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두의 제자 [4]
한혈대마(寒血大魔) 설두일(雪頭一)의 죽음.
현 무림 최고수라 불리우는 십존(什尊)의 일좌가 죽었는데 그 파급력이 중원에 미치지 않는다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빙존은 또 한명의 최고수인 풍존의 무공을 탈취해 달아난 무림의 제1공적이 아닌가.
무림의 명문 정파들과 세가들은 빙존의 빈자리를 통해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고민하기 시작했고, 사마의 세력들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울이 지나면 해는 길어진다. 정(正)과 협(俠)이라는 이름의 태양이 중천에 오르면 그만큼 그림자도 길어지기 마련이다. 그 그림자 속에 움직이는 흐릿한 존재들은 때로 발없는 말보다 빠르다.
"드디어 빈자리 하나가 생겼구만."
사내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마침 딱 알맞은 시기이옵니다. 하늘이 주군을 도우시는 모양입니다."
상석에 자리하고 있는 사내는 야수였다. 의복의 곳곳이 찢어져 있었고 하의는 반 이상이 뜯겨 나가 있었지만 사내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내의 숨소리는 고요한 실내에 으르릉거리며 짐승처럼 울리고 있었다.
그와 마주 하고 있는 사람은 여인이었다. 등 뒤에 매어있는 한자루의 검은 그녀가 무인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여인은 준비한 종이를 사내에게 건넸다.
불존(佛尊) 소림방장(笑林房丈) 정진자(正進者)
검존(劍尊) 매화검제(梅花劍帝) 청수강(淸受康)
선존(仙尊) 무당신선(武當神仙) 옥령진인(玉鈴眞人)
뇌존(雷尊) 천뢰광검(天雷光劍) 남궁환(南宮煥)
권존(拳尊) 패군(覇君) 황보진천(皇甫振天)
도존(刀尊) 굉격천도(宏激天刀) 팽산악(彭山嶽)
암존(暗尊) 탈명공자(奪命公子) 당세아(第細牙)
빙존(氷尊) 한혈대마(寒血大魔) 설두일(雪頭一)
마존(魔尊) 수라혁검(修羅赫劍) 비연욱(飛燕昱)
흑존(黑尊) 은휘영(隱徽影) 악유정(惡有程)
이상, 무림 최고수라 불리는 십존什尊의 명단이다.
"이미 내가 원하던 것을 보았으니 그 고하(高下)는 의미가 없다."
20년 전 검존이 입신에 닿은 후 화산의 후기지수들에게 전한 이 한마디는 무림의 절대적인 금언이 되었고 그 이후로 무림은 천하제일이니 삼황사왕(三皇四王)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게되었다.
하지만 강인함을 숭상하는 무인들의 세계에서 강자들에 대한 외경은 끊임이 없는 법. 최고라고 칭송받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을 리 없다.
세상은 자신만의 길에서 최고의 경지의 올랐다는 천하십대고수를 골라내었고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흔히 십존이라고 불렀다.
십존은 구파일방 최고수라 불리는 3인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 뒤로 육대세가 출신인 뇌존, 권존, 도존, 암존이 강자로 거론되었다. 마교의 우두머리인 수라혁검 비연욱은 그 무위가 단 한번도 들어난 적 없으나 마존이라 불리며 경외시 되었고 무림 제일의 악인인 한혈대마가 한자리, 자객임에도 그 무위가 최절정에 닿았다는 흑존이 마지막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천하제일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십존중에도 서열이 있다고 하나 이는 그 세력에 따라 세간의 사람들이 지레짐작한 것일 뿐이었고 실제로 십존간에는 어떤 우위도 가릴 수가 없었다.
어찌 쉬이 천하십대고수의 무위를 견식할 수 있으랴. 게다가 검존의 발언 이후로 십존간의 대결은 은연중에 금기시 되어 있었다.
10년전, 빙존과 풍존의 혈전이 있었지만 그 대결로 풍존은 결국 목숨을 잃었고 그 빈자리를 역사상 최고의 자객이라는 흑존이 채우게 된다.
이 일도 무림 제일의 마두 빙존이니까 가능했던 일이지 이미 강호에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걸출한 인물들이 자신과 대등하거나 혹은 더 강할지도 모르는 상대와 생사투를 벌인다는 것은 쉽게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십존의 자리는 20년째 지속되었고 새로운 고수가 나타났다고 하여 쉽게 허락될 위치가 아니었다.
"빙존은 죽었고 이제 그 한자리가 남았다."
하지만 지금 여기. 십존의 일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내가 있다.
낭황(狼皇).
8년전, 낭인촌에 등장해 단번에 낭인 중 최고의 자리를 얻어낸 무인. 그 힘을 바탕으로 흩어져있던 낭인들을 규합하고 낭인부를 설립한 낭인들의 왕.
이름도 없이 낭황이라 불리는 이가 바로 그였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지?"
사내의 물음에 주변에 있던 여인이 신속히 부복하며 응답했다.
"방해 세력을 거의 다 축출하였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빙존이 남긴 흔적을 찾아라. 그 노인이 세상의 남겼을 마지막 안배를 찾아 싹을 제거해야한다."
"이미 조사 중에 있습니다."
여인이 대답에 사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곳. 하남을 근거로 무림의 새로운 지존이 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얻은 주제에 군림하고 있는 강자들에게, 나 역시 강자임을 보여줄 것이다."
사내의 웃음은 야망을 넘어서 광기로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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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으로 가능 표행길.
금전 30냥을 보수로 받고 숙식 제공.
한린이 선택한 여정이었다. 잘나간다는 후기지수들처럼 홀로 강호를 유랑하고픈 마음따위는 눈꼽만큼도 없다. 각박한 현실에 낭만은 무슨! 세상은 넓고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혼자 싸돌아다니다간 객사하기 딱 좋다.
보수가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표사가 부족할 일은 없었다. 표행을 업으로 삼는 표사들이야. 하남까지 가는데 고작 30냥이라면 말도 안되는 거래라며 손사래를 치겠지만 하남까지 갈 필요가 있는 무인들이라면 이 만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하게 낙양까지 갈 수 있을 뿐더러 숙식까지 제공한다니! 줄을 서는 무인들이 그리 많은데 굳이 비싼돈을 들여 표사까지 영입할 필요가 없었다. 한린은 적당한 뒷거래를 통해 아슬아슬하게 표행에 참여할 수 있었고 스스로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당연히 정작 중요한 표물에는 중앙표국의 표사들이 이미 포진되어 있고, 사실상 이번에 고용된 무인들은 중요하지 않은 나머지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무슨 일이 있을 때 살짝 거들어 주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리 위험할 것도 없겠지.
무임승차.
한마디로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마차에 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주 편안한 여정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보다 좋은 표행을 찾기 위해서 이틀을 허비했고, 보다 쉬운 일처리를 위해 표사를 모집하던 자에게 여유돈을 얹어주기도 했으니 한린은 이 여정이 아주 편안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 필요하면 그러한 결과를 억지로라도 만들어내는 것이 사부에게 배운 그의 방식이었다.
표행은 아주 양호할 것이다. 아주 예외적인 상황만 없다면 말이다. 예측 불가능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예외적인 상황이...
- 작가의말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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