와 진짜 질투하나 보다?”
“그런 게 아니라 어떤 눈 낮은 인간 때문에 매니져님이 의기양양한 모습이 눈꼴 시려운 거죠.”
“뭐 임마?”
그녀가 발끈해서 노려보자 콧방귀를 뀌며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감히 날 두고 다른 남자의 추파에 헤헤거리다니. 대놓고 삐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번호 따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홀로 나가서 주문을 받은 후 새롬 누나한테 쪽지를 하나 건넸다.
“누나 저기 있는 사람이 이거 전해주래요.”
“오~ 오늘 새롬 언니 인기 폭발인데요? 뭐라고 써 있어요?”
그녀는 표정관리 못하고 히죽거리며 쪽지를 펴보는데 거기엔 이런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아메리카노 한잔 카페모카 한잔”
그걸 보고 사장님과 윤미는 빵 터져서 웃다가 손님들이 쳐다봐서 소리 죽이며 웃었다. 새롬 누나는 주먹으로 내 팔뚝을 마구 가격했고 홀로 도망쳤다. 윤미는 주방에 주저앉아 웃었고 사장님은 인자한 표정으로 껄껄 웃었다. 그녀는 죽여 버리겠다며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웃으며 얄미운 표정을 짓다 문득 이 순간이 기억 속에 계속 간직될 정겨운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지화면으로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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