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성칭 밑의 피와 재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23.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3.08.13 23:55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1,888
추천수 :
127
글자수 :
805,772

작성
23.07.14 20:00
조회
15
추천
1
글자
24쪽

76화

DUMMY

태양절이 지나가고 새해가 시작되었다.

타티아 시의 거리는 아침부터 새로운 한해를 기념하는 들뜬 기분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침부터 일찍 선착장과 시장에 나온 상인들은 재물의 신에게 간단한 기도를 올리고 일터로 나갔고 모험자들은 제각기 믿는 신들에게 올해는 대박이 나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였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여기, 아침부터 모험자 길드 1층 로비의 게시판도 보지 않고 휴식용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않아있는 이 엘프 남성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이 엘프 남성의 이름은 프룬, 라르사 왕국의 군인이었으나 상관에게 입 바른 소리를 했다가 퇴직금도 못 챙기고 전시 명령불복종을 명분으로 불명예제대를 하게 된 현직 모험자였다.

프룬은 자기 수통에 담아놓은 술을 한껏 들이키고는 억울하다는 듯이 로비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포효했다.



"대체 왜 아무도 나와 파티를 안해주는 겁니까! 내가! 뭘! 잘못! 했다고!"



그러나 모험자들은 냉정했다.

프룬에게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몇 명 뿐이었고 대부분은 옆에서 개가 짖나 하는 얼굴로 게시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저 엘프 뭐야? 왜 소리를 질러?"


"소문 못 들었어? 저 엘프 지난 달에 어떤 늑대 수인이랑 눈 마주쳤다고 베어버린 엘프잖아"


"아, 늑대 혐오자(울프 헤이터; Wolf Hater) 프룬?"



프룬은 지난달 12월에 처음 이 타티아 모험자 길드에 왔을 때 카싯 왕국 출신 늑대 수인과의 뜻하지 않은 충돌로 상대를 죽여버렸다.

물론 늑대 수인 쪽이 먼저 공격을 했기에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약간의 훈계 및 조서 작성, 경비대에서 훈방 조치되어 풀려났으나 원래 소문이라는 것이 늘 사실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바람을 타고 처음 전해진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살이 덧붙여지고 색깔이 입혀져 소문으로 바뀐 채 전해지다보면 원래의 형태와 색채를 잃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 타티아 모험자들 사이에 퍼진 것은 모험자끼리의 다툼에서 엘프가 늑대 수인을 정당방위로 죽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계속해서 왜곡과 변형을 거듭한 끝에 대륙 중부의 전쟁터에서 카싯 왕국의 수인들을 베어넘기다 피바다 속에서 그만 자기자신을 잃어버리고 늑대 수인을 혐오하는 살인광이 된 군인 출신의 엘프 모험자가 타티아에 왔다는 소문으로 변질되었다.


이런 꺼림칙한 소문을 가진 모험자와 파티를 짜려는 모험자는 당연히 없었고 프룬은 타티아 모험자 길드에 등록하고 쭉 솔로 모험자로 활동해야 했다.



"이봐 거기! 소란 일으킬 거면 나가서 해!"



길드 로비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모험자를 제압하는 역할을 하는 레아가 프룬에게 소리쳤지만 프룬은 서럽다는 듯이 항변했다.



"저는 억울합니다!"


"모험자의 삶에서 다른 지역에 도착해서 등록하기도 전에 유명해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야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옛 말에도 있잖아 [악명도 결국 명성이다] 라고..."


"크아아아아악!"



레아는 능글맞게 넘어가려고 시도했지만 안타깝게도 저런 사탕발림에 넘어가기에는 프룬이 너무 똑똑했다.

프룬은 기분 나쁜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하면서 발작했고 레아는 한걸음 물러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이 실력만 좋은 신참 모험자를 어떻게 케어해야 하나 고민해봤지만 지금 타티아 시 전체에 무차별적으로 퍼져나간 프룬의 악명을 해소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실력에 비해 정신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군."



그때 반대편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빈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휙 돌린 프룬과 레아는 새벽 의뢰 끝마치고 돌아와서 쉬고 있는 인간 남성 모험자 샤반을 발견하였고 샤반은 피곤한 기색이 보이는 눈으로 프룬에게 말했다.



"그렇게 징징 댈 시간에 의뢰 하나라도 더 해서 돈을 벌어놓는 편이 좋을 거다 라르사인. 결국 악명이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솔로 활동에 익숙해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거든."


"그때는 고마웠습니다."



프룬은 화를 내려다 꼼짝없이 살인마로 몰리기 직전에 샤반이 자신을 변호해줘서 그나마 정당방위가 입증되어 풀려난 걸 기억해내고 인사하였다.

샤반은 알아들었으면 됐다는 표정으로 수통에서 물을 마시고는 길드 건물을 나서려고 하였고 레아는 떠나는 샤반에게 말했다.



"얌마 샤반 지금 니가 남 걱정할 때냐? 니 실력에 맞는 랭크인 은 등급으로 올라가고 싶으면 제대로 된 파티 좀 구해."


"흥!"



샤반은 레아의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떠났다.

저 모난 성격 때문에 진작 은 등급이 되었어야 했던 녀석이 동 등급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샤반은 타티아에 퍼져있는 자신의 악명을 해소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레아는 샤반이 떠나가는 걸 지켜보다가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는 듯이 프룬에게 말했다.



"여차하면 저놈이랑 파티해보는 게 어때? 성격이 지랄맞아서 꽤 오랫동안 솔로 활동을 했지만 실력만큼은 은 등급에 어울리는 녀석인데"



레아의 권유에 프룬은 자길 도와준 은인이기도 하고 실력도 꽤 괜찮은 샤반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샤반을 쫒아갔다.

길드의 골칫거리 2명을 로비에서 내보내고 다시 일상 업무로 복귀하려던 레아는 저 멀리 반대편 테이블에서 일어난 소란을 감지하였다.



"데이모스, 넌 우리 파티에서 추방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추방이라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니 녀석 때문에 우리 파티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아니 미친 놈들아! 내가 파티 리더인데 추방이라니! 데이모스 없는 데이모스 파티를 만들 생각이냐!"


"오늘부터 이 파티는 라비린스 트레블러로 이름을 바꿀 거야!"



간신히 파티 하나를 만들었더니 다른 파티에서 파티원을 추방하려는 걸 본 레아는 혹시 모험자 파티원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이론을 증명할 수단도 의지도 없었기에 무시했다.

니키치나는 데이모스라는 모험자의 파티원들이 데이모스를 파티에서 빼겠다고 통보하는 걸 듣고 순순히 그들의 강철로 된 모험자 플레이트에 기록된 파티원 명단에서 데이모스를 빼버렸다.

데이모스는 그 모습을 보고 발끈해서 검을 뽑으려다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레아를 발견하고는 검에서 손을 떼버렸고 잠시 후 파티 상세정보 수정이 끝난 옛 파티원들이 우르르 나가버리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뒷걸음질쳤다.



"이, 이럴 수가... 내가 저 잡것들을 추방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가 추방당하다니... 내가! 추방당하다니!"



데이모스는 파티 리더인데도 불구하고 다수결에 의해 파티에서 추방된 충격이 상당했던 건지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주르륵 흘러내리듯 앉아버렸다.



"니키 언니, 이건 또 무슨 소란이야?"


"데이모스라는 모험자의 파티인데 다른 파티원들 수준은 생각 안하고 무조건 고난이도 층으로 파티원들을 끌고가는 버릇이 있었나봐. 그래놓고 다른 파티원들이 자기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윽박지르는 버릇이 있어서 결국 버려진거지."


"은 등급 중에서 데이모스라는 이름은 들은 적이 없는데?"


"데이모스는 동 등급이고 나머지 파티원들은 강철 등급이거든."


"실력은?"


"가비의 평가에 의하면 동급에서 중하위권이야. 잠재력도 그저그렇다고 평가되는 평범한 모험자야."



일단 대륙 서부나 남부나 상급 모험자로 인정되는 건 은 등급, 실버 랭크부터다.

은 등급이 저런 일을 당했다면 다른 파티에서 잽싸게 조건을 달아서 영입하겠지만 간신히 동 등급에 올라가놓고 강철 등급 모험자에게 갑질을 하다가 역으로 추방당하는 머저리를 파티에 받아주는 건 파티 구성이 급한 자들이거나 정보에 어두운 이들 밖에 없을 것이다.



"난 또 샤반 정도로 실력이 있는 놈이라 저러나 싶었네."



레아는 데이모스에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건지 다른 곳을 보기 시작했고 데이모스는 마치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꼭두각시 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모험자 길드를 나갔다.

다행히 오전의 소동은 이걸로 끝이었다.

그 뒤로는 쭉 시끌벅적하기는 해도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고 레아는 마음 편히 근무를 서던 중, 갑자기 길드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걸 들었다.

잠시 후, 길드 정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그 너머에서 9명의 다크엘프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뭐야 새꺄? 끼어들기를 할 거라면 실수를 한..."



다크엘프들은 줄 서 있는 모험자들을 무시하고 접수처로 곧바로 왔고 다른 모험자들이 화를 내며 뭐라고 하려는 순간 다크엘프들은 품속에서 모험자 길드 직원 증명패와 서신을 꺼내며 말했다.



"길드 중앙회에서 파견된 신입 직원들입니다. 교육을 담당하시는 선배님은 어느 분이신가요?"



새치기를 하려는 모험자가 아니라 모험자 길드의 신입 직원이라는 말에 화를 내려던 모험자들은 말과 행동을 멈추고 관망하는 태도로 전환했다.

니키치나는 자신이 담당자라며 다크엘프들을 안쪽으로 데려갔고 레아는 급히 자신이 니키치나의 자리를 맡아 일처리를 하기 시작하였다.



##



갑작스러운 마스터 로드리고의 호출에 길드마스터 집무실로 향한 파우스는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처음보는 얼굴들을 보고 대충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어서오게 파우스 부길드장. 여기는 전에 말했던 대로 프리지야와 타티아의 인력 보충을 위해 길드중앙회에서 보내준 신입들일세."



다크엘프들은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중 8명의 소개가 끝나자 마스터 로드리고는 이들이 만성적인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프리지야의 필립 밑으로 배속될 것이라고 말했고 그제야 남아있는 마지막 한 명의 다크엘프가 자기소개를 하였다.



"테네브라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있던 곳에서는 테네나 테네브라고 불렸습니다."


"이 친구는 우리 타티아 길드에서 일하게 될 걸세."


"만나서 반갑다. 나는 타티아 모험자 길드의 부길드장 파우스라고 한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마지막 다크엘프까지 소개가 끝나자 파우스는 자기소개를 하고 모두와 돌아가며 악수를 하였다.

로드리고는 9명의 신입 직원들을 안내해준 니키치나에게 다들 1층으로 데려가서 인사를 시키라고 해서 내보내고는 파우스와 함께 이번 일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그 마스터 멜린과 대립하는 파벌의 다크엘프 직원들입니까?"


"슬쩍 확인해봤는데 아무래도 작년에 우리에게 전달된 정보는 왜곡이 가해졌던 것 같네."



파우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로드리고를 바라보았고 로드리고는 물담뱃대를 주섬주섬 꺼내서 세팅하며 말했다.



"아까 신입들에게 슬쩍 떠봤는데 몇 명은 되려 자기들이 아퀼레이아로 배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추운 북부로 와서 놀랐다고 하더군."



파우스와 로드리고가 작년에 들은 정보는 아퀼레이아로 가는 걸 거부한 다크엘프 직원들이 게누아로 갈 수 없으면 차라리 북부나 동부로 보내달라고 해서 타티아로 배속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정작 타티아에 도착한 신입 중 일부는 자신들이 아퀼레이아에 배속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북부로 배정되서 놀랐다고 한다면 그들이 들은 이야기 중 일부는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신입 중에 그 말을 듣고 잠깐동안이지만 안색이 변한 인원이 있었네."


"누구입니까?"


"타티아에서 일하기로 한 테네브라이일세."



로드리고의 말을 들은 파우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을 조합해 추리를 시작했지만 아직 확실한 정보라는 것이 없는 상황이라 섣부른 판단을 내릴 때가 아니었다.



"테네브라이만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알고 있고 나머지는 모르고 있는 게 아닙니까? 지금보니 다들 어린 다크엘프였습니다."


"어쩌면 다크엘프가 아퀼레이아 지부에 배속되는 걸 꺼린 아퀼레이아 지부의 공작일 수도 있지."



마스터 베르너와 그 휘하 심복들이 처형되거나 감옥에 처박히긴 했어도 아직 아퀼레이아 지부의 직원들은 엘프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길드 중앙회에서 인간이나 수인 직원을 채워넣어 비율을 높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지 출신 직원들의 업무 숙련도를 따라잡으려면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라 아직도 실권은 아퀼레이아 지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엘프 직원들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그렇기에 마스터 로드리고의 말대로 인간과 수인 직원들이 배속되서 안그래도 엘프들의 영향력이 깎여나가는 상황에서 다크엘프들까지 직원으로 배속되면 인종갈등으로 인한 사건이 터질 것을 우려한 아퀼레이아 지부에서 손을 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이걸로 프리지야의 인력부족이라는 골칫거리가 해결되었으니 우리로서는 손해볼 게 없네."



로드리고는 어찌됐든 프리지야 개발 이후로 늘 부족했던 직원숫자를 다시 채워놨으니 나쁜 일은 아니라고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말하다가 물담배의 향에 불을 붙이던 중 지금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참, 장인길드에서 연락이 왔네. 쌍둥이 여신 교단의 예배당과 숙소 내장작업을 거의 끝마쳤다고 하더군. 아마 일주일 내로 공사가 끝날 것 같으니 잔금을 지불해달라고 하던데 가까운 시일 내에 가서 한번 봐주게. 혹시 날림 공사를 했을 가능성도 있으니 철저하게 확인하게나!"


"알겠습니다 길드마스터."



예배당과 숙소를 만드는데 겨우 1년 밖에 안 걸린 공사 기간 때문인지 아니면 흠을 잡아서 가격을 후려칠 생각인지 로드리고는 파우스에게 철저하게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고 파우스는 간단하게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시간은 아직 제9주간시(오후 3시), 지금부터 공사현장을 보러가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파우스는 길드마스터 집무실에서 나와 곧장 1층으로 향했고 방금 막 자기소개를 끝낸 길드 직원들과 신입 길드 직원들이 흩어져 제각기 자신들의 업무로 복귀하는 걸 목격했다.



"당신 어디가?"


"쌍둥이 여신 교단 예배당이 거의 다 지어졌다고 한다. 잔금 지불하기 전에 혹시 날림공사를 하지 않았나 확인하러 갈 생각이다."



그때 막 로비로 나오려던 레아는 파우스가 계단을 내려오는 걸 보고 물었고 파우스는 자신의 용건을 확실하게 설명하였다.



"그래? 메건 말에 의하면 오늘 사예스 주교가 비번이라는데 데리고 가."


"그럼 애들은 누가 돌보지?"


"어... 글쎄? 애들만 집에 남겨두면 안되니까 데려가야하지 않을까? 아니면 오늘 말고 다른 날 잡아서 공사현장 확인해야 할 거 같은데"



레아는 애들 문제는 생각을 못했다면서 그럼 차라리 다른 날에 보러가라고 말했지만 파우스는 가끔씩은 애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건지 잠깐 생각하다가 애들 문제는 걱정말라고 하고 길드를 나섰다.



"그렇게해서 쌍둥이 여신들께서는 파디탄 왕국의 왕족들을 구원하고 교단 본부를 수도에 세우게 되었답니다."


"어? 아빠다"


"빠빠!"



레브메 저택에 돌아와보니 사예스 주교는 넓은 1층 로비에서 아이들에게 쌍둥이 여신 교단이 세워진 신화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사예스 주교의 이야기가 지루했던 건지 아이들은 정문을 열고 들어온 아빠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왔다.

물론 아직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이데스는 자기를 내버려두고 가버린 누나들을 분하다는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일찍 퇴근하셨군요. 어쩐 일인가요?"


"방금 장인길드에서 예배당과 숙소가 일주일 내로 완공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는데 확인하러 갈 건가 사예스 주교?"


"최소 2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완공되었군요. 그런데 애들은 어떻게 할까요?"



사예스 주교는 당연하게도 아이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했고 파우스는 말 없이 창고로 들어가더니 작은 안락의자를 꺼내왔다.

파우스는 그걸 들고 옆마당 대장간으로 향했고 대략 20분 뒤에 4개의 바퀴가 달려있고, 앉는 부분이 네모난 금속틀에 막히고, 뒷쪽에 손잡이를 달아놓은 안락의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게 뭐죠?"


"유모차"


"유모의 차? 유모가 끄는 마차라는 뜻입니까?"



사예스 주교는 처음보는 물건의 형상과 이름만 듣고도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챘고 파우스는 유모차에 푹신푹신한 이불과 쿠션을 넣고 제일 먼저 아들 아이데스를 집어넣었다.

유모차를 만드는 재료가 된 안락의자가 워낙 커서 그런지 아이데스가 누워있는데도 공간이 남았고 파우스는 그곳에 둘째 딸 루스티를 앉혔다.


루스티는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용접된 금속사각 판때기 위로 고개를 내밀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금속판 위에 미리 이불을 올려놔서 루스티가 날카로운 모서리에 베이고 상처입는 일은 없었다.


사예스 주교는 외출준비를 하자고 헤르를 데리고 드레스룸으로 향했고 잠시 후 헤르는 앙증맞은 노란색의 두툼하게 솜이 들어간 겨울옷과 갈색 구두를 착용하고 나왔다.

헤르는 아직 대인공포증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하는 외출이라 그런지 들뜬 마음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며 용기를 충전했다.

헤르의 호랑이 꼬리가 쉴새 없이 움직이다가 저택의 정원을 지나 정문을 나서자 쭈뼛하고 서더니 이내 꼬리가 허리를 감쌌다.

헤르가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은 파우스는 유모차는 사예스 주교에게 끌게 하고 헤르를 안아올렸고 헤르는 파우스의 품에 얼굴을 붙이고 부비부비하였다.


거리는 이제 제10주간시가 되었지만 여전히 쌀쌀했고 시 변두리의 예배당으로 가던 파우스는 거리를 지나던 중 의외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안드레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요?"


"당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건 다름이 아니라 모험자이자 코우로스 백작가 도련님인 안드레스와 그 애인인 미에스 자작가 영애 레오노르였다.

최근 길드에서 안보인다 싶더니 최근 가문 직속 상단 경영 수업의 일환으로 타티아에 온 미에스 자작가 영애랑 연애하느라 바빠서 그랬던 모양이다.

파우스는 지금 딱히 아는 척해봤자 시간낭비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는데 저 멀리 길가의 코너 쪽에서 안드레스와 레오노르를 지켜보는 3쌍의 눈동자를 찾아냈다.


안드레스의 파티원들인 미아, 테닐, 볼테르였다.

그들은 파우스와 눈이 마주치자 안드레스에게 말하지 말라는 손짓 발짓을 하면서 신호를 보냈고 파우스는 뭐라고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가던 길로 갔다.



"생각보다 멀쩡하군요."



파우스와 사예스 주교는 사소한 헤프닝을 지나쳐 결국 시 변두리의 공사현장에 도착했다.

이전에 있던 낡고 초라한 건물을 개조한 예배당과 달리 이번에 새로 지어진 예배당은 장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대로 예배당이라는 느낌이 나는 건물이었다.

새로 지어진 예배당의 정문은 쌍둥이 여신 교단의 상징인 반쯤 겹친 해와 달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고 예배당 본당은 각진 지붕 중앙에 종을 놓을 수 있는 첨탑이 달려 있었다.

숙소 역시 이전의 낡은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2층으로 구성된 길게 뻗은 연립주택 형태로 지어졌다.

한창 인부들을 윽박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예배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안에 보이는 건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엉? 이게 누구야? 모험자 길드 부길드장 형씨 아냐?"



안에서 인부들에게 호통을 치며 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건 다름이 아니라 레브메 저택 유령 소동 당시 함께했던 장인 길드의 십장 마이요빈 그라펠이었다.

파우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마이요빈은 반갑다는 얼굴로 다가와 악수를 청했고 파우스는 옆에 헤르를 내려놓고 마이요빈의 악수를 받아주며 말했다.



"큰 소리가 들리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니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고 이 멍청이들이 벌써 다 깔아놓고 모르타르 마르는 것만 기다리면 되는 석재를 깨먹을 뻔해서 야단 좀 치고 있었지."



마이요빈은 끌끌끌 혀를 차면서 인부들을 노려봤고 인간과 드워프, 수인으로 구성된 인부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형님. 실수 한번 한거가지고 2시간동안이나 설교하는 건 좀..."


"시끄러! 이제 납기일이 일주일 밖에 안남았는데 추가 작업할 껀덕지를 만들 뻔한 놈이 말이 많아!"



마이요빈은 변명을 하려던 드워프 일꾼에게 호통을 치며 다시 설교를 시작했고 그동안 사예스 주교는 예배당 안을 구석구석 확인하였다.



"그런데 저 손수레는 또 뭐야?"



그래도 손님 앞이라고 적당히 설교하는 걸 마무리하고 뒤를 돌아본 마이요빈은 파우스와 사예스 주교가 끌고다니는 유모차를 보고 저게 무슨 물건인가 하는 얼굴로 다가갔다.



"꺄꺄꺄!"


"어린애?"



유모차 안의 루스티가 철판 위로 고개를 내밀어서 저 멀리 있는 마이요빈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마이요빈은 어린아이가 타고 있다는 것에 살짝 의외라고 생각한 건지 유모차를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흠, 그렇군. 의자에 튼튼한 바퀴를 달아놓고 앉는 부분에는 철판으로 감싸서 아이들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대비한 건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이들을 밖에 데리고 다니기 위한 도구라... 발상이 나쁘지 않아."



드워프 특유의 장인기질이 발동한 것인지 마이요빈은 유모차를 보고 작업용으로 배치해놓은 설계도를 올려놓는 테이블로 가서 설계도를 뒤집어 뒷면에 유모차를 정신없이 스케치하고는 그 옆에 자신이 생각한 최적화된 유모차 형상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예배당 확인을 끝낸 파우스와 사예스 주교가 유모차를 끌고 돌아오자 마이요빈은 자신이 그린 유모차 설계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걸 보고 팍 하고 떠올랐는데 이거 부길드장 형씨 작품인가?"


"만든 건 제가 만들었지만 발상은 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파우스의 말에 마이요빈은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내가 이걸 만들어서 아이가 있는 가족들한테 판매하고 싶은데 로열티는 얼마면 될까 부길드장 형씨."


"그럼 이 정도로"


"너무 저렴한거 아냐? 이 돈으로는 슬럼가에서 파는 쥐고기도 못 사먹는다고"


"발상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차하면 마음대로 만들어도 상관없습니다."



파우스가 유모차 1대씩 팔 때 지급할 로열티로 제시한 금액은 그야말로 애들 군것질거리에도 못 쓸 상징적인 계약금에 불과한 푼돈이었고 마이요빈은 진짜 괜찮냐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파우스는 계속 괜찮다고 사양했다.

파우스가 마이요빈과 이것저것 계약서를 쓰고 있는 동안 사예스 주교는 헤르와 아이들을 데리고 숙소를 살펴보았고 사예스 주교가 숙소에 별 다른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예배당으로 돌아오자 파우스는 손에 계약서 여러 장을 들고 하나씩 말아서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숙소는?"


"아직 복도 쪽 작업이 덜 끝났는데 3일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사예스 주교는 나름 만족한다는 얼굴로 말했고 파우스는 마이요빈에게 그럼 가보겠다고 말하고 예배당을 나왔다.



"예배당과 숙소도 1년 만에 완공되는데 벌써 1년 넘게 지속된 대륙 중부 왕국전쟁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군요."



사예스 주교는 자신이 타티아에 온지 벌써 1년이나 되었다고 말하면서 같은 시기에 발발한 쌍둥이 여신 교단 본부가 있는 파디탄 왕국이 휘말린 대륙 중부의 왕국전쟁을 떠올렸다.



"결국 엘프, 인간, 드워프, 수인 같은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서야 전쟁이 없어지겠지."


"아뇨, 필멸자들이 사라져도 불멸자들 사이의 다툼은 끝나지 않을 테니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파우스의 말에 사예스 주교는 필멸자들만이 아니라 불멸자들 사이의 다툼에 대해 말했고 파우스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그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심각한 분위기의 어른들과 달리 오랜만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도 크게 무서운 기분이 들지 않은 헤르는 자신의 대인공포증이 치료되고 있다는 것이 기쁜 얼굴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즐거운 루스티는 계속 꺄꺄 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아이데스는 옆에서 계속 웃고 있는 누나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다가 눈을 감고 잠들어버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성칭 밑의 피와 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0 100화 23.08.13 32 3 17쪽
99 99화 23.07.24 15 1 16쪽
98 98화 23.07.23 16 1 18쪽
97 97화 23.07.22 15 1 23쪽
96 96화 23.07.21 19 1 20쪽
95 95화 23.07.20 17 1 15쪽
94 94화 23.07.20 17 1 21쪽
93 93화 23.07.19 16 1 22쪽
92 92화 23.07.19 12 1 14쪽
91 91화 23.07.19 13 1 20쪽
90 90화 23.07.18 11 2 16쪽
89 89화 23.07.18 14 1 17쪽
88 88화 23.07.18 13 1 19쪽
87 87화 23.07.17 10 1 19쪽
86 86화 23.07.17 12 1 14쪽
85 85화 23.07.17 12 2 15쪽
84 84화 23.07.16 19 1 17쪽
83 83화 23.07.16 14 1 14쪽
82 82화 +1 23.07.16 18 1 14쪽
81 81화 23.07.16 12 1 15쪽
80 80화 23.07.16 11 1 19쪽
79 79화 23.07.15 15 1 20쪽
78 78화 23.07.15 15 1 15쪽
77 77화 23.07.15 13 1 16쪽
» 76화 23.07.14 16 1 24쪽
75 75화 23.07.14 16 1 11쪽
74 74화 23.07.14 15 1 21쪽
73 73화 23.07.14 13 1 16쪽
72 72화 23.07.14 14 1 28쪽
71 71화 23.07.13 14 1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