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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나락 일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snownun
그림/삽화
원one
작품등록일 :
2020.07.17 19:55
최근연재일 :
2020.12.07 19:54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2,489
추천수 :
228
글자수 :
196,698

작성
20.10.12 21:26
조회
18
추천
5
글자
11쪽

반복되는 하루의 끝

DUMMY

난 그대로 쓰러져 눈에 파뭍혔다. 숨을 쉴 수는 없었지만 마치 질식한다는 게 뭔지는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손들이 나를 저주하며 잡아당기는 느낌이다. 나의 모든 게 잠식되어, 사라져간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은 모두 다 자주빛으로 흐려져 그 형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얼핏 보이는 나의 내면은 오직 검은빛만을 띄는 칠흑의, 나락의 세계였다. 그리고, 모든 것에 휘몰아치며 날 형체도 없이 비틀어버린다. 잘못 본 거겠지. 아마 기분탓이리라. 환영이다. 환상이다. 저주 탓이다. 분명 그녀가 저주를 걸어서 날 고통받게 하는 것이리라.


............


세상이 원래의 빛을 띈 건 반나절이 넘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난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을이라고 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히 처음 보는 풍경이다. 사실 이 대륙은 지형이 전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지만 약간씩 다른 점이 있었다.


그저 내 옆에서 앉아 있던 에피메테우스가 걱정하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여긴 아마 남서쪽일 거야."


어떻게 그 작은 지도를 보고 온 건지 조금 신기하게도 느껴졌지만, 그보다 그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는 게 더 중요했다.


"...설명해주겠네......."


나는 다시 기억을 열어보았다.


"크...윽...."


고통스럽다. 나의 과거, 그들과 있었던, 그 모든 기억이 나를 집요하게 괴롭혀왔다. 수많은 저주의 목소리가 날 매도했고, 죽으라는 전언만을 전달했다.


내가 고통을 호소하자 에피메테우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말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억하기 힘들다면 말 안해줘도 돼."

"...고맙네...."


결국 설명하는 걸 포기한 난 일어나서 다시 이동할 채비를 하였다. 시간은 밤에 가까웠지만, 어느정도 이동하는 건 괜찮을 것이다. 게다가 날도 맑다.


남서쪽은 처음 와본다. 남서쪽엔 지형지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기껏 해봐야 작은 언덕 몇 개 정도. 하지만 이런 날씨엔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가 훨씬 더 수월하다. 적어도 눈 같은 게 쌓여서 사라지진 않으니 말이다.


벌써 밤인가. 좀 더 멀리 가려 했지만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동하긴 힘들다. 우리들은 주변의 언덕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했고, 에피메테우스는 잠이 들었다.


이번 밤도 별 일은 없었다. 다행이로군.


오늘은 남서쪽의 가장자리에 가보기로 했다. 계속 돌아다니며 찾아봤지만 여긴 숨을 만한 장소도,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남서쪽의 가장자리는 축복받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하얀 빛 없이 오직 푸르고 미지근한 공기만 떠다니는, 그런 길고 얇게 퍼진 축복받은 대지가. 그 끝, 바다에는 황색의 모래사장 해변과 잿빛의 바위들이 펼쳐져 있었다.


동화에서나 봤을 법한 그런 풍경이다.


모래는 흙과 비슷하지만서도 보슬보슬한 게 조금 흐르는 물같았다. 하지만 물과는 다르게 거칠고 딱딱했다. 특이한 느낌이다.


저 멀리의 바다를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바다. 그 무한함은 마치 허무함을 표하는 듯했다.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전부 헛된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불길함이 올라오면서도, 다시 기어들어간다. 이 불안함은, 아마 기분탓일 것이다. 그녀의 저주가 아직까지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거겠지.


...아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니다. 무의미하지도 않다. 무조건 화이트윈드를 찾아내서, 복수할 것이다. 어떻게든, 몇 일,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이 모든 생을 바치더라도. 이번에만큼은, 내 손으로 이루어내고 싶다. 더 이상 타인의 손을 빌리는 짓따위 하고 싶지 않다.


"이제 가지 않겠나?"


담담한 나의 목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바위에서 일어나 다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제 얼어붙은 대지의 탐색은 끝났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말이다. 화이트윈드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지 모르니 계속 와봐야 겠지. 이게 바로 그를 찾는 게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이유다. 숨어서 화이트윈드를 기다리고 싶어도, 그 정도 되는 드래곤이라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기척 따윈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계속 이동한다면 눈보라에 숨어 정확한 정체를 숨길 수도 있고, 기척을 눈치채더라도 이 땅에 널린 생명체 중 하나로 느낄 것이다. 괜히 부자연스러운 짓을 하다간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들은 총 3~4일에 걸쳐 저주받은 대지에 달했다. 하지만 저주받은 대지에 가긴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그야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거센 눈보라가 시도때도 없이 쏟아지고 있으니. 길을 잃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한다. 추위는 별 문제가 없었다. 여긴 극한의 대지와 비교하면 약한 수준인 데다 에피메테우스 같이 서리 거인들은 냉기에 어느정도의 내성을 지니고 있어서 문제는 없다.


예전에도 한 번 왔었는데, 여기가 이렇게 가기 힘들었나.


눈보라가 심각히 세게 쏟아져오는 탓에 움직이기도 힘들다. 어떻게든 에피메테우스의 등 뒤에 숨어서 걸어나가고 있긴 하지만 버티기 힘든 건 여전하다.


"크...윽...아인즈...! 이만 돌아가자...!"


내 앞에서 눈보라를 막아주던 에피메테우스가 돌아가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대한 답은 당연히 긍정이다. 이런 날씨에 더 이동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들은 저주받은 대지를 빠져나와 그 곳을 탐색할 방법을 모색했다.


아예 공기가 차가운 거라면 몰라도, 저 정도의 눈발은 막을 수가 없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저 안의 눈보라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생각해보면 이 곳이 화이트윈드가 숨기 가장 좋은 자리인데 말이다.


일단 잠시 쉬었다가 다시 얼어붙은 대지에서 찾아보고, 내일 다시 와보는 게 좋겠지. 이 방법밖에 없다. 날씨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1년, 2년, 3년, 4년. 우리들은 약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화이트윈드를 찾아다녔다. 허나 아직까지도 화이트윈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약간씩 허망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복수를 위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얼어붙은 대지를 조금 둘러보다가, 저주받은 대지의 날씨를 보는,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한 번씩은 극한의 대지도 가봤다. 그럼에도 화이트윈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신비의 결정을 얻으려 해도 드래곤들의 견제로 인해 불가능했다. 신비의 결정을 얻기 위해선 역고드름을 올라가야 한다. 아무래도 경계당하고 있는 데, 높은 역고드름까지 올라간다는 건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다. 순식간에 포위당해 얼어붙거나 발톱에 찢겨져 버릴 것이다. 둘 중 한 명이 미끼가 된다는 작전도 생각해봤지만 드래곤이 바보도 아니고 도발한다는 이유로 쉽게 경계를 풀 리가 없다.


저주받은 대지의 날씨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여기가 가장 미궁인데, 정작 들어가질 못한다.


오늘도 똑같이 얼어붙은 대지를 둘러본다. 이번엔 남동쪽이다.


길게 늘어진 산맥의 끝, 에피메테우스가 그 끝을 들여다보았다...부서진 마을의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그 잔해는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크억!!"


!?!?!?!?!?!? 갑자기 에피메테우스의 심장을 꿰뚫고 누군가의 발톱이 튀어나왔다.


에피메테우스가 피를 토하며 고통을 내뱉었다. 그럼에도 그의 올곧은 눈빛은 흔들리지 않은 채 무언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처음엔 화이트윈드인 줄 알았지만 에피메테우스의 말 한 마디로 그 누군가가 바로 특정되었다.


"버치케일......!!"


버치케일이라고...?


"더 이상은 못봐주겠다...이만 죽도록 하거라...!"


눈 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갑자기...?


"나 정도도 이기질 못하면서...어떻게 누군가를 지키겠단 말이느냐...!!"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엔 느슨한 격노와 턱 막힌 듯한 답답함이 담겨 있었다.


"나도 예전엔 지키려던 이가 있었다...하지만 내 무력함에 잃어버렸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그 만한 힘이 필요하다...당연한 이치거늘...! 우매한 것 같으니...!! 그딴 이룰 수 없는 신념 따윈 내가 없애버리겠다...!!!!"


아니다...그의 신념은...절대로 잘못되지 않았다...얼핏 느껴지는 그의 눈빛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그의 신념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으아아아!!!!"


난 버치케일을 향해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의 검은 닿지도 못한 채, 난 그의 팔뚝에 맞고 날아가버렸다.


"꺼지거라...!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따윈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말거라...!!"


무력하다.


나의 무력함이 원망스럽다.


나의 무력함이 다.


나의 무력함이 절망스럽다.


무력한 나머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살아."


이게 에피메테우스의 마지막 말, 유언이었다.


그의 눈빛은 아직까지도 꺼지지 않은 채 자신의 신념을 관철했다.




이 말이 아인즈에게 할 말이 아니란 건 알고 있다. 그는 스스로 죽으려 하니까. 난 그럼에도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난 그가 살길 바랬다. 그에게 속죄하라는 말을 하긴 했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지키고 싶었다.


나 자신의 무능함과 무력함이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결국 무능한 채로 남아있게 되었다. 형체 없는 말만을 남긴 채로 말이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언젠가, 하늘에서 볼 수 있길.


형....




난 그의 말대로 살기 위해 어떻게든 뛰쳐갔다. 젠장, 젠장, 젠장!!!!!!


뛰었다. 그리고 또 뛰었다. 몇 시간 동안, 몇 일 동안, 쉬지 않고 뛰었다. 분명 방금 막 일어난 일 같은 데, 이상하게도 현실의 시간은 수없이 지나있었다. 이런 괴이한 형상 속에서 시간의 개념이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의 근원, 화이트윈드를 찢어발겨버리자고.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살점 하나하나 뜯어서,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버릴 것이다.


예전의 기억 따위 이미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걸 잃은 느낌이다.


그 무엇도 지켜내지 못한 느낌이다.


내 앞에 서는 모든 것의 목숨을 빼앗고, 부쉈다.


몇 년이 지났는 지는 상관없다.


터벅.


터벅.


끝없는 걸음.


끝없는 살육.


"오, 뭐야. 또 만났네."


작가의말

드디어 전부 다 수정했습니다...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제 작품을 읽고 계시던 분들도 헷갈리지 않도록 내용을 최대한 추가하지 않으면서 수정하느라 오래 걸린 것 같네요...오타나 문장이 어색한 부분들도 수정했습니다. 연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만약 비평할 부분이나 오타 지적 같은 건 모두 댓글도 정확히 알려주세요! 바로 고치겠습니다!


드디어 마녀와 일상 1화가 올라왔습니다. 조금 여유롭게 연재할 예정이며 가능하다면 한 화당 삽화 하나를 넣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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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습격 +2 20.11.20 16 1 14쪽
38 지식 쟁탈전 +2 20.11.17 19 2 16쪽
37 두 개의 동굴 +2 20.10.30 30 3 13쪽
36 드래곤 +4 20.10.25 24 5 14쪽
35 마법의 검사 +2 20.10.22 31 4 10쪽
34 신비의 결정, 푸른 세상 +6 20.10.20 33 6 11쪽
33 2부-창백의 일대기 +2 20.10.17 44 4 9쪽
32 하나의 육체, 두 명의 영혼, 동일한 운명. +6 20.10.16 29 5 13쪽
31 불멸자와 필멸자(삽화) +4 20.10.14 29 5 14쪽
» 반복되는 하루의 끝 +4 20.10.12 19 5 11쪽
29 복수의 여정 +8 20.09.23 40 7 13쪽
28 허무함(삽화) +4 20.09.19 37 4 12쪽
27 되돌아가다 +8 20.09.13 33 6 15쪽
26 되돌아오다 +6 20.09.08 32 5 15쪽
25 불사의 존재(삽화) +2 20.08.31 50 3 13쪽
24 결전의 날(삽화) +8 20.08.17 57 7 19쪽
23 다시 만난 웨어울프들 +6 20.08.16 40 6 10쪽
22 지하실 +4 20.08.14 33 5 12쪽
21 괴뢰와 마녀 +6 20.08.12 40 6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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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베어내지 못했던 것 20.08.08 29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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