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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성칭 밑의 피와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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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23.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3.08.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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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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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97화

DUMMY

A.J. 728년 11월 23일

엘프어 아페니니, 대륙 남부 방언으로는 아페닌으로 불리는 거대한 산맥의 한복판에서는 때아닌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절대로 협력할 일이 없을 늑대, 곰, 호랑이 같은 짐승들은 물론이고 구울과 좀비가 섞여있는 대군세의 한복판에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페른! 옆에 하나!"


"나도 알아!"



전력으로 몬스터 무리 한복판에서 탈출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이들은 다름이 아닌 실종된 모험자 카라니보르의 파티였다.

후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홀로 저지하고 있는 페른이라는 별명을 지닌 다크엘프 전사 은골도칠은 완전히 광분상태에 빠진 회색 늑대를 베어버리며 투덜거렸다.



"내가 이래서 동굴에서 야영하지 말고 땅 파서 숨자고 했잖아!"


"이제와서 그렇게 한다고 결과가 바뀌겠냐! 몬스터나 죽여!"


"로스딜! 조심해!"


"고마워 시엔"



존의 두 여자친구인 엘프 로그 로스딜과 다크엘프 전사 오로드로시엔은 페른이 미쳐 막지 못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베어버렸으나 늑대 몇 마리가 그들을 지나쳤다.

늑대들의 목표는 중앙에 있던 궁수와 마법사였다.



엘프 마법사 다에벨레그는 광역 피해를 주는 얼음 폭풍 주문을 준비 중이었기에 만약 늑대들의 공격을 허용한다면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집중이 끊어질 위기였으나 다에벨레그의 동료이자 여자친구인 데네이엔은 즉각 전위 지원을 중단하고 남자친구에게 달려드는 늑대들을 정확하게 활로 쏴서 절명시켰다.



"아직 멀었어?!"


"보채지마 페른! 얼음 폭풍!"



페른이 자신의 방패를 물어뜯는 좀비를 털어내면서 외치자 다에벨레그는 수많은 짐승과 언데드가 몰려있던 자리를 향해 얼음 폭풍 주문을 시전하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대한 우박이 비처럼 쏟아지며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두터운 털가죽을 가진 짐승들조차 얼어붙고 우박에 맞아 쓰러질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구울과 좀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좋아 후방은 거의 정리됐어! 빨리 리더랑 존을 따라가자!"



파티 리더인 카라니보르와 금 랭크 모험자이자 파티의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존은 그야말로 괴력을 발휘해서 전방의 몬스터의 무리를 돌파하고 있었다.

사이클롭스를 혼자서 사냥할 수 있는 금 랭크 모험자인 존에게 늑대나 호랑이 구울, 좀비 정도는 거기서 거기인 잡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존의 목숨을 노리는 라르사 왕국군 잔당이 몰고 온 지금 이 몬스터 스탬피드의 숫자는 정상 범주를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읏!"


"카라니보르!"



게다가 이 제대로 숫자파악조차 할 수 없는 몬스터 군단 사이사이에 마법이 걸린 은신 로브를 입은 라르사 왕국군 잔당이 호시탐탐 그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호랑이와 곰을 한꺼번에 검으로 베어버리던 카라니보르는 갑자기 측면의 허공에서 은신 로브를 벗어버리고 튀어나온 복면을 쓴 라르사 왕국 암살자에게 덮쳐져 넘어졌다.

그러나 카라니보르는 혼신을 다해 시커먼 독이 뚝뚝 떨어지는 칼날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암살자와 힘 싸움을 하며 버텼다.


존은 자신의 허리춤의 벨트에서 투척용 단창을 잡아서 던졌고 카라니보르를 덮쳐서 힘싸움을 하고 있던 라르사 왕국 암살자는 등을 관통해 가슴을 뚫고 나온 단창을 보며 옆으로 넘어졌다.



"죽어라! 국왕 폐하의 원수!"



존의 시선이 카라니보르 쪽으로 쏠린 사이 뒤통수 쪽의 사각지대로부터 분노에 찬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존은 소리가 난 방향에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걸 느끼고 벌써 머리 위를 향해 창을 내지렀고 위에서 떨어져내리며 독 묻은 칼날을 휘두르려던 두번째 암살자는 위로 뻗은 창에 몸이 꿰뚫려 꼬챙이처럼 꿰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마치 이걸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방향에서 세번째 암살자가 튀어나왔다.

침묵 주문이라도 사용한 것인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암살자는 핏발 선 눈으로 존의 뒤통수를 노리고 빠르게 다가갔다.



"옆에 3명째!"



하지만 카라니보르는 세번째 암살자를 보자마자 급히 외쳤고 존은 즉시 창을 흔들어 창에 꿰뚫린 암살자를 마지막 암살자가 있는 방향으로 흔들어 털어냈다.

동료의 시체가 날아오자 암살자는 아마도 욕을 내뱉은 것 같았으나 침묵 주문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세번째 암살자가 동료의 시체를 피하느라 존에게 접근하지 못한 사이 존은 즉각 카라니보르에게 달려가 카라니보르를 일으켜세웠다.



"괜찮아? 카라니보르?!"


"난 괜찮아. 암살자 주의해! 셋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리더! 존! 무사해?"


"레그, 근처에 암살자가 숨어있어! 힘들겠지만 광역 탐지 좀 해줘!"



존이 카라니보르를 일으켰을 때 다른 파티원들이 가까스로 둘을 따라잡았고 세번째 암살자는 미련 없이 다시 마법이 걸린 위장 로브를 두르고 사라져버렸다.

마법사 다에벨레그는 리더인 카라니보르의 지시대로 광범위 탐색 주문을 시전했으나 암살자는 이미 범위 밖으로 도망친 것인지 아니면 탐지를 무효화 하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던 건지 감지되는 것은 그들에게 몰려드는 몬스터와 언데드들 뿐이었다.

카라니보르는 절명한 암살자 중 하나의 시체를 들처업고 말했다.



"일단 시체 하나를 가지고 가서 쓸만한 유류품이 없나 보자고"


"굳이?"


"다른 암살자에게 대응할만한 정보나 물품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암살자 2명을 죽였지만 아직 암살자가 더 남아있었고 게다가 그들이 불러모은 언데드와 약으로 광폭화시킨 몬스터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카라니보르는 죽은 암살자 시체를 들처업은 채 품속을 뒤졌고 그들이 며칠 전 자신들에게 뿌렸던 몬스터 유인용의 특수한 향기가 나는 가루를 담은 주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카라니보르는 시체에서 꺼낸 가루를 자신들을 쫒아온 주변의 언데드들에게 뿌려댔고, 가루를 전부 뿌려버린 카라니보르는 가루가 묻은 장갑과 암살자의 망토를 몬스터들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이걸로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거야. 튀자!"



카라니보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늑대와 호랑이가 눈이 뒤집혀서 카라니보르의 파티 대신 가루가 뿌려진 언데드들에게 달려들었다.

언데드들은 사령술사의 명령 때문인지 짐승들은 무시하고 어떻게든 카라니보르의 파티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짐승들이 다리를 물어뜯기 시작했기에 도저히 카라니보르의 파티를 따라갈 수 없었다.



##



사건은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 전, 카라니보르의 파티는 케일런 교단과의 화해를 위해 케일런 교단의 성서를 협상장소까지 운반하라는 의뢰를 가장한 명령을 받았다.

교단의 성서를 훔쳐온 원죄가 있었기에 카라니보르의 파티는 도저히 이 지명의뢰를 거부할 수 없었고 그렇게 아페닌 산맥 밑의 한적한 장소에서 오르갈 남작과 브루노 주교의 협상장소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 마주친 두 세력은 서로 으르렁댔다.

케일런 교단 입장에서는 성서를 훔쳐간 카라니보르의 파티는 찢어죽여도 시원찮은 것들이었고 케일런 교단의 폭로 활동으로 인해 딸을 잃은 오르갈 남작 입장에서는 케일런 교단은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단은 성서를 되찾아야하고, 오르갈 남작은 주군인 게누아 백작의 명령이 있었기에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협상에 임했다.


협상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을 때 판을 깨버린 것은 교단도, 남작도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협상장에 대량으로 정체모를 가루를 살포한 것이다.

오르갈 남작은 백전연마의 영웅답게 마법사들을 시켜 만들게 한 방호 주문이 담긴 마법아이템을 발동시켜 대응했으나 그 가루는 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몬스터나 짐승의 표적이 되도록 만드는 유인향을 개량해 만든, 유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광폭화시키는 광폭향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검은 복면의 사내들이 양치듯이 몰아온 몬스터들과 검은 복면 중 섞여있는 사령술사가 불러낸 언데드 무리가 몬스터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협상장소로 밀려들어 대혼란이 일어났다.


카라니보르의 파티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퇴로는 이미 언데드들에 의해 막혀버린 상태였기에 그들은 측면으로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측면이 열려있던 것 자체가 오르갈 남작의 부대와 케일런 교단으로부터 그들을 분단시키려는 검은 복면의 사내들의 계획이라는 걸 몰랐던 카라니보르의 파티는 암살자들과 몬스터들에 의해 점점 한쪽으로 몰리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아페닌 산맥의 깊은 곳으로 유인당했고 그들이 간신히 자신들이 유도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산맥 쪽으로 깊게 들어온 상태였다.



"으으으, 나 다리 물렸어."



그렇게 도망치다 동굴에서 야영하던 중 다시 습격을 당하는 바람에 암살자 2명을 죽이고 다시 탈출한 카라니보르의 파티는 이번에는 페른의 의견에 따라 땅을 파서 아예 땅 밑에 은신처를 만들었다.

페른은 아까 몬스터들을 막다가 정강이보호대와 무릎보호대 사이의 빈틈에 파고든 늑대의 이빨자국에 약을 바르며 투덜거렸다.

다행히 깊게 물리지 않아 자국이 남은 정도로 끝났으나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던 건 분명했다.



"그런데 존, 아까 그놈이 외쳤던 국왕폐하의 원수라는 건 대체 뭐야? 너 왕이라도 암살했냐?"


"..."



카라니보르는 간신히 진정이 되었는지 아까 암살자가 존에게 했던 말에 대해 물었고 존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카라니보르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만해 카라니보르. 모험자의 룰 잊었어? 과거는 안 묻는거"


"맞아, 이런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부터 생각해야지 뭘 그런 걸 따져"



로스딜과 오로드로시엔은 남자친구인 존을 옹호하며 카라니보르에게 타박을 줬으나 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더는 숨길 수도 없겠지. 어디서부터 듣고 싶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이번 사태의 원인에 대해 들려달라는 카라니보르의 요구에 존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일의 시작은 14년 전, 내가 아직 13살짜리 라르사 왕국의 기사학교의 학생이었던 때 시작되었어."



존은 은은한 빛을 내는 마석 램프를 바라보며 14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얼굴에는 고통과 증오가 서려있었고 그 모습에 카라니보르는 순간적으로 괜히 말을 꺼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4년 전, 난 라르사 왕국의 귀족인 아르튀르 가문의 장남으로서 라르사 왕국의 기사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그런데 하루는 선배들이 시킨 심부름을 위해 학교의 훈련장 뒷편 창고로 짐을 나르고 있었는데 창고 뒷편 담장 너머의 으슥한 곳에서 누군가 말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뭐, 혈기넘치는 10대 시절에는 그런 건 흔한 일이지.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말싸움을 하는 줄 알고 심심한데 싸움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담장 위로 머리를 내밀어 그 너머를 봤는데... 거기엔 압조프 왕의 아들 중 하나인 아르누멘 왕자가 외국에서 온 유학생을 칼로 찌르고 있었어."



시작부터 상당히 처참한 이야기에 카라니보르의 파티원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왕자가 그 유학생을 죽인 이유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 어쨌든 말다툼 끝에 왕자가 유학생을 칼로 찔러 죽여버렸고 그는 유학생을 찌른 자신의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유학생이 가지고 다니던 호신용 칼을 유학생의 상처에 몇 번 쑤시고는 유학생의 손에 쥐어놓고 도망쳤어. 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걸 처음봐서 얼어붙어있었는데 왕자는 아마 시체를 자살로 위장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내가 담장 위에서 보고 있다는 걸 몰랐었나봐."



존은 처참한 기억을 다시 되살리느라 고통스러운 건지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30살도 되지 않은 젊은이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암운이 드리운 그 얼굴은 어쩐지 지쳐버린 노인이 떠오르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당연히 왕족이 얽힌 살인사건이니 수사관들은 처음에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유학생이 칼로 자결했다고 수사를 종료시켰지만 피해자가 라르사 왕국 사람이 아니라 외국에서 유학 온 귀족 자제였기에 외국의 조사단이 합류한 뒤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나는 거기서 증인으로 나서서 증언을 했어. 거기다 자살 위장이 너무 허술했기에 증거가 한무더기로 쏟아져나왔고 아르누멘 왕자는 결국 내 증언과 왕자의 검에서 피해자의 피가 검출된 것이 결정타가 되어서 사죄의 의미로 발목의 힘줄을 끊는 형벌을 받게 되었지."


"발목 힘줄을? 왕족이 받는 형벌로서는 꽤 중형인데?"


"듣기로는 죽은 피해자의 가문이 라르사 왕국과 함께 하던 사업이 있는데 이제 와서 다 취소시키기에는 왕국 쪽 피해가 너무 막심해서 아르누멘 왕자에게 사죄를 시키는 선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아르누멘 왕자가 사죄 자리에서 압조프 왕과 피해를 입은 귀족 가문 원로 양쪽 모두에게 욕을 날렸다고 하더군."


"성깔 참..."



자기 아버지인 왕에게 대놓고 대들었으니 외국 귀족 앞에서 체면이 손상된 압조프 왕 입장에서 당연히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중형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아르누멘 왕자의 행패와는 별개로 라르사 왕은 너에게도 분노했겠군."


"그래, 압조프 왕은 자기 아들이 유죄를 받는 결정적인 증언을 한 나를 죽도록 미워했고 권력에 집착하던 쓰레기 같은 내 생물학적 애비 놈을 꼬드겨서 어느날 한밤 중에 나를 납치했지. 나는 왕궁 지하의 심문실로 끌려가서 압조프 왕이 보는 앞에서 아르누멘 왕자와 같은 고통을 맛보라며 다리의 뼈를 부러뜨리고 다리 전체를 불에 달군 꼬챙이와 인두로 지지는 고문을 받게 되었어. 그것 때문에 성장이 멈춰버려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하플링으로 오해받는 땅꼬마로 남게 되었지."



존이 바지를 걷어서 보여준 고문의 흔적들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14년이나 흘렀으나 일부 흉터들은 포션이나 마법으로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운이 좋게도 어느날 왕궁에서 소란이 일어났어. 내가 매일 같이 고문을 당하던 고문실 담당자가 고문을 하다가 국왕이랑 함께 급하게 나가느라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을 걸 확인하지도 못할 만큼 큰 소란이었는데 그 소란이 뭐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지하 감옥구역의 사형장 옆의 시체와 오물을 던져넣는 구멍을 통해 탈출해 이웃나라인 엘람 왕국으로 달아났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천운이었어."



존은 자신이 완전히 작살난 다리로 대체 어떻게 그 끔찍한 지하 감옥 구역을 탈출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계속 말했다.

혹시 존을 지켜보던 신이 라르사 왕국에게 심술을 부린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존의 의지가 기적을 만든 것이었을까?

이제 와서는 뭐가 진실이었는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압조프 왕은 죽었고 존은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이웃나라인 엘람 왕국에서 2년동안 존으로 이름을 바꾸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상처를 치료했는데 간신히 제대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덜컥 겁이 나더라고. 혹시나 압조프 왕이 내 입을 막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는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래서 엘람 왕국을 떠나 바이타트 왕국으로 넘어가 모험자로 활동했어. 그런데 정작 압조프 왕은 나를 아예 잊어버렸더라? 그렇게 죽도록 미워하고 고문했으면서 다시 날 봤을 때는 내가 누군지 전혀 감도 못 잡는 모습을 보니 맥이 탁 풀리더라고 정말 웃기지 않아?"


"잠깐만... 압조프 왕을 다시 봤다고? 어떻게?"



바이타트 왕국에서 모험자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압조프 왕과 다시 만났다는 말에 동료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였고 존은 동료들의 표정을 보고서야 자기가 설명을 너무 생략했다는 걸 깨닫고 설명을 추가하였다.



"난 우드힐 왕국과 그 연합군이 라르사 왕국을 무너뜨릴 때 연합군측에 종군했어. 엘람 왕국이 라르사 왕국을 배신하고 수도를 함락시킬 때 그들이 라르사 왕국 수도의 왕궁에 침투한 루트는 내가 왕궁 지하 고문실에서 탈출할 때 썼던 루트를 그대였고."



엘람 왕국이 라르사 왕국을 배신하고 연합군에 붙을 때 어떻게 라르사 왕국 수도를 그렇게 빨리 함락시킬 수 있었는지 카라니보르의 파티는 이제야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대륙 중부 왕국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그야말로 라르사 왕국 왕족들이 쌓은 업보 그 자체였던 것이다.



"라르사 왕국 수도가 맥없이 함락당한 건 내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이루어진 거야. 하지만 전부 라르사 놈들의 자업자득. 13년동안 그런 구멍을 막아놓지도 않고 그대로 쓰고 있었으니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말했겠지."


"..."


"그리고 압조프 왕이 팽형에 처해질 때 아르누멘 왕자랑 날 팔아넘긴 애비 놈도 같이 처형시켰으면 했는데 왕자는 감옥 안에서 옷을 찢어서 만든 끈으로 목을 매달아 자살했고 애비 놈은 왕국이 멸망할 때 분노한 영지 주민들에게 벌써 맞아죽었더라. 편하게 죽으면 안될 놈들이 너무 편하게 가버렸어."



존은 이제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압조프 왕을 처형해서 원한을 일부 해소했지만 그의 또 다른 원수들은 너무나도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고 존은 풀리지 않은 원한을 품은 채 바이타트 왕국으로 돌아가 어린 그린 드래곤을 토벌하고 금 랭크 모험자가 되었다.



"내가 바이타트 왕국에서 어린 그린 드래곤을 토벌하고 금 랭크 모험자가 되었을 때 라르사 왕국군 잔당 중 일부가 바이타트 왕국에 있었던 모양이야. 그놈은 바로 나머지 잔당에게 나에 대해 말했고 나에게 복수하겠다고 쫒아오기 시작했어. 그놈들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는 게 거북해서 바이타트 왕국을 떠나 이 사비니 왕국까지 온 건데"


"라르사 왕국군 잔당의 집착이 상상을 초월했군."


"그래, 그런데 그놈들이 엘람 왕국과 우드힐 왕국에게 복수하지 않고 나에게 달려드는 이유가 뭔지 알아?"


"수도를 함락시킨 핵심 정보제공자라?"


"아니, 그놈들은 연합군의 맹주인 우드힐 왕국이나 라르사를 배신한 엘람 왕국에게 복수할 여력은 없으니 그나마 만만한 나를 죽이려는 거야. 바이타트 왕국에서 나를 습격한 잔당을 심문했을 때 그렇게 말하더라."



상상을 초월하는 이유에 카라니보르 파티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거만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조차 무리가 있는 라르사 왕국군 잔당은 옹졸하다기보다는 반쯤 미쳐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고 느껴졌다.



"라르사 왕국인 중 많은 자들이 어딘가 심성이 비뚤어져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과장한 거 아냐?"



카라니보르는 도저히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며 존에게 말했으나 존은 그런 카라니보르의 반응을 보며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초에 왕족들부터 내가 하는 건 살인이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미친 것들이었는데 그런 왕족들에게 빌붙는 간신배들이 제정신이겠어? 나는 그나마 라르사 왕국에서 살아온 세월보다 다른 나라에서 살던 세월이 길어서 라르사 물이 빠져 제정신으로 돌아온 거고."


"그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네."


"어랍쇼?"



그때 갑자기 페른이 입을 열었고 다른 파티원들은 다 함께 페른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뭔가 진동 느껴지지 않았어?"


"진동?"


"그래, 마치 지진 전조 증상마냥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땅이 흔들린 것 같.... 으아아아아!!"



페른은 눈을 껌뻑거리더니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를 내려다보았고 그 순간 갑자기 바닥이 푹 꺼지면서 페른이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하였다.



"아으윽! 내 다리!"



다행히 구멍이 그리 깊지는 않았는지 페른의 모습이 사라진지 채 1초도 되지 않아서 땅바닥에 페른이 처박히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고 파티원들은 급히 바닥에 난 구멍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외쳤다.



"페른! 무사해?"


"이게 무사한 걸로 보여?! 다리 뼈 박살나거나 금이 간거 같다고!"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거 같네"


"썅! 암살자한테 노려지는 판에 다리가 이렇게 되었는데 뭐가 다행이야!"



페른은 고래고래 욕을 내질렀고 동료들은 그래도 욕할 기운은 있는거보니 다리 말고 다른 곳은 멀쩡한 거 같다며 구멍에 밧줄을 내려 밑으로 내려갔다.

페른이 떨어진 곳은 텅 빈 돌로 된 공간이었고 파티원들은 마석 램프를 비춰보자 그곳이 단순한 종유 동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뭐야 여기? 자연 동굴이 아니라 사람이 돌을 깎은 흔적이잖아."


"저기 벽에 불빛 좀 비춰봐! 뭔가 있어!"


"이건 기둥이네? 확실히 자연동굴은 아니야."


"씨빠아아알! 지금 기둥 같은데 문제냐! 나 다리 부러졌다고!"


"그만 좀 징징거려 페른. 모험자 같은 험한 업종에서 다리 부러지는거 엄청 흔하다고."



마법사 다에벨레그가 페른의 상처를 살피는 동안 다른 파티원들은 이 정체불명의 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안쪽으로 더 들어간 엘프 로그 로스딜이 마침내 뭔가를 찾아냈다.



"이건 뭐지? 다들 이리와봐!"



로스딜은 벽 끝에 적혀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를 보고 파티원들을 불렀다.

그 문자는 고대 엘프어는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고대 엘프어였다고 해도 의무교육 기간을 제외하고 고고학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그들이 제대로 해독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결국 페른을 치료하느라 합류가 늦은 마법사 다에벨레그가 오고서야 그 문자의 정체가 판명되었다.



"이건 대륙 중부에서 사용되던 고대 드워프어야. 그런데 이 문자가 왜 이런 곳에?"


"고대 드워프어? 해독할 수 있어?"


"잠깐만 기다려봐. 용들을 위한... 노란 은? 노란 은이 뭐지? 아니 잠깐만 이건 황금을 의미하는 어휘잖아. 드워프 놈들 왜 이렇게 금을 의미하는 단어가 많은 건지 원..."


"그래서 무슨 의미인데?"



다에벨레그는 투덜거리면서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한참동안 글귀 앞에서 사전을 뒤적거리고 양피지에 글을 써가며 해독을 하였다.

결국 1시간도 넘게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는 제대로 해독을 하여 동료들에게 글귀를 해석해 말해줬다.



"내가 제대로 해석을 한 것이 맞다면 이 글은 '용들을 위한 황금 한무더기, 신들을 위한 암브로시아 한접시, 그리고 드워프를 위한 크바스 한모금으로 만들었노라.' 라는 의미야."


"뭐를?"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 뭔가 더 적혀있었던 거 같은데 세월이 지나서 훼손이 된 것 같..."



다에벨레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대 드워프어가 적혀있던 벽이 굉음을 내며 밑으로 내려갔고 그 너머로 불 꺼진 통로가 아가리를 벌렸다.

카라니보르와 그 동료들은 잠깐 서로를 바라보았고 모두가 지금 눈앞에 놓여있는 저 통로가 뭘 의미하는지 깨달았다는 걸 직감했다.


그들은 고대 드워프 유적의 첫 발견자가 되었고 어쩌면 막대한 부를 거머쥘 기회가 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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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칭 밑의 피와 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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