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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아아 님의 서재입니다.

몸속에서 벌레 군대를 키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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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아아
작품등록일 :
2022.05.11 11:53
최근연재일 :
2022.06.26 22:1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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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481

작성
22.06.2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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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54화

DUMMY



아마 생명의 위기가 닥치며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능력이 폭발적으로 발휘된 것 같다.


벌레들이 과증식하며 출혈을 멈추고 조직을 재생시켰을 것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부지불식간에 이동하며 그 주변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았을 테지.


레지던스나 분당까지 갈만한 상황이 아니니 남은 옵션은 렌터카 뒷좌석밖에 없다. 벌레들이 그 위기 상황에서도 나름 합리적으로 움직인 것 같다.


의식은 없어도 내 뇌의 측두엽과 해마에 이런 상황에서 내가 택했을만한 패턴이 기억으로 남아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일 끝나고 현장 정리할 때 강박적으로 내 세포들을 지우는 게 습관이 되어있었는데, 내 것만 골라서 지우는 미세조정이 여의치 않다 보니 그 주변 영역에 있는 모든 벌레들을 구분하지 않고 싹 다 정리했을 것이다.


왠지 그런 위기 상황에 나를 대리해서 움직여준 벌레들의 의사결정이나 행동 패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후 윤시현에게 전화했으나, 이미 없는 번호가 되어있었다. 대포폰마저 삭제해놓았다면 가벼운 상황이 아니다. 이메일로 남기기도 적절치 않을 것이다.


곧바로 윤시현이 피했던 안전가옥으로 이동했는데, 이미 그 안에 시현이는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황윤건은 급히 분당 오피스텔로 향했다.


* * *


"시현아!"


문을 열고 들어가며 윤시현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크게 한숨을 돌렸지만, 집안은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박스들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마치 이삿짐 옮기는 날처럼.


무릎을 끓고 물건들을 챙기고 있던 윤시현이, 황윤건을 보고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미안해. 연락 못 해서. 몇 시간 전에 깨어났어. 정말 미안."


말없이 윤시현은 몸을 떨었다.


"나 몸도 멀쩡해. 걱정했지? 미안."


"아냐... 살아있기만 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어. 제발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다행이야..."


"내가 널 두고 어딜 맘대로 죽겠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이런 사람이면 정말 결혼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랑해."


고여있던 눈물이 흐르기 전에 그는 볼을 부비며 자기 얼굴로 그 따뜻한 체액을 대신 받았다.


그렇게 축축해진 입가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덮었다.


* * *


"사실은 나 미리 찾아서 확인했어.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 인적 사항. 그중에 자기 이름이 없어서... 그래도 살아있을 확률이 더 높겠구나 조금은 안심했었어. 그 전까지는 정말 죽고 싶었고. 물 한 모금 못 넘기겠더라."


한동안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 윤시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 아직까지 내가 충분히 유능하지가 않아. 이틀 넘게 잠들어있을 줄은 몰랐어."


"그걸 탓하려는 건 아냐... 자기야. 내가 불안한 건, 내가 자기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거야."


윤시현이 처연해진 눈으로 황윤건을 쳐다보았다.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하려고 하는지, 어디까지가 뜻한 대로고 어디까지가 뜻대로 안 된 것인지,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할 건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니까 상황 판단도 안 되고 예측도 대응도 할 게 없어. 그저 손 놓고 지켜보면서 불안해할 수밖에 없어."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었으니까.


나의 능력까지 세세히 알게 되는 경우, 어쩌면 윤시현까지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다고 나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자기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불안에 떨면서 기다리는 것밖에 못 하는 상황. 정말 괴로워. 너무 힘들다고."


조용조용 말하는 윤시현의 시선에서 원망같은 것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최진홍과 만나고 난 후 워낙 멘탈이 깨져있어서 그런지, 사람이 예전과 달리 위축되어 생기가 없었다.


부딪히고 해결하려는 느낌보다는, 포기하고 물러서려는 느낌.


"시현아. 그런데... 왜 짐을 싸고 있었어? 지금 그렇게 급한 상황이야?"


윤시현은 원래부터도 이런 아지트는 일정 이상 보안 상의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옮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왔었다.


지금도 최진홍이 이미 뒤를 캐면서 깊게 접촉을 해온 상황이니 충분히 그런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번 일이 후폭풍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야. 수도권에서 대놓고 총격전에, 법정 감염병인 탄저균까지. 지금 그쪽 회사에 검찰 수사에 국정원 내사까지 한꺼번에 들어간 상태야."


방 안에 널린 박스들을 쳐다보며 윤시현이 말을 이어갔다.


"아마 본사 측에서는 물밑에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쓰고 있겠지만, 이미 공중파 보도까지 다 나간 상태라서. 일이 너무 커졌어. 그리고 검찰은 몰라도 국정원 내사가 맘먹고 들어오면 나도 노출될 확률이 높아."


1초 전만 해도 최진홍 놈에게 엿을 제대로 먹였구나 싶어 일말의 뿌듯함이 있었지만, 어두워지는 윤시현의 얼굴을 보고 황윤건은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아주 낭패스러운 쪽으로.


"그럼 어디로 이동하는 거야?"


"...자기야."


한 손으로 잠깐 이마를 짚고 있다가. 윤시현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나 한동안 외국에 나가있어야 될 것 같아. 아마 동남아 쪽으로."


"뭐??"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최진홍 회사에서 진행하려던 프로젝트가 한국 국내법 기준으로 위법 혹은 범법일 가능성이 높아. 그 상태에서 그쪽 회사에 남아있는 나에 관련된 데이터가 조사기관으로 흘러들어가면, 나도 많이 위험해질 수 있어."


"일을 같이 한 적이 없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계약서만 보고 왔다며?"


"자기야... 나 무슨 일 하는지 몰라서 그래? 너무 튀면 무조건 마이너스인 바닥이야. 이쪽 업계가 원래 이런 리스크가 좀 있긴 한데, 이번 건 너무 치명적이었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윤시현이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해커의 명성이라는 건 업계 내부에서나 알려져서 쓸모있는 것이지, 그 바깥으로 새어나가면 좋을 일이 없다.


특히 공권력의 주목을 받게 된다면, 단순히 마이너스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해진다.


"지금까지 흔적 다 지우고 상당 기간은 눈에 안 띄게 숨어있어야 할 것 같아. 나중에 일 재개하더라도 아이덴티티를 아예 새로 만들어서 처음부터 다시 쌓아가야 할 수도 있고."


조금 전 솟아올랐던 낭패감은 더욱 분명한 형체를 갖추며 황윤건의 명치와 양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며, 속이 콱 막히며 토할 것 같았다.


계획대로 최진홍에게 엿을 먹이는 일은 확실하게 성공했지만, 그 불똥이 너무 크게 튀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알아챈 것이다.


분노에 사로잡혀, 생각이 너무 짧았다.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다름아닌 윤시현이 위험해진 것이다.


윤시현을 지키려고, 윤시현과의 관계를 지키려고 취했던 액션이 지금 다름 아닌 황윤건 본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길면 한 달, 짧으면 3일 안에 내 여권이 무효가 될 수 있는 상황이야. 일단 며칠 안에 한국에서 빠져나가긴 해야 해. 큰 설비는 나중에 분해해서 보내더라도."


"자, 잠깐. 그럼 언제 돌아올 수 있어?"


다급하게 황윤건이 물었다.


"짧으면 육 개월, 길면..."


윤시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모르겠어. 얼마나 일이 더 커질지에 따라 달라."


황윤건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열받아서 미친 짓을 한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기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나도 짐작은 할 수 있어. 순전히 날 위해서 한 일이고... 그런데."


윤시현이 다가와 무릎을 끓고 눈높이를 맞추며 이야기했다.


"나한테만 미안해할 문제가 아니지 않아...? 윤건아, 하룻밤에 서른 네 명이 죽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너하고 무관하지는 않겠지."


어두운 조명 사이로 윤시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이 보였다.


"최진홍 때문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고 해도, 그렇게 사람들을 죽이면 안 되는 거잖아... 그 사람들은 너를 해한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인간 회사에 고용된 직원들이었을 뿐인데."


황윤건이 얼굴에 대고 있던 양손을 천천히 떼어낸 윤시현이, 두 손을 포개며 맞잡았다.


"내가 이런 말할 자격 없는 건 알아. 이번 일 결국 나 때문에, 내 과거 때문에 벌어진 문제니까. 그래도... 난 예전부터 마음에 좀 걸렸어. 네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약상, 깡패, 국회의원에게 돈을 뜯어내고... 그들이 물론 나쁜 짓을 한 범죄자이긴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다른 어떤 상황보다도 네가 즐거워하고 있다고 느꼈어."



황윤건의 떨리는 두 눈을, 윤시현이 담담히 마주보았다.


"밟아서 혼내줄 수 있는 놈들이 생겨서 다행이고, 네 힘을 쓸 수 있는 명분과 기회가 생겨서... 기뻐하는 것 같았어."


두 손이 떨려왔다. 가장 아끼는, 그만큼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철저히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건... 네가 가끔 이야기하던 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이잖아..."


차마 윤시현의 눈을 마주보지 못하고 황윤건은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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