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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식 님의 서재입니다.

강제로 초월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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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식
작품등록일 :
2022.05.11 17:00
최근연재일 :
2022.12.0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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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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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기억 탐색 (2)

DUMMY

조각에 대한 기억은 그게 전부였다.


-


크로노스의 기억을 탐색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승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볼 건 다 알아본 건가. 제법 피곤하구만.’


모든 기억을 샅샅이 살필 수도 없었고, 유실된 기억이 많아 여기저기 빈구석이 넘쳐났지만, 그래도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의 기억이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과거와 미래의 비전으로 인해 실질적인 기간은 수백 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 기간을 일주일로 압축해서 훑어본 것 치고는 제법 수확이 컸다.


‘일단 정리 좀 해볼까.’


-


첫 번째 수확은 관리자들이 뿌리고 다닌 조각들의 근원을 알아냈다는 것.


일반적인 정보 흡수로는 탐색 되지도 않고, 파편이라 부르기에도 미안한 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공의 힘이다.


그것들을 대체 어디서 구하는지가 쭉 의문이었는데, 조각을 심는 과정을 계속 살피다 보니 수급처를 찾을 수 있었다.


따로 조각을 심은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태어난 누구나 조각이 될 무언가를 지니고 있던 것이다.


관리자들은 대상이 이미 가지고 있던 아주 미세한 무언가를 활성화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흔적들이 그리 넘쳐났지.’


관리국의 교육을 받은 승호에게도 금시초문인 일이니, 지구인들이 특별하다고 봐야 했다.


‘방벽에 뭔가 영향을 받은 거겠지.’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장 먼저 의심이 드는 것은 역시 방벽이다.


승호는 자신의 초월에도 그 미세한 힘이 어떤 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나 의심했지만,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이 추측일 수밖에 없다.


‘제작자를 만나게 되면 알 수 있으려나.’


-


두 번째 수확은 방벽과 지저세계를 만든 제작자의 정체와 행방이다.


모든 신화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땅 그 자체이자 지모신 신앙의 근원.


반고, 이미르, 가이아, 마고 그 외의 많은 이명.


그녀는 그때그때 형태를 달리했지만, 전반적으로 자연 그 자체라 생각할 만큼 거대한 여성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나곤 했다.


‘지구의 화신이라 봐야겠지.’


추측에 불과하지만, 별의 의지가 인격을 지닌다면 그런 모습일 듯싶다.


‘강기좀 못 쓰면 어때. 그냥 직접 후드려 패는 게 운동도 되고 좋지.’


처음 정체를 눈치챘을 때는 그녀 덕분에 귀찮은 상황을 겪은 데다가 강기를 사용 못하는 억울함도 풀고 싶었지만, 이제 그 마음은 완전히 가신 상황이다.


‘좀 불안하지만...’


기억에서 훔쳐본 그녀의 성향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집착한다는 것.


그래도 그 대상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다 보니 편협한 집착이라 표현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다.


거기다 크로노스의 감정을 전달받은 덕분일까.


잔존사념만 느꼈던 아발론에서야 뭐 이런 미친년이 있나 싶었지만, 실체를 파악하고 보니 그 집착도 일종의 모성으로 느껴진다.


문제라면 로키나 크로노스는 그녀에게 일종의 직계비속이라는 것.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승호는 그 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자식이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직계비속과 1,280대손쯤 되는 후손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싸운다는 이미지가 전혀 안 떠오른단 말이지.’


무서울 게 전혀 없는 승호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땅 그 자체와 싸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정말로 땅 전체는 아니었지만, 한순간 승호가 겁을 집어먹을 만큼 그녀의 크기는 엄청났다.


그래도 그쯤 되면 격이 얼추 맞을 테니 기록을 이용한 죽음 교환이 성립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지구가 같이 터져나갈 수도 있다.


아마 그녀의 의식만 다시 잠드는 것에 그칠 확률이 높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그녀와 지구가 같이 사라질 확률이 0%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승호는 지구에서 꿀을 빨고 싶은 거지. 날려버릴 생각은 전혀 없다.


‘자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다행히 그녀는 방벽을 세운 여파로 깊은 잠에 빠져든 상황이다.


그러니 승호가 신경 써야 할 존재는 오로지 야훼뿐이다.


-


‘야훼는 어떻게 말로 잘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로키와 크로노스도 같은 생각으로 접근했다가 일이 꼬였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무작정 설득하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전부였지만, 이번에는 나름의 근거를 찾았다.


아발론에서 만났던 아카샤의 행동 원리와 비슷한 제약이 관리자들에게도 있던 것이다.


관리자들이 제작자에게 부여받은 유일한 사명.


방벽을 유지하라.


그 과정에서 이익이나 재미를 추구할 수 있을 정도로 해석의 범위가 넓지만, 아예 저버릴 수는 없다.


아니었다면 크로노스는 진작에 자살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야훼가 어떤 꿍꿍이를 지녔더라도 방벽 안에서만 벌어지는 수준의 일이라는 뜻.


정말 크게 잘못돼도 겨우 별 하나만 사라지고 끝날 일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관리국에서 쉽게 허가를 내줄 수준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까짓거 좀 꼬이면 어때? 그냥 내가 직접 처리하면 될 일이야.’


-


승호가 크로노스의 기억에서 얻은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수확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이다.


여태껏 그를 갉아먹고 있던 귀차니즘의 원인을 찾은 뒤, 치료한 것이다.


지구로 돌아온 지 겨우 반년.


용이기에 가끔 지구의 모든 것이 부질없고 하찮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계속해서 집구석에 틀어박히려는 행동은 정상이라 보기 힘들다.


승호 스스로도 내심 문제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사건을 겪다 보니 그에 대한 반동이겠거니 생각하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속 그 상태였다면 이백 년쯤 뒤에는 정말로 죄다 때려치우고 환원했겠지.’


원래 은둔형 외톨이였다면 모를까.


초월하기 이전의 승호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게다가 비두스에서 텔린과 지낼 당시의 승호에게는 지금과 같은 귀차니즘이 전혀 없었다.


원인은 지금껏 승호가 줄창 봐왔던 영상매체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죄다 시청한 승호지만, 그래도 사람이기에 자신과 비슷한, 인간을 벗어난 신적 존재가 나온 작품을 볼 때는 조금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불로불사는 인류가 죽음을 인지했을 때부터 존재한 로망.


영원한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은 넘쳐났다.


그렇지만 현재 그가 거주하는 곳은 지구다.


불멸은 꿈도 못 꾸고 불사는커녕 불로에도 닿지 못한 인간들이 주를 이루는 세상이다.


당연히 문화 전반에 걸쳐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퍼져 있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쌓인, 불멸이나 불로불사를 이룬 극소수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덤이다.


그런 환경이다 보니 불로불사를 다룬 작품 대부분은 영원한 삶을 고통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고뇌.


본인은 그대로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져간다는 공포.


분명 생각의 방향이 다른 작품도 있지만, 그 수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그렇게 지구의 인류가 쌓아 올린 문화가 승호의 무의식을 잠식하고 세뇌한 것이다.


특정한 존재가 아닌 문화라는 개념의 공격이었기에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인류한테 문화승리 당할뻔했다고 말하면 텔린이 비웃겠지?’


물론 승호도 앞으로 펼쳐질 영원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빠질라치면 얼른 형태 구현부터 하라는 면박이 날아온 데다가, 그 면박의 당사자가 먼저 영원을 살아가던 고룡이다보니 깊게 고민할 이유와 여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의식 위로 튀어나올 만큼의 고민은 아니었던데다가 원인까지 규명했으니 극복은 쉽다.


‘자각이라는 게 생각보다 효과가 크네.’


단순히 마음만 새로 다 잡은 것이 아니다.


당장 크로노스라는 사례가 있지 않나.


그는 괴로운 기억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승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다.


망각이라는 축복이 그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승호가 오백 년 가까이 살았다지만, 실질적으로 겪은 세월은 고작 사십년에 불과하다.


아픈 기억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곱씹을 만큼 괴로운 기억도 없다.


추가로 로키가 계속해서 장난을 칠 수밖에 없고, 크로노스가 저도 모르게 매혹됐던 강력한 치료제가 존재한다.


바로 조각을 지닌 사람들이다.


크로노스도 그들을 지켜보며 잠시 괴로움을 내려놨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과 앞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개입한 뒤 지켜보겠다는 결심이 합쳐지니 승호를 잠식하던 무기력과 귀찮음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사실 승호가 크로노스의 기억을 수습한 일주일중 원하는 것을 찾는 데에는 삼일이면 충분했다.


남은 사일은 조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뒤지며 지켜보는 데에 열중한 것이다.


영상 매체에서 필멸자들의 인생으로 갈아탄 것 아닌가도 싶었지만, 어쨌거나 유난스러웠던 귀찮음을 떨쳐냈으니 만사 오케이다.


‘역시 인간만큼 재밌는 게 없다니까.’


-


마음가짐을 새로 했다지만,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고작 일주일만의 재충전으로 승호가 가진 기존의 생활 습관을 바꾸기는 조금 부족했다.


극도의 귀찮음과 그로 인한 짜증이 사라졌을 뿐.


텔린에게 주입 당한 한량 마인드와 여지껏 일어난 사건들의 반동으로 축적된 나태는 여전하다.


야훼를 추적하려는 마음도 여전하지만, 직접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 꼬리를 붙잡으려 나서기가 너무 번거롭다.


‘그냥 예루살렘에 핵이나 터트려볼까?’


성지라고 알려진 장소에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가한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승호의 취향이 아니다.


‘바로 요 앞에서 크로노스가 터졌으니 알아서 찾아오겠지. 그때까지는 그냥 쉬자.’


그렇게 승호가 하릴없이 바닥을 뒹굴고 있는데 뜬금없는 소음이 그의 귀를 때렸다.


띵동! 띵동!


‘뭐지? 음식 시킨 거 없는데? 택배 올 것도 없고.’


예전 같으면 벨이 울리자마자 알버트 녀석 일 안 하냐면서 성질을 냈겠지만, 승호는 군말 없이 인터폰을 받았다.


고작 인터폰 받은 것 가지고 무슨 유난인가 싶겠지만, 여지껏 음식이나 택배가 아닌데 그가 인터폰을 직접 받는 일은 드물었다.


귀찮은 일들일 것이 뻔한 연락이었고, 승호가 나서기 전에 알버트와 클럽이 사력을 다해 쳐냈기 때문이다.


조금이지만 분명 바뀌긴 한 것이다.


‘뭐야. 1층 현관이 아니라 집 앞이네?’


클럽이 심사숙고해서 구한 곳인 만큼 보안은 철저한 아파트였기에 신비와 관련 없는 방문객이 집 앞으로 찾아온 적은 처음이라 승호는 조금 놀랐다.


“누구세요?”


신비와 관련된 떨거지가 아닌 처음으로 맞이하는 손님이기에 승호는 괜스런 기대감으로 상대방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런데 억지로 친절을 가장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기대감에 들떴던 승호의 눈빛은 짜게 식었다.


“형제님? 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알버트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죽었다 살아난 놈이라 한동안 편히 놔뒀는데, 오랜만에 기강을 잡아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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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탐색 (2) +1 22.08.27 397 1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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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뒷정리 +1 22.08.20 492 21 10쪽
54 크로노스 (3) +1 22.08.14 505 23 11쪽
53 크로노스 (2) +2 22.08.13 496 24 10쪽
52 크로노스 (1) +3 22.08.11 495 2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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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요괴들의 사정 (1) +1 22.08.05 514 2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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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악연(1) +3 22.07.25 626 2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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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마무리 (2) +2 22.07.19 769 26 10쪽
41 마무리 (1) +2 22.07.17 808 25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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