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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나락 일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snownun
그림/삽화
원one
작품등록일 :
2020.07.17 19:55
최근연재일 :
2020.12.07 19:54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2,494
추천수 :
228
글자수 :
196,698

작성
20.10.14 22:47
조회
29
추천
5
글자
14쪽

불멸자와 필멸자(삽화)

DUMMY

"오, 뭐야. 또 만났네."


나의 이런 걸음을 멈추게 한 건, 다름아닌 '지크프리트'였다.


뭔가 이상하다. 지크프리트는 분명 죽었을 것이다. 죽지 않은 게 이상하다. 상대는 드래곤로드였다. 드래곤로드와 맨몸으로 싸워서 멀쩡히 살아돌아온다니, 말도 안된다.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니, 뭘 생각하는 거지? 저 자와 엮이면 다시 새로운 인연이 생기고, 그 인연은 죽음이라는 칼날에 끊어져버린다. 그런 뻔한 인연, 처음부터 생겨선 안된다. 그러니, 내가 직접 끊어버려야겠지.


"비켜라. 지금 당장 꺼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사실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나에게 공포를 느끼며 도망치게만 만들면 됐다. 그렇게 되면 나와 연관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조소를 짓더니, 이내 자신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어 자살했다.


.........


......??


잠깐....


이게 도대체 뭔...?


"지크프리트!!"


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


"...푸흣...하하하하하하!! 반응 재밌네! 아픈 거 참길 잘했어. 분위기가 바뀌었길래 뭔가 했는데, 그냥 연기였을 줄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평범하게는 있을 수 없는, 이상하고도 기묘한 광경을 목도한 난 그저 넋을 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나를 뒤로하고 시원하게 웃는 그였지만, 나의 머릿속엔 의문점만이 생겨나 정착해갔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을 수가 있지? 어떻게 되살아난 거지?


"...하하...설명해줄게. 난 불로불사. 즉, 절대로 못죽어."


불로불사...라고?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죽지 못한다는 점에선 뭔가 동질감이 느껴졌다. 죽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옆에 있던 그 거인은 어디갔어?"


...난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말해 보려 해도, 턱이 움직이질 않았다.


깊은 공백. 짧은 정적.


지크프리트는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이 쓴웃음을 내뱉고선 하늘을 보며 말했다.


"......흐음...그랬던 거구나."


그는 잠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뭐, 나도 그런 일은 많이 겪어봤으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학살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난 나의 검을 보았다. 본래 새빨간 빛을 띄고 있어 수많은 선혈이 묻었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검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내 손엔 굳어버린 피와 흘러가는 피가 선명하게 묻어있었다. 어째서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자책했다.


그가 나에게 바란 건 내가 사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수없이 다른 생명들을 빼앗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가 살기만을 바랬다.


"...그렇군. 난 도대체......."


깨닳음, 후회.


내 손에 흩뿌려진 피를 보았다. 방금까지도 누군가를 죽인 흔적이다. 손이 떨려왔다. 내가 한 모든 일을 후회했다. 과거의 기억이 되돌아오고, 나의 죄악감은 커져만 갔다.


고통스럽다. 지금까지 내가 준 고통에 비하면 턱도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그 고통은 점점 더 나의 모든 걸 침식해나가 몇 배는 더 부풀어졌다.


생각해보니 잊어버린 게 하나 있었다. 바로 화이트윈드의 행방이다. 그의, 우리들의 목표였던 일.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존재였는데....


잠깐.


"이봐, 화이트윈드는...그 드래곤로드는...어떻게 되었나...?"


왠지 모를 불안함, 불길함.


"어? 아, 그 드래곤? 걔라면 이미 죽었어. 예전에 갑자기 나타났을 때."


순간 잘 못 들었나 했다.


죽었다고? 그것도 그 때? 그럴 리 없다.


우리가 그를 찾기 위해 여행했던 게 전부 쓸모없는 일이었다니.


말도 안된다.


그럼 그의 삶도, 그의 죽음도, 완전히 의미없는 것이었다는 건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 갑자기 왜그래!?"


우리의 여정이,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가, 그의 죽음이, 그가 암묵적으로 나에게 남긴 일이, 모두 다 의미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난 한없이 좌절하며 절규했고, 갈라진 괴성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다.


차라리 꿈이라고 해라. 이 모든 게 꿈이었다면. 그래, 분명 눈을 뜨면 그가 있을 것이다. 분명 눈을 뜨면.......


...


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눈을 뜰 수도 없다.


꿈을 꿀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다.


그 사실이, 내 뇌리에 새겨졌다.


난 그저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허무함에 잠겨 익사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슬픔에 빠져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와 지크프리트, 우리 둘 빼곤 아무도 없는 눈밭에, 나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렸다.


팔도 힘이 풀렸다.


몸을 수구리며 땅을 내려쳤다.


"어째서!!!! 어째서!!!!!!"


대답할 사람 없는 허공에 소리를 질렀다.


이런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이런다고 해서....


무력하고도 무능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그런 현실이 너무나도 잔혹하고 허무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아무리 눈을 감아보려 해도, 아무리 잠에 들려 해도, 나의 공허하고도 붉게 빛나는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차갑고도 냉혹한 현실 뿐이었다.


이 현실로부터 나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지만, 난 결국 제자리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치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좌절했다. 자신의 무능함과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슴 속의 여운은 아직도 떠나지 않고 남아 따끔한 고통을 주었지만, 내가 느끼고 있는 건 없었다.


이상한 느낌.


"...미안, 아인즈...괜한 말을 해서...."


그가 날 위로하려 말을 꺼냈다.


그를 질책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도 몰랐었으니까. 괜한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난 존재하지도 않는 화이트윈드를...평생토록 찾고 있었을 테니까.


난 오히려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살짝 그늘이 져 있었다.


"나도, 이렇게 죽을 수 없는 몸으로 살다 보니 잃은 게 많아. 자살도 많이 해봤어. 목도 매달아보고, 칼 마흔 자루로 전신을 꿰뚫어도 보고, 마법으로 머리 자체를 없애 보기도 했지. 결말은...뭐, 말 안해도 알겠지만 말이야. 난 그 속에서 중요한 걸 얻었어. 아주,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뻔한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뻔한 이야기가 너에겐 구원을 내려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짧은 정적 사이의 한숨. 이어지는 말.


"나아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리고 부딫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멈춰 서서 부서질 수는 없잖아? 끝없이 나아가며, 끝없이 부딫히며, 극복해낸다면, 분명, 그 앞은 좋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네가 나아갈 길을 생각해봐."


난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난, 스스로 나아간 적이 없었다. 항상, 다른 누군가의 영향으로 나아갔지, 나 스스로 진정한 목표를 찾으려 했던 적은 없었다.


그는 내 반응을 유심히 보더니 만족한 듯 웃고는 이내 떠나버렸다.


"미안, 해골. 난 이만 여행을 떠나러 가야 해서.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된다면 좋겠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된다면, 이라. 그래,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


더 이상 동료의 죽음에 속박되어 길을 멈추고 싶진 않았다. 다른 길을 걷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나만의 길을 걷고 싶다. 하지만, 나에겐 불가능하다. 나에겐 아직, 하나의 죄가 남아있으니까.


오직 속죄만을 위한 여행을, 나아가겠다.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는다. 이 철칙만을 내세워 길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이 땅이 이렇게나 넓었었나, 새삼 느껴졌다.


나의 길, 그 끝이 어떤 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아간다. 그 끝이 죽음이더라도, 속죄라 받아들일 것이다.


터벅.


터벅.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신비의 결정까지 닿았다. 쌓여있는 눈 속에서도, 영롱한 빛깔이 사라지질 않을 정도의 아름다운 보석. 이 보석의 가치는 그 누구도 정하지 못할 것이다.


난 그 옆에 나의 붉은 검을 꽂아넣었다. 더 이상 나에게 검은 필요없었다. 이게 다른 누군가의 희망이 되리라.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멈춰라."


길의 끝에서 날 부르는 소리. 난 그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에 서 있던 건, 로알과 벨리우스, 그리고...반쪽짜리의 얼어붙은 브로치를 한 아이였다.


드디어...드디어 속죄할 수 있겠군.


그들의 얼굴은 경멸과 격노, 혐오감이 잔뜩 쌓인 모습이었다.


"드디어 혼자가 되었군."


묵직한 로알의 목소리가 분노를 표출했다.


"미네르바 씨에게서 들었다. 얼어붙은 팔을 쓴다라. 그런 너에게 대항할 무기도 얻었다. 그 지하실의 시체 뒷편에 있더군. 이름은 주와이외즈랬나, 미네르바 씨는 이 선택이 날 집어삼킬 거라고 말리셨지만, 난 그럼에도 널 심판하겠다! 이 한 몸을 버리더라도!!"


이어지는 벨리우스의 말.


"네놈이 마을에서 학살을 일으킨 것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아무래도 반란을 일으키는 놈들 때문에 위험한 상태였는데, 네놈이 그런 짓거릴 하는 바람에, 결국 도망친 나를 제외한 웨어울프 전체가 몰살당했단 말이다!! 얌전히 죗값을 받아라."

"그의 말이 맞다. 아인즈. 넌 죄 많은 존재지. 처음 봤을 때부터, 불길함이, 기분 나쁜 오싹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건 아마 네 더러운 영혼 때문일 거다. 니가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를, 아문센을 참혹하게 찢어발겨놓았던 그 광경은 아직도 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그만 죽어버리는 게, 네 인생의 유일한 가치다! 죽어라! 아인즈!!"


뭐라...고? 나 때문에 웨어울프들이 몰살당했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잠깐, 확인해볼 게 있다.


"피어리는...피어리는 살아 있나...?"

"돌아가셨다!! 날 지키시다가, 결국은...."]


벨리우스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이 더욱 구겨져갔다.


결국 전부 다 내가 죽인 건가....


내 정신은 거기서 무너져버렸다. 좌절하고 싶지 않았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들을 죽인 거다. 다름 아닌 내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마을의 동료를 두 명이나 죽인 거다.


내가 좌절할 틈도 없이, 벨리우스의 대검과 로알의 주와이외즈가 나의 늑골을 부쉈다. 피할 생각은 없었다. 일부러라도 맞으려 했다.


"...저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이게 나의 유언이었다. 겨우 사과 한 마디론 부족하다 해도, 내가 죽는다면 그걸로 속죄는 될 것이다.


......


오싹하다. 다신 느끼고 싶지 않았던 불길함. 그 불길함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불안함이 전신을 뒤덮는다. 뭐지?


앞을 알 수 없는 삭막한 공포가 내 눈앞을 가로막는다. 아니, 안된다. 지금 와서? 이제 그만 죽어버리고 싶다. 제발. 제발. 제발.


한기가 내 몸을 타고 올라온다.


"물러나게ㄴ...!!!!"


한 발...늦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어째서!!!!!!!!!!!!!!!!어째서!!!!!!!!!편히 죽여주질 않는 건가!!!!!!!!!!!!!!!!!!!!!!!


난 어떻게든 그 둘을 밀쳐내려 했으나 나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한기가 내 주변을 휘감았고, 그대로 얼려버렸다.


뒤에서 이 광경을 본 아이의 얼굴은, 마치 증오와 분노, 슬픔, 허무함이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깊고 깊은 어둠에 잠겨버렸다. 젠장...젠장젠장젠장. 젠장!!!!!!!!!!!!!!!!


아이의 새카맣게 죽어버린 눈이 날 응시했다. 차라리 공포에 질려 도망쳐버렸으면 했다.


그 아이는 점점 더 나에게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쓰러진 나의 머리를 내려쳤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이대로 죽는다면 좋겠지만, 아이의 연약하고 나약한 팔로는 내 머리에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저 절규하며 로알의 손에 있던 주와이외즈로 내쳐칠 뿐이었다.


어떤 말이든 하려 했지만 입이 도저히 열리지가 않았다.


결국 힘이 다했는지 아이는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눈 속에 파뭍혀 쉬어버린 목소리로 울고 있었다.


"흐윽...크흑...."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 아이의 모습을 계속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막아섰던 건 나였다.


후회, 절망, 죄책감, 무력함.


이 모든 감정이 날 옳아매고, 끌어당겨 일어설 힘조차 주지 않았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눈 속에 파뭍혀서 쓰러진 나의 늑골엔 한 자루의 검, 주와이외즈가 꽂혀 있었다.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몸은 움직일 수 있었다.


깨져버린 늑골은, 파란 얼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


할 말이 없었다.


할 일도 없었다.


속죄마저 무산된 지금의 내게, 앞은 없었다.

나락 일대기 삽화3 희망.png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벌써 조회수가 1000을 넘었네요!!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 가끔씩 읽어주시는 분들, 모든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특히나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화에는 아인즈의 내적 고통과 좌절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보고 싶었습니다! 그 감정이 읽는 분들께 잘 전해졌는 지는 몰라도 말이죠....


보너스!

이 이야기는 지크프리트가 화이트윈드와 마주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참. 그 둘은 일단 보냈고, 너만 상대하면 끝이네.”


 난 나의 검을 꺼내들었다. 예전에 레인이 해준 ‘각인’, [무기 제작]. 이 각각을 통해 내 손으로부터 한 자루의 주홍빛 검을 만들어냈다. 내가 별다른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은 것도 이게 있으니까다.


 전투 준비를 마친 나에게 드래곤로드로 보이는 한 드래곤이 말을 걸어왔다. 한 마디, 한 음절마다 담긴 위압감과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이 정도쯤 별 거 아니었다.


 “호오...꽤나 특이한 마법을 쓰는 구나....”


 쟤가 뭘 말하든 의미는 없다. 그냥 무시하자. 난 그저 저 놈을 처리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마안이랬지? 그 마력을 볼 수 있는 거.”


 내가 말을 끊고 무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드래곤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인간인 주제에 그런 걸 알다니...유식하군...그 점은 칭찬해주마....”


 오만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씹어먹을 만큼 강력한 힘이 있기에 가능한 거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미안하지만, 난 인간 아니야!”


 난 이 말과 동시에 달려가 그의 오른팔을 베어냈다. 칼날의 길이가 짧아 제대로 된 상처는 주지 못했지만, 어차피 소모전으로 갈 거라 상관은 없다. 죽어도, 다시 재생하면 될 뿐이다. 난 불멸자다. 그 어떤 상처도 회복하고, 그 어떤 괴로움도 이겨내며, 세상 모든 죽음에 통달해 일어나는 존재다.


 내 일격에 맞춰주듯 그의 발톱이 날아왔다. 당연하게도 난 그 발톱에 갈갈이 찢겨 끔살당했다. 그리고 되살아나 그의 발톱을 모조리 잘라버렸다. 한 번 죽으면 검을 다시 꺼내야 해서 마력을 많이 잡아먹긴 하지만 마력량이 무한해서 문제는 없다.


 죽지않는 내 모습을 본 그 드래곤의 표정은 꽤나 볼만했다. 처음 보는 광경인 만큼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걸 전부 짓밟아버리는 오만이 공존하는 그런 표정.


 “...오호...분명 죽였을 터인데...살아 있다니....”

 “말 했잖아! 인간 아니라고!”


 솔직히 나도 내가 뭔지는 모른다. 그냥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다는 점 밖에 없다.


 의미 없는 소모전의 반복이지만 체력이 소모되는 건 저 드래곤 뿐이다. 난 죽어도 되살아나듯 체력도 순식간에 회복된다. 사실상 체력 소모가 없다고 봐야 하리라.


 손가락을 자르고, 짓이겨 눌러지고, 날개를 조각내고, 던져져 박살나고, 목을 베고,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고, 이를 무한히 반복했다.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 드래곤의 움직임도 둔해지며 더욱이 약점을 밝혔다. 남은 건 그 약점을 공략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목을 두동강 내버리는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이걸로 끝이다. 잘 가시지. 쓰러진 드래곤의 시체에서 유용한 부분들을 챙기고, 나머지는 바다에 버린다. 이런 깨끗한 풍경이 피로 뒤덮혀서야 보기 안좋으니까.


 아...생각해보니 그 둘을 날려보내서 이제 안내해줄 사람이 없다. 망했네. 뭐, 혼자 돌아다니던가 해야지. 아쉽구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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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풀려가는 이야기 +2 20.12.02 9 1 12쪽
41 얽히고 얽힌 이야기 +2 20.11.28 16 1 11쪽
40 수수께끼 +2 20.11.25 15 1 15쪽
39 습격 +2 20.11.20 16 1 14쪽
38 지식 쟁탈전 +2 20.11.17 19 2 16쪽
37 두 개의 동굴 +2 20.10.30 31 3 13쪽
36 드래곤 +4 20.10.25 24 5 14쪽
35 마법의 검사 +2 20.10.22 31 4 10쪽
34 신비의 결정, 푸른 세상 +6 20.10.20 33 6 11쪽
33 2부-창백의 일대기 +2 20.10.17 44 4 9쪽
32 하나의 육체, 두 명의 영혼, 동일한 운명. +6 20.10.16 29 5 13쪽
» 불멸자와 필멸자(삽화) +4 20.10.14 30 5 14쪽
30 반복되는 하루의 끝 +4 20.10.12 19 5 11쪽
29 복수의 여정 +8 20.09.23 40 7 13쪽
28 허무함(삽화) +4 20.09.19 37 4 12쪽
27 되돌아가다 +8 20.09.13 33 6 15쪽
26 되돌아오다 +6 20.09.08 32 5 15쪽
25 불사의 존재(삽화) +2 20.08.31 50 3 13쪽
24 결전의 날(삽화) +8 20.08.17 58 7 19쪽
23 다시 만난 웨어울프들 +6 20.08.16 40 6 10쪽
22 지하실 +4 20.08.14 33 5 12쪽
21 괴뢰와 마녀 +6 20.08.12 40 6 9쪽
20 잠시의 휴식 +2 20.08.10 35 6 12쪽
19 베어내지 못했던 것 20.08.08 29 4 9쪽
18 베어내지 못하는 것 +2 20.08.02 37 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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