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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최근연재일 :
2024.05.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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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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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54,850

작성
20.04.1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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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4화 : 그릇(Vessel) (5-2)

DUMMY

-5-


다음 날, 1987년 12월 24일 목요일 15시 57분.

서울 시내, 서울역 인근 모 호텔 앞.


성탄을 앞두고 호텔 방을 예약하기는 쉽지 않았다. 정은정 과장은 어제 사방에 전화를 돌린 끝에, 겨우 방 하나를 예약할 수 있었다.


다행히 서울 중심에 있는 고급호텔이었다. 사실 다행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았다. 1박 비용을 받아든 염준철 과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의든 타의든 이런 곳에 온 건 처음이라, 정은정 과장은 약간 들떠 있었다.


강(江).


그것도 수장인 「김지수」와 연결된 건 어제 오후였다. 저번 달 어둠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한강진 국장에게 전화를 넘기면서도,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은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인 반채림을 통해 그들이 제안한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바로 「상어」에게 대항하기 위한 공동 전선을 펴자는 것이었다.


‘......’


호텔을 향해 걸어가며 복장과 장비를 다시 한 번 떠올리는 정은정 과장이었다. 특히 오늘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꽤 힘주어 차려입은 상태였다. 보통은 활동을 중시하여 면바지에 셔츠 정도를 즐겨 입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몇 번 입지 않은 갈색의 겨울 코트와 정장을 꺼내고,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치마 아래로 검은색 스타킹과 하이힐, 역시 평상시에는 거의 하지 않는 화장까지 신경 썼다. 마지막으로 풀어서 돌려만 머리카락에 귀걸이까지.


‘이거... 너무 힘줬나?’


왠지 하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약간 오버했다는 생각도 든 정은정 과장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협상 카운터파트너는 김지수와 자신의 어머니인 반채림. 적어도 분위기에서는 질 수 없었기에 다시 한 번 열의를 다지는 그녀였다.


이때 옆에서 걷던 한강진 국장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 과장.”

“네. 팀장님.”

“오늘 멋지군.”

“고맙... 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마치 노력의 대가에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좋은 기분을 숨기며 한강진 국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짙은 회색의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가 바람에 펄럭였다. 계단을 올라가는 시원한 걸음걸이에 카키색 정장은 잘 어울렸다. 아주 큰 키는 아니었지만 비율은 매우 좋았다. 그리고 역시 평상시에는 수수하게 다니는 편이기에, 오늘의 차림은 유독 눈에 띄었다.


분위기와 비슷하게 거칠게 흩트려 고정한 머리카락, 오늘만큼은 피곤함이 덜 보이는 얼굴과 강인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까지. 중년으로 접어드는 모습에서 뭔가의 여유로움과 멋짐이 느껴졌다.


그는 정은정 과장을 호텔 입구에 세워놓고 체크인을 했다. 둘은 성탄 분위기로 가득한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벨벳이 깔린 복도를 걸어갔다. 정은정 과장은 깔끔한 복도를 걸으며 유럽 시절을 떠올렸다. 작전을 위해 숱하게 나라와 도시를 옮겨 다녔으면서, 정작 숙박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오히려 이런 곳이 답답해서 저렴한 곳에서만 묵곤 했었다.


잠시 뒤, 열쇠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퀸 사이즈의 커다란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잘 정리된 방은 아늑한 느낌이었다. 정은정 과장은 방 안을 살피며 시계를 보았다.


약속은 16시 30분. 아직 2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한강진 국장이 가져온 수트케이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은정 과장은 혹시나 모를 도청기 같은 것을 찾기 위해 방안 집기류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특별한 건 없어 보입니다.”

“음.”


한강진 국장은 책상과 의자를 방 중간으로 옮겼다. 두 개의 의자는 마주보게 놓은 후, 한 쪽 자리에 앉았다.


“잠깐 앉지. 아직 시간 남았는데.”

“네.”


호텔방 안에서 약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한강진 국장은 생각에 잠긴 듯 하면서도, 은근히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리 커다란 미팅을 앞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그였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을 모습이 분명했지만.


잠시 뒤. 정확히 16시 30분이 되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은정 과장이 문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김지수입니다.”


어둠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그렇게 상대를 확인한 그녀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곳에는 역시 정장 차림의 김지수와, 반채림이 있었다.


“들어오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지수는 손에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가지고 있었다. 상상 외의 큰 크기에 정은정 과장이 눈길을 보내자, 그가 대답했다.


“좀 조심할 필요가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


씨익 웃으며 대답하는 지수는 방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선 한강진 국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강진 국장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국가안전기획부 9국 국장인 한강진입니다. 김지수... 수장이라 불러드리면 될까요?”

“물론입니다. 고맙습니다.”


젊고 잘생긴 얼굴에 큰 미소가 올라왔다. 한강진 국장은 나이를 가늠하려다 생각이 꼬이는 걸 느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경력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젊은 모습 때문이었다. 이때 지수 뒤쪽의 반채림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정은정 과장과 비슷하면서도, 훨씬 더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대전충남지역 의기력자 공동체인 미림(美林)의 문주(門主), 반채림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 못난 딸이 폐를 끼치지나 않는지 모르겠네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잘해줘서 제가 언제나 도움 받는 처지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강진 국장이 인사를 끝내자, 정은정 과장이 뒤에서 나왔다.


“국가안전기획부 9국 현장지원과장 정은정입니다.”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어둠 속에서 확인한 실루엣 이래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20대 초반 정도의 ‘매우 잘생긴’ 얼굴이었다. 전반적으로 날카로움이 흐르긴 했지만, 그마저도 완벽한 균형미의 얼굴조형에 묻힐 정도였다.


정은정 과장은 빠져들 것 같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네. 오래간만입니다.”


하지만 지수는 정은정 과장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마치 호기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녀는 조금 부담스러운 듯 계속해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거리낌 없이 계속 정은정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을 놓으며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 잘 봤습니다. 그날.”

“네?”


지수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 없이 수트케이스를 침대 위에 올렸다.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들리고 케이스가 악어 주둥이처럼 위로 크게 열렸다. 그곳에는 몇 개의 모니터와 복잡한 전자기기가 케이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강진 국장이 내용물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도청탐색기?!”

“네. 최근에 일이 좀 있어서요. 물론 말씀드릴 것이긴 합니다만...”


신중한 손동작으로 장비를 작동시키던 지수는, 한참 뭔가를 들여다보다가 수트케이스를 닫았다.


“별 건 없군요.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제 말씀 나누시죠.”

“... 좋습니다.”


책상을 가운데 놓고 한강진 국장과 지수가 마주 앉았다. 정은정 과장과 반채림은 옆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한강진 국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좋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만.”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재 상황과, 원하는 걸 말해 주시죠.”

“시원시원하셔서 좋군요.”


지수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양손의 깍지를 풀면서 말했다.


“예지망을 저희가 제공하겠습니다. 대신 상어를 낚을 손을 빌려주십시오.”

“그 말씀은, 커뮤니티별 예지망 예지 정보를 넘기겠다?”

“네.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사실 저희는 저번 주에 상어와 교전했었습니다.”

“!!!”


상어와의 교전 얘기가 나오자 한강진 국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디서 말입니까?”

“... 대전에서 연합체 회합이 있었습니다. 상어 대응책을 논하기 위한 자리였죠. 그날 그는 회합 전 바이어로 위장하여 회의 장소를 정확히 찾아왔고, 도청기를 설치한 후 회합을 도청했습니다.”

“!!!”


그래서 오자마자 저 난리를 쳤군. 한강진 국장이 놀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는 아까보다는 무거워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때 도청하던 상어의 의지봉인에 빈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반채림 문주께서 말씀해 주실 겁니다.”


발언의 바턴이 지수에게서 반채림으로 넘어가자, 한강진 국장과 정은정 과장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반채림은 소파에 앉은 채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추측하는 바로는... 그는 두 가지 내용에 반응하여 의지봉인에 허점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는 제 딸 이야기였고, 다른 하나는 유럽이라는 단어였습니다.”

“!!”


이번에는 정은정 과장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두 단어와의 연관이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마법사의 나무」였다.


“그 직후 저희 예지가가 느낀 건 「엿듣겠다」라는 행동과, 맹렬한 분노였습니다. 아무튼, 근처에 있는 것이 확실해져서 바로 밖으로 나갔죠.”

“그리고 교전하셨군요.”

“네.”

“실력은 어땠습니까?”


한강진 국장의 질문에 반채림이 잠깐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강했어요. 마법사전(戰)에 익숙한 움직임이었죠. 더구나 몸이 유리처럼 변하는 법칙까지 사용하면서 도망갔죠.”

“몸이 유리처럼...?!”


한강진 국장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지수가 말했다.


“광학위장입니다. 표막과 반응하는 최신 법칙이죠. 마치 투명인간처럼 사라지더군요.”

“...!!”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한강진 국장이었다. 그리고 놀라움 그대로 되물었다.


“어떻게 생겼었죠?”

“180cm 이상의 키에 양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 핸섬한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양복 핏은 국장님보다는 못했습니다만.”


지수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한강진 국장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상어의 생김새에 대한 정보는 생각 외로 다양했다. 그 연령대도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었고,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상어가 1인 이상일 수 있다는 추측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제일 일반적인 형태는 175cm 정도의 키에 조금 덩치가 있고, 특징 없는 흐리멍덩한 인상이 주된 것이었다. 이는 빈에서 목격된 모습과도 일치했다.


“사실 저희도 사실 자료와 조금 달라서 의아하긴 했습니다. 확실히 주석처럼, 1인 이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건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이어진 지수의 말도 핵심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일단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시죠.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고자 한 건 의지봉인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여기에 정은정 과장님과 관련된 일에서는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확인했죠. 따라서...”

“우리가 선봉에 서면, 더 쉽게 상어를 물 밖으로 끌어낼 수 있다... 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작가의말

언제나 읽어주시고 관심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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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5화 : 추적(Pursuit) (1-3) 20.05.02 61 0 11쪽
75 5화 : 추적(Pursuit) (1-2) 20.04.27 52 0 12쪽
74 5화 : 추적(Pursuit) (1-1) 20.04.26 54 0 10쪽
73 4화 : 그릇(Vessel) (6-3) 20.04.25 65 0 13쪽
72 4화 : 그릇(Vessel) (6-2) 20.04.24 51 0 12쪽
71 4화 : 그릇(Vessel) (6-1) 20.04.21 60 0 13쪽
70 4화 : 그릇(Vessel) (5-4) 20.04.20 55 0 8쪽
69 4화 : 그릇(Vessel) (5-3) 20.04.16 56 0 15쪽
» 4화 : 그릇(Vessel) (5-2) 20.04.13 54 1 11쪽
67 4화 : 그릇(Vessel) (5-1) 20.04.12 55 0 11쪽
66 4화 : 그릇(Vessel) (4-3) 20.04.11 55 0 9쪽
65 4화 : 그릇(Vessel) (4-2) 20.04.10 59 0 10쪽
64 4화 : 그릇(Vessel) (4-1) 20.04.09 59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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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4화 : 그릇(Vessel) (3-3) 20.04.06 58 0 11쪽
61 4화 : 그릇(Vessel) (3-2) 20.04.05 6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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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4화 : 그릇(Vessel) (2-1) 20.04.01 73 0 13쪽
56 4화 : 그릇(Vessel) (1-4) 20.03.30 71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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