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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달에 울려퍼지는 소나타

그로스(growth)

웹소설 > 일반연재 > 게임, 판타지

적월소나타
작품등록일 :
2024.01.05 16:04
최근연재일 :
2024.04.08 19:00
연재수 :
4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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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1,998

작성
24.03.2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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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5. 비오는 날의 추억 (3)

DUMMY

순백의 타락... 그리고 악마.

말하자면 에세리아 그녀는 천사가 아니라 바로 악마였다. 순백을 관장하는 특이한 악마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예전에 그 믿을 수 없는 추악한 검은 괴물로 변신한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다른 몇몇의 유명한 페이스라면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가장 대표적인게 페이스 레이젤, 레이젤이라는 성장을 관장하는 천사가 이끄는 페이스 집단이다.

이 페이스 집단은 굉장히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그곳의 일원들의 차원을 뛰어넘는 실력 때문이다.

비록 인원은 수십 명에 불과하였으나 단 하나의 페이스로 수천명 규모의 대길드 3개 연합을 상대로 승리한 전설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이었다.

즉, 한명 한명이 최상급의 스펙을 갖춘 랭커들이었으며 상상도 할 수 없는 강함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렇듯, 이 페이스 집단이 길드에 비해 굉장한 힘을 낼 수 있었던 대표적인 이유는 바로 성장의 축복이라는 레이젤 페이스 고유의 어빌리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어빌리티가 이렇게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 바로 내가 가진 이 어빌리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설명은 거창했지만 따지고 보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어빌리티. 애초에 순백이라는 말 자체가 애매했다.

성장이라면 성장, 힘이라면 힘, 재력이라면 재력. 이런 식으로 확실한 효과를 보장할 것 같은 단어의 어빌리티에 비하면 이것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이 아무런 개수의 제한이 없고 삭제 및 대체가 가능한데 비해, 어빌리티의 경우 최대 두개까지 습득이 가능했고 중요한 점은 삭제나 대체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어빌리티를 획득하는데 있어서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일텐데 나는 벌써부터 어빌리티를 획득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는 그런 자리만 축내는 어빌리티를.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온라인 게임에서 흔히들 말하는 '잉여 캐릭'이라는 것은 날 두고 말하는게 아닐까.

그로스 게임의 경우 일명 '리셋'이라는 것이 가능했다. 카드 게임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인 '리세마라'와 비슷한 개념으로 캐릭터를 초기화시켜 전혀 다른 스탯과 스타팅포인트, 그리고 좋은 어빌리티나 퀘스트를 획득할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물론, 어지간하면 리셋은 보통 캐릭터를 생성 후 하루도 채 되지 않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들 축복받은 여행자의 줄임말인 '축행자'의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은 하루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희귀한 퀘스트가 갑자기 나타난다던지, 스탯이 특정한 곳으로 치우쳐 있다던지, 시작부터 우연하게 누구를 만나 특정한 어빌리티를 부여받게 된다던지.

다시 말해서, 나처럼 5일 정도가 지났는데도 리셋을 하는 여행자는 거의 없다는 소리다. 그동안 쌓아둔 돈과 인맥, 그리고 소모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런 것을 도저히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별안간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시선을 약간 아래로 떨구었다. 어느새 이불을 헤치고 소파에 앉아 있는 베이지색 머리의 소녀.

나는 조금 씁쓸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미간에는 못마땅하다는 듯 잔뜩 힘을 주고서.

"안녕히 주무셨어요, 꼬마 악.마.님?"

"... 어? 너 알고 있었어?"

들킬 줄 몰랐다는 것처럼, 에세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긴 머리며 새빨간 눈이, 귀여운 토끼같은 모습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지만 애써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빌리티 창에 떡하니 쓰여 있는데 모를 줄 알았어요?"

"......."

잠시 침묵. 에세리아는 안쓰러울 정도로 작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말을 아꼈다. 나는 그 모습에 근거 없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그 감정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미안해... 괜히 천사라고 속여서......."

눈을 여전히 바닥으로 향하면서,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그녀가 속삭이듯 잘못을 토로했다.

"악마라고 하면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을 거잖아... 여행자들은 악마를 아주 교활하고 나쁜 존재로 알고 있고... 그래서......."

"그래서... 속인건가요? 저를... 아니 자기 자신을요...."

"...."

다시 이어지는 침묵. 이번에는 에세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속인다는 것은 대단히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아무리 추하고 하찮은 존재라고 할지라도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고요!"

나에게서 나온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그런 신경질적인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녀 역시 평소와는 다른 나의 강한 목소리 톤에 겁에 질린 듯 커다랗게 붉은 눈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왜 고함을 질렀을까. 마치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힌 것처럼 방금 내가 소리쳤던 게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조금 내리깔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으응? 아니야. 괜찮아, 내가 잘못한 일이니까."

에세리아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녀가 밝은 음색을 내자 나는 죄책감 비슷한 기분에 더욱 힘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제야 알 것만 같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었다. 과거의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겁쟁이 나에게 스스로 꾸짖는 질책.

나는 기억의 기류로 인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 역시 나의 심정을 이해라도 한 것처럼 뭔가 물어보지 않았다.

적갈색의 맑은 눈동자와 나의 눈동자가 서로 교차했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몇 분 동안 침묵의 시간이 무겁게 흐르고 말았다.

마치 하늘도 그 분위기를 헤아려 주는 것처럼 맑은 별하늘이 눈부시게 총총 박힌 대신, 오직 구름에 가려 엷은 달만이 외롭게 텅 빈 검은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에세리아와 대치상황.

이 시간쯤이면 깊은 잠에 빠져있을 에세리아인데 웬일로 오늘은 나보다도 먼저 깨어있다니... 이쯤되면 해가 서쪽에서 뜰 노릇이다.

"마... 마스터님? 왜 벌써 일어나 있으세요?"

말을 마치고 잔뜩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흥미롭다는 듯, 아니면 가소롭다는 듯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미소를 짓는 에세리아.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에 온 몸이 끈적하게 젖으니 마치 사우나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몇 초간의 침묵. 나의 긴장감이 희미한 바람을 타고서 최고조에 달해 있을 즈음에 에세리아가 별안간 외쳤다.

"광장에 데려가줘!"

"네...?"

정말로 에세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전혀 생각치 못한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데려가 달란 말이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아뇨... 어려운 건 아니지만...."

아니, 사실은 어렵다. 우선, 지금 당장 도서관에 간다고 해도 제시간에 도착할까 말까 한 시간인데 광장 같은 데에 갈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불편하다. 아무리 꼬마라곤 해도 이런 여자아이와 같이 가면... 데이트가 생각날 수밖에 없잖아!

문득, 처음 마스터님과 만났을 때가 떠오른 나는 조심스럽게 반격했다.

"그치만, 마스터님은 구걸하시러 가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그걸 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말야. 내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

"......."

자연스럽게 되받아친 마스터님에 의해 얼떨떨해져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린 마스터님은 다시 이어서 말했다.

"이제 난 그런거 안해도 돼! 왜냐하면 너가 있잖아! 너가 돈도 벌어줄거고 그리고. 밤에 항상... 너가 같이 있으니까...."

마스터님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살짝 흐려버리는 바람에 덩달아 나의 얼굴도 새빨개지고 말았다. 도대체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에요?

"페... 페이스로서... 계속 유지할 수 있다구!"

"아 그... 그런 뜻이었어요?"

"다... 당연하지. 그 밖에 뭐가 있겠어?"

서로 말을 더듬으며 얼굴에 가신 열기를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 나와 마스터님. 그저 평범한 대화일 뿐인데. 어째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 그저 게임일 뿐인데.

껄끄러워진 분위기를 타파하듯, 마스터님이 나의 가죽 갑옷을 걸친 어깨부분을 탁탁 손바닥으로 치면서 활짝 웃었다.

"그건 됐고, 자 그럼 출발해야지?"

"그럴까요?"

작은 몸으로 마스터님은 계단을 힘차게 내려갔다. 덕분에 씩씩한 마스터님의 모습을 보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오히려 순수한 그녀의 미소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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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6. 순백의 악마 (4) 24.04.08 3 0 7쪽
39 6. 순백의 악마 (3) 24.04.05 4 0 16쪽
38 6. 순백의 악마 (2) 24.04.03 5 0 8쪽
37 6. 순백의 악마 (1) 24.04.01 6 0 14쪽
36 5. 비오는 날의 추억 (7) 24.03.29 5 0 9쪽
35 5. 비오는 날의 추억 (6) 24.03.27 5 0 11쪽
34 5. 비오는 날의 추억 (5) 24.03.25 6 0 9쪽
33 5. 비오는 날의 추억 (4) 24.03.22 6 0 11쪽
» 5. 비오는 날의 추억 (3) 24.03.20 6 0 10쪽
31 5. 비오는 날의 추억 (2) 24.03.15 6 0 15쪽
30 5. 비오는 날의 추억 (1) +1 24.03.13 7 0 15쪽
29 4. 용서할 수 없는 것 (6) 24.03.11 6 0 9쪽
28 4. 용서할 수 없는 것 (5) 24.03.08 8 0 9쪽
27 4. 용서할 수 없는 것 (4) 24.03.06 6 0 7쪽
26 4. 용서할 수 없는 것 (3) 24.03.04 7 0 16쪽
25 4. 용서할 수 없는 것 (2) 24.03.03 5 0 8쪽
24 4. 용서할 수 없는 것 (1) 24.02.26 6 0 8쪽
23 3. 차가운 만남 (9) 24.02.23 4 0 12쪽
22 3. 차가운 만남 (8) 24.02.21 5 0 9쪽
21 3. 차가운 만남 (7) 24.02.19 5 0 12쪽
20 3. 차가운 만남 (6) 24.02.16 6 0 8쪽
19 3. 차가운 만남 (5) 24.02.14 5 0 7쪽
18 3. 차가운 만남 (4) 24.02.12 6 0 10쪽
17 3. 차가운 만남 (3) 24.02.09 6 0 8쪽
16 3. 차가운 만남 (2) 24.02.07 6 0 7쪽
15 3. 차가운 만남 (1) 24.02.05 6 0 7쪽
14 2. 노스피아 원정대 (6) 24.02.02 7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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