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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성칭 밑의 피와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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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23.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3.08.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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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4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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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

72화

DUMMY

레브메 저택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아이데스는 이상한 아이라고 말할 것이다.

얼굴과 눈은 아버지를 닮고, 아주 조금씩 엄마를 닮은 붉은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는 이 아이는 뭔가 이상했다.

처음 태어날 날 울음을 터트린 이후로 단 한번도 울지 않았던 것이다.

덕택에 아이가 언제 배가 고프고, 언제 대소변을 싸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레아와 쌍둥이 교단 수녀들은 늘 아이 옆에 누군가 한명이 붙어있어야 했다.


그냥 무식하게 튼튼해서 울지 않는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데스는 그런 사례와는 달리 평범한 아이였다.

한번은 기저귀에 대변을 지리고도 한참동안 울지 않아서 엉덩이 부근에 물집이 생겼고, 또 어떤 때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레아의 진주 귀걸이를 삼키고 목에 걸렸는데 울지를 않아서 큰일이 날 뻔하기도 했다.


레아와 쌍둥이 교단 수녀들은 혹시 아이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체질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 말을 들은 파우스가 아기의 팔을 가볍게 꼬집자 아이가 고통을 느낀 건지 인상을 쓰면서 다른 손으로 아빠의 손을 후려친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혹시 눈물샘이나 성대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 검사해봤지만 하품할 때는 눈물이 나오고 아빠가 성대 쪽 검사를 해본다고 입에 검사장비를 들이밀자 대놓고 불만이 가득한 꺄꺄꺄 거리는 싫은 소리를 내는 걸 보니 성대도 멀쩡한 것 같다.


아이데스는 한살 많은 누나인 루스티가 자기 귀를 쭉쭉 빨아대는 걸 귀찮아하면서도 싫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루스티가 종종 자기 머리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갈 때면 팔과 다리로 넘어진 누나의 등을 때리거나 아니면 불만 가득한 꺅꺅거리는 목소리를 내서 근처에 있을 엄마나 큰누나 헤르를 부르고는 했다.



"요즘 애들은 발육과 성장이 빠르다더니 다 이런건가?"


"절대 아니에요 레아 언니! 옆에 있는 루스티를 보세요! 루스티 같이 행동하는 게 정상이라고요!"



무통증도 아니고, 또 표현을 해야 할 때는 표현을 하는데 대체 왜 울지 않는 건가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은 아빠인 파우스 하나였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상식과 이해 너머에 있는 아이데스를 약간의 두려움 섞인 눈으로 보고는 했다.

그래도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한다고 레아는 그런 이질적인 아이라도 사랑했다.


다만 레브메 저택 주민들 중에서 사예스 주교만은 아이데스에 대한 태도가 약간 달랐다.

파우스나 레아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쌍둥이 여신 교단의 수녀들처럼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를 보는 눈도 아니다.

사예스 주교는 아이데스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래도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는 아이데스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수녀들이 많아졌고 아이가 태어나고 2주 정도 지난 시점에서는 무서워하는 수녀가 반, 그냥 신경쓰지 않자고 생각하는 수녀가 반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 화창한 9월 말의 어느날, 파우스는 길드마스터 로드리고의 급한 호출을 받고 모험자 길드로 갔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타티아? 왜 하필 타티아입니까?"



그랜드마스터 베르너가 채터박스를 통해 전해온 소식은 다름이 아니라 대륙 서부 모험자 길드 연합이 랭크제 도입에 필요한 위조 방지 기술이 적용된 모험자 신분 증명 플레이트 제조가 가능한 기술자와 샘플들을 보내고 추가 협상을 할 곳으로 타티아를 지목했다는 이야기였다.

로드리고는 꽤 귀찮게 되었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하였다.



"나도 의아해했는데 저쪽에서 설명하는 걸 들어보니 납득이 되더군. 듣자하니 랭크제도 도입에 필요한 서부측에서 개발해서 남부에 제공할 장비들의 운송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아나비 왕국과 연결된 수로가 있는 타티아에서 우리들에게 랭크제도 도입에 필요한 물건들을 넘겨주고 끝낼 생각인 모양일세."



원래대로라면 수도인 엘레키움으로 장비와 기술자들이 전부 향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서부 측에서 챙겨온 짐이 많은 모양인지 운송비가 도저히 수지타산이 안맞는다면서 서부와 가까운 아나비 왕국과 수로로 연결된 타티아까지만 오고 그 다음부터는 남부 모험자 길드가 알아서 하라고 한 모양이었다.



"뭔가 서부측의 의도가 깔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미노타우르스 뿔은 단번에 빼라는 격언이 있긴 하지만 이번 일은 느낌이 좋지 않아."



그러나 딱히 거절한 명분도 없기에 마스터 로드리고는 그랜드마스터 베르너의 권유대로 서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서부 모험자 길드 연합 측 인원들과 사비니 왕국의 대도시 모험자 길드 길드장들이 타티아에 모이는데는 꼬박 한달이 걸렸다.

타티아 시의 선착장에 나타난 서부 모험자 길드 연합을 상징하는 팔륜기 깃발이 내걸린 중형 화물선을 맞이한 사비니 왕국 길드마스터들은 거기서 차례차례 내려지는 짐들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그냥 기술자 몇 명에 모험자 플레이트 샘플이나 조금 보내올 거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배에서 나타난 것은 성당이나 신전에서 사용할 법한 거대한 오르간 정도 크기의 장비 10대와 위조방지 기술이 적용된 모험자 신분 증명 플레이트를 담은 상자 20개였다.

운송비용이 왜 많이든다고 한 것인지, 왜 수로를 이용하려고 했는지 단번에 납득되는 양과 무게였다.


서부측 인원들은 로드리고의 안내를 받아 오늘 하루 폐점한 타티아 모험자 길드로 향했고 길드 직원말고는 아무도 없는 길드 건물 로비에서 서부 측의 쾌활해보이는 검은색과 붉은색 정장을 입은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분명 그는 선착장에서 자기소개를 했을 때 자신을 서부 모험자 길드 연합의 직원 마이어스라고 소개했었다.



"남부 사비니 왕국의 동지 여러분께 저희 서부 모험자 길드 연합의 제품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신형 모험자 플레이트의 기본적인 사양과 기능은 이전 회담 때 소개받으셨지요?"



그 말에 회담과 교섭에 참가했던 그랜드마스터 베르너, 마스터 마크리누, 마스터 카스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서부에서 개발한 신형 모험자 플레이트는 피를 이용한 계약 마법을 사용해 만들기에 플레이트의 주인이 원할 때만 정보가 판 위에 이름, 나이, 성별, 종족, 파티에서의 주 포지션, 특기, 의뢰 완료 횟수, 랭크가 표시되는 물건이었다.

그러면 저 대형 오르간만큼 커다란 물건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때 플레이트에 정보를 기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하셨을 겁니다. 이게 바로 그 해답입니다! 소개합니다! 서부 상업길드 연합의 기술자가 개발한 [마력을 동력원으로 하는 모험자 길드 증명 플레이트 복합기능 내장 초정밀 세공기계] 입니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저희는 그냥 플레이트 복합세공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능청스럽게 기계에 마석을 넣어 작동시키며 말했다.

복합세공기는 거대한 오르간만큼이나 컸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장치들이 달려있었다.

그는 의자 하나를 달라고 한 뒤 복합세공기 앞에 앉아서 타자기 윗쪽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겨 내장된 투명한 판을 끄집어내면서 말했다.



"자, 보십시오! 이렇게 일단 계약이 끝난 아무런 정보가 기입되어 있지 않은 플레이트를 판 위에 올려놓고, 이 판을 밀어서 기계 안으로 넣은 뒤! 여기의 타자기를 치면!"


이름: 마이어스

나이: 38세

성별: 남

종족: 인간

특기: 협상

취미: 돈벌기, 나쁜놈 괴롭히기, 낚시


"오오오"



복합세공기의 시커먼 유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니터였다.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없던 흑색 유리창 위에 녹색으로 빛나는 글자가 떠올랐고 거기서 더 나아가 타자기를 두드리는 대로 글자가 하나씩 새겨졌다.


마이어스는 갑자기 타자를 치던 걸 멈추고 복합세공기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모험자 플레이트를 빼내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분명 넣기 전에는 아무런 글자도 떠오르지 않던 플레이트 위에 인적사항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분명 마이어스가 기입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렇게 플레이트에 내장된 기록판에 정보가 기입됩니다. 흠, 혹시 길드 직인을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십니까?"



그러면서 마이어스의 눈은 이 건물의 주인인 타티아 모험자 길드의 길드마스터 로드리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로드리고는 속으로 자길 귀찮게 한다고 투덜거리면서 길드 직인을 보여주었다.



"이걸로 대체 뭘 하려는 거요?"


"걱정마십쇼. 그냥 성능 증명을 위한 일입니다. 여기의 이 구멍에 직인이나 도장을 넣고 이렇게 버튼을 누르면!"



마이어스는 모험자 플레이트를 다시 복합세공기에 집어넣고 타자기 근처에 있던 구멍에 길드 직인을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뚜껑을 닫고 10초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던 마이어스는 화면에 녹색으로 뭔가가 떠오르자 타자기 오른쪽 위 모서리에 달린 지금까지 누르지 않던 버튼을 눌렀고 화면에 무언가 나타났다.



"길드 직인이!"



화면에 나타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타티아 모험자 길드의 직인이었다.

마이어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타자기 옆 뚜껑을 다시 열어 길드직인을 로드리고에게 돌려주고 모험자 플레이트를 꺼내 뒷면의 완수한 의뢰 상세내용을 띄우면서 거기에 찍힌 타티아 모험자 길드의 직인을 모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보셨죠? 이렇게 복합세공기의 도장 삽입구에 도장이나 직인을 넣으면 플레이트의 완수한 의뢰 상세내용에 길드 직인을 찍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직인을 찍은 날짜와 시간이 함께 기록되기 때문에 모험자 실적을 위조하려고 해도 어느 길드에서 언제 찍었는지 기록되어 실적 조작을 도운 길드는 조사당하는 걸 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완료한 의뢰의 상세내용은 300자 기준으로 무려 1000회나 플레이트에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걸 본 길드마스터들은 역시 최신기술이라며 감탄하며 떠들기 시작했고 파우스는 놀란 눈을 하고 있는 그랜드마스터 베르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마이어스와 서부측 인원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계약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 위조방지 기술의 핵심은 플레이트가 아니라 저 복합기 쪽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우리가 한방 먹었어. 플레이트에 적용된 기술자체도 대단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저 복합기 쪽일세."



그랜드마스터 베르너는 서부의 기술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바짝 긴장한 채 말하고 있었지만 몇몇 길드마스터들은 이미 복합세공기의 성능에 매료된 것 같았다.



"위조방지 기술이 적용된 플레이트의 제조법과 정보 세공법을 제공하고 관련 부속을 판매한다고 했지 그 세공 기계는 기타 부속으로 분류되어서 기술제공에는 포함되지 않고 판매 쪽 조항에 적용됩니다. 게다가 아마 제가 만든 채터박스와 마찬가지로 강제로 뜯으면 망가지도록 조치를 취해놨을 겁니다."


"향신료 수입 관련 계약은 모험자 길드 연합이 아니라 각 국의 모험자 길드 중앙회를 대상으로 한다고 했으니 진짜 협상은 지금부터라는 건가"



그랜드마스터 베르너는 일단 시간을 좀 더 벌어야겠다고 말하며 파우스에게 복합세공기를 자세히 살펴봐달라고 말하면서 마이어스와 서부측 인원들에게 접근해 슬슬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데 자신이 한턱 내겠다며 안내역으로 로드리고를 데리고 서부 모험자 길드 연합 사람들과 길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모든 서부측 인원이 그랜드마스터 베르너를 따라간 건 아니었다.

장비를 관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드워프 기술자로 보이는 인원 2명이 남기로 하였다.

다른 길드마스터들도 슬슬 출출한 시간이라 식사를 하겠다며 길드 건물을 나섰고 길드 로비에는 대량의 모험자 플레이트가 담긴 상자와 10대의 복합세공기, 그리고 니키치나와 파우스, 두 드워프 장인만 남게되었다.



"조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당신들이 인수할 물건인데 머저리 발렌스마냥 분해하려고 들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발렌스?"


"그 당신네들이 개발한 통신기를 받고 4분만에 분해하려고 했던 그 머저리 놈 말이야. 머리는 좋은데 평소에도 흥미로운 걸 보면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가서 골칫거리인 녀석이었거든 하하하! 이번에 크게 벌 받았지."



파우스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채터박스를 분해하려고 했던 장본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파우스는 샘플로 제공된 아직 피로 주인 등록을 하지 않은 텅 빈 은색 플레이트 한장을 복합세공기에 넣고 인적사항을 작성해보았다.



이름: 아이데스

나이: 1살

성별: 남자

종족: 인간

포지션: 전위, 중위, 후위

특기: 유격전

의뢰완료: 0회

랭크: 6급(나무)


파우스는 타자기로 내용을 입력한 뒤 입력 직후 타자기 안쪽의 복합세공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소음을 귀를 대고 들은 뒤 입력이 완료되자 복합세공기에서 플레이트를 빼내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복합세공기를 만든 자는 천재가 분명합니다. 이 정도의 초정밀 기술은 저도 몇 번 본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가요 파우스 부길드장?"



뒤에서 파우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니키치나는 파우스가 뭘 알아낸 건지 짐작이 되지 않는지 물었고 파우스는 플레이트의 순도 낮은 은으로 감싸여 있는 얇은 측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기계에는 여러 종류의 마법과 세공기술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투시, 확대, 투과, 이미지 전송, 이미지 출력, 빛마법을 통한 초정밀 세공에 관련된 수많은 주문과 기술을 한꺼번에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게다가 플레이트 자체도 혈마법이나 계약마법을 응용한 독자적으로 개발한 주문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걸 개발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지 짐작도 안됩니다."


"한번 사용해본 걸로 많은 걸 알아냈군. 하지만 계약은 어디까지나 플레이트의 제조법과 세공법을 제공하는 것! 플레이트 복합세공기를 만드는 기술은 제공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주게."



드워프 장인들은 파우스의 말을 듣고 꽤 놀랍다는 듯이 말했고 파우스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 파우스가 기계와 플레이트를 살피는 걸 막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랜드마스터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이 플레이트를 만드는데만 해도 상당한 돈이 들어갈 겁니다. 서부의 랭크로 따지자면 이제 막 모험자가 된 나무 등급 모험자는 당연하고 철이나 동 랭크의 하급 모험자에게까지 이런 고성능 플레이트를 보급하려면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일단은 은 랭크부터만 적용하겠다고 그러셨었죠 아마?"



현재 서부의 모험자 길드는 모험자의 등급을 미스릴, 금, 은, 동, 철, 나무로 나누어놓았다.

나무 플레이트의 모험자는 이제 막 모험자가 된 초보들로 일정 숫자의 의뢰를 무사히 달성하면 철 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철 등급부터는 단순히 의뢰 완료만으로는 승급을 할 수 없고 모험자 길드의 평가가 필요하다.

그 평가 방법은 각 지방 길드의 재량에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



"뭐, 돈만 따진다면 타당한 판단이군. 그래서 우리도 나무와 철 등급은 간단한 서류만 만들고 동 등급부터 제대로 된 이 신형 플레이트를 지급하지."



그 말에 드워프 장인이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했고 파우스는 대체 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한 거냐고 물었다.



"제 생각에는 상급 모험자라고 부를 수 있을 은 랭크부터 해야 수지타산이 맞을 것 같습니다만 대체?"


"우리 서부 사람들이 그 생각을 안해봤을 거 같나? 처음에는 우리도 돈이 아까워서 그랬지. 하지만 어떻게든 은 랭크가 되려고 조작을 하려는 게 너무 많아서 그냥 동 랭크까지 신형 플레이트로 교체하기로 했지."


"그럼 들어가는 비용 문제는 어떻게 해결한 겁니까?"



드워프 장인은 말로 하는 것보다는 보여주는 게 빠르다는 듯이 주머니에서 청동으로 만든 플레이트를 꺼내서 보여줬다.

은 랭크 이상의 플레이트와 달리 청동으로 된 플레이트 표면에는 물리적으로 인적사항이 새겨져 있고, 뒷면의 의뢰 상세내용을 불러오는 기능도 없었다.

그러나 플레이트를 복합세공기 안에 넣자 기록된 내용을 불러올 수는 있었다.



"동 랭크의 플레이트는 완료한 의뢰 내용 기록과 조작 방지 외의 모든 기능을 빼버려서 단가를 맞췄지."


"역시 드워프라고 해도 들어간 기술이 너무 난해하고 고급스러워서 원가절감 말고는 답이 없었나보네요."



니키치나의 말에 드워프 장인들은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움찔거리더니 로비 구석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뭔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할 말 마치고 돌아온 그들의 니키치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 살벌해진 걸 보니 기능을 빼버리는 걸로 원가절감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장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기분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네 인간 처자, 실력 없는 우리들 책임이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드워프 장인들의 구겨진 얼굴을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우스는 잠깐 고민하다가 드워프 장인들에게 말했다.



"저희들도 채터박스 만들면서 단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능을 빼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어허! 자네들 같은 인간이랑 우리 드워프의 경우가 같나! 자네들은 원가절감해도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다들 넘어가지만 우리 드워프는 아니라고!"


"형님! 형님을 욕하는 장인 길드의 그놈들이 뭘 알겠습니까! 현장에 나와 망치를 휘두르지 않은지 50년은 되서 팔뚝에 비계가 생긴 게으른 것들이 하는 질투 섞인 험담일 뿐입니다! 진정하세요!"


"으아아아아! 기술을 발전시켜서 들어가는 재료를 줄일 생각은 안하고 기능 빼서 원가절감하는 게으른 커티우스? 니들이 뭘 안다고 그러냐! 죽일 놈들! 원한의 오벨리스크에 영구적으로 기록할 놈들 같으니!"



아무래도 그 원가절감 건 때문에 여기저기서 욕을 먹었던 건지 드워프 장인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다른 상대적으로 젊은 드워프가 그를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니키치나는 슬쩍 뒤로 빠져나가더니 보관하고 있던 드워프 접대용 술인 드래곤 브레스를 꺼내와서 잔에 담아 드워프 장인에게 건네줬다.

드워프 장인은 화를 내느라 목이 타들어갔던 건지 단숨에 잔을 비웠고 알콜이 들어가자 조금 진정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말했다.



"후우, 미안하군. 내가 최근 이런저런 일이 있다보니 속에 쌓인 화가 많아. 이해해주게."


"알겠습니다."



니키치나는 이 드워프들이 다른 서부측 사람들이 왔을 때 또 화를 내기 전에 조금 열기를 빼놔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길드에서 보관하고 있던 술과 빵, 고기를 내왔다.

드워프 장인들은 마침 배가 고팠던 건지 넙죽넙죽 술과 음식을 받아먹었고 그들이 배를 든든하게 채웠을 때 그랜드마스터와 함께 밖에서 식사를 하고 서부측 인원들이 돌아왔다.


배가 채워졌으니 이제 소화를 시키기 위해 땀을 뺄 시간이었다.

길드의 직원 구역으로 들어간 사비니 왕국 모험자 길드 사람들은 대륙 서부 모험자 길드 연합, 대륙 서부 상인 길드 연합 측 인원들과 커다란 테이블을 두고 서로 마주본 채 교섭에 들어갔다.


당연하게도 신형 모험자 플레이트 완제품 수출도, 제대로 된 로열티를 받고 위탁생산을 하는 것도 지난 교섭에서 실패한 서부측 사람들은 복합세공기의 가격을 상당히 높게 불렀다.


하지만 지난 교섭에서 서부측이 불리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을 저버리고 무례한 짓을 한 서부측 인원의 문제였기에 그랜드마스터 베르너는 그 점을 파고들며 지난 교섭의 실패를 이번 교섭으로 끌고오지 말라는 논리로 받아쳤으나 서부측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중, 마이어스가 한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저희 쪽에서 한가지 제안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남부 왕국의 길드 중앙회에는 제안한 적이 없는 특별 제안이지요!"


"뭡니까?"


"플레이트 복합세공기에 적용된 기술 일부와 채터박스의 제조법을 교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랜드마스터 베르너는 이게 서부의 진짜 목적이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지금까지 지지부진하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짓을 여러번 했기에 사비니 왕국 길드마스터 일부는 꽤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마스터 라인켈은 그렇다쳐도 마스터 푸리우스는 애시당초 의욕이 별로 없었기에 더더욱 심했다.



"우리 서부는 이미 메시지 전송 주문을 복원시켰습니다. 채터박스 제조법은 만약을 위한 투자입니다. 플레이트 복합세공기에 적용된 기술 전체를 넘길 가치는 없지요!"


"메시지 전송 주문의 단점은 메시지를 주고받을 통신원이 서로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반면 채터박스는 채터박스 한쌍만 있으면 사용자가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서부도 그걸 알고 있기에 채터박스에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닙니까?"



마이어스는 협상을 자기 의도대로 끌고가려는 것 같았다.

그랜드마스터 베르너는 이미 파우스에게 들은 정보가 있었기에 서부에서 흔히 사용되는 메시지 전송 주문의 약점을 언급했으나 마이어스는 태연했다.



"하지만 저희 쪽의 플레이트 복합세공기는 수많은 기술과 마법의 집약체입니다. 저희가 듣기로 마석만 충전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복합세공기와 달리 채터박스는 3년 정도 밖에 사용할 수 없지요?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계와 소모품을 같은 선상으로 두는 건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확실히 그건 마이어스의 말이 맞았다.

베르너는 파우스에게 어떻게든 해보라는 눈치를 줬고 파우스는 조용히 손을 들고 발언 허가를 받은 다음 입을 열었다.



"그건 생산성을 위한 원가절감에 의한 결과입니다. 고급 모델은 물리적, 마법적 파손이 없을 시 최소 10년의 사용기간을 보증합니다. 특주로 채터박스를 주문하신다면 사용기간 50년이 보증되는 모델도 제조가능합니다."


"기술력이 상당하군요."



마이어스는 말로는 대단하다고 하고 있지만 대충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마이어스의 계산 내라는 의미였고 파우스는 잠깐 눈을 굴리다가 아까 로비에서 자신들에게 복합세공기의 설명을 해준 드워프 장인과 눈이 마주쳤다.



"복합세공기의 제조자가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으셨지만 대강 짐작은 됩니다. 이 기계의 핵심기술은 보석세공장인으로부터 제공 받으셨겠지요?"


"글쎄요? 저는 상인 길드 소속이 아니라 잘 모르겠군요."



마이어스는 표정 변화 없이 말을 꺼냈지만 파우스의 날카로운 감각은 순간적으로 긴장된 마이어스의 목 근처 근육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보통 보석세공 장인이 아니라 마법을 다룰 수 있는 특별한 세공 장인... 보통은 마법을 사용하는데 능숙한 엘프나 하프데몬 장인을 생각할 겁니다."



엘프나 하프데몬이라는 말에 마이어스는 그저 웃고 있었지만 그 다음 나온 파우스의 발언을 듣고 굳어졌다.



"하지만 아무리봐도 여기에 적용된 기술은 드워프 장인, 그것도 최고레벨의 실력자의 손이 닿았다고 생각됩니다. 마법적인 재능이 있는 드워프는 굉장히 드물고, 그런 재능이 충만한 드워프 중에서 보석세공을 오랫동안 한 드워프는 더더욱 드뭅니다. 신원을 특정하는 건 쉬우니 그분과 직접 협상을 하는 쪽이 더 빠를지도 모르겠군요."


"그..."


"하하하핫! 자네가 졌어 마이어스. 이 마법사는 상업 길드의 갈란만큼이나 예리하군."



결국 옆에서 협상이 오고가는 걸 지켜보고 있던 드워프 장인 커티우스가 크게 웃으면서 말했고 그랜드마스터 베르너는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그래, 내가 바로 이 녀석의 개발자인 커티우스다."


"그럼 기술 교환에 대해서..."


"아니, 그건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그 대신 서로의 제품을 돈 받고 파는 쪽의 이야기를 하면 어떤가?"



커티우스는 그러면서 남부 측이 생각한 것보다 꽤 가격이 높지만 아까 마이어스와 그 동료들이 부른 터무니없는 가격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했다.

물론 거기서 만족할 사비니 왕국 모험자 길드 중앙회가 아니었기에 협상은 2시간 정도 더 진행되었고 결국 남부측에서 금화와 사용기간 10년 보장의 고급형 채터박스 20쌍을 지불해 복합세공기 1대씩을 들여오는 걸로 계약을 맺게 되었다.

파우스는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고급형 채터박스의 재고를 전부 서부측에게 넘겨줬으나 수량이 모자랐기에 나머지 분량만큼은 그만큼 사비니 왕국 모험자 길드 중앙회에서 그랜드마스터 명의로 어음을 발행해서 줘야했다.



"살짝 손해인거 같은데"


"어쩔 수 없었다고 보네요 그랜드마스터. 낙담하지 말고 다음 교섭 때는 잘해보죠."



제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진짜배기 상인과의 교섭은 힘든 일이었다.

그랜드마스터는 조금 토라졌으나 마스터 마크리누가 그를 위로했다.

이로서 거래는 이루어졌고 타티아 모험자 길드에 들여놓은 10대의 복합세공기와 여러 종류의 신형 모험자 플레이트가 들어있는 20박스는 사비니 왕국 모험자 길드 중앙회의 것이 되었다.

한편 낙담하고 있는 사비니 왕국 모험자 길드와 달리 올때보다 짐이 가벼워진 서부측 인원들은 다시 배에 올라서 의아하다는 듯이 갑판에서 타티아 시를 바라보고 있는 드워프 장인 커티우스에게 묻고 있었다.



"왜 기술 교환에 부정적으로 나오신 겁니까 커티우스 님? 잘만하면 메시지 전송 주문과는 다른 타입의 통신 주문을 쉽게 손에 넣을 기회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철저한 보안 주문이 걸린 완제품만 들여와서는 역설계가 힘듭니다."


"채터박스 개발자라는 그 인간 봤나? 절대 운 좋게 옛 주문을 복원한 마법사 같은 게 아니야. 내 감일 뿐이지만 마법만이 아니라 야금술, 연금술 등의 여러 기술 쪽으로 폭 넓은 지식과 그를 뒷바침할 실력이 있는 장인이 분명해. 기술 하나를 넘겨주면 나머지까지 홀라당 먹어치웠을 실력자였단 말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니 그 마법사도 기술교환에 부정적으로 나온 거겠지."


"그 정도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번 협상에 임한 서부측 인원들은 수십 년에 걸쳐 드워프들이 개발한 복합세공기를 상대적으로 기술이 뒤떨어지는 남부에서 설령 국가의 개입이 있다고 해도 단기간에 복제해낼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커티우스는 교만한 감정을 뒤로 치우고 협상에 임했고 나름 괜찮은 조건으로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납득을 하지 못하는 서부측 인원들을 향해 드워프 장인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너희들 벌써 이 세상에 통용되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잊었냐?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때로는 신과 드래곤들도 패배라는 걸 경험하고, 드워프가 엘프 장인에게 뒤쳐지고, 엘프 사냥꾼이 숲에서 인간에게 압도되는 때가 있는 법이지."


"하지만..."



서부측 인원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벌써 배는 출발신호인 종을 울리며 닻을 올렸다.

대륙 서부 장인 길드 소속 보석세공사이자 상업길드 연합의 간부직을 겸임하고 있는 드워프 장인 커티우스는 배가 움직이면서 밀려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외쳤다.



"하지만 드워프의 자존심은 용의 힘줄보다 질긴 법! 얌전히 인간에게 기술에서 따라잡혀줄 생각은 없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그 채터박스 개발자조차 표정관리 못하고 눈이 튀어나올 엄청난 물건을 만들어주지! 하하하하!"



커티우스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어느새 손에 든 맥주잔을 단숨에 비워버렸고 서부측 인원들은 그런 커티우스의 모습에 다함께 웃었다.

커티우스는 아까 시장을 지나가다 구입한 석류를 열어서 그 진홍빛 보석 같은 알들을 단숨에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향신료만이 아니라 과일도 수입하도록 계약체결을 했어야 했는데 그걸 새카맣게 잊어버린 건 좀 아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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