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붉은 달에 울려퍼지는 소나타

그로스(growth)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적월소나타
작품등록일 :
2024.01.05 16:04
최근연재일 :
2024.04.08 19:00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481
추천수 :
0
글자수 :
181,998

작성
24.02.19 19:00
조회
5
추천
0
글자
12쪽

3. 차가운 만남 (7)

DUMMY

"야! 어서 일어나. 좀 있으면 과외받을 시간이잖아!"

평소처럼 다소 여리지만 거친 목소리가 나를 잠에서 깨게 만들었다. 졸린 눈을 반쯤 뜨고 옆을 바라보니 부석부석한 검은 머리에 투박한 안경을 쓴 누나가 씩씩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아, 벌써 일요일 아침이구나. 나는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대충 갈아입었다. 문 밖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누나는 벌써 방을 나가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아아암.

하품을 한번 크게 하고 눈을 비비며 1층으로 내려가니 어느새 식탁에는 계란 후라이가 얹어있는 두 접시가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하아, 또 계란 후라이야?"

벌써 2주째 같은 음식을 아침에 먹고 있었던 나는 오늘도 자연스레 불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말투.

"그래? 그럼 먹지 말던가."

언제나 그랬듯이, 굴복한 나는 젓가락을 들어 지겨운 맛을 참으면서 계란 후라이를 입 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어 버렸다.

딩동

아침식사를 끝마치기도 전에 고행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집안 곳곳에 울러퍼졌다.

"야, 빨리 들어가! 벌써 왔잖아!"

마지막 남은 커다란 조각을 젓가락으로 채 집어먹기도 전에 급히 접시를 뺏어서 부엌의 싱크대에 넣고는 누나가 얼른 내 방안으로 들어가라고 등을 떠밀어 재촉했다.

그 바람에 나는 약간 허전한 배를 느끼며 공부를 준비할 수 밖에 없었다.

"어, 안녕... 왔어?"

"으응."

한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들어오자 나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타오르는 듯한 정열적인 붉은 색의 머리. 그리고 선명한 복숭아빛 입술과 아기자기한 코, 그리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에메랄드 색에 가까운 잿빛 눈동자는 무언가 보고 있는 이에게 따뜻함과 미소를 저절로 안겨다주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수려한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레인즈시티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들만이 갈 수 있는 특별 국제학교인 우청 중학교. 거기서 모든 과목의 종합성적으로 항상 전교 1,2등을 다투고 있는 그녀는 거의 누구나 인정하는 영재이자 소위 말하면 엄친아에 가까운 여자아이였다.

지금의 나와 그녀의 존재감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있다. 늘 곁에 있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 자신이 과연 그녀와 어울릴 수 있는 레벨이 되는 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정도로.

그리고 이상한 것은 존재감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유대감. 비록 유대감이라는 것이 참 애매한 감정이긴 하나 어쨌든 친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사이가 어색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거리낌 없이 같이 놀고 뛰어다니며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소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비를 보고 나는 어쩐지 불편함을 느꼈다. 거리가 더욱 멀어진 느낌이랄까... 마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는 것처럼 막막했다.

"으음... 오늘은 그러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은 사회에 대해 공부하는 날이었다. 수학만큼 현기증이 날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나름 고역인 과목이었다.

미리 의자에 앉아서 책상에 수학 문제집을 펼치고 있는데.

툭.

"집어."

"......?"

순간 그녀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선 어조의 목소리에 환청인가 싶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헉...!"

어느새 푸른 머리를 한 싸늘한 여검사가 무시무시한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낯익은 모습에 본능적으로 식은 땀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어서 집어. 싸우자."

방 바닥에 놓인 낡은 검을 가리키며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할 듯 검날을 섬뜩하게 나에게로 향했다.

마치 온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도저히 움직일 기세를 보이지 않자 그녀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안 집겠다, 이거지?"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검이 내 몸을 크게 대각선으로 베고 말았다. 아니, 검의 움직임이 어렴풋한 잔상조차 보이지도 않았지만 붉은 피가 상처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이상하게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이 마비된 걸까? 피가 온 몸을 적시는 불쾌한 감촉을 생생히 느끼며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한 감각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아찔해지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나는 그제서야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끄아악!"

***

헉... 헉...

눈이 번쩍 떠지며 얼음 바닥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나고 말았다. 당장 베인 상처의 감각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끔찍했지만 왠지 모르게 기묘한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꿈.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새근새근 잠에 흠뻑 취해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글라시아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릴 뻔했는데 이제보니 조금은 그녀가 루비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특히 전반적인 얼굴 인상이 비슷했다. 물론, 머리 색이며 성격 등 분위기가 전혀 상반된다는 점을 빼고 본다면 말이다. 혹시, 어쩌면... 저 여자애가 루비와 자매 관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나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로 저어댔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저렇게나 성격이 다른데... 게다가 초등학생에 같이 어울려 다니는 동안 루비에게 저런 언니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벌써 잠에서 깬 거야...?"

망상에 잡혀있는 동안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소녀의 눈이 번쩍 떠지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황급히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게 부작용이 되었는지 그녀의 눈매가 약간 날카로워진 것 같아 보였다.

"연습할까?"

"네... 넵."

반쯤 강제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에 선택권이 없었던 나는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닳아서 이빨이 빠진 것처럼 보기 흉하게 되어버린 낡은 검을 쥐고는 투지를 불태우며 자세를 취했다.

그녀가 소환한 화염의 정령을 쓰러뜨리는 일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였다.

도저히 전투에서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은 그녀도 역시 그것을 쓰러뜨릴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는지 그저 잘 싸웠다고만 말해줄 뿐이었다.

그래도 굳이 그 정령을 상대하는 것으로부터 배운 점을 꼽자면 공격을 할 때 무작정 공격하지 않고 어느 정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보고 나서 움직이는 정도랄까.

하지만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늘어난 것은 딱 하나 있었다.

사샥!

전광석화로 검집을 뽑고 달려드는 소녀. 순간이동을 한 듯 순식간에 바로 내 앞까지 이동하고는 가차 없이 무기를 횡으로 휘둘렀다.

꼼짝없이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하고 당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해당되는 말이지만.

나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이전에 반사적으로 겨우 무기를 들어 막는 것이 아닌 공격에 대한 확실한 회피였다.

보인다... 운동신경이 늘어난 탓인지 미세하게 잔상으로나마 그녀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얼마 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나의 움직임에 살짝 놀랐는지 잠시 공격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동요한다거나 일말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잔인하고 냉철하기보단, 좀 더 만족감과 기쁨에 가까운 듯한 그런 종류의 미소. 지지 않겠다는 듯 검집을 꽉 쥐고 살짝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긴장하며 움직임을 주시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고 난 후, 이번엔 먼저 내가 있는 힘껏 얼음을 박차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마치 내가 선공을 할 것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그 자리에서 소녀는 여유롭게 검집을 들어 방어를 할 자세를 취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면으로 무모하게 달려드는 나의 공격 정도는 그저 눈을 감고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쉬울 것이다.

'걸려 들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있는 힘껏 달리다가 일부러 미끄러 넘어졌다. 그녀는 칠칠맞지 못한 내 모습을 보고는 조금 힘이 빠졌는지 자세를 풀었다.

언뜻 보면 마치 실수로 달려나가다가 우스꽝스럽게 엉덩방아를 찧은 것처럼 보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얼음판 위에서 갑작스럽게 넘어진 나는 반동에 의해 급격한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나아갔다. 뛰어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

그제서야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양,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어자세를 취하려고 하였지만 이미 빙판에 의해 가속될대로 된 내가 먼저 파고들었다,

거의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나는 눕혀진 상태에서 검을 있는 힘껏 들어 측면에서 공격을 시도했다.

역시나 아무리 냉혈한의 그녀라도 이번에는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뜨고서 반사신경만에 의존하여 겨우 다리를 옆으로 돌려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큭!"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오른쪽 다리를 꿇는 소녀. 주저앉은 그녀의 푸른 머리가 힘없이 흔들렸다.

"괘... 괜찮아요?"

"괜찮아...."

설마 검상이라도 입은가 싶어 지레 겁을 먹고 그녀에게로 달려가보니 무표정하기만 했던 소녀의 약간 찌푸린 인상이 말해주듯 아무런 갑옷도 입지 않은 다리가 시뻘건 액체로 물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도 하필이면 우연히 다리에 베인 상처가 무릎 뒤쪽 부분이었다.

'커다란 적을 제압할 때는 무릎 뒤쪽의 급소를 노리는 것이 좋아. 적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으니.'

어렴풋이 소녀가 이전에 했던 말이 생각나면서 섬뜩한 느낌과 함께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헉...!'

큰일났다! 이젠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겠구나 싶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날카로운 전투감각을 가진 그녀가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해도 이렇게 허무하게 부상을 입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즉시 무릎을 꿇고는 상체와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깊게 숙인 채 마치 중죄인처럼 깊은 사죄의 말을 털어놓았다.

"죄... 죄송해요! 죽을 죄를 졌습니다. 저도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그만 힘이 들어가서...."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고의로 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그녀가 어떤 반응을 하고 있을지 너무나도 두려워서 차마 보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박다시피 한 채로 처분만을 기다렸다.

생살을 얼릴 듯이 추운 한기가 맞닿은 이마를 타고 전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극도로 긴장하여 생긴 뜨거운 땀이 얼굴을 타고 이마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박동이 무섭게 요동치는 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덜덜 떨고 있는데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소녀의 힘겨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부축해줘."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그로스(growth)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중단 안내 24.05.03 6 0 -
공지 작품설정(1권) 24.01.05 20 0 -
공지 작품 공지 +2 24.01.05 12 0 -
40 6. 순백의 악마 (4) 24.04.08 4 0 7쪽
39 6. 순백의 악마 (3) 24.04.05 4 0 16쪽
38 6. 순백의 악마 (2) 24.04.03 6 0 8쪽
37 6. 순백의 악마 (1) 24.04.01 7 0 14쪽
36 5. 비오는 날의 추억 (7) 24.03.29 6 0 9쪽
35 5. 비오는 날의 추억 (6) 24.03.27 6 0 11쪽
34 5. 비오는 날의 추억 (5) 24.03.25 6 0 9쪽
33 5. 비오는 날의 추억 (4) 24.03.22 6 0 11쪽
32 5. 비오는 날의 추억 (3) 24.03.20 6 0 10쪽
31 5. 비오는 날의 추억 (2) 24.03.15 6 0 15쪽
30 5. 비오는 날의 추억 (1) +1 24.03.13 7 0 15쪽
29 4. 용서할 수 없는 것 (6) 24.03.11 7 0 9쪽
28 4. 용서할 수 없는 것 (5) 24.03.08 8 0 9쪽
27 4. 용서할 수 없는 것 (4) 24.03.06 7 0 7쪽
26 4. 용서할 수 없는 것 (3) 24.03.04 7 0 16쪽
25 4. 용서할 수 없는 것 (2) 24.03.03 5 0 8쪽
24 4. 용서할 수 없는 것 (1) 24.02.26 6 0 8쪽
23 3. 차가운 만남 (9) 24.02.23 5 0 12쪽
22 3. 차가운 만남 (8) 24.02.21 6 0 9쪽
» 3. 차가운 만남 (7) 24.02.19 6 0 12쪽
20 3. 차가운 만남 (6) 24.02.16 6 0 8쪽
19 3. 차가운 만남 (5) 24.02.14 5 0 7쪽
18 3. 차가운 만남 (4) 24.02.12 7 0 10쪽
17 3. 차가운 만남 (3) 24.02.09 7 0 8쪽
16 3. 차가운 만남 (2) 24.02.07 6 0 7쪽
15 3. 차가운 만남 (1) 24.02.05 6 0 7쪽
14 2. 노스피아 원정대 (6) 24.02.02 7 0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