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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나락 일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snownun
그림/삽화
원one
작품등록일 :
2020.07.17 19:55
최근연재일 :
2020.12.07 19:54
연재수 :
43 회
조회수 :
2,503
추천수 :
228
글자수 :
196,698

작성
20.07.17 20:58
조회
447
추천
12
글자
9쪽

첫번째 불사자(프롤로그+1화)

DUMMY

그래, 그 시작은 분명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지.


허나, 그 시작이 모든 것의 도화선이 될 줄이야.


난 애초에 뒤틀려 있는 존재다.


그 뒤틀림은, 다른 존재들의 운명마저 집어삼켜버리지.


난 그 뒤틀림에 고통받았다.


처음엔 그저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이상하더군.


어딘가, 잘못되어 있듯이 말이야.


뭐, 때는 이미 늦었지만.


망각하고 있었다.


검에 피가 묻은 것 같지 않아도, 그 손에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피로 덧칠해져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


이 검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나도, 이런 내가 싫었다.


무력한 내가.


무능한 내가.


봐라.


내 손은 이렇게 살점 하나 없이 구멍이 나 있지.


마치 그 구멍처럼, 내 운명에도 내가 잡은 모든 걸 흘려내리게 만드는 구멍이 하나 있었다.


분명, 다시는 망각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럼에도, 난 다시 한 번 망각하려 한다.


방금, 아주 강한 운명을 느꼈거든.


난 한 명의 불사자이자, 여행자다.


잘 갔다오지.


다음에 다른 누군가가 여기 온다면, 그 자는 분명 행복하길 바라네.


빼앗기는 일 없이.




투둑.


둔탁하고 맑은 소리.


매서운 눈폭풍과 싸늘한 바람만이 휘날리는 이곳, 프로즈키아 대륙의 어느 동굴에서 무언가가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그 자의 정체는 이 세계에서 첫번째로 되살아난 존재, 스켈레톤이었다.


되살아났다고는 하나, 사실은 부서지며 망가져버린 영혼이 재구축된, 새로운 영혼에 불과하다. 즉, 생전의 기억도, 재능도 없이 방금 막 태어난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사인도 불명, 생전의 이름도 불명, 생전의 출신도 불명. 모든 게 베일에 감쳐진 존재.


그 자가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이 산만이 알 수 있으리라.


가여운 아기가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어두운 적막이 지나고, 창백한 오로라의 빛깔이 그윽하게 비쳐왔다.


하늘을 보았다.


차갑고 냉랭하게 얼어붙은 동굴의 천장. 내 눈에 들어온 건 이 광경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온 몸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난 내 양손을 보았다. 그 손은 앙상하게 뼈만 남고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손 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그러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본 사람은 나고, 내가 가장 많이 본 사람도 나다. 이렇게 자주 보는 것을, 누가 이상하게 여길까.


내 손은 오른손과 왼손의 모습이 달랐다. 조금도 아니고, 많이. 아주 많이 달랐다. 오른손은 다른 신체 부위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상아색의 백골이었지만, 왼손은 이 동굴과 같은 빛의 푸른 얼음으로 되어있었다.


천장에 구멍이 나 있는 이유는 어쩌면 이 손과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신경쓰지 말자.


왼쪽 손바닥 중간에 피어난 푸른 얼음의 결정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풍경을 설명하자면 방금 본 천장과 마찬가지였다. 무엇 하나 다를 것 없이, 내 모습이 흐릿하게 비쳐왔다.


난 무의식적으로 동굴을 나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이 동굴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과 기피감, 혐오감이 내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이유도 없이 이 곳이 어딘지도,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전신으로 새겨져가는 기억만을 남기고서 도망쳤다.


황홀하게 비쳐오는 오로라 덕분에 밝은 것처럼 느껴지긴 했으나, 근본적인 어두움을 몰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어둠은 마치 소용돌이처럼 회오리치고 기이하게 서로 뒤섞여 괴상하게 뒤틀린 장관을 자아냈다. 난 그런 어둠을 밟고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여전히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 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 마침 동굴 밖에서부터 넘쳐 흘러나오는 새하얀 빛을 발견한 난 그것만을 갈구하며 기어갔다.


동굴 입구에 도달하자, 한 치의 그림자 없이 깨끗한 백색의 세상이 펼쳐졌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 풍경이 동굴 속의 오로라보다도 황홀하고, 찬란해서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은 느낌이다.


내 눈은 그 무언가를 볼 수도 없이 새하얗게 물들었고, 동시에 묵직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강타했다. 눈이었다. 깨끗하고, 무구한 눈. 그 눈은 얼굴부터 시작해서 내 시야 속의 모든 것에 신벌을 내리듯 내리쳤다.


그 눈덩이들은 곧 눈보라가 되어 온 세상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런 눈보라를 버티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몸이 시켰다. 앞으로 나아가라고. 나아가면 빛이 있을 거라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눈보라를 뚫고 그나마 눈이 적게 오는 곳까지 빠져나오자 저 멀리서 흰 곰을 찢어먹고 있는 거대한 늑대를 보았다. 덩치는 나보다 조금 더 컸고, 전신에는 탄탄하게 울거진 근육이 힘을 과시했지만, 그 힘을 숨기듯 은빛 털이 나있었다. 그 털은 얼핏 보면 언덕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이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색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저 늑대를 볼 수 있었던 건 흔치 않은 새빨간 선혈이 주위를 물들이고 있었다는 것과 고요함 속에서 울려퍼지는 죽음의 소리 덕분이었다.


똑같이 살아남기 위해 눈밭의 색으로 위장한 곰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찢고, 손아귀의 악력으로 살집을 비틀며, 자신의 양분으로 쓰기 위해 먹는다. 하나같이 잔인하고 잔혹한 방법이다. 어째서인지 나의 두 눈동자, 공허한 구멍 속의 피빛 불꽃은 그 상황을 빠짐없이 뇌리에 새겼다. 처음 보는 광경이기 때문일까, 생소한 광경이기 때문일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웨어울프가 날 발견했다. 아무래도 내 기척을 느낀 듯하다. 그리고 나에게 뛰쳐왔다.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뛰쳐온 탓에 당황하여 왼팔을 물렸지만 곧바로 늑대를 뿌리치고 서둘러 도망쳤다. 하지만 어느샌가, 내 바로 뒤에는 살벌한 늑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


거대한 발톱이 내 두개골을 내려치기 직전, 늑대의 목에 작은 화살이 박혔다. 동시에 울음도 멈추었다. 하지만 효과는 약했는지 금방 화살을 부러뜨린 뒤 다시금 이빨을 세웠다. 누가 쏜 거지...?


이번엔 화살이 꽂힌 곳에 창이 날아와 박혔다. 어찌나 강력하게 날렸는지 그 거대한 늑대의 목이 거의 관통되기 직전까지 몰렸다.


서둘러 주위를 훑어보니 두꺼운 털옷을 입은 인간 세 명이 늑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나보다는 작은 키를 가졌지만 나무, 돌, 쇠같은 재료로 만든 다양한 도구들을 지니고 있었다.


한 명은 장궁을 든 채로 늑대를 저격으며, 또 한 명은 자신의 키만한 나무창으로 늑대를 견제했다. 나머지 한 명은 라운드 실드와 아밍 소드를 들고 용감히 맞섰다.


라운드 실드를 든 인간은 늑대에게 다가가 발톱을 막으며 다른 인간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창을 든 인간은 그에 맞춰 늑대의 뒤를 노렸다. 마지막으로 장궁을 든 인간은 조금 뒤에 떨어져서 늑대에게 화살을 쏘아댔다.


나는 안중에도 없는 지, 그들은 늑대만을 바라보며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늑대를 죽였다.


"이번에는 꽤나 큰 늑대인간이었군."

"그러게 말이야. 이정도면 오늘 사냥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어."


늑대를 잡자마자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해나가는 걸 보면, 아마 일상적인 말이리라.


"뭐, 뭐야!"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무기를 쥐어잡으며 죽일 기세로 위협했다.


공격받을 지도 모른다. 내 약점은 머리다. 그렇기에 난 양 팔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그들이 당황해하며 무기를 거뒀다.


"...아무래도 싸울 마음이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묶어두고 마을에 데려가자. 사서라면 알 지도 몰라."


그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내 몸을 밧줄로 묶고 끌어갔다. 금방이라도 찔러죽일 것처럼 창과 칼날을 드러내고 있어서 도망치지도 못한 채 묶여버린 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작가의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묘사에 관한 건데, 1인칭으로 쓰다 보니 최대한 그 인물의 수준에 맞춰서 쓰고 있습니다.

이건 글을 쓰는 저와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한 것도 있고, 순전히 제 억지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그냥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것도 묘사에 관련된 겁니다.

만약 ’초콜릿처럼 달달한 커플이다‘같은 비유가 있다고 칩시다.

근데 이 작품의 시간대에서는 아직 초콜릿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초콜릿처럼’이라는 비유는 없는 게 되는 겁니다.

애초에 ‘초콜릿’이라는 단어도 없죠.

3인칭으로 쓴다면 몰라도, 1인칭으로 쓸 때 저런 말이 나오면 그 인물은 자신도 모르는 뜻의 단어를 쓴다는 겁니다.

그니까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저희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적식’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모르는데, ’나비에-스크토스 방정식같다’라고 비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고로 저도 나비에-스크토스 방정식이라는 게 뭔지 잘 모릅니다.

뭐야 저거 무서워.

역시 수학 잘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진심입니다.

아, 주제를 벗어났네요.

어쨌든 네줄로 요약하자면,

1인칭으로 쓸 때는 1인칭이 되는 인물의 수준대로 씁니다.

비유를 쓸 때는 세계관과 시간대 내에 존재하는 것들로 씁니다.

원래 넣어야 할 비유를 위와 같은 이유로 못 넣는다면, 작가의 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품 내에서 기분이라는 표현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데, 이것도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주인공이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에 느낌이란 단어로 대체하는 겁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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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되돌아오다 +6 20.09.08 32 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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