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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에 울려퍼지는 소나타

그로스(growth)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적월소나타
작품등록일 :
2024.01.05 16:04
최근연재일 :
2024.04.08 19:00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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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수 :
181,998

작성
24.02.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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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가운 만남 (8)

DUMMY

"네엣...?"

순간 환청인가 싶어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상처가 괴로웠는지, 이마에 식은 땀이 송송 맺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녀는 무표정에 가까운 눈빛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통증이 심한 듯 간신히 말을 내뱉자마자 반쯤 눈을 감았다 뜨는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나는 방금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손바닥에 의지한 채 살며시 푸른 머리의 소녀에게 다가갔다. 다리 하나를 세워 지탱하고 이제 일으켜 세우려는데 내 손이 멈칫거렸다.

아무리 위급상황이라고는 해도 스킨십이라니... 그게 소심한 나에게 있어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허리를 감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모르는 내 모습을 보고는 조금 화가 났는지 싸늘한 기운을 담아 그 여자애가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잡아."

효과는 탁월했다. 죽음의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일깨워주는 말에 나는 어느새 쑥맥은 잊어버리고서 그녀의 겨드랑이에 팔을 얼른 댔다.

내 오른쪽 가슴 부분에 닿은 손이 미치도록 간지러웠지만 꾸욱 참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의 상처때문인지 일어나면서 그녀가 윽 하고 짧게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다리 상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조금 힘겨워하는 듯한 말투로 냉혈한 소녀가 대답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해보니 어느새 그녀의 무릎 부근에 붕대로 칭칭 감아 놓은 것이 보였다. 내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조아린 동안에 혼자서 처리한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요?"

완전히 일어나 부축한 상태로 내가 걱정스럽게 물어보자 그녀는 한쪽 눈을 찌푸리며 살며시 입을 열었다.

"노스피아까지... 부탁... 해."

추욱. 갑자기 그녀가 의식을 잃고 머리가 앞으로 축 늘어지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겨우 버텨서 몸을 추스리고는 여자애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노스피아까지...?"

에엑...?! 가... 가능 할리가 없잖아아! 단순하게 보면 내 또래쯤의 여자 애를 부축해서 근처 마을까지 데려가는 일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는 '던전'이다. 그것도 고레벨의 유저들조차 고난을 겪는 극악의 던전. 최소 280레벨 이상의 초강력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는 이른바 미탐사 던전이라고 부르는 곳 중에 하나다.

겨우 한걸음 씩 움직이는 것이 고작인 내가 이 수많은 몬스터들을 뚫고 게다가 이 혹독한 추위까지 맞서 싸우며 무사히 마을에 도착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것이 틀림 없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일이 된 이상 해야만 한다. 할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저 애가 다쳤고 이제 노스피아까지 가야만 하는 책임을 지게 된 것은 바로 나였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도대체 어디로 가야 던전을 탈출할 수 있는 거지...?'

제일 단순한 방법으로 이곳 던전 벽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상층으로 가는 통로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방법이었다.

겨우 10레벨에 불과한 내가 280레벨이 넘는 거대한 괴물들의 시선을 완전히 피해서 던전을 탈출해야 한다니. 이것은 마치 개미가 인간들의 발걸음을 피해서 보도를 걷는 것보다 더 무모할 것이 분명했다.

아냐, 아냐. 너무 위험해. 고개를 크게 흔든 나는 다른 방법을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었다. 시선이 영상이 흘러나왔던 수정 기둥으로 향하자 문득 이상한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기둥을 들고 올 수 있었을까?'

따지고 보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몰래 이런 영상을 숨기려고 여기에 가져다 놓았다면 분명히 커다란 원정대는 아닐텐데, 무슨 수로 이 수많은 몬스터들을 헤치우고 여기까지 기둥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가 있었던 걸까?

"아... 설마?"

영상을 보여줄 수 있는 커다란 수정. 이 수정은 어딘가에서 마력을 공급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이 수정이 세워진 땅이 한마디로 텔레포트에 유리한 곳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딱 한 가지 있었다.

"그치만... 난 마법을 쓸 수 없잖아...?!"

텔레포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마법과 마력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사실. 한마디로 마법의 '마'자도 모르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수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수정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수정을 만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

수정에 손을 대자 신비한 느낌을 주는 백색 섬광이 내 몸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기억 속의 영상을 봤을 때처럼 어딘가로 이끌려가는 기분...

아니, 그보다도 방금 전에 노스피아를 떠나기 직전에 느껴봤던 감각이었다.

내 주변에 공기가 불투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살아있는 듯이 손으로부터 뻗어져 나오는 무언가가 꿈틀꿈틀대며 나와 정신을 잃은 글라시아를 중심으로 커다란 구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게 마력이라는 걸까? 팔을 더듬는 것 같은 감촉에 조금 불쾌했지만 매우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점점 나와 그녀를 감싸던 구체가 선명해지면서 주위에서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난데없이 밟고 서 있던 얼음판이 밝게 빛나면서 주변이 반대로 점점 캄캄하게 보였다.

나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앗!"

조심스럽게 어깨로 그녀의 몸을 받치고, 황급히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낡은 검과 하얀 검집을 챙긴 후 그녀의 빵빵한 배낭에 주섬주섬 집어넣으려고 시도를 해보았다.

윽, 안 들어가잖아!

아무리해도 들어갈 생각을 않자 결국 체념하고 내 배낭에 꾸깃꾸깃 억지로 집어넣어버렸다. 두 배낭을 어깨에 맨 순간, 절묘하게도 텔레포트가 시작된 듯 빛과 소음이 요란하게 울러퍼졌다.

광음이 절정에 달할 무렵, 번쩍 하는 강렬한 섬광으로 인해 눈이 질끈 감겼다. 점차 빛이 사라지고 서서히 눈을 뜨자.

"......!"

부작용으로 깜깜해진 시야가 돌아오면서 보인 내 눈에는 바깥세상의 하얀 절경이 펼쳐져 있었다.

희뿌연 눈으로 가득한 설원. 마치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듯 그 어떠한 인위적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대자연 속에 내가 서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타고 차가운 무언가가 얼굴에 조금씩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생생했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이제서야 긴 잠을 떨쳐내고 깨어나는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이게 정말로 게임 속이라는 말이야? 나는 당연하게 믿었던 그 사실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대지이며 손을 조금만 뻗으면 잡히는 눈 속에 묻힌 풀, 가벼운 가죽 신발을 타고 전해지는 미끄러우면서도 시린 바닥의 감촉, 심지어는 제법 맵지만 은근히 싱그러운 내음이 전해지는 바람까지.

온 몸으로 이 절경을 오랜만에 만끽하려고 하는 순간에.

끼르르륵

저 멀리 들판에 어떤 형체들이 소리를 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체격은 인간보다 약간 작은 편에 기다란 귀, 그리고 전신이 하얀 괴물... 설마?

'스노우 레빗은 진짜 무서운 괴물이야. 레벨이 무려 200이나 되는 것도 그렇지만 수가 굉장히 많고 스피드가 빨라서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고 해.'

나래 누나가 옛날에 말했던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다. 무려 1년 동안이나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부분의 책을 읽어서 그런지 누나는 정말로 모르는 게 없었다.

쉬는 시간이나 가끔 같이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온갖 책에 나오는 재밌는 이야기를 꺼내곤 하는 누나였으니까.

'내... 내가 저걸 해치울 수 있을까...?'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스럽게 몸을 낮춰 정신을 잃은 그녀를 나무에 기대게 만든 후 배낭에서 낡은 검을 주워들었다.

레벨 10짜리가 200에게 달려드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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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4. 용서할 수 없는 것 (4) 24.03.06 7 0 7쪽
26 4. 용서할 수 없는 것 (3) 24.03.04 7 0 16쪽
25 4. 용서할 수 없는 것 (2) 24.03.03 5 0 8쪽
24 4. 용서할 수 없는 것 (1) 24.02.26 6 0 8쪽
23 3. 차가운 만남 (9) 24.02.23 4 0 12쪽
» 3. 차가운 만남 (8) 24.02.21 5 0 9쪽
21 3. 차가운 만남 (7) 24.02.19 5 0 12쪽
20 3. 차가운 만남 (6) 24.02.16 6 0 8쪽
19 3. 차가운 만남 (5) 24.02.14 5 0 7쪽
18 3. 차가운 만남 (4) 24.02.12 7 0 10쪽
17 3. 차가운 만남 (3) 24.02.09 7 0 8쪽
16 3. 차가운 만남 (2) 24.02.07 6 0 7쪽
15 3. 차가운 만남 (1) 24.02.05 6 0 7쪽
14 2. 노스피아 원정대 (6) 24.02.02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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