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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은수님 님의 서재입니다.

게스트하우스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추리

완결

우은수
작품등록일 :
2016.09.12 16:59
최근연재일 :
2017.01.15 17:16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0,426
추천수 :
147
글자수 :
139,273

작성
17.01.06 10:34
조회
249
추천
5
글자
10쪽

26. 마지막 부탁

DUMMY

느리게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저 멀리 어딘가부터 짙은 푸른색이 천천히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검은 돌담도, 귤나무와 아직 따지 않은 초록색의 청귤도, 진한 갈색 흙바닥도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에 비춰지고 있었다.


명희는 겁에 질린 채 동그래진 눈으로 경옥을 보고 있었다. 흰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붉게 충혈 되었던 경옥의 눈은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아까보다 - 게스트하우스 안에서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던 그때보다는 - 눈동자의 초점이 맞아 보였다. 경옥은 초조해 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말없이 명희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명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리 들어오라고 손 내밀던 얼굴과 목을 조르던 그 표정이 너무나 무섭게 뇌리에 각인되어서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숨소리마저 덜덜 떨리며 얼어붙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겁에 질린 명희와 달리 경옥은 오늘 일을 겪지 않은 다른 사람처럼 우뚝 서 있었다. 경옥이 쓰러진 나연과 진주를 돌아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후 나지막이 말했다.


“명희야...”


명희는 말이 없었다. 여전히 몸을 약간 뒤쪽으로 기울인 채 그저 경옥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경옥이 말을 이었다.


“미안해. 이 모든 게··· 이 모든 게 너무 미안해. 아까 왜 그랬냐고 물어봤지? 왜 그랬냐고. 왜··· 다른 변명 안 할게. 돈 때문에 그랬어."


명희가 혼잣말처럼 겨우 답했다.


"그게... 무슨..."


"예전에 우리 조카라고 내가 보여주었던 사진··· 병원에 있는 아이 사진 기억 나? 그거, 내 딸이야.”


오래전 회식 자리에서 경옥이 술에 취해 신세한탄을 하고 명희에게 보여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휴대폰 사진 속에서 대여섯 살로 보이는 어린 아이는 머리를 짧게 깎고 산소 튜브를 코에 꽂은 채 웃고 있었다. 


경옥은 그 아이를 조카라고 말했다. 아파도 씩씩한 녀석이라고, 많이 힘들 텐데 그래도 잘 버틴다고. 그리고 경옥은 살짝 울음을 보였다. 그 이후로 경옥은 조카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명희는 지금 경옥의 말을 듣고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우리 딸이야. 사랑하는 내 딸··· 이상한 병으로 힘들어 하고 있어. 약값도 많이 들고··· 그래서 그랬어. 널 데려오기만 하면 돈을 준다고 했거든."


명희가 여전히 경계하는 얼굴로 억지로 용기 내어 물었다.


“내가··· 내가 여기 오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어제 게스트하우스 정리할 때··· 너랑 비슷한 사진이 떨어져 있었지. 그 사람이 너로 되는 거야. 너는··· 너는 여기서 죽는 거였고.”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그래,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나도 깜짝 놀랐어. 하필 너랑 너무 닮은 사람이라서. 전까지는··· 그저 내가 가진 고객들 민증이나 여권을 복사해서 보내주면 되는 일이었어. 


그 사람들··· 이 일을 시킨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신분증이 필요했거든··· 제주에서 부산, 인천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 중요한 사람이라 바로 외국으로 가야 한다고··· 닮은 사람을 찾아달라는데, 그게 하필··· 하필 너였어.”


명희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만약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안 왔다면, 넌 서울에서 사고가 났을 거야.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를 너로 바꾼다고 했거든. 그리고 그녀가 외국으로 나갈 때까지 넌 발견되지 않았겠지..."


명희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싹함이 엄습해와 컥 숨이 막힐 정도로 두려웠다. 경옥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미안해 명희야. 내가... 내가 널 위험에 빠뜨린 거야. 조용히 다른 신분증만 넘기고 말았어야 했는데... 내 욕심이 여기까지 온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이젠 되돌릴 수도 없게 됐어."


경옥은 손에 들고 있던 뾰족한 트로피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멈춰야겠어.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마무리 해야지."


명희는 여전히 겁에 질려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옥이 말을 이었다.


"염치없지만,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


"부, 부탁? 내게...?"


"우리 딸에게... 거짓말 한번만 해줘."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나쁜 사람들이랑 싸웠다고... 그러다 잘못된 거라고 말해줘. 부탁해."


"언니, 설마..."


"그리고... 치료비는... 아니다. 그냥 그렇게만 좀 전해줘."


“왜 그래 언니. 나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래... 조금 전까지 널 해치려던 내가 부탁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다. 너무 미안해 명희야. 내가 다 안고 갈께."


"언니..."


"우리 딸에게 말 좀 잘해줘."


경옥은 트로피 조각을 들어 목에 갖다 댔다. 명희는 정확하게 뭐가 뭔지 판단하지 못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그저 경옥의 행동을 말리려 손을 뻗을 때 - 강식이 소리쳤다.


"진주야!!!"


강식은 쓰러진 진주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주변의 다른 사람은 시선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강식은 진주를 부둥켜안고 다급하게 흔들며 말했다.


"진주야, 진주야! 정신차려봐. 아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세상에 머리에 이 피 좀 봐... 진주야, 정신 차려... 진주야, 진주야.... 으흐흑..."


명희는 강식이 나타나자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주저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며 한쪽으로 몸을 숨기려했다. 그러나 경옥은 무표정한 얼굴로 명희와 강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면 강식을 꼭 데려가야 했는데 스스로 나타나 주었다.


진주를 안고서 흐느껴 울던 강식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경옥을 지나 조금씩 도망치려는 명희와 눈이 마주쳤다. 강식은 사냥개처럼 꽉 다문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지... 너...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다 망가졌어!"


강식은 쓰러져있는 명희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경옥도 함께 움직였다. 성찬의 삽자루에 찔려 절룩거리는 다리로 명희에게 달려들던 강식의 허벅지 상처에 경옥이 트로피 조각을 찔러 넣었다.


“으아아아악!”


강식은 바닥에 나뒹굴며 경옥에게 말했다.


“뭐야··· 뭐하는 거야!”


경옥은 쓰러진 강식에게 다가가 담담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다 그만해."


"당신 미쳤어? 그만하긴 뭘 그만해?!"


경옥은 말없이 트로피 조각을 강식의 옆구리에 찔렀다. 강식은 맨손으로 뾰족한 트로피 조각을 막아냈다. 손바닥을 찔리고 긁혔지만 덥석! 트로피를 잡고 오른 손으로 경옥의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경옥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팔이 꺾이는 방향을 따라 무릎을 꿇으며 몸을 접었다. 강식은 피가 줄줄 흐르는 손으로 주먹만 한 돌을 집어 경옥을 마구 내리쳤다.


명희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접질린 다리를 질질 끌며 돌담 너머로 겨우 도망쳤다.


강식은 쓰러진 경옥에게서 트로피 조각을 빼앗아 던져버리고 경옥의 팔목을 밟으며 일어섰다.


"대체! 뭘! 그만하라는 거야! 이제 와서! 어떻게!!"


광기어린 얼굴로 정신을 놓은 채 무작정 돌을 내리치던 강식은 경옥의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축축이 적실 때에야 멈췄다. 여전히 광분한 상태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괴성을 질렀다.


"어디 갔어... 어디 갔어! 으아아아아아악!!!"


강식은 명희가 도망친 방향으로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면서 겅충 겅충 한쪽 다리로 뛰어갔다.


  옆으로 누운 시선으로 멀어지는 강식의 발을 보며 경옥은 희미하게 말했다.


“미안해··· 명희야··· 미안해··· 우리 딸···”


딸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런 일을 시작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뒤늦은 후회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뺨에 흐르는 것이 피인지 눈물인지 경옥은 알 수 없었다. 웃고 있는 딸 곁으로 간다고 생각하며, 이제 금방 간다고 믿으며, 경옥은 눈을 감았다.


검은 밤이 짙은 푸른색의 새벽으로 넘어가는 중간이었다. 명희는 이제야 길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귤 밭 한가운데로 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힘겹게 다리를 끌며 걷고 또 걸었다. 돌담을 넘어 비자나무 군락지를 허겁지겁 달렸다.


강식을 가로막을 때 경옥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사람 같은 얼굴. 그 얼굴 옆으로 다양한 표정의 경옥이 스쳐 지났다. 처음 회사에서 만났을 때 웃으며 반겨주던 언니의 얼굴, 어딘가와 전화통화 후 긴 한숨을 내쉬며 씁쓸해하던 얼굴, 회식 자리에서 수다스럽게 농담을 던지던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 제주 해수욕장에서 발을 담그고 웃으며 사진 찍은 후 무언가 어두워졌던 얼굴, 목을 조르며 달려들었던 얼굴, 그리고 마지막의 조금 전 얼굴...


명희는 달리면서 울고 있었다. 뒤돌아 도망칠 때 강식이 질렀던 괴성과 돌로 내려치는 소리는 이미 강식이 경옥을 해쳤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전히 경옥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경옥과의 일상과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났다. 그러나 상념에 빠져 걸었던 길도 잠시, 강식이 소리를 지르며 뒤따라왔다.


"으아아아아아-!"


화들짝 놀란 명희는 다리가 아픈 것조차 잊은 채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강식 또한 여기저기 피가 튀고 상처 난 몸으로 악착같이 뒤따랐다. 명희의 눈 앞 저 멀리 파란 슬레이트 지붕의 가정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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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32. 내미는 손 / 마지막 회 17.01.15 319 4 8쪽
31 31. 인천으로 17.01.13 230 4 13쪽
30 30. 도플갱어 Doppelgänger  17.01.12 239 4 9쪽
29 29. 그냥 가지 그랬어 17.01.11 239 4 9쪽
28 28. 내가 말했잖아 17.01.10 220 4 10쪽
27 27. 그럴 리가 없어 17.01.09 294 4 11쪽
» 26. 마지막 부탁 17.01.06 250 5 10쪽
25 25. 이게 대체 어떻게... 17.01.05 203 4 10쪽
24 24. 추격 17.01.04 236 4 16쪽
23 23. 빨리 구급차를 17.01.04 253 5 9쪽
22 22. 절대로 용서 못해 17.01.03 246 5 9쪽
21 21. 설득은 필요 없어 17.01.03 256 5 10쪽
20 20. 그냥 죽어주면 돼요 17.01.03 244 5 9쪽
19 19. 카오스 CHAOS 17.01.01 237 5 8쪽
18 18. 반격 17.01.01 230 4 9쪽
17 17. 저는 기회를 드렸어요 16.12.31 228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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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 push to open button 16.12.29 257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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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지하실로 가는 길 16.12.28 260 4 12쪽
11 11. 하나씩, 하나씩 16.12.28 290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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