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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범 님의 서재입니다.

국왕 폐하 만세!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지니범
작품등록일 :
2019.08.15 12:20
최근연재일 :
2020.01.06 06:00
연재수 :
100 회
조회수 :
48,025
추천수 :
569
글자수 :
386,170

작성
19.11.01 06:00
조회
291
추천
4
글자
10쪽

신성모독

DUMMY

1.


"당장 꺼져라! 아무리 감언이설로 짐을 속이려 한들 소용 없느니라!"


"....알겠습니다 폐하.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뭐? 아니.. 어서 나가거라!"


오늘도 어김없이 황궁에서는 루돌프 황제와 아나이스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째서인지 아나이스는 순순히 서류뭉치들을 탁탁 쳐서 정리한 다음 나갔다.


평소라면 제발 마음을 바꾸어 달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을 텐데. 지금의 아나이스는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고 나갈 뿐이었다.


'뭐지? 대체 뭐가 달라진거지?'


루돌프든 아나이스든 루돌프가 서류에 옥새를 찍지 않을 것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루돌프가 제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당연히 그가 적법한 황제이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황제란 현인신. 제국의 지도자이자 지배자. 그리고 신성불가침을 뜻했고. 만약 아나이스가 황제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거나. 혹여나 옥체에 상흔이라도 입힌다면 황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아나이스는 순식간에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냥 설득을 포기한 건가?'


루돌프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나이스가 자신을 포기하거나. 자신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거나. 아니면 자신을 죽인다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역사상 그런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을 한다면 아나이스는 실각을 넘어 파멸의 길을 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명분 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해방군에 지도자를 잃은 성전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것이고. 결국 내전은 해방군의 손에 끝이 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루돌프는 계속해서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식견으로는 결국 아나이스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나이스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그리고 그 달라진 눈빛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2.


"먹을 걸 내놔!"


누군가의 구슬픈 목소리가 울렸다.


"물러서! 안 그러면 쏘겠다!"


그리고 또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린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젖도 못 먹고 있다고 이 망할 것들아! 저기에 먹을 게 있는데 왜 나눠주지 않는거야!"


"벌써 1달 반이나 굶었어! 우리보고 다 굶어죽으란 소리야?!"


그러나 군인의 말에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러갈 수 없었다. 벌써 1달이나 넘게 굶은 민중들이 눈 앞에 먹을 것을 두고 있다.


그리고 지키는 자들은 소수의 병사들. 밀어붙인다면 먹을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설령 총에 맞아서. 칼에 찔려서 죽는다고 해도. 굶어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만약 죽지 않고 창고에 들어갈 수 있다면. 적어도 오늘 먹을 양식은 구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점점 많은 사람의 뇌리에 스치고. 이내 군중심리로 변하면서. 창고 앞에 밀려든 민중들은 하나의 해일이 되어 군인들을 덮쳤다.


탕! 탕!


마치 언데드 무리와 같이 달려드는 민중들에게 두 발의 총탄이 박혔지만 몰려드는 군중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도. 쓰러진 사람도 없었다. 정말 맞았는지. 아니면 아예 하늘로 총탄이 솟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쾅! 쾅!


"뜯어내! 뜯어내라고!"


이윽고 운 없는 병사들을 성부의 곁으로 보내버린 군중들은 앙상한 팔뚝으로 굳건하게 잠긴 창고의 문을 두드렸다.


"열쇠다!"


때마침 아직 머리에 영양분이 남아있는 여자 한 명이 죽은 경비병의 시체에서 열쇠를 가져왔다. 열광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먹을 거다!"


"비켜! 내가 먼저 집었다고!"


"웃기지 마! 내가 먼저 잡았잖아!"


몰려든 군중에 비하면야 터무니없이 작은 창고는 순식간에 군중에게 약탈당했다. 이미 이성을 놓아버린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많은 식량을 가지려고 서로 상처입혀가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창고에 그득히 쌓여있었던 곡물들은 분노한 민중의 손에 의해 갈갈이 찢겨져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긁어모아봐야 몇 줌 되지 않는 잡곡들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없는 빈민들에 의해. 마침내 창고에는 곡식 한 톨마저 남지 않았다.


그리고 창고는 장작이 부족한 시민들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되어 장작으로 재활용되었고. 이윽고 창고가 있던 자리에는 무언가가 있던 흔적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3.


"이번 주만 해도 벌써 3곳의 식량 창고가 파괴되고 약탈당했습니다. 사상자는 전부 합쳐 78명입니다."


"쯧. 경비병의 수를 더 늘리도록 하게. 식량은 적어도 내년까지는 구할 수 없어. 있는 것들로 버티는 수밖에 없네."


"하지만 이미 1달 이상 시민들이 굶고 있습니다. 장원에서 사는 농노들은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도시의 시민들은 말 그대로 물만 먹고 삶을 연명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들을 굶겨 죽일 것이 아니라면.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자네도 알고 있듯이 지금 우리 해방군에게는 자금이 없네. 그나마 있는 자금들도 화약과 무기 구매에 전부 투자했단 말이네! 설마 이번 해의 농사가 이렇게까지 망할 줄은 몰랐단 말이다!"


에이젤은 거의 발악하듯이 외쳤다. 그도 제국의 위정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가 자신의 사람들을 굶기지 않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잘 알고 있으니 더욱 더 미칠 지경이었다. 성의 아래에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데 줄 식량이 없으니 말이다.


"군량미를 풀었다가는 사태가 더 악화될 뿐이야! 백성들은 식량이 있는데 나눠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불만을 품을테고. 그렇게 되면 호민군이란 대의명분을 가지고 일어선 우리 해방군은 순식간에 망하고 말겠지!"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더 많은 밥을 줄 수 있는지. 어떤 사람이 배를 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근 상황이다. 성전군이든 해방군이든 쪼들리는 것은 똑같다. 그러니 민중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창고에 불을 지르고. 보급대를 약탈하고.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고 있다.


끔찍한 일이었으나. 이제 곧 겨울이 된다. 다음 봄이 되면 다시 파종의 계절이다. 어떻게든 겨울 내에 승부를 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또 한 번의 봄이 지나가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제국이 멸망하는 날이 될 터이니 말이다.


4.


"신성모독이다! 이건 신성모독이야! 아나이스! 당신은 미쳤소! 황제 폐하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겠다고?"


"만세일계의 발렌시아 황실을 당신의 손으로 근절시킬 셈인가? 우린 황제 폐하를 보위하고. 제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려 이 성전을 일으켰소! 구국의 결단이라고? 웃기지 마라 이 반역자!"


"제국을 반으로 나눠서 동쪽을 지배한다고? 그럼 나머지 서쪽은? 그 해방군들에게 맡기자는 건가? 농담은 그 쯤 하시오 아나이스! 제국은 1000년간 단일 국가였소! 이 대륙에 중앙에 당당하게 하나의 국가로서 존재해 왔단 말이오!"


아나이스는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고관들의 말을 눈을 감고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 계획은 신성모독적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을 반으로 나누어 동쪽은 성전군의 아나이스가. 서쪽은 제국 해방군의 에이젤이 맡아 다스리고. 현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새로 태어난 제국을 다스리겠다는 계획은 아나이스는 몰라도 성전군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초에 당신은 황제가 될 자격이 없어! 황실의 피를 이은 방계도 아니고. 선대 황제 폐하에게 후계자로 임명된 것도 아니야!"


"그동안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드디어 미친건가? 제국의 옥좌는 결코 너 같은 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제국은 발렌시아 가문의 것이다! 결코 알렉스 가문을 위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나이스는 점점 거세지는 비판을 빙자한 비난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저 천치들을 죽이고 싶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이성의 끈이 그것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매국노!"


툭.


하지만 그것도 '매국노'라는 단어가 간단하게 끊어버리자. 아나이스는 매국노라는 폭언을 한 귀족에게 다가갔다.


"뭐..뭐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말을 더듬으며 물러서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움직인 것은 아나이스가 먼저였다.


촤악!


"커억...! 끄르르륵...."


아나이스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져 나와 귀족의 목을 가르자. 비릿한 냄새를 내는 핏물이 귀족의 목에서 꿀렁꿀렁 쏟아져나왔다.


".....!....!"


목이 베인 귀족이 무엇을 말하려 했지만. 그는 결국 온 몸을 피로 물들이며 절명했다. 경악한 귀족들이 각자 무기를 뽑아들려 했지만. 아나이스는 아직도 피가 묻어있는 검을 들고서 외쳤다.


"성전군이여!"


콰앙!


"으읏!"


문이 폭발하며 방 안으로 성전군의 근위대가 들이닥쳤다. 귀족들은 아주 잠시동안 아나이스가 그들에 의해 죽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내 그들의 눈빛을 보고는 그들의 살기가 자신들을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배신자! 아나이스 네놈! 성부께서 네놈을 지옥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푸욱!


"커억....! 제국....만...세..!"


귀족들은 차례대로 쓰러졌다. 자비는 없었다. 확인사살까지 마친 근위대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아나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아나이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듯 했다.


"지옥이라고....? 그래..! 지옥에 떨어져주마! 잉걸불에 불타주마! 제국은 새로 태어날 것이다! 바로 나 아나이스 알렉스의 손에 의해서!"


"알렉스 제국 만세!"


"아나이스 폐하 만만세!"


아나이스의 눈은 흉흉하게 빛났다. 그의 검은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아직 한 번의 잔학이 남았다. 새로운 제국을 만들기 위해 처리해야 할 마지막 구시대의 인간.


아나이스와 근위대는 집무실을 나와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레드 카펫을 피로 물들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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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증오심 19.11.08 282 3 9쪽
68 힘의 차이 19.11.07 265 5 9쪽
67 압박 19.11.06 275 5 9쪽
66 밀약 19.11.05 285 3 9쪽
65 구국의 결단. +1 19.11.04 294 6 9쪽
» 신성모독 19.11.01 292 4 10쪽
63 구휼 +1 19.10.31 289 4 9쪽
62 대리전 19.10.30 288 3 9쪽
61 충성의 댓가 19.10.29 335 3 9쪽
60 대탈출 19.10.28 303 3 10쪽
59 천년의 역사. 19.10.25 309 3 9쪽
58 그들의 땅. 19.10.24 294 4 10쪽
57 흥망성쇠 19.10.23 294 3 9쪽
56 여름의 태양 19.10.22 307 4 10쪽
55 거세지는 전화 19.10.21 307 5 9쪽
54 상징 19.10.18 312 6 9쪽
53 후폭풍 19.10.17 325 5 10쪽
52 낙마 19.10.16 332 7 9쪽
51 학살 19.10.15 357 3 9쪽
50 승리 아니면 죽음을. 19.10.14 359 5 9쪽
49 또 한번의 결혼 19.09.30 378 5 9쪽
48 신부 교육 19.09.27 384 7 9쪽
47 음지에서 양지로 19.09.26 383 6 9쪽
46 동맹 19.09.25 384 7 9쪽
45 서부와 동부 19.09.24 402 4 9쪽
44 톨레랑스 19.09.23 430 4 9쪽
43 공식적 화답 19.09.20 451 5 9쪽
42 연맹 19.09.19 471 6 10쪽
41 신경전. 19.09.18 482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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