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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 님의 서재입니다.

용과 전생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sung1354
작품등록일 :
2017.11.23 17:33
최근연재일 :
2019.02.13 12:30
연재수 :
93 회
조회수 :
11,407
추천수 :
165
글자수 :
641,611

작성
18.12.26 01:16
조회
52
추천
2
글자
22쪽

금발놈과 시합 전에

DUMMY

기숙사에서 하룻밤동안 푹 잤다. 아직 남은 일은 엄청 많지만,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지만 마음은 편했다.


티아고 금발놈이고 다 잊어버렸다. 자기 전에 정신을 조금 다듬으며 경지를 정리하긴 했지만 그것도 오래 하진 않았다. 어차피 부상도 입은 터라 몸도 안 좋았으니까.


일어나니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꽤 상쾌했다. 어제 그렇게 처맞았으니 벌써 다 나았을 리가 없지만 이상하게도 컨디션은 좋았다.


나는 침대에서 기지개를 쭉 펴고 미아드를 불렀다.


"미아드! 일어나! 가자!"


...


대답이 없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미아드가 자고 있는 윗 침대로 올라가 보았다. 미아드는 베게에 얼굴을 묻은 채 자고 있었다.


나는 미아드를 흔들어 깨웠다.


탈탈!


"...으음."


"일어나. 임마. 내 경기 안 보러 갈 거냐? 아, 혹시 몸 아프면 그냥 자고."


나는 어제 일이 생각나서 말했다. 나야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몸상태가 좋다지만 미아드는 다를 수도 있다. 어제 미아드가 나보다 더 맞기도 했고.


"...아냐. 일어날게."


미아드는 내 어조에서 두고 갈 수도 있다는 걸 느꼈는지 정신을 못 차린 상태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크게 하품을 했다.


"흐아암."


그러다가 옆에서 내가 보고 있는 걸 깨달았는지 황급히 입을 가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뭘 이제와서 그러냐?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봤는데."


"그, 그래도 이제 여자라는 걸 밝혔으니 행동거지를 조신하게 해야지."


"어제도 생각했지만 너 성차별 엄청나구나."


"차별 같은 게 아니라... 됐어."


미아드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고개를 젓고 화장실로 향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내 침대로 내려가서 느긋하게 누웠다. 그리고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할 건 간단하다. 일단 금발놈을 패 준 다음.


"티아도 패야지."


다시 생각해도 심플해서 좋군. 나는 자화지찬하며 느긋하게 미아드를 기다렸다.


미아드 다음에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녀석이 말을 걸어왔다.


"근데 생각보다 변한 게 없네."


"뭐가?"


바지를 여분의 것으로 입으며 물었다. 미아드는 내 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나는 내가 여자라는 것을 밝히고 나면 너랑 내 사이가 변할 줄 알았는데... 다른 건 몰라도 옷은 나처럼 화장실에서 갈아입을 줄 알았지."


"난 니가 여자인 거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니까. 이제 와서 바꿀 이유 같은 건 없지."


나는 상의가 움직이기 쉬운지 허공에다 주먹 몇 번을 날려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니가 여자인 걸 몰랐더라도 변할 건 없어. 너랑 난 계속 친구니까."


"..."


스스로 생각해도 오글거리는 말이라 저 녀석 성격이면 감동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아드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쁘기는 한데..."


"..."


"약간은 싫을지도."


"뭐?"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친구하기 싫다는 건가 싶어서 언성을 높였더니 위에서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오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아, 미안! 조금 무의식적으로!"


"너 나 싫냐?"


"아니, 절대 싫은 건 아냐. 좋아해!"


"...음?"


미아드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외쳤다. 그 모습은 어째서인지 이상할 정도로 여성스러워 보였다.


나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말을 아꼈다. 미아드는 조심조심 내 반응을 살피다 작게 말했다.


"물론 친구 사이의 좋아함을 말하는 거야."


"...어. 응. 그래."


아니겠지. 나는 아닐 거라고 굳게 믿기로 했다.


나는 딱히 눈치가 없지 않다. 연애도 다른 사람들만큼은 해 봤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 눈치가 미아드한테서 하나의 감정을 찾아내고 있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이제 겨우 그동안의 걱정거리에서 풀려났는데 새로운 걱정거리를 만들기 싫었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 누워서 브릿을 기다리기로 했다. 미아드는 내 침대에 걸터앉아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브릿이 빨리 오기를 빌고 있으니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다행히 금방 도착했다.


"할리! 미아드! 가자!"


우리는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갔다. 미아드가 물었다.


"몸은 괜찮아?"


"하룻밤 자고 나니까 움직일 만해. 너희 둘이야말로 괜찮아?"


"나도 괜찮아. 할리도 괜찮지?"


"아니.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누가 봐도 농담이라는 어투로 말했음에도 브릿은 잠시동안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야, 당연히 농담이지. 왜 그런 눈을 해. 임마.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까 반 년 동안 친구 성별을 착각하는 거잖아."


"젠장.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지만서도..."


"그래도 하루 만에 눈치 챈 건 할리 니가 비정상인 거 아냐?"


"아니, 열에 일곱여덟은 눈치 챘을 걸."


미아드가 자기변호 겸 브릿을 면호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미아드랑 가까운 곳에서 지내면 하루 안에 아무리 못해도 '어 이 새끼 설마...' 정도의 생각은 해볼 거란 걸.


물론 그 시간의 100배가 넘게 눈치 채지 못한 우리 브릿 군이 있지만.


"괜찮아. 브릿 너는 단지 열에, 아니 백... 그냥 만에 둘셋 정도일 뿐이니까."


"위로가 아니잖아!"


"누가 위로한댔냐?"


평소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 경기장으로 향했다. 나는 경기장으로 도착하자마자 바로 윌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제 미아드를 구하고 난 다음 바로 기숙사로 돌아가 버려서 시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확률은 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탈락한 걸로 됐을지도 모른다.


아직 마지막 시합을 시행할 시간이 아니라서 윌슨은 체육관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지만 내가 가까이 가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썩어도 검술 학교 선생인 건가.


바로 말을 꺼내올 줄 알았던 윌슨은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했다. 다만 그 고민이 나에 대한 걱정 같은 것에서 비롯된 건 아닌 건 같았다.


나는 그가 나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그가 그동안 나를 차별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티아 때문인데, 어제 나랑 티아랑 싸우는 걸 봤을 테니.


내가 기다리고 있는 걸 확인했는지 윌슨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할리, 미아드, 브릿 볼스 학생."


일단은 평소처럼 대하기로 했는지 존댓말에 정중한 어조였다. 저쪽에서 그렇게 했으니 나도 평소처럼 받기로 했다.


"어제 시합의 결과와 오늘 시합에 나갈 사람이 궁금해서 왔습니다. 어제 저는 패배한 걸로 처리됐나요?"


"아니요. 어제 할리 학생이 티아리스 님과 싸, 대련을 하고 간 후에 시합에 나와야 했던 학생이 도착했지만, 시간도 늦었고 무엇보다 티아리스 님과 대화한 후에 바로 시합 포기를 해서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 건 할리 학생입니다."


나는 '티아와 대화를 한 후'라는 부분에 집중했다. 저건 티아가 나를 포기하지 않았고, 내 뒤를 봐줄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정보일지도 모른다. 머리에 박아두고서 관중석으로 향했다. 미아드가 기뻐하며 말했다.


"다행이다! 그럼 이제 우승은 니 차지네."


"그렇지."


겸손 같은 건 부릴 생각 없었다. 이제 우승은 정해졌다. 그 어떤 변수가 일어나도 금발놈이 나를 이길 리는 없으니까.


매일 앉던 자리를 찾아가며 나는 옆에 둘이 하는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지금은 티아나 금발놈이 있을 만한 곳을 훑어 보느라 바빴으니까.


"브릿 볼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쓸모없는 행동이었다. 우리의 자리에는 찾고 있던 불청객이 먼저 와 있었으니까.


나는 금발놈이 이쪽을 보는 것을 확인하고 미아드의 반응을 살폈다. 분노하고는 있지만 딱히 겁먹거나 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보통 한 대상에게 오랫동안 두들겨 맞으면 공포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브릿은 뛰쳐나가고 있었다.


"!"


나는 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따라 달렸다. 내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외침이 들렸다.


"너! 미아드를!"


그리고 주먹을 쳐들었다. 각도를 보아 얼굴에 주먹을 날릴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금발놈이 크게 당황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봐서 이대로 두면 알아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브릿을 지나쳐 달려가 금발놈의 팔을 잡아챘다.


금발놈은 그제야 얼굴에 당황을 담으며 팔을 흔들었지만 나와 녀석의 근력 차이를 생각하면 일부러 놓아주지 않는 이상 풀릴 가능성은 0%라고 해도 좋다.


물론 나는 놓아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한 발자국 더 깊이 들어가 등에 남은 한 손을 대 한층 더 굳게 구속했다.


그리고는 상쾌한 미소로 놈의 얼굴에 다가오는 주먹을 즐겼다.


한 방 날려. 브릿.


빠악!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에야 팔을 놓아주었다. 금발놈의 몸이 한 바퀴 돌며 부하놈들에게 떨어졌다. 부하놈들은 당황하면서도 몸을 받아냈지만 실린 힘이 셌는지 균형을 못 잡고 쓰러졌다.


그나저나 저 두 놈은 자기들을 버리고 도망쳤는데도 아직 따르는 건가? 대단한 충성심이라 해야할 지 멍청하다 해야할 지...


어느 쪽이 더 비꼼을 잘 나타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동안 브릿은 쉼호흡을 하며 분노를 삭혔다. 한 박자 늦게 미아드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브, 브릿!"


"...후우. 미안해. 미아드."


브릿은 한 방 날리고 나니까 머리가 식었는지 미아드 쪽을 보며 사과했다. 갑자기 다른 사람을 때린 것에 대한 사과는 아니었다.


"니가 해야 하는 복수였는데 내가 대신해서. 저 녀석을 보니까 순간 머리에 피가 돌아서!"


말하다가 또 화가 났는지 어조가 높아졌다. 브릿은 분노한 얼굴로 차갑게 일어서는 금발놈을 쳐다보았다.


금발놈은 쓸데없이 멋지게 주변에 피가 섞인 침을 뱉고는 말했다.


"무슨 짓이냐. 볼스."


그 목소리는 어제 내가 본 게 환상이 아니었을까 0.01초 정도 의심하게 해볼 정도로 무감정했다. 그 어조에 한층 더 화났는지 브릿이 분노해서 외쳤다.


"무슨 짓이냐고! 내가 할 소리다! 니놈이 미아드를 구타했던 사실은 둘에게 들어서 모두 알고 있어! 그런데 발뺌을 해!?"


"그게 왜 나한테 분노할 만한 이유가 되지?"


"...뭐?"


브릿은 금발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해하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실수였다.


"규칙을 어긴 건 그 평민년이다. 나는 단지 정말로 규칙을 어겼는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처벌을 내렸을 뿐."


"..."


"..."


가관이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둘이 대화하는 걸 지켜보려던 기본 방침을 어기고 끼어들었다.


"야, 금발놈."


"니놈이 끼어들 만한 자리가 아니다."


"아 그래. 니 성격이면 나랑 대화하기 싫은 건 알겠는데,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러거든. 두 가지만 얘기하자. 대답은 안 해도 돼."


놈은 분명 확인과 동시에 처벌을 내렸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즉...


"미아드가 여자인 걸 확신도 안 하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사람을 팬 거였냐?"


"자신의 혐의는 자신의 손으로 풀어야 하는 법. 그걸 귀족인 내가 직접 풀어주겠다고 나섰는데 협조하지 않다니. 설령 죄가 없다고 해도 죄가 생길 만한 일이다."


아, 대답하지 말라니까. 귀가 썩을 것 같다고. 나는 더 말하지 말고 브릿에게 맡길까 생각했지만 이왕 나선 김에 하던 얘기만 끝 마치기로 했다.


"그리고 정말 미아드가 죄가 있다 치자. 그럼 그걸 니가 왜 처벌하는데?"


처벌은 판사가 내리고, 집행은 간수가 하는 거다. 설령 미아드가 정말로 벌을 받아야 하더라도 니가 왜 처벌을 하는데. 니가 뭐라고 새끼야.


그런 의미를 담아서 말하니 대답은.


"죄를 처벌하는 건 확실히 규칙에 따라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티아리스가 너를 비호하고 있는 이상 분명 제대로 된 처벌은 받지 않겠지. 그래서 내가 직접 한 거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은 이론 무장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직도 반박하려면 거리는 많이 남았지만 더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브릿의 옆으로 돌아왔다.


금발놈은 그제야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너야말로 어째서 아직 평민들이랑 같이 있는 거지. 너를 속인 거야 니놈의 호구 같은 성격으로 넘어간다 치더라도 그놈들은 교칙을 어겼다. 검술학교에 평민 여자의 입학은 금지되어 있어."


저 부분도 어느 정도는 정론이다. 악법도 법이니까. 나는 브릿이 어떻게 대답하려는지 보려고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궤변을 쓴다면 할 말이야 많지만 브릿 성격으로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브릿은 그냥 정면승부를 택했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왔듯 정론을 꺼냈다.


"애초에 그 규칙부터가 공정하지 않았으니까."


"무슨 소리냐."


"귀족에 있어서는 여학생에 제한이 존재하지 않아. 이 학교에 여학생이 적은 건 단지 검술학교라는 특이성 때문일 뿐이지. 그런데 평민에게만 금녀라는 규칙을 들이대고 있어. 이건 불공평해."


"검술학교의 교칙은 선귀족 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교칙을 니 마음대로 판단하겠다는 거냐!"


"전통은 지켜야 하는 거지만, 악습은 폐지되어야 해.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규칙은 악습이야."


금발놈이 호통을 쳤지만 브릿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나는 즐거워졌다. 사람들은 궤변을 하는 사람들을 똑똑하게 보고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괜히 정론이 정론이 아니다.


저런 식으로 정론만을 얘기해 오면 사람은 할 이야기가 없어지지. 금발놈도 브릿이 저런 식으로 말하니까 반박할 방법이 없었는지 이를 갈며 뒤돌았다.


그러면서 찌질하게 몇 마디 해 두는 건 잊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니놈을 좋게 봤던 과거의 내가 부끄럽군. 그렇게 평민이 좋다면 마음대로 해라. 멍청한 놈."


"아, 잠깐."


금발놈이 떠나려고 하니까 나는 그제야 할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불렀는데도 금발놈은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에 니가 날 때린 거 기억하냐? 그때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되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거든."


"...뭐냐."


그대로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들어볼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숨겨 두었던 말을 꺼냈다.


"조금 잘났다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 아냐? 새끼야."


"하아."


금발놈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는 금방 그 웃음을 비웃음으로 바꾸었다.


"볼스 놈의 흉내라도 내는 거냐? 그딴 헛소리로 시간을..."


"뭐, 안 될 건 없지."


"...뭐?"


아, 재밌다. 티아나 금발놈 같은 더럽게 폼 잡던 것들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만큼 즐거운 게 없다.


그리고 브릿의 흉내라는 건 틀렸다. 나는 브릿과는 다르다. 정론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궤변 쪽에 더 재능이 있지. 굳이 비교하자면 금발놈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힘이 조금 세거나, 키가 조금 크거나 한 것만으로 인간은 다른 인간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지. 거기에 옳고 그름 따위는 없어. 그냥 현실이니까."


나는 말하며 금발놈에게 다가갔다. 금발놈이 무언가를 눈치 채고 물러나려는 낌새를 보이자 빠르게 움직여 놈의 어깨를 잡아챘다.


"하지만 그걸 이용해 우위를 차지하려는 인간은 하나만큼은 꼭 명심해야 돼."


"이놈이...!"


금발놈은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아까 못했던 걸 이제 와서 괴력이 솟아날 리가 없다.


나는 그대로 팔에 힘을 줬다. 금발놈은 잠깐은 버티는 듯했지만 내가 제대로 힘을 주니 다리에 힘이 빠져 무릎을 꿇었다.


"으으윽!"


"세상에는 너보다 잘난 사람이 많다는 걸.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타나는 순간이 니 그 같잖은 우위의 끝이라는 걸 말이야."


이젠 정말 더 할 말이 없었다. 팔에서 힘을 빼고 돌아섰다. 뒤에서 금발놈이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았지만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할 말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결승전 나와라. 피차 둘다 귀찮아지지 말자고."


"...니놈이야말로 도망치지 마라."


"기운 차서 좋네."


기세만큼은 마음에 드는 놈이었다. 원래 저렇게 자기 주제도 모르는 기세를 내뿜는 놈을 밟아줄 때가 최고로 즐거운 법이니까.


뒤에서 금발놈을 부축해가는 부하놈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부하놈이랑 금발놈 사이가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예전에는 정말 열의 있게 저놈을 따라 다닌다면 지금은 관성으로 따라다닌달까. 아무리 버리고 도망친 영향이 있기는 한 것 같다.


뭐, 크게 관심 있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미아드의 저 초롱초롱한 눈빛을 어떻게 하는 게 더 바빴다.


나는 일단 예의상 물어봤다.


"왜 그렇게 보냐?"


"멋졌어. 할리."


"..."


예전에 에라가 내가 상의탈의했을 때 했던 것과 비슷한 눈이었다. 그 눈빛이 하기 싫은 상상을 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서 시선을 돌렸다.


돌린 시선에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티아가 보였다.


"호오..."


"왜 그... 티아!?"


"티아라고!?"


왜 소리치고 그래. 안 그래도 방금 전 금발놈 때문에 주변 시선이 몰려 있는데. 더 몰리잖아.


"나 혼자 얘기하고 올게. 니들은 여기 있어."


"괜찮겠어?"


브릿이 걱정해줬지만 솔직히...


"나 혼자 가서 안 괜찮으면 니들 둘이 와도 안 괜찮은 거거든."


"큭..."


"걱정해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니까."


나는 스스로의 무력함에 분노하는 브릿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침울해하는 미아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아드가 얼굴을 붉혔다.


"..."


안 돼. 그러지 마. 지금은 티아보다 니 반응이 더 걱정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미아드는 방금 전까지 내 손이 있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오랜만에 머리 쓰다듬어주네."


"요새는 좀 바빴으니까."


주로 내 재능에 대해 고민하느라고. 생각해보니 그것도 저 년 때문이었군. 나는 다시 한 번 그때의 분노를 떠올리고 말했다.


"그럼 갔다 올 테니까 기다려."


나는 말을 내뱉고 티아 쪽으로 걸어갔다. 눈이 마주치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티아도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티아는 나와 마주치자 할 말을 되짚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이미 그 과정을 끝냈으니 곧바로 해야 할 일을 했다.


"안녕. 티아. 오랜만이네."


"..."


"음. 나 별로 안 보고 싶었나 봐? 나는 1분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어 하는데."


티아의 기억력은 이틀 전에 한 말을 잊을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뜻인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전매특허 기술. 도발이다.


티아는 내 도발을 받고서도 무표정을 유지하더니 말했다.


"어제 그 기술 설마..."


"응? 그 기술이 왜? 넌 못해? 이거 실망이네."


"..."


적절한 타이밍에 추가 도발을 넣었다. 티아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상관 안 하는 게 아니라 참고 있는 거다.


나는 이쯤 하면 화를 돋울 만큼 돋았다고 생각해서 도발은 그만하기로 했다.


"그래서 진짜 왜?"


"그거 기술(氣術)이야?"


4단계는 다른 말로 기술의 단계라고 불린다. 기를 다양한 방법으로 바꾸거나 하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저 질문의 대답은 '응'이지만...


"그건 니 스스로 알아봐야지. 왜 스스로의 할 일을 남한테 떠맡겨? 나 참 기가 막혀서."


"..."


이건 도발이 아니다. 애초에 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남의 밥줄을 물어보려는 년이 나쁜 거지. 그렇고 말고.


"...그렇다면 알겠어. 그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티아가 물었지만 저건 틀린 표현이다. 바라는 게 있는 건 내가 아니다. 저쪽이지.


그래도 내가 배려해서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단판승부."


"!"


"오늘 밤 자정에 여자 기숙사 앞으로 나와. 니가 원하던 걸 이뤄주지. 내가 이기면 우리가 졸업할 때까지 우리한테 아무런 피해도 오지 않도록 잘 보호해."


"...내가 이기면?"


"그건 안 물어봐도 돼. 니가 이길 일은 없으니까. 그라고 이 승부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아무리 나라도 이 부분마저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보는 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줄였다.


"이 승부는 진검으로 한다."


"!"


"자 이제 내 용건은 끝이야.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하고. 니가 당장 결정해야 하는 건 하나뿐이야."


"..."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세상은 결국 마지막에 가면 '예'와 '아니요' 둘 뿐이다. 아까도 말했듯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편이지만, 필요하다면 정면으로 뚫고 나간다.


그리고 그 승부 중에 마지막 단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이겼기에 이곳에 서 있다.


티아는 대답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돌아 경기장으로 향했다. 타이밍 좋게 윌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타티 르스 님과 할리 님은 경기장으로 와주십시오!"


나는 걷던 걸음 그대로 속도를 줄이거나 높이지 않고 걸어갔다. 앞에 쌓인 무기들이 보였다.


토너먼트에서 무기는 자기가 직접 가져오거나, 미리 준비해놓은 것들 중에 골라서 사용한다. 나 같은 경우는 그냥 있는 것들 중에 하나 골라서 썼지만 오늘은 그쪽에는 얼씬도 안 했다.


대신 그대로 걸어 맨손으로 금발놈의 앞에 섰다. 장검을 든 금발놈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나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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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엘프랑 가해자랑 대화 +1 19.01.16 45 2 15쪽
82 도망치는 엘프 +1 19.01.14 42 1 15쪽
81 3권 후기 +3 19.01.13 47 2 4쪽
80 3권 마지막 화 +1 19.01.12 46 2 19쪽
79 패배 예고 +1 19.01.09 40 2 18쪽
78 티아리스 2차전 결말 +1 19.01.06 39 2 18쪽
77 티아리스 2차전 +1 19.01.03 52 2 15쪽
76 티아와 전투 준비 +1 18.12.31 54 2 16쪽
75 금발놈에게의 복수 +2 18.12.28 57 2 15쪽
» 금발놈과 시합 전에 +1 18.12.26 53 2 22쪽
73 내일을 위한 휴식 +1 18.12.23 47 2 11쪽
72 미아드의 비밀 +1 18.12.19 52 2 16쪽
71 각성 +1 18.12.13 65 2 18쪽
70 브릿 대 금발놈 +1 18.12.10 50 2 16쪽
69 티아의 계획 +1 18.12.07 54 2 17쪽
68 재능 +1 18.12.04 51 2 15쪽
67 안 좋은 날 +1 18.12.01 66 2 15쪽
66 토너먼트 진행 중 +1 18.11.28 48 2 15쪽
65 금발놈 승리 +1 18.11.25 58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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