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솔직히... 나 이제 자기가 좀 무서워."
잡고 있던 황윤건의 땀기 어린 오른손에, 고개를 외로 꼰 윤시현이 가만히 볼을 가져다댔다.
"처음 우리 여기에서 만났을 때 자기가 나 자꾸 협박했을 때에도. 그냥 별다른 수가 없어서, 자기 정체 들킬까봐... 아니면 어설픈 일처리 숨기느라 그냥 쎈척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어. 괜히 무섭게 굴어서 나 말 잘 듣게 하려고, 나름 애쓰는 거라고."
천천히 고개를 든 윤시현이 손을 뻗어 황윤건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번 일 겪고 나니까... 자기는 정말로 수 틀리면, 아니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타인을 거리낌없이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어. 나도 결국에는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지금도 조금 무서워."
볼에서 조금씩 손길을 아래로 내려, 윤시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황윤건의 입술을 만졌다.
"자기야. 근데 내가 그것보다 정말 정말 무서운 건... 자기가 또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상황이야. 날 지키려고 죄없는 사람들까지 다 희생시켜버리는... 그런 끔찍한 상황. 나만 아니었으면 이 사람이 또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텐데, 자책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하게 될까봐 너무 무서워."
윤시현의 말에 점점 울음이 섞이고 있었다.
"윤건아. 우리 이제 그만... 여기까지만 하자..."
무릎을 끓은 채로 윤시현이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굳은 채 황윤건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
낡고 어두운 방 안에는 백 개가 넘는 모니터가 이곳저곳의 테이블 위에 열을 지어 쌓여있었다. 대부분은 그 위에 먼지가 가득했다.
켜져있는 건 고작 스무 개 남짓이었고, 그중에서도 뭔가 유의미한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는 건 더 적었다.
곳곳의 겉 가죽이 벗겨져있는, 낡고 큼지막한 사장님 의자에 앉은 젊은 여인 한 명이 뜸하게 켜진 모니터와 모니터 사이를 마치 놀이기구 타듯 이동했다.
한쪽은 추리닝 차림의 맨발로 의자에 올려놓고, 다른 한 쪽은 삼선 쓰레빠를 신고 바닥을 밀고 있었다.
"사장임예. 거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A33PV114 안 있슴니까."
"거기가 왜."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인이 소리치듯 입을 열었고, 저 한쪽 멀리에서 귀찮다는 듯한 여자의 대답이 들려왔다.
"금마 그거 대인병기인줄 알았는데 맵병기데예. 지금 나오는 거 보니끼니."
모니터를 응시하던 여인은 혀를 내두르며 인중을 늘였다.
"한 따까리 한다 아임니까. 그 어디냐, F190MO470에 있는 독마毒魔라는 인간 말종하고 비슷함니더."
"애초에 우리가 그런 놈들만 찾고 있으니까 그렇지... 검색 조건이 다 그런 쪽이잖아."
사장이라 불린 여인이 대꾸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근데. 제 촉이 딱 여기에 섰는데예. 지난 일주일 동안 찾아낸 놈들 중에, 이 머스마가 가능성이 좀 있어보인다, 이 말씀임니더."
"몇 명 죽였는데?"
"거... 보자. 서른 넷?"
"장난해? 십만 단위로 죽어나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촉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야, 네 몸값을 생각해! 지 인건비가 얼만데."
분을 못 참겠다는 듯 사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근데 사장임요. 오늘 간식은 뭘로 시키실건데예. 지난번에 그 랍-스타 리좆또. 거 맛있대. 밥알 하나하나가 고소한 게."
"랍스터는 얼어죽을. 야, 간식 얘기 꺼내려면 어제분 밀린 보고서나 먼저 작성해. 아놔, 뭐 이런걸 데리고 와서 내가 이 지랄을..."
"하 참... 보소. 아지매요. 사람 갖다 쓸 때 그렇게 하는거 아임니더. 일을 시키려면 배불리 먹이는 게 기본 아이요."
"이런 XX!"
그 한쪽에서 운동화 하나가 초고속으로 날아와 젊은 여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스치고 지나가 벽에 박혔다. 마치 도끼처럼.
"아지매... 참 그거 승질 하고는. 저래가 지 아를 으띃게 키웠는지 몰라. 벌써 다 잡았겠구만."
쓰레빠를 슬며시 벗고 맨발 두쪽을 모두 의자에 얹은 채 여인이 어깨를 움츠리고 슬금슬금 옆으로 피했다.
*******
"오빠. 시간 됐어요. 이제 들어가야 해."
"아... 벌써."
한동안 워낙 병원 안에만 갇혀있다보니 이런 땡볕도 반갑다 싶어, 벤치에 앉아 손수건 하나 얼굴에 덮어놓고 잠깐 졸았던 것 같다.
황윤건은 손수건을 내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치켜올리며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번 로테이션 끝나면 다음에 돌 과가 어디였지?"
"이번주 사상의학과 끝나고... 다음주에는 심계내과요."
"또 중풍 환자들만 엄청 보겠구만."
같이 본과 병원실습을 도는 조원들과 잡담을 나누며, 황윤건은 스마트폰을 꺼내 캘린더에서 일정을 확인했다.
"보라야. 이번주 다음주에 저녁타임이 빌만한 요일이 언제 있을까? 전공의 선생들이 너한테는 귀띔 좀 해줬을 것 같은데."
"윤건 오빠 또 밖으로 새려고 그러는구나."
조장인 보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놀러가는 거 아냐... 실험 밀려서 그래. 한 번에 결과 안 나오면 밖으로 새는 게 아니라 밤을 새야 할 수도 있어."
"형 이제 당당하게 서른 줄에 진입하셨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내가 이제 막 밤 새고 할 나이는 아닌데 말야."
"그래도 윤건이 형은 사장님이잖아... 자기 명의로 된 회사가 있다고. 우리랑 끕이 다르신 분임."
"그러니까. 형 앞으로도 쭉 사장님 하시고, 제발 우리 의료원 인턴 지원하지 마세요. 형 지금 성적이 국시 등수로까지 이어진다? 형이 지난번 말 뒤집고 끼어들면 지금 다른 애들이랑 짜놓은 구조가 다 무너진다고요. 알았죠? 배신 때리기 없기? 응?"
"병원 지겨워... 인턴 안 한다. 걱정 마."
손사래를 치며 황윤건이 웃었다.
4~5년 어린 동기들이랑 지내다가 느끼게 되는 풋풋함과도, 이제 곧 헤어지게 될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가 짜줬던 플랜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한동안 그를 사로잡았던 혼란함은 몇 년의 시간과 함께 조금씩 가라앉아 지금은 어느 정도 명료함을 되찾은 상태였다.
동이에 받아놓은 후 석회질이 가라앉아 어느 정도 맑아진 물처럼.
하지만 언젠가 또 이 동이가 흔들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잠깐 맑아졌던 물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탁해질 거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녀가 남기고 간 낙인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죽이지 말라는 것.
그 날 이후 그 금기를 깬 적은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또 벌어질지 알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렇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멀리 남쪽에서부터 구름이 끼는 것을 보면서 황윤건은 병원으로 향했다.
< 몸속에서 벌레 군대를 키우기로 했다 / 1장 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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