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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에 울려퍼지는 소나타

그로스(growth)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적월소나타
작품등록일 :
2024.01.05 16:04
최근연재일 :
2024.04.08 19:00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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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수 :
181,998

작성
24.03.2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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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 비오는 날의 추억 (4)

DUMMY

"끄아아! 역시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흑흑흑."

울상과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는 래디어스 광장의 한 벤치에 녹초가 된 채 앉아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세인, 세인! 이리와바!"

온갖 솜사탕과 풍선 등을 손에 쥐고 저쪽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마스터님. 역시 악마라고 해도 아이는 아이인가보다.

본격적으로 광장 중심에 도달하기도 전에 온갖 파는 물건들에 현혹된 마스터님이 나를 재촉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뭐,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하나 둘씩 사주던 나였지만 그 한 두번이 계속 쌓이고 쌓인 결과 지금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 내 전재산의 반이.... 무려 89레니 중에 49레니를 먹을 것으로 날려버린 그녀. 도대체 뱃속에 뭐가 들어 있는거야?

절망적인 상황에 나는 고개를 안쓰러울 정도로 푹 숙이고 말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스터님은 나의 옷깃을 잡아끌며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다.

"나 저거 사줘어! 저것도 먹고 싶단 말야아!"

"마스터님... 지금 돈이 없는데요...."

남은 돈을 악마의 마수로부터 지키고자,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도 의심하지는 않았는지 순진하게 웃는 마스터님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반짝반짝 의욕에 빛나는 붉은 눈. 저건 포기한 아이의 눈빛이 아니잖아?

"헤헤, 그럼 은행에 돈을 빌려서라도 저걸 사먹어 볼까나...."

아니나 다를까, 더욱 정신을 못차리는 마스터님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아무리 상하관계라도 이쯤 되면 말려야 한다는 용기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악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두려웠지만 그래도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고쳐줘야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이제 마스터님과 나는 한 배를 탄 사이였다. 리셋을 하지 않는 한,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계약 관계.

다시 말하면 그녀가 진 빚은 곧 페이스의 빚. 페이스의 빚은 또한 나의 빚.

결국 거기까지 생각에 도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스터님을 강하게 불러세웠다.

"마스터님!"

"응?"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한 듯 천진난만하게 미소짓고 있는 마스터님에게 나는 인상을 더욱 험악하게 찡그려보였다.

"지금 마스터님이 하신 행동이 주제에 맞다고 생각하시는가요? 마스터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저희 페이스는 가난하잖아요! 그러니까 가난할수록 돈을 아껴야...."

"걱정 마."

갑자기 어른스럽게 변한 듯한 마스터님의 말투가 나의 말을 끊어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끊어버린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끊어버린 것이었다.

"나도 그런 몰상식한 짓은 안하니까...."

"그렇다면 은행에서 돈을 빌리신다고 한건...?"

"농담... 일까나."

마스터님은 작은 얼굴로 생긋 웃고는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나를 우리의 본거지가 있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마스터님의 진주빛 긴 머리가 미풍에 아름답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전혀 알 수 없을 것 같은 마스터님의 속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이지... 어쩔 땐 아이 같으면서 어쩔 땐 다 큰 어른 같기도 하단 말이야. 우리 마스터님은... 엇? 잠깐... 은행에서 돈을 빌린 건 농담이라 쳐도 이제까지 돌아다니며 사먹은 50레니까지 농담일리는 없잖아아!

제대로 당했다는 생각에 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의 생각을 엿보기라도 한 듯, 갑자기 빨라지는 마스터님의 걸음 속도.

거의 달리다시피 걷다가 마침내 전속력으로 날쎄게 도망치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쫓아가면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마스터님, 제 돈 50레니는 어쩌고요오오!"

***

"......."

벌써부터 도서관 안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침이 바싹 말랐다. 본래 아침 9시 정각에 맞춰 왔어야 하니 무려 1시간도 넘게 늦은 것이다.

인상이 날카로운 관장 할머니께 어떤 꾸중소리를 들을까 덜컥 겁이 났다. 이틀 전에 책 한권을 이웃에 위치한 톰슨 도서관에 약속보다 몇 시간 늦게 갖다주는 바람에 된통 혼난 기억이 떠올랐다.

"으, 안 돼. 깊게 생각하지 말고 침착하자. 침착하는 거야."

나는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며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당당히 가공된 가죽으로 장식된 나무문을 열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시간쯤 도서관 내부는 굉장히 조용했다. 살벌한 눈빛으로 말없이 책을 고르고 있는 몇몇 인물들을 제외한다면 손님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세인, 네 녀석! 도대체 뭘 하다 이렇게 늦게 온게냐?"

이크! 몰래 머리를 숙여 살금살금 관장님의 시선을 피해 입구를 지나려던 나는 호랑이 같은 포효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고 말았다.

"과... 관장님! 죄송합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관장님을 향해 90도로 상체를 꺾어서 사죄. 그러나 관장님의 목소리는 전혀 노기가 풀릴 기색이 없었다.

"어허, 죄송하다면 다야! 그럼 법은 왜 있고?"

법이란 말에 나는 흠칫 놀라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이곳 세계에서도 법이란 것은 존재했다.

디바인 코드. 에르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적용되는 법을 일컫는 말이었다. 즉, 내가 에르제국의 영토를 밟고 있는 이상 디바인 코드는 그 효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는 뜻이다.

법을 어기면 보통 감옥을 간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감옥이라는 것이 죽음보다 더 끔찍한 패널티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죽음과 동일하게 하루 동안 접속 금지... 는 아니고 접속을 할 수는 있지만 감옥 내에서 지내야만 했기에 사실상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석방을 위해 죄에 따라 다른 금액의 면죄금을 내야 했다. 물론, 안 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벌에 따라서는 1년동안 감옥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기에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디바인 코드 제 4장 3조, 일의 직무 유기 및 태만은 그 수준에 걸맞는 벌을 내리도록 한다."

휘익

이동식 사다리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그 위에 타고 있던 누군가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별안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관장님께 반성을 하는 것도 잊고 굽힌 상체를 피며 고개를 돌렸다.

나의 눈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한 소녀가 들어왔다.

"나래 누나...! 정말로 절 감방에 보낼 셈이에요오?!"

"음... 후후, 그것도 재밌겠는데?"

진지한 듯, 아닌 듯한 미소로 볼에 검지손가락을 대고서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노려보는 누나.

나래 누나는 말하자면 도서관 사서였다. 책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직업으로 벌써 1년이나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나로서는 며칠조차 이곳에서 일하는 것도 힘든데 1년씩이라니... 어지간히 누나는 이 일을 좋아하나 보다. 윽, 나 같았으면 진작에 때려치고 바깥으로 사냥을 하러 갔을텐데.

관장님은 누나를 보더니 화색을 띄며 신뢰가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오, 나래구나. 마침 잘 됬다. 잠시 몇 분 정도 쉬어도 괜찮으니 휴게실에서 세인에게 따끔하게 혼내주려무나."

"네, 관장님. 아주 단단히 박살을 내드릴게요!"

여전히 다정다감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면서, 나래 누나는 나의 옷소매를 잡고 이끌었다.

나는 누나의 리드에 조금은 얼굴을 붉히면서 조용히 끌려가듯 따라갔다.

"너, 무슨 일 있었니?"

어느새 장난궂은 말투는 사라지고 누나는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지그시 쳐다봤다. 아, 평소의 따뜻한 누나로 돌아왔어!

사실 나래 누나는 원래 장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관장님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장난궂고 때로는 엄하게 나를 다룬다.

어쩌면 내가 관장님께 직접 벌을 받지 않게 만들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오른 적도 있었지만 이내 그럴 이유가 없다며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쨌든, 나는 기분 좋은 만족감을 얻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은 어제 어떤 여자아이를 만나서...."

나는 숨김 없이 나래 누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누나는 중간에 침에 찔려 기절했다는 부분에서 심각한 것처럼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이내 얼굴을 피며 깔깔 웃었다.

"쿡쿡쿡, 정말 재밌는 경험이었겠구나."

"네...."

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누나의 말에 동의했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지만.

"그래서? 그 꼬마 악.마.님은 지금 계셔?"

"아뇨, 아마도 지금쯤 구걸하러 다닐 거에요."

한숨을 쉬며, 내가 씁쓸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결국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맛있는 거를 사먹는다며 또 시작해버린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나 고귀한 존재... 아니 무시무시한 존재가 겨우 길거리에서 거지처럼 구걸을 하러 다니다니.

나의 고개가 안쓰러울 정도로 푹 꺾이자 누나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대신 따뜻한 누나의 몸이 안겨왔다.

"엇...!"

"괜찮아... 넌 아직 실패한게 아니야. 너도... 그분도... 성장하고 있는 중인 거야. 지금 시작은 비록 비루하고 초라하지만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나보다 조금 커다란 누나의 키 때문에 볼륨감 있는 가슴에 얼굴이 반쯤 파묻혀 있었던 나는 화악 얼굴이 뜨거워지면서도 황홀감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누나의 품에서 벗어나게 되자 나는 조금 진정되었지만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힘내!"

그러나 나래 누나의 어떤 차가운 것도 녹여버릴 것만 같은 그 따스한 미소에 나는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저 노력할게요, 누나!"

비록 나래 누나를 만난 지 겨우 5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누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남자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그런 예쁜 외모보다도 저절로 사람을 편안하고 기분좋게 만드는 저 햇빛처럼 빛나는 미소 때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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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6. 순백의 악마 (1) 24.04.01 6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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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5. 비오는 날의 추억 (5) 24.03.25 5 0 9쪽
» 5. 비오는 날의 추억 (4) 24.03.22 6 0 11쪽
32 5. 비오는 날의 추억 (3) 24.03.20 5 0 10쪽
31 5. 비오는 날의 추억 (2) 24.03.15 5 0 15쪽
30 5. 비오는 날의 추억 (1) +1 24.03.13 7 0 15쪽
29 4. 용서할 수 없는 것 (6) 24.03.11 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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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4. 용서할 수 없는 것 (4) 24.03.06 6 0 7쪽
26 4. 용서할 수 없는 것 (3) 24.03.04 6 0 16쪽
25 4. 용서할 수 없는 것 (2) 24.03.03 5 0 8쪽
24 4. 용서할 수 없는 것 (1) 24.02.26 5 0 8쪽
23 3. 차가운 만남 (9) 24.02.23 4 0 12쪽
22 3. 차가운 만남 (8) 24.02.21 5 0 9쪽
21 3. 차가운 만남 (7) 24.02.19 5 0 12쪽
20 3. 차가운 만남 (6) 24.02.16 5 0 8쪽
19 3. 차가운 만남 (5) 24.02.14 5 0 7쪽
18 3. 차가운 만남 (4) 24.02.12 6 0 10쪽
17 3. 차가운 만남 (3) 24.02.09 6 0 8쪽
16 3. 차가운 만남 (2) 24.02.07 6 0 7쪽
15 3. 차가운 만남 (1) 24.02.05 6 0 7쪽
14 2. 노스피아 원정대 (6) 24.02.02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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