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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자 님의 서재입니다.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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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자
작품등록일 :
2019.07.17 01:42
최근연재일 :
2019.11.1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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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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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57,029

작성
19.09.02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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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야만의 거래 4

DUMMY

옥저는 결국 론리를 억지로 바깥으로 끌고 나가는 수를 택했다.

머리를 식혀야 하는 건 론리도 마찬가지였기에 흔쾌히 나왔다.


자정이 가까워졌지만 도서관이며 세미나동에는 여전히 불이 반짝였다.

그 불을 보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는 위안이 됐다.

그 안에 있을 이름모를 동창들과 응원을 주고받으며 이 치열한 전장에 혼자만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론리는 다른 학생들보다는 학업이 주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웠다.

직업탐색검사 때 얻은 놀라운 능력은 생물체의 행동을 예지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떤 과목이든 수업을 듣거나 책만 읽어도,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는 지 3차원 시뮬레이션 영상을 보는 것처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체육과 격투과목도 한번 보고 배운 동작은 바로 따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전에서 응용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물론 그 능력 때문에 다른 학생보다 학교생활이 편해지긴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12구역의 박해를 겪은 뒤로 론리는 웬만한 일로 고통받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것들이 론리나 그가 좋아하는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은 아니니까.


그뿐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이 넘치는 이 학교에서 어렸을 적 추억을 공유하는 소꿉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됐다.

수억 명이 넘는 수험생, 그러니까 직업탐색검사를 받은 사람 중 아키텍쳐 스쿨에 올 수 있는 학생은 고작 200명 남짓이니까 대단한 행운인 것이다.


“마셔.”


옥저는 론리에게 캔 음료를 건네고는 자신의 손에 든 커피의 뚜껑을 열었다.

자신도 모르게 간혹가다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론리를 응시할 때가 있기에,

혹여 지금도 그런 눈빛을 들킬까 론리를 쳐다보다가도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커피를 번갈아 쳐다봤다.


언제부터 론리를 좋아했을까.

너무 어렸을 적부터라 그런 것을 따지기도 무의미할 정도로 계속 좋아해버리고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중학생 때부터였을 것이다.

론리는 그에게 고아라고 놀린 악동과 싸운 뒤로 어딘지 모르게 변했다.

데카르트라던가 밀이라던가 하는 철학자들의 서적을 읽을 때 다른 아이들과 달리 성인 남자로 보이는 것이다.

연애라던가 패션, 게임에만 관심 있었던 또래들 사이에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남자를 보며 옥저는 두 가지를 확신했다.

이 남자는 내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며,

그가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큰 일을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옥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과 론리는 언제나 달랐으니까.

신념과 철학이 있는 남자를 좋아하지만 옥저에겐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것은 우정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사귀어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또 그들에게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끊을 수 없었다.

외교부에서 일하는 부모님은 언제나 해외에 계셨기에,

친구가 아니면 함께 고독한 시간을 죽여 줄 사람이 없었다.


사랑받아본 적이 없으니 사랑받기 위해 해야 할 행동이 뭔지 모르는 옥저였지만,

그래도 그가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꽤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둘이 있는 상황에서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그것 때문에 고통받는 다는 사실 모두를 감추기 위해서는 긴 침묵은 좋지 않았다.


“매가 저렇게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다니.

우리 마음이 우주면 우리는 신이게?

당장 내일이 레포트 제출에 발표인데 어떻게 하면 좋아.”


론리는 자신을 달래려는 옥저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등불이 켜진 건물들을 쳐다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매의 말이 맞을 거야. 아마도.

사람의 기억인자가 이용할 수 있는 통로는 11차원까지고,

기억은 곧 우리 마음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확실해?”


론리는 놀람과 황당함이 교차하는 표정을 하는 옥저를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공식으로 환산해서 남들에게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데. 느껴져 나한텐.”


“너 철학서 그만 읽어.

그러다 도를 아십니까 이런 데 빠지는 거야. 가만.

그러고 보니 너 아까는 매한테 죽자고 덤벼들었잖아. 그런데 그 생각이 맞을 거라니?”


“일부러 그랬어.

지금까지는 그 자식이 일방적으로 나를 관찰했다면,

이제부턴 나도 그놈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그래서 자극해 본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론리는 옥저의 의심에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침묵을 지키고 정적을 응시했다.

그러고도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확신하자 옥저에게 조용히 말했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 해본 적 없어?

양자도약을 이용한 통신기기를 상용한건 전 세계에서 팍스사밖에 없어.

밸류컴퍼니의 감마회장도 양자물리학계에선 손꼽힐정도의 권위자인데도 구현하지 못할정도의 고도의 기술이야.

그런 기술의 원리를 매는 줄줄이 꿰고 있어.

학교 도서관 어디에도 알려주지 않는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지.”


“그럼 사막의 매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얘기야?”


론리는 순간 이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본인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건 아닐까 하고.

최악의 경우 자신이 매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가 눈치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말하기로 했다. 옥저는 이 학교에서 자신이 가장 믿을만한 친구였고,

그에게는 동료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옥저는 자신의 말을 믿어주리라 확신했다.


론리는 옥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론리가 낙화유수에게 쫓겼던 일부터 시작해서 12구역의 박해,

그리고 사막의 매가 자신의 몸을 은신해서 론리를 관찰하던 일들까지.


옥저는 그 얘기를 듣고 한동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동안 론리를 지켜본 결과 미친 것 같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상황을 묘사하던 것이 너무 구체적이었다.

심지어 사막의 매가 마술을 쓰는 동안 자신도 그곳에 있었다니 너무 섬뜩했다.

연달아 커피를 두 캔 들이켰다.


“너 그래서 매가 주변에 있을 때마다 차가운 사람인 척 연기 한 거구나.

내가 김막생 교수님 수업에 지각한 날도 그렇고.”


론리는 드디어 오해를 풀 수 있게 되어 후련한 마음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옥저도 섭섭했던 마음을 풀고 친밀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제안했다.


“만약 내가 있을 때 또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눈썹을 비벼.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최면술같은 걸거야.

최면술은 자신이 그것에 걸렸다고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약해져.

네가 신호하면 내가 매를 찾아볼게.

일부러 찾아보려고 한다면 최면이 풀리면서 보일 거야.”


“보이지 않으면?”


“널 정신병원에 보내야지.”


“정말로 보이면?”


“그건...”


국가, 아니 국가보다 큰 권력체가 하나의 개인, 그것도 사회인도 아닌 학생을 감시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옥저는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적어도 증거가 있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과,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아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에 말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옥저와 론리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고민과 무기력함을 함께 내뱉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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