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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에 울려퍼지는 소나타

그로스(growth)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적월소나타
작품등록일 :
2024.01.05 16:04
최근연재일 :
2024.04.08 19:00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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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1,998

작성
24.02.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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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3. 차가운 만남 (4)

DUMMY

"으으으......."

제대로 이너웨어까지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뼈에 사무치는 추위에 나는 이빨을 덜덜 떨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널부러져 있던 괴물의 사체는 온데간데없고 말끔하게 정리된 공간.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저쪽 구석에 서 있던 소녀를 쳐다보았더니 글라시아는 이미 짐을 다 싸고서 배낭을 맨 상태였다.

아... 이제 던전을 벗어나려고 하는구나...... 잠깐만...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칼을 들이댔던 그녀가 나에게 선뜻 같이 가자고 이야기할 리가 없다.

도움은 고사하고 오히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르는 판국에 귀찮은 짐덩어리를 굳이 떠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먼저 말하기도 어려웠다. 자칫하다가 저 청발 소녀의 심기를 건드리는 날엔 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도무지 알 수 없을테니.

본능적으로 저 여자가 매우 위험하고 강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던전을 벗어나 안전하게 노스피아 마을까지 가려면 그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만약 지금부터라도 재빨리 벗어나 마을에 도달한다면 원정대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대부분 원정대는 이동 속도가 느린 데다가 하루 정도를 물자 보급 및 교환으로 시간을 소모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든 저 소녀에게 호의를 보여서 같이 동행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내 눈이 희망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이만...."

정말로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차가운 눈초리로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그 소녀는 천천히 등을 돌려 발걸음을 향했다. 아니면 이전에 만났던 기억이 전혀 없었던 걸까?

방금 전에 먹을 것을 건네주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마치 전쟁터로 떠나는 엄격한 여전사의 느낌.

막연하게 부풀어올랐던 동행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이 산산히 깨어지는 듯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땅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려고 할 때.

에세리아가 떠올랐다. 지금쯤 어쩌면 언제 돌아올까 노심초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에세리아가... 물론, 겉으로 보기엔 천방지축 고집불통에 장난꾸러기처럼 보이는 꼬마에 불과했지만 나는 내심 얼마나 에세리아에게 의지를 했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나의 몸이 다시 의지를 갖고 일어섰다.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시키는 거다.

아니, 설득이 실패한다고 해도 나는 그녀를 따라갈 것이다. 반드시 노스피아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내 발걸음이 일정한 간격을 놓고 글라시아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나의 목숨을 건 미행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던전 안은 밤과 낮을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고 그 희미한 빛마저도 벌써 자취를 감춰버린지 오래였다.

전혀 진척이 없었다. 섣불리 청발의 소녀에게 말을 걸기도 전에 어마무시한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였고 거의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몬스터들은 대개 두 동강이 나서 쓰러져버렸다.

내가 싸움에 휘말릴까봐 뒤로 물러난 사이, 글라시아는 방금 전투를 한거라곤 전혀 믿을 수 없을만큼 멀쩡한 상태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도저히 진지한 설득은커녕, 대화를 시도할 틈조차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저 죽어버리고 편하게 현실세계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꾹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던 무렵, 갑자기 끊임없이 나아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왜... 따라오는 거지?"

고개를 돌린 그녀의 차가운 얼음빛의 눈동자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 사실은 저 소녀도 내가 미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겨우 몇 십 발자국의 거리를 두고 계속 미행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겠지만 어두컴컴한 던전이었기에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 동안 나는 멀찍이 물러나있거나 숨어있었기 때문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계속 자신의 뒤통수에 대놓고 꽂아대는 시선을 끊임없이 맞아도 아주 모를만큼 둔탱이는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그게...."

"더 이상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거야...."

차갑게 읖조리듯이 말한 그녀가 순식간에 하얀 검신의 검을 뽑았다.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하얀 눈과도 같은 매끈한 검에는 당장이라도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아 몸을 저절로 덜덜 떨게 만들었다.

더 이상 내가 말을 잃어버린 채 굳은 듯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 소녀는 만족했는지 검을 집어넣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크윽...! 검날의 끝이 자신을 향할 때 순간적으로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새하얘졌다. 목숨을 잃는 두려움과는 다른 무언가라고 생각될 만큼의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설령 따라간다고 한들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한데 어째서 죽음을 무릅쓰고 미행을 하려는 내 자신을 알 수 없었다.

추위와 공포에 이빨이 떨리면서도 나는 계속 나아갔다. 그녀에게 설득을 성공할 때까지... 그리고 이런 나약한 내 자신을 극복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 흐르고 나서 마침내 다시 한번 글라시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경고했을텐데... 따라오지 말라고."

"그러니까...."

이번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왜 자신이 그토록 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뒤도 돌아보지도 않는 그녀에게 나는 당당히 마음 속의 바람을 솔직하게 외쳤다.

"강해지고 싶어요! 이곳에 있는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을 때까지!"

겨우 레벨 10짜리가 280이 넘는 몬스터를 상대하다니... 내 자신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내 마음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단지 육체적인 강함뿐만이 아닌 어떤 몬스터가 오더라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그런 정신적으로도 강한 전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 면으로 봤을 때 저기 눈 앞에 보이는 소녀는 그야말로 지금의 내가 동경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일 것이다.

"강해지고 싶다고...?"

그제서야 예상치 못한 내 말에 반응하듯 그 소녀의 고개가 스윽 돌아갔다. 얼굴에 담긴 냉조의 무표정. 마치 그 모습이 비웃는 것 같아 나를 조금 위축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럼... 어디 강해져 봐."

스릉하고 순식간에 칼을 뽑아드는 그녀. 내가 미처 검을 뽑을 새도 없이 몇 십보나 되는 간격을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돌진하여 좁혀버린 소녀가 검을 나에게 휘둘렀다.

치링하고 검과 검집이 맞붙는 소리가 들리며 나의 몸이 충격으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위력! 내가 반사적으로 검집을 들어 겨우 막을 정도의 스피드로 가볍게 휘두른 검이 저정도다.

거의 몇 미터를 날아가 얼음벽에 볼썽사납게 부딪힌 나는 뒷머리에 전해지는 아찔한 충격에 머리를 감싸매며 끙끙거렸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건 상대조차 되지 않는 일방적인 실력차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임시방편으로 방어하여 그나마 충격을 줄이는 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멀어진 거리를 파고들며 공격을 휘두를 때마다 나의 몸은 마치 풍선처럼 붕붕 날아다니며 바닥에 벽에 먼 거리를 날아가 쳐박혔다.

"겨우 강해진다는게 이정도야...? 난 지금 진짜 힘의 10퍼센트도 쓰지 않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들었다면 그저 허풍같아 보였지만 몇번이고 엄청난 위력을 본 지금은 마음 속 깊이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소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나를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벌써 내 몸은 이런저런 충격에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였다.

가죽 겉옷은 너덜너덜 찢겨 있었고 군데군데 속에 감춰진 이너웨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체 부분도 맨살이 조금씩 드러날만큼 손상되어 있었다.

온갖 고통이 머리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멤돌고 있었지만 나는 악착같이 버텼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방금 전까지 강해지고 싶다는 것을 그토록 원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자신이 목숨을 걸어도 부족할 정도로 강한 저 소녀와 결투를 하고 있다.

오히려 자신이 강해질 수 있는 더 없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자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 방어하고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서 소녀에게 공격을 가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크억!"

챙 하고 금속음을 울리며 내 검이 힘 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어찌할 새도 없이 그녀의 이어지는 발차기가 나의 몸체를 무너뜨려 넘어뜨렸다.

누워있는 나의 시선에 무표정으로 서서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들어왔다. 칼을 날카롭게 역으로 세우면서 내 가슴 위에 직각으로 위치시켰다.

끝났구나... 나는 거의 반쯤 눈이 감긴 상태로 체념하고 말았다. 갖은 혹독한 충격에 이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 앞에 내리꽂을 검의 공격조차 피할 미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의지가 꺾이고 나니 애써 부여잡은 정신마저 희미해지며 온갖 고통이 그 틈새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끄윽.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부족해."

어라? 내가 잘못 본 걸까? 그녀가 차갑지만... 조금은 어딘가 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으며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푹하고 칼이 어딘가에 박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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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4. 용서할 수 없는 것 (4) 24.03.06 7 0 7쪽
26 4. 용서할 수 없는 것 (3) 24.03.04 7 0 16쪽
25 4. 용서할 수 없는 것 (2) 24.03.03 5 0 8쪽
24 4. 용서할 수 없는 것 (1) 24.02.26 6 0 8쪽
23 3. 차가운 만남 (9) 24.02.23 4 0 12쪽
22 3. 차가운 만남 (8) 24.02.21 5 0 9쪽
21 3. 차가운 만남 (7) 24.02.19 5 0 12쪽
20 3. 차가운 만남 (6) 24.02.16 6 0 8쪽
19 3. 차가운 만남 (5) 24.02.14 5 0 7쪽
» 3. 차가운 만남 (4) 24.02.12 7 0 10쪽
17 3. 차가운 만남 (3) 24.02.09 7 0 8쪽
16 3. 차가운 만남 (2) 24.02.07 6 0 7쪽
15 3. 차가운 만남 (1) 24.02.05 6 0 7쪽
14 2. 노스피아 원정대 (6) 24.02.02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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