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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성칭 밑의 피와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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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23.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3.08.13 23:55
연재수 :
1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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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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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DUMMY

11월 첫째날의 제3주간시, 아침 일찍부터 게누아 백작 저택에 마차와 행인들이 들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오늘 백작가 구성원 중 누군가의 생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백작가 구성원 중 생일이 가까운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였고 사람들은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밖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과 달리 백작가 저택 2층에 마련된 커다란 회의실에는 이미 각자 대답이 나온 모양이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제 아무리 악신숭배자라고 해도 케일런 교단은 굉장히 특수한 집단입니다. 섣불리 적대했다가는 케일런 교단과 밀월 관계인 교단들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호겐 정복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평가를 받고 호겐 지방의 상업 길드 지부들에 영향력을 두루 발휘하고 있는 멜린 자작은 회색빛 피부에 회색빛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미남이었지만 지금 그 윤기나는 머리카락이 출렁거릴 정도로 격한 움직임을 보이며 게누아 백작이 말한 계획을 반대하였다.

나나스 멜린의 보좌진 역할로 회의에 출석한 파우스가 보기에 멜린 자작은 의외로 나나스 멜린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나나스 멜린과 외형은 별로 닮지 않았다.

되려 조부인 게누아 백작이 자작에 비해 훨씬 나나스 멜린과 닮았다고 느껴졌다.



"다른 교단이 어쨌건 그것들이 이 게누아 시에서 난동을 부린 건 사실이 아닙니까? 그것들이 다시는 호겐 지방에서 이상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단죄해야 합니다!"



구리빛 피부에 짧게 자른 남색 머리카락을 지닌 거구의 사나이 오르갈 남작은 멜린 자작을 잠깐 쏘아보다가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호겐 정복 전쟁 당시 수많은 적을 쓰러뜨리면서도 명예를 우선시하여 적과 아군 모두에게 존경을 받은 전쟁 영웅이자 지금은 게누아 시 인근의 오르갈 남작령을 통치하고 있는 오르갈 남작은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오르갈 남작이 이렇게 열을 내는 건 그의 딸인 자이라가 케일런 교단의 불륜 폭로로 인해 그녀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애인 중 한명에게 살해당한 사건으로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자는 없었다.


남작은 케일런 교단과 최근 호겐 지방에 침투했을 가능성이 높은 라르사 왕국군 잔당을 함께 쓸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백작 입에서 나오자마자 평소의 신중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제대로 계획을 듣지도 않고 찬성할 정도였다.



"아니면 라르사 왕국 잔당만 쓸어버리고 케일런 교단 놈들은 체포해서 제대로 법에 따라 처벌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호겐 정복 전쟁 당시 오르갈 남작 다음가는 전공을 세웠고 지금은 게누아 시의 군사 부문 총책임자나 다름 없는 카란앙가 경이 오르갈 남작과 멜린 자작의 눈치를 보며 슬쩍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멜린 자작과 오르갈 남작 둘 모두를 분노하게 하였다.



"내 말을 뭘로 들은건가 카란. 쓸데없이 교단들과 적대할 필요는 없네."


"흥! 그렇게 어중간해서야 이 게누아의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군인이라고 할 수 있겠나 카란?"



사비니 왕국의 국왕 루이가 임명한 호겐 지방의 수호자이자 게누아 시와 그 인근 영지들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게누아 백작은 오른쪽에 앉은 자신의 장녀 미니엘 행정관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상황을 살폈다.

오르갈 남작의 왼쪽에 앉아있는 나나스 멜린은 자기 뒤에 서 있는 파우스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어떻게 하죠? 아버지와 오르갈 남작님의 의견이 너무 극명하게 갈리는데요?"



게누아 시 모험자 길드의 수장이자 게누아 백작의 손녀이며 동시에 멜린 자작의 딸인 나나스 멜린은 설마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느 편을 들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일단 존을 암살하기 위해 호겐 지방에 침투했을 확률이 높은 라르사 왕국군 잔당을 쓸어버리는 것에는 모두가 찬성했다.

뒷배도 없고 분란만 일으키는 쓸모없는 암살자들은 내버려둬도 공공질서와 치안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의견이 갈린 것은 케일런 교단, 통칭 CCC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사실상 조국이 망해버려서 처리해버리건, 생체실험을 하건, 개 먹이로 줘도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을 라르사 왕국 암살자들과 달리 이들의 뒤에는 케일런 교단 본부와 케일런 교단과 비밀리에 협력하고 있는 대륙 중부의 여러 교단들이 있다.


제 아무리 소규모 지파나 교구라고 해도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이들을 제거해버리는 건 큰 분쟁을 몰고 올 수 있는 일이었다.

비록 이 대륙 남부가 아직 종교 집단의 세가 약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중재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 오르갈 남작의 반응을 보아하니 끼어들어봤자 덤터기를 쓸 확률이 높습니다. 백작 각하나 행정관님께서 의견을 제시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물론 오르갈 남작께서 이쪽으로 화살을 돌리면..."



파우스는 정치적인 경험이 부족한 나나스 멜린이 끼어들어갔다가는 순식간에 먹혀버릴 거라고 판단하고 나나스 멜린에게 기다리라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파우스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누군가가 나나스 멜린을 지목하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는거요 길드마스터? 이번 사태는 사실상 모험자 길드에서 촉발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뭔가 대책 마련은 되어 있는 것이냔 말이오!"



오르갈 남작은 능구렁이인 멜린 자작과 말싸움을 해봤자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고 파악한 건지 바로 화살을 나나스에게 돌려버린 것이다.

멜린 자작은 딸 쪽으로 공격 방향을 틀어버린 오르갈 남작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으나 지목 당하고도 파우스와 계속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침착한 태도를 보이는 딸의 반응에 눈을 감고 대답을 기다렸다.

파우스는 나나스를 지목한 오르갈 남작의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을 계속했고 대화가 끝난 뒤 나나스 멜린은 오르갈 남작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남작님께서는 너무 낙관적이시군요"


"그건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요? 낙관이라니? 지금 케일런 교단의 처분에 관한 걸 논의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나는 지금 상황을 굉장히 심각하게 보고 있는 상태요! 그렇기에 교단 놈들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말하고 있는 거고!"


"이번 일의 핵심은 케일런 교단의 처분 여부가 아닙니다. 이번 일로 생길 물적, 인명 피해를 얼마나 줄이느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남작은 머리에 꽉 차있던 열기 때문에 판단을 그르쳤다는 걸 깨달은 얼굴을 하고 뭐라도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나나스 멜린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라르사 왕국군 잔당의 전력은 미지수, 케일런 교단의 입증파는 소수지만 한명한명이 강자인 소수정예 집단입니다. 포위하더라도 사살은 쉽지 않고 제압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섬멸을 주장하고 싶으신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피해를 최소화시킬 작전 계획도 함께 제시하신다면 설득력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멜린 자작은 딸이 내뱉은 말에 어째서인지 당황한 것 같았고 오르갈 남작은 그 말을 듣고 신음을 삼키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전쟁 영웅인 오르갈 남작은 범부들처럼 말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거나 소인배처럼 할 말이 없어서 욕을 하는 그런 자는 아니었다.

그는 분노가 가셔서 이성이 돌아온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대로 너무 근거제시 없이 내 주장만 한 것 같군. 사과하겠네 길드마스터."


"그럼 오르갈 남작,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지?"



이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게누아 백작이 드디어 입을 열었고 오르갈 남작은 침착하게 자신이 수집한 정보들을 꺼내놓으며 케일런 교단과 라르사 왕국군 잔당 모두를 섬멸하기 위해 포위했을 때의 예상되는 아군의 피해와 여러 변수에 의한 전투 예측 결과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멜린 자작은 오르갈 남작의 말에 일일이 참견하기 시작했고 기껏 머리가 식어서 이성이 돌아왔던 오르갈 남작은 다시 머리에 피가 오른건지 말이 거칠어졌고 결국 오전 내내 진행된 회의는 별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게누아 백작은 남작과 자작에게 각자가 주장하는 계획의 워게임 결과와 피해, 호겐 지방의 엘프들에게 돌아올 이득 등을 조사해서 보고하라 명했고 오르갈 남작과 멜린 자작은 서로에 대한 경쟁심리가 발동한 건지 백작에게 인사를 하고는 쏜살같이 저택에서 나가버렸다.

백작은 딸에게 저 둘이 답을 들고 올 때까지 호겐 지방에 침투한 케일런 교단과 라르사 왕국군 잔당을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명하고는 회의실에서 나가버렸고 회의실에는 미니엘, 파우스, 나나스 세 사람만 남겨졌다.

나나스는 편한 사이인 사람들만 남겨지자 회의 내내 답답했던 기분을 토해내려는 듯이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의 뒷담화를 시작하였다.



"남작님도 남작님이지만 아버지도 이상해요. 서로 협조해서 이야기를 잘 풀어나가면 좀 좋아?"


"그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오르갈 남작도 진짜 화난 것이었지만 길드마스터께 한소리 듣고 난 뒤에는 전부 화난 척 한겁니다."



하지만 파우스와 미니엘은 아직 나나스가 경험이 부족해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파우스가 대표로 말했고 나나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파우스와 이모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화난 척이라니요?"


"몰랐니 나나? 고성이 오고가는 지경까지 됐는데 오르갈 남작 입에서 자기 영지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잖니?"


"아..."



그제야 나나스는 아까 자신이 오르갈 남작에게 일침을 가했을 때 말을 들은 오르갈 남작이 아니라 되려 아버지인 멜린 자작이 당황한 이유를 깨달았다.



"멜린 자작은 아무래도 오르갈 남작의 위세나 세력을 자기 손을 쓰지 않고 꺾어놓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일이 생각대로 안풀려서 조급해진 것 같더구나. 네가 그 한마디만 안했으면 자작 의도대로 됐을지도 몰랐는데"


"그럼 아까 제가 말하고 있을 때 아버지 표정이 살짝 구겨진 건..."


"화살이 너에게 돌아가면 오르갈 남작을 자극할 말을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오르갈 남작을 정신차리게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당황한 거겠지."



미니엘의 말을 들은 나나스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아버지가 자길 일종의 지뢰로 여겼다는 사실이 화가난 건지 얼굴이 점점 험악해졌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을 열었다.

파우스는 혼자서 화내고 있는 나나스 멜린을 천천히 따라가면서 옆에서 걷고 있는 미니엘에게 백작의 의중이 뭔지 물었다.



"백작 각하께서는 이번 일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어느 쪽이든 이 호겐 지방과 우리 엘프들에게 도움이 되면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사실 최선은 오르갈 남작과 멜린 자작이 협조해서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는 거지만 회의 때 분위기로 느꼈듯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때, 파우스는 복도 코너 부분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하인이나 하녀가 청소 중인가 싶었으나 복도 코너에 있는 것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작은 아이였다.

갈색 피부의 작은 다크엘프 꼬마는 불안, 초조, 기쁨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미니엘, 나나스, 파우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파우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코너 부분을 바라보자 그 시선이 따라 눈을 움직인 미니엘은 살짝 놀란 얼굴로 빠른 걸음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잠시동안 복도의 코너에서 아이와 이야기를 하던 미니엘은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소개하죠. 이 아이는 제 아들인 글로르나르입니다. 올해 4살입니다."


"안녕하세요."



루스티와 동갑내기 소년인 글로르나르는 누가보더라도 굉장히 특이한 엘프였다.

전체적인 얼굴 형태는 할아버지인 게누아 백작을 닮았고 눈매는 엄마인 미니엘을 닮아 살짝 날카로워보였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금안이라는 점이었다.



"금안은 굉장히 희귀한 유전형질입니다. 아버지 쪽이 금안이었습니까?"


"..."



미니엘은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심기가 불편한 기색이 되었고 어째서 미니엘이 심기가 불편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파우스를 붙잡고 나나스는 귓속말을 건넸다.



"큰이모부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게 좋아요."


"아니, 됐다 나나스. 어차피 부길드장도 어떻게든 알게 될 테니 차라리 오해없이 내가 말하는 쪽이 낫겠지."



나나스 멜린은 어떻게든 미니엘의 남편에 대한 걸 얼버무리려 했으나 미니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녀는 조카에게 아들을 데리고 잠깐 다른 곳으로 가있으라고 지시하였고 글로르는 사촌누나인 나나스의 손을 잡고 저택의 정원으로 향했다.

저택 정원에서 공놀이를 시작한 두 사람을 2층 복도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며 미니엘은 파우스에게 자신의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 남편이 죽은 건 여동생... 네르비나가 암살당한 뒤입니다. 그이는 도시 경비책임자였습니다."



마스터 브란트가 마스터 네르비나를 암살할 때 게누아 시의 경비대 책임자였다면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파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스터 브란트의 악랄함을 다시 느꼈으나 미니엘은 파우스의 착각을 정정해주었다.



"오해하지마세요. 남편은 브란트에게 죽은 게 아니라 지나친 책임감으로 계속해서 무리하게 사건 조사를 하다가 그만 과로사했습니다."


"...?"



브란트가 죽인 게 아니라 영주의 둘째 딸이자 모험자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네르비나가 죽은 사건을 빨리 조사하라는 심리적 압박에 야근을 계속하다가 과로사했다는 말에 파우스는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어서 치유 주문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파우스의 신체는 멀쩡했고 미니엘은 파우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차기 영주의 남편이 과로사한 것도 충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만"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저와도, 남편과도 눈 색깔이 다른 글로르가 태어나버려서 사람들이 혹시 제가 바람을 피웠던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확인도 안하고 소문 퍼트리기만 좋아하는 놈들 같으니!"



미니엘의 남편은 마스터 네르비나와 함께 암살된 것도 아니고 무려 과로사해버렸고, 게다가 그렇게 남편이 죽은 뒤 태어난 아이는 남편과도, 엄마와도 전혀 다른 황금빛 눈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사람들이 미니엘에 대해 떠들어댔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파우스는 미니엘의 말에서 거짓말을 하는 낌새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미니엘은 사람들이 자신과 아들에 대해 억측과 찌라시, 근거없는 소문을 퍼트리는 것에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진실의 대지 주문은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해봤습니다. 하지만 부길드장도 잘 알고 있다시피 그 주문은 정신조작이나 최면 등으로 거짓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사람한테 사용하면 거짓말 판별을 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제가 진실의 대지 주문을 사용한 채 제 아들이 남편의 아이라고 말한 다음날 주문의 약점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퍼지더군요."



파우스는 미니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문 밖의 글로르나르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아이를 바라보던 파우스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걱정으로 가득한 눈으로 나나스와 놀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미니엘에게 말했다.



"일단 법적인 효력은 없습니다만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비로 도련님을 검사해봐도 되겠습니까?"


"위험한 검사는 아니겠지요?"


"물론 안전합니다. 피 몇 방울만 있으면 됩니다."



파우스는 잠깐 검사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고 미니엘은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말했다.

미니엘은 창문을 열고 나나스에게 돌아오라고 말했고 얼마 뒤 나나스는 글로르를 데리고 저택 2층으로 돌아왔다.

미니엘은 파우스와 나나스, 글로르를 저택의 자신의 개인실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파우스는 위상도약 파우치에서 이런 저런 검사장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게 뭔가요 파우스 부길드장?"


"간단한 검사장비입니다. 자, 여기에 손을"



파우스는 온갖 검사장비를 꺼내놓은 뒤 글로르에게 손을 넣는 구멍이 있는 상자에 손을 넣고, 커다란 금속 상자와 연결된 렌즈가 달린 고글을 쓰게 한 뒤 상자의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며 말했다.



"뭐가 보입니까 도련님?"


"언덕 위에 집? 집 같은게 보여요. 너무 흐릿해요."


"흠,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아까보다 잘 보여요. 그런데 아직도 흐려요."


"이건?"


"아직도 흐려요 아저씨"


"이건 어떻습니까?"


"잘 보여요."


"이건?"


"어... 아까랑 비슷하긴 한데 이쪽이 흐려요."



고글 속에서 보이는 그림에 글로르의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엄마인 미니엘은 아들이 손을 집어넣은 상자 옆의 투명한 수정에 피 몇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걸 보았다.

하지만 글로르는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고 파우스는 고글을 치우고 글로르가 상자에서 손을 빼내게 하였다.

아이의 여린 검지손가락 끝에 살짝 피가 묻어있었는데 파우스가 깨끗한 천으로 피를 닦아내자 놀랍게도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도련님의 시력은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 북부의 우로스 산맥에 서식하는 시력이 좋은 맹금류 기준으로 테스트를 해봤는데 평범한 인간보다 2배는 시력이 좋습니다."


"그거 좋은거에요 아저씨?"


"보통 사람한테는 점처럼 보이는 물건도 잘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도련님"



글로르나르는 의미는 잘 모르지만 어찌됐든 좋은거라고 하니 기뻐했고 미니엘은 지금 단순한 시력테스트하려고 이렇게 거창하게 준비를 했냐는 표정을 지었으나 파우스가 고통없이 글로르나르의 손에서 피를 몇 방울 뽑아낸 쪽이 진짜 정밀검사를 위한 준비일 거라고 생각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로 파우스는 기괴한 데칼코마니 그림 10장을 아이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뭐로 보이냐고 물어보았고 글로르나르는 너무 기괴해보여서 뭔지 감도 안잡히는 그림 몇 장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여러가지 테스트가 진행된 뒤 글로르가 처음 손을 넣었던 상자의 아래쪽이 저절로 열리면서 종이 한장을 내뱉었고 파우스는 꽤나 흥미로운 결과라는 표정으로 검사 장비에서 나온 종이를 보았다.


파우스는 이제 됐다는 듯이 나나스에게 눈빛을 보냈고 마침 글로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사가 계속되어서 지루해진 상태였기에 밖에 나가서 놀자는 사촌 누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방에서 나갔다.

아들과 조카가 방에서 나가자 미니엘은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로 파우스에게 물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어떤 것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장비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도련님은 원래 금안이 아니었는데 특정한 힘에 노출되어 태아 상태에서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추측됩니다."



태아가 변이를 일으킨 흔적이 보인다는 말에 미니엘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지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으나 파우스는 오해하지 말고 들으라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검사결과지에 변이를 일으키지 않았을 경우 원래 눈색깔이 뭐였는지 알 수 있는데 보통은 나오지 않는 색깔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동안 장비점검을 게을리한 탓에 장비에 오류가 생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원래 색깔이 뭐였습니까?"


"보통은 나오지 않는 색깔인 걸 보아서 장비고장이 의심되는..."


"어서요!"



파우스는 검사장비가 고장난 것 같다고 말했으나 미니엘은 원래 어떤 색깔이었는지 무조건 확인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파우스는 검사결과지에 묻어있는 작은 얼룩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 얼룩은 파란색 바탕에 구석에 갈색과 초록색이 섞인 것이었다.

파우스는 그 얼룩 때문에 검사장비가 고장났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색 조합을 본 미니엘은 되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장비 고장이 아닙니다. 이건... 이건! 라우... 그이의!"


"행정관님?"



미니엘은 그 말을 듣고 오열하며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파우스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안잡힌다는 얼굴로 미니엘이 진정하기를 기다렸고 미니엘은 한참을 울다가 가까스로 진정하고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그러나 한번 터친 눈물샘이 그렇게 쉽게 닫힐 리가 없기에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미니엘 행정관은 정말 기괴하게도 눈물을 흘리면서 웃고 있었다.



"애아빠랑... 애아빠 눈이랑 똑같은 색깔입니다. 그이는 굉장히 희귀한 홍채 얼룩증 환자였습니다. 딱 이런식으로 파란색 눈에 갈색 얼룩이 있었습니다. 녹색은 아마 저에게서 이어받은 피 때문일겁니다. 글로르의 피에서 이 결과가 나왔다는 건... 제 아들이 남편의 친자가 맞다는 증거입니다."



그동안 외도를 저지른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그렇게 받아왔건만 증명할 수단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그녀의 결백을 입증하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아무래도 그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던 것인지 미니엘은 웃으면서 계속 눈물을 흘리다가 반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눈물을 닦아낸 미니엘은 잠깐 파우스에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방에서 나가버렸고 잠시 후 아버지인 게누아 백작을 대동해서 돌아왔다.

미니엘은 파우스에게 아버지 게누아 백작에게 검사장비와 검사결과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였고 파우스는 천천히 게누아 백작에게 장비의 기능과 글로르나르의 피로 검사를 한 결과에 대해 설명을 해야했다.

백작 역시 크게 기뻐했으나 파우스는 되려 백작 부녀를 의심하는 눈빛을 하며 말했다.



"세상에 파란색 눈에 갈색 얼룩이 있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두분께서 절 속이려는 것 아닙니까?"



백작 부녀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파우스를 역으로 설득해야 했고 그건 사촌누나와 노는 것도 질려버린 글로르나르가 엄마를 찾아서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걸 집사가 말해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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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87화 23.07.17 11 1 19쪽
86 86화 23.07.17 12 1 14쪽
85 85화 23.07.17 12 2 15쪽
84 84화 23.07.16 19 1 17쪽
83 83화 23.07.16 14 1 14쪽
82 82화 +1 23.07.16 18 1 14쪽
81 81화 23.07.16 12 1 15쪽
80 80화 23.07.16 12 1 19쪽
79 79화 23.07.15 16 1 20쪽
78 78화 23.07.15 16 1 15쪽
77 77화 23.07.15 13 1 16쪽
76 76화 23.07.14 16 1 24쪽
75 75화 23.07.14 16 1 11쪽
74 74화 23.07.14 15 1 21쪽
73 73화 23.07.14 13 1 16쪽
72 72화 23.07.14 15 1 28쪽
71 71화 23.07.13 14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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