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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님의 서재입니다.

성칭 밑의 피와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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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굴림실패
작품등록일 :
2023.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3.08.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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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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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7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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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87화

DUMMY

그날은 굉장히 드물게도 파우스가 포션공장에서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평소와 달리 파우스가 공장에서 일찍 퇴근할 수 있었던 건 드디어 공장 책임자로서의 짐이 가벼워진 걸 물주인 게누아 백작으로부터 인증 받았기 때문이다.


엘프 원로 쿠루갈라드와 그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통적 연금술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며 파우스가 만든 포션 공장 설비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공장 설비로 최상급 포션을 만들어 백작에게 선보였다.

최상급 포션을 테스트해보고 만족한 백작은 이쯤되면 믿고 맡길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앞으로는 공장에 쿠루갈라드도 감당하기 힘든 기기 고장 같은 일이 터졌을 때만 파우스를 호출하고 평소의 포션 공장 가동은 쿠루갈라드와 그 제자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물론 백작이 쿠루갈라드를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닌지 제8주간시 쯤에 포션 공장 사무실에서 회의를 끝마치고 퇴근하던 중 파우스의 눈에 들어온 공장 잡일꾼 중에 백작의 저택에서 일하던 시종들과 비슷한 자들이 약초를 옮기고 있는 게 보였지만 쿠루갈라드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기에 그냥 퇴근해버렸다.

파우스는 집으로 가려다가 그래도 직속상관인 나나스 멜린에게 포션 공장 관련 프로젝트가 완전히 종결되었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는 걸 기억해내고 모험자 길드로 발을 옮겼다.



"우우우! 정정당당한 결투에 나선 에칼라드에게 무슨 짓이냐!"



게누아 모험자 길드는 로비에서 술을 마실 수 있기에 평소에도 시끄럽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더더욱 시끄러웠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파우스의 눈에 로비 한쪽의 테이블을 전부 치우고 모험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원 형태로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더 안쪽에는 테이블 위에 은화와 금화를 쌓아놓고 있는 모험자가 초조한 얼굴로 도박에 사용하는 배당율을 기록한 나무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파우스는 그 익숙한 얼굴의 도박사의 뒤로 다가가 물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이타롤?"


"뭐야? 베팅시간 다 끝났... 허억!"



다크엘프 도박사이자 모험자인 이타롤은 싸움구경을 하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뭐라고 하려다가 자기 바로 뒤에 있는 파우스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싸우던 선수들과 구경하던 모험자들은 그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가 파우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피하면서 딴청부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돌아와봤더니 길드 꼴이 말이 아니군. 이건 대체 무슨 소란이지?"



군중이 모인 길드 로비 한가운데에서 싸우고 있던 키 작은 모험자는 파우스의 말을 듣고는 바로 상황파악하고는 다크엘프 모험자를 짓밟고 있던 발을 치우고 휘파람을 불면서 다른 모험자들과 마찬가지로 딴청을 피웠다.



"저저, 저기 부길드장 난 아무 잘못 없어! 다 허락맡고 한 거야!"



모험자이자 유명한 도박사인 이타롤은 절대로 자기 독단으로 진행한 게 아니라는 듯이 군중 속에 있던 길드 직원 놀디엘과 타우리엘을 가리키며 말했고 파우스는 길드 직원들에게 물었다.



"길드장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보고할 안건이 있다."


"잠깐 외근 나가셨는데요."



제 아무리 성격파탄자인 놀디엘이라고 해도 깐깐한 파우스에게 잘못 걸리면 득 볼 것이 하나도 없기에 조심스럽게 말했고 타우리엘은 파우스가 딱히 설명하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술술 상황을 설명하였다.



"마스터 멜린은 아침에 일이 있어서 도시 밖으로 외근 나가셨고 레아 씨는 아까 점심시간 잠깐 지나서 집에 둘째 딸이 넘어져서 다쳤다는 이야기 듣고 반차 내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불법 투기장은 뭔가?"



관리자들이 사정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건 둘째치고 왜 이런 불법 투기장이 모험자 길드 로비 한복판에 열렸는지 추궁하자 타우리엘은 잠깐 놀디엘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는 의미의 시선을 보내다가 한숨을 내쉬고 자백했다.



"저기 조금 작은 모험자는 엘람 왕국에서 온 존이라는 금 등급 모험자인데 처음 이 길드에 왔을 때 잠깐 로스미르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로스미르? 그 녀석은 안 보인다만"


"로스미르는 처음 시비가 붙었던 날에 카라니보르에게 제압당해서 부친에게로 끌려갔습니다."



로스미르의 부친은 게누아 백작 휘하의 기사 중 한 명이고 굉장히 까탈스러운 것으로 유명한 자였기에 파우스는 로스미르의 운명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카라니보르의 개입으로 그 당시에는 문제가 안됐는데 그때 로스미르와 친한 모험자들과 존 사이에 앙금이 남은 채 계속 악화되다가 길드장님과 부길드장님에 레아 씨까지 자리를 비운 오늘..."


"결국 터져버렸다는 건가?"


"칼부림 나기 직전에 결투 도박장에 나오는 검투사들이 하는 방식으로 싸워서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제가 제안했어요!"



놀디엘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고 타우리엘은 한쪽 팔로 놀디엘의 목을 휘감고 다른 손으로 놀디엘의 관자놀이에 주먹돌리기를 먹이면서 파우스에게 말했다.



"칼부림이 일어나기 직전에 놀디엘이 돈 걸고 투기장 형식으로 한판 붙고 감정 훌훌 털어버리라고 한 걸 도박에 눈이 먼 모험자들이 죄다 찬성하는 바람에 그만..."


"이런 즐겁고 신나는 길드 직원 보증 투기 도박이 언제 열릴 줄 알고!"


"옳소! 아까부터 계속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타우리엘은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타우리엘은 계속 말리려고 했지만 한동안 심심했던 게누아의 모험자들이 지금 보는대로 죄다 놀디엘 쪽에 붙어버리는 바람에 놀디엘과 타우리엘을 제외한 다른 길드직원들도 어쩌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파우스는 바텐더이자 베테랑 길드 직원인 쿨캄과 나이 든 접수원 아마리엘 쪽을 슬쩍 바라보았고 쿨캄은 말 없이 미안하다는 시늉을 하고 아마리엘은 그냥 웃고 있을 뿐이었다.


파우스는 무표정, 무감정한 얼굴로 타우리엘의 퇴진을 요구하는 모험자들을 노려보았고 로비는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파우스가 천천히 시선을 옮기면서 모험자들의 얼굴을 기억하던 중 존이라고 불린 키 작은 모험자와 눈이 마주쳤고 존은 파우스의 시선에 금 등급 모험자임에도 불구하고 포식자에게 노려진 작은 동물처럼 움찔거렸다.

파우스는 잠깐 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로비에서 싸우면 길드 집기 파손 위험이 있으니 할 거면 차라리 안쪽 훈련장에서 해라. 타우리엘, 미안하지만 심판 좀 봐주게."


"이예쓰! 부길드장이 허락해줬다!"


"내가 건 돈 날릴까봐 초조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술 가져와! 술 없이 검투 구경을 어떻게 해!"


"쿨캄, 이타롤 녀석이 돈 들고 튀지 못하게 감시 좀 해주게."


끄덕



허락이 떨어지자 모험자들과 도박사들은 우르르 길드 안쪽의 훈련장으로 몰려가버렸다.

이동 중에 슬쩍 배당률 기록표를 고치려던 이타롤은 파우스가 쿨캄에게 말하는 걸 듣고 손을 멈추고 얌전히 걸린 판돈을 테이블 째로 옮겼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존에게 당한 다크엘프와 엘프 모험자들이었다.

이들은 파티원들의 부축을 받아 길드 의무실로 옮겨졌고 파우스는 슬쩍 훈련장에 구경가려는 놀디엘을 붙잡고 텅 비워지고 테이블과 의자가 한쪽 구석으로 치워진 로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놀디엘, 원상복구 시켜놔라."


"이걸 전부요?"


"전부"


"혼자서요?"


"도움 요청까지는 허락해주마"



모험자들이 투기 도박을 벌이기 위해 구석으로 치워진 테이블과 의자의 숫자가 많은 것도 문제지만 모험자 길드 로비 펍의 테이블과 의자는 험악한 모험자들의 행패를 견디기 위해 굉장히 튼튼한 재질로 되어 있다.

그리고 보통 튼튼한 가구는 그만큼 무게가 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파우스도 놀디엘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까지는 허락해준 것이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다들 왜 외면하는 거야!"



평소에 인격파탄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던 놀디엘이 도움을 요청했으나 다른 길드 직원들은 외면해버렸다.



"다들 정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즐기고 있었잖아?! 이릴레스! 너는 돈까지 걸었잖아! 최소한 넌 도와줘야지"


"글쎄, 놀디엘... 내가 돈을 걸었다는 증거가 있니?"


"크으으윽!"



놀디엘은 결국 혼자가 되었고 훌쩍거리면서 파우스에게 매달리려고 했지만 파우스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돈 걸었으면 이릴레스한테 부탁해서 대신 수령받아라."


"너무해요 부길드장님! 제 워라벨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죠?!"


"너의 양심과 함께 날개가 돋아나서 훨훨 날아갔다. 그리고 지금부터 빨리 치우지 않으면 퇴근시간에 길드 밖으로 못 나갈 거다."



파우스는 조금 있다가 와서 확인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고 천하의 놀디엘이라도 여기까지 왔으면 얌전히 일을 해야했다.

놀디엘은 훌쩍거리면서 장정 2명이 들어야 할 나무와 금속 복합재질의 테이블과 의자를 옮겼고 파우스는 그동안 길드 직원 구역으로 들어와서 아마리엘에게 모험자 존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게누아 모험자 길드 모험자 명부에는 이전에 존에게서 받은 금 등급 플레이트에서 확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고 파우스는 놀라운 점을 알 수 있었다.



"인간?"



플레이트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모험자 존은 키가 작지만 하플링이나 노움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엘람 왕국의 모험자 길드에서 처음 등록을 한 존은 엘람 왕국에서 2년 정도 활동을 하다가 대륙 서부의 왕국인 바이타트로 넘어가 그곳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던 중 대륙 중부의 왕국 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참전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시간을 들인 뒤 엘람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시기는 전쟁 막바지에 엘람 왕국이 라르사 왕국을 배신하기 직전이었고 얼마 안 있어 엘람 왕국의 배신으로 라르사 왕국의 수도가 연합군에게 넘어가며 전쟁이 끝나자 바이타트 왕국으로 돌아온 존 앞으로 엘람 왕국의 막대한 포상금이 전달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바이타트 왕국으로 다시 돌아온 존은 엘람 왕국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포상금을 전부 최상급 장비 구입에 사용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기에 갓 진입한 뒤 어떤 이유로 폭주해서 마을 몇 개를 날려버린 어린 그린 드래곤을 토벌하는 대규모 레이드에서 대활약해서 금 등급으로 랭크 업을 하였다.


그런데 그린 드래곤 토벌 직후 한동안 모험자 길드의 의뢰를 맡지 않다가 그 다음에 맡은 의뢰에 바이타트 왕국 모험자 길드 인장이 아니라 아나비 왕국 모험자 길드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나비 왕국 모험자 길드의 의뢰 다음에는 마그렙 왕국 모험자 길드의 인장이 찍혀있었고 그 다음 의뢰에는 사비니 왕국 모험자 길드의 인장, 그것도 레가툼 시의 모험자 길드 인장이 찍혀 있었다.



"금 등급으로 랭크업 한 계기가 된 그린 드래곤 토벌로 트러블이 생겨 바이타트 왕국을 떠나 아나비 왕국과 마그렙 왕국을 거쳐 사비니 왕국으로 들어왔다는 겁니까?"


"걸려오는 시비를 넘기지 않고 상대를 박살내려는 성향이 강하던데 어린 그린 드래곤 토벌 때 생긴 트러블로 바이타트 왕국 모험자 길드와 갈라서지 않았을까요?"



나이 든 다크엘프 접수원인 아마리엘은 파우스와 같은 추측을 하고 있었는지 동의했고 파우스는 아마리엘에게 물었다.



"마스터 멜린께서는 이 자에 대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한동안 지켜봤는데 걸려오는 시비를 넘기지 않고 상대를 박살내려는 성향만 제외하면 괜찮은 모험자니 내버려두자고 하셨습니다."


"와아아아아!"


"크하하하! 믿고 있었다고 존 형씨!"


"으아아악! 내 돈이이이이!!!"



그때 길드 건물의 방음 능력을 초과하는 엄청난 음량의 함성이 훈련장 쪽에서 들려왔다.

아무래도 결판이 난 모양이었고 파우스는 모험자 명부 닫아 책장에 돌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뜻밖에도 다른 길드 직원들이 놀디엘을 도와서 테이블과 의자를 원위치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파우스가 존에 대한 정보를 열람하는 사이에 다른 직원들의 설득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놀디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도박에서 패배해 일찍 훈련장에서 나온 모험자들에게 당신들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술 마시고 싶으면 테이블과 의자 원위치를 도우라고 윽박질러서 안 그래도 돈을 잃어서 속이 타는 패배자들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 모험자들은 어느새 로비로 나와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파우스를 보고 기가 눌려서 얌전히 놀디엘의 지시에 따라 테이블과 의자를 원위치 시키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많던 테이블과 의자는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갔고 훈련장에서 제대로 정산 받아서 두툼해진 주머니를 들고 나온 도박판의 승자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정돈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 길드 바텐더 쿨캄에게 술을 주문하였다.

마지막으로 훈련장에서 나온 것은 옷에 먼지가 달라붙은 존과 심판 타우리엘, 정산 끝내고 정산에 사용한 테이블을 다시 로비로 가지고 온 도박사 이타롤이었다.



"아 맞다 이타롤, 내 돈은?"


"타우 누님! 내가 테이블 옮기느라 손이 부족한데 꼭 그런 소리 해야겠어? 좀 도와주고 말하던가!"



아무래도 놀디엘 몰래 타우리엘도 돈을 걸었던 모양이었다.

타우리엘은 투덜거리면서 이타롤과 함께 테이블을 옮기려다가 파우스와 눈이 마주치고는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고개를 숙였고 이타롤이 그걸 보고 화를 냈다.



"누님!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사내가 되어서 테이블 하나 못 옮겨서 여자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보통 테이블이 아니잖아!"



길드의 교관인 타우리엘이 파우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타롤과 함께 테이블을 원위치 시키는 동안 모험자 존은 술을 주문하는 모험자들로 다시 시끌벅적해진 길드 로비를 말없이 빠져나가려다 다시 파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자기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러지 못했군. 게누아 모험자 길드의 부길드장 파우스일세."


"바, 반갑습니다. 존... 입니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안에서 이야기해도 괜찮겠나?"



존은 파우스를 보고는 호랑이를 만난 토끼마냥 몸서리쳤지만 파우스는 존에게 잠깐 이야기하자며 모험자 길드의 직원구역으로 통하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고 존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구역의 응접실로 안내된 존은 다크엘프 길드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차를 받았지만 파우스와 마주보고 있는 것이 영 불편한 것 같았다.

파우스는 차와 다과가 준비되자 먼저 존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다친 곳은 없나? 이런 일을 제지해야 할 길드직원들이 되려 도박판까지 열면서 싸움을 부추긴 것에 대해 내가 대신 사죄하겠네."


"아, 아닙니다. 모험자 일을 하면서 그럴 수도 있는 거죠."



포식자 앞의 피식자처럼 본능적인 공포감에 떨던 존은 파우스의 사과에 조금 긴장이 풀린 것 같았고 파우스는 먼저 찻잔에 우유를 담은 뒤 홍차를 타 한 잔 마시고 말했다.



"자네도 느꼈겠지만 이 사비니 왕국 남부 지역은 지난 전쟁으로 촉발된 인종갈등이 봉합되지 않은 상태일세. 게다가 몇 년 전에 있었던 이웃도시 아퀼레이아에서 시작된 인종차별로 인한 암살 사건으로 엘프와 인간, 엘프와 다크엘프, 다크엘프와 인간 모두 사이가 거칠어진 상태라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시비가 걸리는 일이 흔해졌네. 혹시 아퀼레이아 쪽으로 갈 생각이라면 차라리 레가툼이나 마그렙 왕국 남부의 해안도시를 추천하네."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마그렙 왕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좀 그렇고 한동안은 게누아에 머물고 싶습니다."



파우스는 대화를 하는 내내 존을 관찰했다.

차를 마시는 자세, 차와 우유 혹은 다른 것들을 배합하는 방식, 다과가 있는 접시 중에서 어떤 다과에 반응하는지, 특정 단어에 대한 얼굴 근육 반응과 호흡의 떨림과 시선 처리, 말을 하기 전에 생각하는 시간의 차이 등 수많은 정보를 조합하면서 파우스는 상대를 파악하려고 노력했고 이야기가 잘 끝나서 존이 다음 의뢰를 수주할 때 파우스나 레아가 도움을 주겠다는 약조까지 한 뒤 응접실에서 나가는 존을 보면서 파우스는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존은 라르사 왕국 출신이며 발 혹은 다리 쪽에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엘람 왕국에서 활동하던 모험자라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이 라르사 출신이라는 걸 깨달은 건 차를 마실 때 라르사 왕국의 풍습이라 대륙 남부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스콘의 밑바닥에 잼을, 위에는 크림을 바르는 행동을 무의식 중에 했던 점 때문이었다.


몇 년 전 레아와 함께 대륙 북부의 에트루리아에서 남부의 사비니 왕국으로 내려오면서 라르사 왕국과 엘람 왕국을 지나온 파우스는 가깝지만 확연히 다른 두 왕국의 풍습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엘람 왕국은 스콘을 반으로 갈라서 크림을 바르고 잼은 홍차에 넣어 마시는데, 라르사 왕국은 스콘의 밑바닥에는 잼, 위에는 크림을 바른 뒤 옆으로 세워놓고 차에 곁들여 먹었다.

이 풍습의 원조인 대륙 북부의 어느 나라는 더 다양한 방식으로 차를 즐기지만 이 문화가 대륙 중부로 전파될 때 라르사 쪽에 전파한 사람과 엘람 왕국에 전파한 사람의 취향이 달라 이런 차이가 생겨났다고 한다.


발 혹은 다리에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은 이야기를 하던 중간에 존이 훈련장에서 싸우다가 바짓단이 올라간 걸 뒤늦게 깨닫고 바지를 정돈할 때 살짝 발목 부분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존의 발목에는 단순히 모험 중에 입은 상처라고 보기 힘든 고문도구를 가죽 밑에 쑤셔 넣어서 생긴 흉터와 죄인들을 구속하는 족쇄를 최대한 조여서 채운 채로 시간이 많이 지나 남겨진 흉터가 있었다.


라르사 왕국 사람, 그것도 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자가 대륙 중부 왕국 전쟁 막바지에 엘람 왕국 쪽으로 가서 용병으로 일하고 돌아왔는데 바이타트 왕국으로 돌아온 존 앞으로 라르사 왕국의 뒤통수를 친 엘람 왕국의 막대한 포상금이 전달되었다?

이건 존이 엘람 왕국의 용병으로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조국을 향해 칼을 겨눴고 어느 정도 인정받을 정도의 공을 세웠다는 소리였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어둡고 참혹한 이야기로 연결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미리 불안요소를 파악해두는 게 좋다고 판단한 파우스는 존에 대한 조사를 의뢰하기 위해 타티아 시의 모험자 길드와 직통으로 연결된 채터박스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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