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1)
폭발한 하비에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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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야훼의 일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승호가 더 이상 기적 감정사들과 함께 지낼 이유는 없다.
아마 하비에르만 아니었다면 벌써 기억을 날렸거나, 알버트를 닦달해 어떻게든 내쫓았을 것이다.
“혼자 잠깐 바람 쐬고 오면 되는 걸 왜 나까지 끌어들이냐고.”
“혼자는 외롭잖아...”
‘진작 쫓아낼 걸 그랬나?’
삼십 대 중반 외국인 아저씨가 외롭다고 칭얼거리는걸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하비에르는 약간이나마 기죽은 표정으로 구시렁댄다.
“아저씨는 원래 외로우면 죽어.”
“언제부터 아저씨가 토끼급으로 섬세한 동물이 됐냐. 어휴, 알았으니까 나가자.”
승호가 하비에르에게 느끼는 친밀감.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뭐 그리 친해졌나 싶다가도 지금처럼 농담이나 따먹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게 즐겁다.
대략 사백칠십 년 만에 생긴 마음 맞는 또래 친구인 것이다.
실제 나이 약 오백세. 정신연령은 아무리 낮게 잡아도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인 용에게 또래 친구가 왠 말인가 싶지만...
‘그러고 보니 지금 나한테 친구라고 할만한 게 하비에르 이놈 하나뿐이네?’
텔린은 친구라기보다는 형님이고, 소리는 직장 상사, 레니스는 썅년은 아니고 조금 싸가지없는 맞선임 느낌이다.
텔린에게 배울 때 잠시 같이 지낸 망룡들이나 국장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불멸자랑 필멸자는 뭔가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세상을 살아가는 시간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 같으면 그게 더 문제다.
‘정령 녀석은 아예 연락이 끊겼고.’
이름 없는 전자정령은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연락하지 못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끝으로 계속 묵묵부답이다.
게다가 녀석은 친구라기보다는 한참 나이 어린 조카 같은 느낌이다.
새삼 자신의 주변 상황을 자각한 승호는 왠지 모르게 조금 슬퍼졌다.
‘나 인간관계 진짜 협소하네.’
지구로 돌아온 이후 인간과의 교류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친구라 부르기도 조금 미묘했다.
알프레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이고, 손자인 알버트는 동생처럼 승호를 따르지만, 둘은 스스로 아랫것임을 자처하며 납작 엎드린 상황이다.
친구 사이에도 사회적 혹은 물리적 지위로 인해 상하관계가 있을 수는 있지만, 클럽의 조손과 우정이라 부를만한 것을 나누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그나마 영국에서 만났던 콜린이 친구라 부를만했지만, 서로 어른의 편의를 주고받으면서 그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묘해진 상태다.
‘흠...’
이 나이 먹고 친구가 없어 고민하는 게 맞나 싶은 승호의 귓가로 하비에르의 외침이 꽂혀온다.
“야! 나간다 해놓고는 멍하니 뭐해? 그만 뭉그적거리고 좀 놀아줘라!”
“알았어. 지금 간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유일한 친구의 부탁이다.
승호는 결국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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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초순.
오늘이 며칠인지 모르는 승호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다들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란 건 안다.
당연히 시내의 풍경은 과장 조금 보태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태였고, 서울 시내의 관광지란 관광지는 다 돌아다닐 생각으로 뛰쳐나온 하비에르조차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적막함에 말을 잃었다.
“...”
“내가 나와봤자 이럴 거라 했잖아. 굳이 명동으로 나온 이유가 뭔데?”
“크리스 신부가 마침 성당 있는 곳이 관광특구로 지정돼있으니 놀기 좋을 거라 했어...”
평일 오전이라지만, 명동이 이런 상황이니 광화문이나 인사동 같은 근처 지역들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 뻔했다.
“서울 정도면 꽤 유명한 관광도시 아니야? 사람 좀 없다고 이런 분위기라는 게 말이 돼?”
말이 된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유적이라면 모를까.
도심 관광지의 풍경을 이루는 데에는 인파가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명동에서 그 실태를 깨달은 하비에르가 망연자실했지만, 승호가 어찌해줄 방법은 없다.
“방법이 왜 없어? 너는 한국인이잖아. 명동의 숨은 맛집이라던가! 아무도 모르는 특이한 상점이라던가!”
“여기 살지도 않는데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근처에 직장이 있다면 몰라도, 서울 사람 대부분은 쇼핑이 목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명동을 목적지로 삼지 않는다.
이태원과는 다른 의미로 외국인 특별구역이니 말이다.
아무리 도심 풍경의 요소 중 하나가 인파라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항상 외국인 관광객들로 가득 차서 번잡하고, 상인들은 그들을 대상으로 바가지를 씌워대니 물가도 미쳐 돌아간다.
게다가 음식은 내국인과 외국인 둘의 입맛을 모두 놓쳐버린 뒤틀린 황천의 지옥 요리 수준이다.
이렇게 경쟁력이 낮은 상황에 코로나까지 겹쳤으니 지역 자체가 빈사 상태였다.
“그런?!”
“그러니까 그냥 집에 가자.”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못내 아쉬웠는지 주위를 둘러보던 하비에르는 제법 멀리 떨어진 장소를 가리켰다.
“잠깐만, 저기는 사람들이 좀 몰려있는데? 한번 가보자.”
“음?”
하비에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로 웬 가게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컷! 바로 다음 씬 가겠습니다!”
촬영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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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유명한 연예인이 촬영 중이었나 보다.
아무리 평일 오전이라지만, 명동 거리에 사람 하나 없는 게 이상했는데 모두 이곳에 몰려있었다.
“헤에, 유명한 사람이야?”
“글쎄, 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잠시 후.
군중의 웅성거림과 시끄러운 촬영 현장의 소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하비에르는 금세 흥미가 식었지만, 승호의 눈은 시간이 지날수록 반짝였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라는 결과물에 빠져있었으니, 자연스레 그 과정에도 흥미가 생긴 것이다.
감각을 조금 넓히면 가게 안에 펼쳐진 촬영 현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으니,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도 신기하고, 수십 명의 사람이 오로지 장면 하나를 위해 협력하는 모습도 장관이다.
‘같은 장면을 최소 네 번은 반복하네. 내가 보기엔 그게 그거 같은데 감독 머릿속에서는 다른가?’
그렇게 구경에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살며시 다가오더니 승호의 뒤통수로 손을 뻗었다.
휙!
가볍지만 약하게나마 바람 소리도 들린다.
빡!
“끅!”
제법 큰 타격음이 울렸고, 한 남성이 뒤통수를 양손으로 감싼 채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물론 승호는 아니다.
클럽 강경파의 암살자들과 만난 이후 물리력을 반사시키는 거래를 계속 유지 중이었는데, 그게 작동한 덕이었다.
기나 주문이 실린 공격이라면 되돌리는데 제법 많은 대가가 필요하지만, 반사하는 대상을 단순한 물리력으로 한정할 경우 기의 소모도 적고 거래는 한 달 정도 유지돼서 편리했다.
승호에게 손을 휘두른 남자는 자신이 사용한 힘 그대로 본인의 뒤통수에 돌려받은 것이다.
‘이건 또 뭐야? 암살자는 아닌 것 같은데.’
습격자는 혹이 생긴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 자연스럽게 승호한테 말을 붙였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남자는 미리 자신의 접근을 눈치챈 승호가 반격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김승호 이 자식! 좀 살살할 것이지 너무 세게 쳤잖아!”
그 적반하장인 태도에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승호는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어...”
“아흐, 겁나 아프네. 완전히 넋 놓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다가오는 건 언제 봤냐?”
옆에서 개입하려던 하비에르도 습격자의 친밀한 태도에 당황했고, 승호는 이 습격자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표정이 왜 그래? 너무 세게 때린 것 같아서 미안하냐?”
“어? 아니, 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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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석 달 만에 봤으니 오랜만이긴 하네.”
남자에게는 석 달이지만, 승호에게는 사백칠십 년이다.
하지만 흐릿한 옛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불알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녀석.
연예인이 되겠다고 난리 치다가 재능이 부족해 소속사에서 방출당했고, 어찌어찌 대학은 갔지만, 연예계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금방 자퇴한 뒤, 영화제작사의 막내, 연예소속사의 로드매니저 등 관련 업계의 바닥을 전전하다 한 소속사의 로드매니저 팀장으로 자리 잡은 친구.
그의 부모나 다른 친지들은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었다가 겨우 정신 차렸다고 타박했지만, 승호의 눈에는 특정 업계에 대한 열정이 있다는 게 부러웠고, 그 열정을 위해 행동했다는 것만으로도 멋있어 보였던 친구다.
“근데 너 여기서 뭐 해?”
“나? 난 우리 애 스케줄 잡혀서 따라왔지.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데?”
“아, 나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본가 들렀다가 엄마한테 너 취직했다고 얘기 들었다. 외국계 기업이라면서. 이모님 엄청 좋아하셨다던데?”
“어. 그렇게 됐어.”
“축하하려고 계속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 되더라. 해외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왜 한국에 있어?”
“아,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그냥 새로 번호 팠어. 연락처 연동이 안 되더라. 그리고 얼마 전에 나갔다 왔다. 한 일주일 됐나?”
마침 며칠 전 관리국에 다녀오면서 자리를 비웠었기에 변명이 쉽게 나왔다.
“해외로 돈다고 들었는데, 너 외국어는 괜찮냐?”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럼 또 언제 나가?”
“아마 한동안은 한국에 있을 것 같은데.”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도 자연스레 서로의 근황을 나눈다.
승호는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하비에르를 소개했다. 그는 존재 자체가 승호의 위장취업에 대한 훌륭한 변명거리였다.
“직장 동료?”
“응. 협력업체 직원.”
알버트가 교황청이랑 클럽은 서로 협약을 맺었다고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이고! 우리 승호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 한국말 모르시나?”
남자는 매니저 일을 하면서 넉살만 늘었는지 말도 안 통하는데 악수하며 너스레를 떨었고, 그 모습을 보던 승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몇 시간 전만 해도 친구가 없어 우울했는데, 거짓말처럼 눈앞에 옛 친구가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근데 얘 이름이 뭐더라?’
다만 녀석의 이름 석 자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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