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성칭 밑의 피와 재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23.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3.08.13 23:55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1,878
추천수 :
127
글자수 :
805,772

작성
23.07.20 12:00
조회
16
추천
1
글자
21쪽

94화

DUMMY

게누아 백작 저택에서의 논의가 끝나고 2일이 지났다.

그러나 멜린 자작과 오르갈 남작의 의견 차이는 몸집이 작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은 독사와 덩치가 커서 사냥감을 한꺼번에 삼키는 뱀마냥 서로를 먹이로 볼 뿐 타협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태.


이 문제에 대해 게누아 시의 군사담당자인 카란앙가 경은 게누아 백작에게 결단을 요청했지만 게누아 백작에게은 호겐 지방에 침투한 십여명에 불과한 타지방의 종교단체와 패잔병 따위의 사소한 트러블보다 더 중요한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행정관이자 백작의 장녀인 미니엘이 낳은 아들, 백작의 장손에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정말 오랜만에 쉬는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낮에 정무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백작 만이 아니라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야할 행정관 미니엘 역시 그 옆에 있었고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게누아 백작가의 장손 글로르나르였다.



"이 부분은 이해가 가십니까?"



그들은 창문 너머로 장손인 글로르나르가 교육받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겨우 4살에 불과하지만 글로르나르는 총명하였고 가르치고 있는 교사는 처음에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가르치려다 글로르나르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똑똑하다는 걸 알고 조금씩 가르치는 수준을 높이고 있었다.



"우애오옹"


"그만해 누나 아빠 바쁘시잖아"



글로르나르가 교육을 받고 있는 곳에는 두 아이가 더 있었다.

레아와 파우스의 아이들인 루스티와 아이데스였고 아이데스의 목소리를 들은 파우스는 3살에 불과한 아들에게 말했다.



"루스티가 심심한 모양인데 무조건 압력을 가하지 말고 놀아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아이데스."


"아빠! 심심해옹! 놀아줘옹! 아이데스, 아데는 재미없어! 루스티는 아빠랑 노는게 조아"



아이데스는 겨우 3살에 불과하나 자기보다 한 살 많은 4살짜리 누나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그 표정은 마치 천방지축을 날뛰는 신입 사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만년 차장과도 같아서 3살짜리 소년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루스티의 집중력이 30분이 채 가지 않는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이 게누아 백작과 미니엘 행정관에게는 총명한 글로르나르를 더 돋보이게 해서 그런지 루스티를 방해된다고 내보내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지난 2일 동안 게누아 백작과 미니엘 행정관은 파우스에게 이런저런 시험을 하였고 파우스가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고는 며칠동안이라도 글로르나르를 가르쳐 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하였다.

권유지만 만약 거부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압력이 느껴지는 거절할 수 없는 권유였기에 파우스는 장녀인 헤르를 제외한 자기 아이들을 함께 가르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련님."



방금 전까지 파우스가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있던 것은 일종의 우화였다.

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무인도에 조난당한 두 학자 앞에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악마가 나타나 그대들을 섬에서 탈출시킬 수는 없지만 배부른 돼지나 배고픈 현자가 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는 이야기였다.


악마는 배부른 돼지가 되면 구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지만 배고픈 현자가 되면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구조가 올 때까지 몸이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남자는 현자가 되는 것을, 다른 한 남자는 돼지가 되는 걸 택했다고 말한 시점에서 루스티가 집중력을 잃고 심심하다고 떼를 쓰기 시작해서 대화가 중단된 것이었다.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현자가 되겠다는 말을 한 평범한 남자는 현자가 되었으나 끝내 주린 배를 잡고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은 배부른 돼지는 맛있는 커틀릿이 되었습니다."


"돼지를 돼지고기 커틀릿으로 만든 건 그들에게 제안을 한 악마인가요?"


"아뇨, 돼지를 잡아먹은 것은 구조하러 온 이들이었습니다. 돼지가 되어버려서 그가 사람이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재료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럼 이건 나쁜... 끔찍한 이야기인데요."


"루스티는 돼지고기보다 닭고기가 쪼아"


"누나, 오늘 저녁 닭고기 해달라고 엄마한테 말해줄 테니까 제발 조용히 좀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일종의 풍유법으로 짜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는 악과 타협하는 이를, 배고픈 현자는 악과 맞서지만 힘없이 쓰러지는 이를, 악마는 돈과 재물을 뿌리는 부정한 권력자 혹은 상인을 뜻합니다. 부정한 돈... 즉 뇌물을 받은 이는 당장은 편안할지 몰라도 나중엔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지요."



나이가 조금 찬 헤르 또래의 아이들은 금세 이해할 수 있겠지만 아직 4살에 불과한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르나르는 대강은 이해한 눈치였다.

글로르나르의 비교군으로서 옆에 있는 루스티는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겠고 그냥 돼지고기 커틀릿보다 닭고기 튀김이 좋다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도 문제지만 언니인 헤르보다 훨씬 본능대로 살아가는 호랑이 수인인 루스티의 성향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야기는 이러합니다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악과 선은 언제나 마음 속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법입니다. 완전히 선한 사람도 없고, 아예 쓸모없는 악당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악이라고 불리는 행위 혹은 사람과 타협해야 할 때가 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 이전에 절 가르치던 로메시르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라고 하셨는데요."



총명한 글로르나르는 파우스의 말에 주눅들지 않고 이전에 자신을 가르치던 게누아 백작가의 집사 중 한 사람인 로메시르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반박하였고 파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건 로메시르 집사님의 말이 맞습니다. 사람은 규율 속에서 사회를 만들고 살아가고, 그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은 정직함과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정직이 최고의 미덕 중 하나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도련님께 가르칠 것은 좀 더 어두운 부분들과 지배자로서의 책무 및 마음가짐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글로르나르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뭐라고 반박하려고 했으나 파우스는 그런 금발 금안의 다크엘프 소년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련님은 아직 제 가르침이 필요한 나이가 아닙니다. 그러나 백작 각하와 행정관께서는 굳이 저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글로르나르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파우스는 글로르나르를 혼내거나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대신 옆에서 어느새 신맛나는 사탕을 꺼내서 빨고 있는 루스티에게 사탕 좀 더 꺼내보라고 손짓했고 루스티는 그 비싼 위상도약 거미의 실로 만들어진 위상도약 파우치에서 사탕을 꺼내 글로르나르에게 건네줬다.

글로르나르는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사탕을 입에 넣었고 그 자극적인 맛에 전율이 일어난 얼굴이 되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물론 침착함을 되찾은 뒤에도 사탕을 탐하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보통 인간이나 수인보다 오래사는 엘프라고 할지라도 세상의 격변을 피해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어쩌면 도련님께서 장성하기 전에 올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그걸 걱정하고 계시는 겁니다."



글로르나르는 파우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빠 말은 한귀로 흘려듣고 사탕을 괴롭히는 루스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데스는 다른 둘 보다 한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대충 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귀찮다는 태도가 되었다.

파우스는 창문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려서 계속하냐는 눈빛을 보냈고 백작은 계속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스는 글로르나르의 수준과 성향이 드러날 반응을 보일 이야기를 고르다가 마침 딱 좋은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럼 옛날 어느 왕국에 있었던 일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물레방앗간을 영주로부터 임대... 그러니까 빌려서 운영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방앗간은 마을 옆을 흐르는 작은 강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지요."



파우스는 허공에 빛나는 가루들을 배치해 흐르는 강물과 그 강물의 힘으로 움직이는 물레방아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치 진짜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가루들이 만들어내는 광경에 사탕 먹는데 바쁘던 루스티도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고 글로르나르는 스스로 허공에서 움직이는 빛나는 가루들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감탄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강 상류... 그러니까 강 윗쪽 영지의 남작이 토목공사... 아주 큰 공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크게 공사를 해서 강이 흐르는 방향을 바꿔버렸습니다. 당연히 강의 힘으로 움직이던 물레방아는 멈춰버렸지요."



파우스가 손을 내젓자 강물 역할을 하던 가루들이 공사를 하는 작은 사람 형상으로 배치되었고 회전하던 물레방아가 멈춰버렸다.

작은 사람들이 삽을 들고 땅을 파내서 물줄기를 바꾸는 그 광경은 파우스가 손을 한번 더 휘두르자 이내 멋드러진 콧수염을 기른 뚱뚱한 귀족과 그 귀족 앞에서 곤란해하는 남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백작은 이웃 영지 남작이 무슨 짓을 했건 자기가 시킨 일은 아니니 부부에게 물레방앗간 임대료, 빌려준 값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 부부는 물레방앗간 임대료를 내야합니까? 아니면 내지 않아도 됩니까?"



제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글로르나르는 이제 겨우 4세.

이런 복잡한 사례의 답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지금 파우스가 말한 문제는 애시당초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였다.

위의 사례는 나라에 따라, 법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답이 바뀌는 문제였기에 애초에 글로르나르 같은 어린아이가 완벽한 답을 낼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파우스는 사탕을 아작아작 깨물어먹는 딸 루스티와 뭘 그리 간단한 문제를 내냐는 얼굴로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가져다대고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 아이데스를 보고 말했다.



"네가 말해봐라"


"우애옹?"


"루스티, 너 말고 아이데스 말이다."


"세금 산출 기준이 방앗간 자체에 되어 있는지 아니면 방앗간에서 나오는 부산물의 양으로 결정되는지에 따라 다르잖아."


"네 생각이 맞다.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나는 판정 기준을 물어본 게 아니라 내야할지 내지 말아야 할지를 물었다 아이데스."



아이데스는 정답이 아니라는 말에 발끈하며 뭔가를 더 말하려다 그게 뭐냐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련님의 눈치를 보면서 우물쭈물거렸다.

그렇게 한참동안 아이들 모두 말이 없자 파우스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 뒤의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그 당시 그 왕국의 법에 의하면 부부는 백작에게 돈을 내야했습니다."


"어째서인가요 선생님?"


"그 나라의 세금 징수 기준이 방앗간의 사용여부가 아닌 대여 기간을 기준으로 되어 있었고, 방앗간과 그 일대의 토지는 백작의 소유였지만 그 강의 상류 지역은 국왕에 의해 직접 임명된 남작이 관리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남작은 백작에게 토목공사를 할 거라고 통보를 했기 때문입니다. 백작 역시 자신의 영지의 백성들에게 포고령을 걸어 토목공사가 진행될 거라고 알려줬습니다. 다만 포고령을 읽어주는 포고꾼이 마침 일이 있어서 다른 곳에 가있었기에 포고령만이 내걸렸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백작은 의무를 다했기에 부부가 백작에게 임대료를 내고, 대신 남작에게 소송을 걸었어야 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건... 음... 그러니까...."



글로르나르는 자신의 짧고도 짧은 4살 인생에서 배운 온갖 단어와 지식을 조합해서 파우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해보려고 했으나 끝내 파우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고 파우스는 괜찮다며 빛나는 가루들을 허공에 재배열해서 그림들을 만들어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글을 못 읽는 까막눈이 많은 농가 사람들이 포고령을 읽어줄 포고꾼도 없이 포고령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귀족이나 행정가 출신도 아닌 방앗간을 운영하는 부부가 법에 대해 잘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설령 이 모든 걸 알았다고 해도 남작을 고소하기 위해서는 법원만이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고소장의 복사본을 제출해야 하는 관례가 있는데 다른 귀족령에 멋대로 들어가면 불법침입죄 혹은 탈주죄를 물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려운 단어는 모르지만 파우스가 빛나는 가루들을 움직여 그림을 만들어내며 설명을 해주자 그제야 아이들은 조금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제대로 상황을 이해한 글로르나르는 불만으로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 속의 귀족들에게 항의하듯이 파우스에게 말했다.



"그건 너무해요. 글도 모르는데 어떻게 공사를 할 거라고 알겠어요?"


"어쨌든 부부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물레방앗간의 임대권한을 빼앗겨 강제퇴거 당했습니다. 더 이상 물레방앗간을 쓰지 못하게 된 겁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세상에는 넘쳐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가 쌓이고 쌓여서 법에 대한 불신, 법을 못 믿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하류계층, 평범한 백성들은 법이 귀족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생각하고, 귀족들은 법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악용, 나쁜 짓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련님은 이 호겐 지방을 어떻게 다스리고 싶으십니까?"



글로르나르는 한참동안 말 없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어떻게 호겐 지방을 다스리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다시 질문을 하였다.



"그 부부는 어떻게 되었나요?"



앞으로 물려받을 호겐 지방의 영지들을 어떻게 다스리냐보다 물레방앗간을 빼앗긴 부부를 걱정하는 소년의 순수함이 깃든 황금빛 눈동자를 보면서 파우스는 부드럽게 말했다.



"부부는 1년 농사와 방앗간 운용 수입을 전부 내팽개치고 수도로 올라가 국왕에게 직접 호소, 그러니까 국왕에게 직접 말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국왕은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크게 분노해서 백작과 남작, 거기에 모든 사정을 알고도 그런 판결을 내린 법관을 체포하였지요. 감옥에 들어간 그들은 소금도 치지 않은 찐감자만 먹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지치 않고 국왕은 강의 줄기를 원래대로 복구하라 명하고 부부에게 물레방앗간의 소유권을 넘겼습니다. 하지만 투옥된 귀족들과 법관의 지인들은 국왕이 법을 무시한다고 반발했지요."



파우스의 말에 맞춰 빛나는 가루들이 허공에서 춤추더니 이내 놀라고 있는 왕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빛나는 가루로 그려진 왕은 스스로 움직이더니 화를 내며 귀족들을 체포했다.

체포된 귀족들이 쓸쓸한 모습으로 소금도 치지 않은 찐감자를 먹는 모습을 만들어내던 빛나는 가루들은 이내 처음 보였던 흐르는 강물과 회전하는 물레방아의 모습으로 바뀌더니 마침내 힘을 잃고 파우스가 펼쳐놓은 보자기 위로 떨어져 쌓였다.


그 모습을 본 글로르나르는 생각에 빠진 얼굴이 되었고 아이데스는 따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고, 루스티는 힘을 잃은 마석 가루를 좋다고 만지작 거리면서 모래성을 쌓으려고 하였다.

파우스는 마석 가루로 장난을 치는 루스티를 옆구리에 끼고 글로르나르에게 말했다.



"지배자가 되시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군대와 법을 장악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는 것입니다. 법 위에 서서 악법을 뜯어고칠 힘과 권한을 거머쥐십시오. 그리고 도련님이 지배할 백성들에게 당신이 응당 그걸 차지할 자격이 있다며 환호하도록 유도하십시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완벽한 법 같은 건 없고, 완벽한 법관도 없으며, 완벽한 법 입안자는 더더욱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월의 흐름과 관습의 변화에 따라 옳았던 법도 나중에는 악법이 될 수 있습니다. 법을 고칠 힘과 권한을 얻게 되셨다면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법이 악용되지 않도록 지켜봐야 합니다."


"음... 그러니까 법이 이상하게 되지 않게 계속 보고 있으라는 건가요?"


"예, 맞습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글로르나르는 조금 주눅든 얼굴로 파우스에게 물었다.

그 얼굴에는 자신이 해낼 수 있을거라고 독려해달라는 소망이 담겨있었고 파우스는 마석 가루로 모래 장난을 하려는 루스티에게 인형을 꺼내줘서 주의를 돌리며 말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성군과 명군이 되는 것도, 폭군이 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암군이 되는 것은 굉장히 쉽습니다."


"암군이 뭔가요? 폭군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아는데 암군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직 어린 글로르나르는 어려운 말을 잘 모르기에 파우스가 말한 단어의 뜻을 물었고 파우스는 다시 마석 가루에 마력을 주입해 허공에 띄우고 말했다.



"폭군은 쉽게 말해 제멋대로 구는 사람입니다. 뭐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어요! 가끔 앞마당에서 훈련하는 기사 아저씨들 중에 있는 로스미르라는 형이 그런 사람이죠? 규칙 안지키고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이요."


"..."



파우스는 설마하니 로스미르의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이 잠깐 눈을 굴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하고는 그냥 은근슬쩍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암군은 어리석은 군주를 뜻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폭군이랑 암군 중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요 선생님?"



글로르나르는 순수한 궁금증에 질문을 하였고 파우스는 잠깐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둘 다 나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폭군보다 암군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인가요?"


"폭군 중에는 제멋대로 굴어도 자기가 할 일은 제대로 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암군들은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없으면 나라를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폭군들은 폭군인 동시에 암군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멋대로인데다 일도 제대로 못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파우스의 말에 글로르나르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납득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파우스는 글로르나르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옆의 창문을 바라보면서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를 보냈고 창밖에서 교육을 지켜보던 백작과 행정관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할아버지!"



글로르나르는 문을 열고 들어온 백작과 미니엘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겼고 백작은 엄마에게 안겨 있는 손자에게 웃으며 물었다.



"새로 온 선생님은 어땠니?"


"말이 많이 어려운데 재미있었어요"


"그래 잘됐구나"



백작은 잠깐 파우스에게 따로 이야기 좀 하자는 손짓을 하였고 파우스는 엄마의 품에서 내려온 글로르나르가 루스티와 아이데스와 같이 놀자고 하는 걸 보고 백작을 따라갔다.

백작은 자기 집무실에서 하인들을 시켜 파우스와 함께 차를 마시며 말했다.



"내 손자는 어떻게 보였나?"


"제 딸아이를 보셨겠지만 그 나이대에는 저런 모습이 정상입니다. 도련님은 나이에 비해 총명함이 돋보이니 잘 갈고 닦는다면 빛나는 보석이 될 겁니다. 다만..."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것이 문제입니다."



파우스가 말하는 건 글로르나르가 어처구니 없이 죽은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아서 생긴 좋지 못한 소문에 대한 것이었다.

백작은 대놓고 인상을 쓰면서 파우스에게 단언했다.



"그 문제는 신경쓰지 말게.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 테니"



며칠 전 파우스가 보여준 검사를 통해 아이의 눈에 약간의 돌연변이가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몇 차례나 확인한 백작은 확고한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손자인 글로르나르에게 무사히 가문과 영지를 물려준다는 소소하고도 당연한 그 바람에 방해가 되는 것은 뭐든지 갈아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 백작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파우스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백작은 다시 차를 마시면서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파우스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연유로 자네 같은 지식인이 모험자 같은 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군. 어떤 사연이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들으셔도 별로 재미는 없을 겁니다. 멸망한 왕국의 생존자와 후예가 다른 나라에서 만나 과거를 잊고 다시 출발한다는 어디에나 널려있는 너무 흔하고 흔한 이야기일 뿐이니 말입니다."


"알았네. 더는 묻지 않지."



백작은 알았다고 말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최근 20년 내로 이 대륙 안에서 멸망한 나라들의 리스트를 검색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백작이 파우스와 레아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낸다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었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으며 멸망의 원인 중 하나인 파우스를 죽도록 원망할 자들은 이미 용들의 발톱과 불꽃에 핏물과 잿더미가 되었다.

알바롱가 왕국 생존자들의 후손들은 왜 왕국이 멸망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레아와 파우스, 그리고 알바롱가 왕국을 멸망시킨 용들 뿐이며 그들 중 누구도 알바롱가 왕국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으니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역사의 그림자 속에서 썩어들어갈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성칭 밑의 피와 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0 100화 23.08.13 32 3 17쪽
99 99화 23.07.24 15 1 16쪽
98 98화 23.07.23 16 1 18쪽
97 97화 23.07.22 15 1 23쪽
96 96화 23.07.21 19 1 20쪽
95 95화 23.07.20 16 1 15쪽
» 94화 23.07.20 17 1 21쪽
93 93화 23.07.19 16 1 22쪽
92 92화 23.07.19 11 1 14쪽
91 91화 23.07.19 13 1 20쪽
90 90화 23.07.18 11 2 16쪽
89 89화 23.07.18 13 1 17쪽
88 88화 23.07.18 13 1 19쪽
87 87화 23.07.17 10 1 19쪽
86 86화 23.07.17 11 1 14쪽
85 85화 23.07.17 11 2 15쪽
84 84화 23.07.16 19 1 17쪽
83 83화 23.07.16 14 1 14쪽
82 82화 +1 23.07.16 17 1 14쪽
81 81화 23.07.16 12 1 15쪽
80 80화 23.07.16 11 1 19쪽
79 79화 23.07.15 15 1 20쪽
78 78화 23.07.15 15 1 15쪽
77 77화 23.07.15 13 1 16쪽
76 76화 23.07.14 15 1 24쪽
75 75화 23.07.14 16 1 11쪽
74 74화 23.07.14 15 1 21쪽
73 73화 23.07.14 12 1 16쪽
72 72화 23.07.14 14 1 28쪽
71 71화 23.07.13 13 1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