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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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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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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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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화 : 그릇(Vessel) (3-1)

DUMMY

-3-


그로부터 이틀 후, 공동체 대표들의 회합날, 1987년 12월 18일 금요일 12시 52분.

대전시 서구 인근, 「거림산업(주)」 건물 앞.


눈이 아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꺼운 구름이 해를 가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비가 사정없이 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내린 비에 놀라며 황급히 흩어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 대신 차량만이 거친 세로선을 잘라냈다. 차가운 금속 위에 부딪힌 차가운 비는 갈기갈기 부서지며 안개처럼 흩날렸다.


이때 비가 만드는 커튼을 뒤집으며 한 대의 검은색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림산업 건물을 앞두고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차량은, 비상 깜빡이를 키며 건물 정문 앞에 완전히 멈춰 섰다.


시동이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석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에서 우산을 꺼낸 뒤, 오른쪽 후문을 열었다. 그리고 운전사가 핀 우산 아래로 사람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한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빗속에서도 화려함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잘 생긴 남자였다. 그는 어깨 위로 떨어진 빗방울을 털어내며, 운전사가 건네주는 우산을 받았다. 운전사는 인사를 하고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양복의 남자는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그 뒤로 검은색 세단은 천천히 떠나갔다. 어느덧 현관에 들어온 남자가 바깥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산을 접고 잠깐 물을 빼는 사이, 경비원이 다가오며 말했다.


“어떤 일로 오셨죠?”


남자가 우산을 우산걸이에 걸었다. 그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성다움과 깔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1시에 약속한 브랜든 리(Brandon Lee)라고 합니다."

"아, 들었습니다. 들어오시죠.“


경비원이 안쪽 문을 열었다. 브랜든은 차분한 발걸음으로 열린 문 사이로 들어왔다.


“이쪽으로 오시죠.”


다른 한 사람의 경비원이 자리를 교대하는 동안, 브랜든을 맞이했던 경비원이 그를 엘리베이터 앞으로 인도했다.


잠시 뒤 종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경비원이 브랜든보다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동그란 5층 버튼에 노란불이 들어왔다.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며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경비원이 브랜든을 사장실 앞으로 인도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비서와 얘기한 경비원은, 비서에게 그를 인도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조금 일찍 왔습니다.”


브랜든이 비서를 향해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젊은 여성인 비서는 그의 얼굴을 보고는 살짝 놀랐다. 그리고 약간 격양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잠깐 전화 통화 중이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브랜든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사장실 문을 살짝 열어 안쪽을 살펴보았다.


“방금 끝나셨네요. 들어가시겠어요?”


만면에 미소를 띤 비서의 인도에 따라 브랜든이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꽤 넓은 사장실 안에는 방금 전화를 끊은 정은정 과장의 어머니 - 반채림 - 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연락드린 브랜든 리입니다.”


호쾌한 걸음으로 사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보며, 반채림도 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제 전화 통화에서 받은 느낌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전문성이 부족해 보였기에 어리숙할 거라는 예상을 했는데, 외모가 그런 느낌을 완전히 날려버리고 있었다.


브랜든이 다가오자 반채림도 책상 옆으로 나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반채림입니다.”

“브랜든 리입니다. 사장님께서 이렇게 미인이시라니... 깜짝 놀랐습니다.”

“고마워요. 앉으시죠.”


회의용 탁자로 그를 안내한 반채림이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반채림은 반신반의 하면서 브랜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어제 전화 통화에서 던진 막대한 물량의 계약건 얘기로 봐서는 경력이 길어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만나고 싶어서 조르는 느낌이랄까. 물론 규모가 큰 얘기기에 여기까지 와서 만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보면 상대방은 목적을 달성했다고 봐야겠지.


“보내드린 자료는 한 번 보셨나요?”

“시간이 부족해서 자세히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반채림이 책상 위에 깔려 있던 서류를 들면서 대답했다.


그 뒤로는 일반적인 사업 이야기가 오갔다. 반채림은 브랜든이 이 분야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자신의 기업을 찾아온 것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는 물 흐르듯 흘러갔고, 내용은 조금씩 진전하고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뭔가가 결정될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허우대만 멀쩡한 사기꾼일 수도 있으니까. 브랜든 역시 한계를 깨달았는지 살짝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시간은 1시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대화를 마무리하던 브랜든이 가져온 수트케이스를 열며 말했다.


“제품 규격이랑 기타 계약조건 자료를 한 부 드리겠습니다. 만약 생산이 가능하시다면, 이쪽으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자료와 명함 하나를 받던 반채림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수트케이스 안에 있던 검은색 헤어스프레이 캔이었다. 그 시선을 눈치 챈 브랜든이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머리카락은 제 생명이라서요.”


브랜든이 잘 빗어 고정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웃었다. 반채림도 역시 같이 웃으며 말했다.


“바이어가 이렇게 잘 생기시면 다들 긴장하겠는걸요.”

“하하. 고맙습니다. 저야 계약이 잘 되면 더 좋습니다만.”

“주신 자료는 내부적으로 검토해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도 성사가 되면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트케이스를 닫은 브랜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비서의 인도로 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갈 때는 들어올 때 루트의 반대였다. 연락을 받고 올라온 경비원이 그를 데리고 건물 밖까지 안내하였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브랜든은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는 우산을 펼쳤다. 그의 눈앞에는 어느새 다시 돌아온 검은색 세단이 있었다. 남자가 모습을 보이자 운전자가 나와 우측 후방 차문을 열었다.


빗소리 때문인지 차문 닫히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뒤이은 엔진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출발한 차량이 천천히 가속하며 조금 전진하였다. 그리고 첫 번째 교차로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렇게 차량이 떠나고 30분 정도가 지난 시간이었다. 갑자기 통일되지 않은, 몇 대의 차량이 거림산업 건물 앞으로 다가왔다. 세단도 있었고 해치백도 있었고 승합차도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한 차량에서는 역시 비슷한 타이밍에 몇 명의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는 직접 내리기도 하고 누군가가 내려주기도 했다. 마치 여러 곳에서 관광을 온 느낌이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우산을 펼치며, 건물 안으로의 발걸음을 서둘렀다.


10분의 시간이 더 지나자 거림산업 사장실 안이 시끌시끌해졌다. 차를 나르는 비서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짧았지만 비를 뚫고 온 사람들이 모이자 사장실 안은 금세 습습해졌다.


대략 10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사람들이 쭉 앉아 있었다. 대략 7~8명 정도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정신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각. 거림산업 건물 인근.


아까 거림산업을 떠났던 검은색 세단이 골목 구석에 서 있었다. 시동은 꺼진 상태로 주차 중이었다. 운전석은 비어있었고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이때 비 때문에 흘러내리는 시야 사이로, 2열 차창 안에 사람 그림자의 움직임이 드러났다. 자세를 푹 낮추고 최대한 모습을 숨긴 양복의 남자였다. 아까 자신을 브랜든 리라고 소개한 남자였다.


그는 검은색 줄로 이어진 이어폰을 귀에 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폰이 연결된 검은색 사각형 상자의 스위치를 만지고 있었다. 조금씩 다이얼을 돌리며 이어폰에 집중하던 남자는, 무언가 들리기 시작하자 손을 멈췄다.


“좋아... 좋아좋아.”


작은 이어폰에는 잡음을 뚫고 어떤 사람들의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까 반채림과 알 수 없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대화였다. 비가 오는 탓인지 신호는 깨끗하지 않았다. 그래도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보내드린 건 받으셨죠?]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인 거 같든디... 반 사장! 이거 출처가 어딥니꺼?]

[... 익명으로 받은 거예요.]

[아따, 익명 치고는 너무 자세한 자료 아니요? 어데 정부에서 뿌린 자룐 줄 알았소.]

[암튼, 중요성은 다 아셨을 거라고 믿어요.]

[그라서 지금 사냥꾼이라도 델고 와야 된다는 야그요? 어데서 온 지도 모르는 자료를 믿고?]


이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나왔다.


[자료 출처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형님도 그만 해요. 모인 것도 오래간만인데 열 올리기만 할 겁니까?]

[에잉...]


여러 지역의 사투리가 함께 들려왔다. 전국 단위의 어떤 모임으로 보였다. 갑자기 의자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는 소리였다.


[수장께서 오셨습니다.]


반채림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의자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 앉는 소리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어폰의 남자 역시 긴장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다들 오래간만입니다. 잘 계셨죠?]


상당히 젊은 목소리였다. 수장(首長)이라기에 늙고 중후한 목소리를 예상했던 남자는,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그런데 물음이 나왔는데 답이 없었다. 대답 없는 침묵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수장이라는 사람도 자기 말을 계속했다. 당연한 반응이라는 느낌이었다.


[오늘 모여 주십사 부탁드린 이유는, 미림에서 보내주신 내용 때문입니다.]

[......]

[이 자료대로라면... 상어란 놈은 상당히 위협적인 것으로 보이는군요.]


상어라는 단어에 남자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놀람과 호기심이 섞인 얼굴 아래로 어떤 광기가 흐르는 듯 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수장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었다. 살인사건, 사건의 의미, 상처의 형태에서 알 수 있는 ‘나무’까지.


남자는 뭔가 흥분한 듯, 입술을 파르르 떨며 이어폰의 목소리를 집중하여 듣고 있었다. 잠시 뒤 설명이 끝나고 수장이 말했다.


[의지봉인이 제일 큰 변수겠군요.]

[... 그걸 전적으로 믿는 겁니꺼? 수장까지?]

[사진이 거짓말 하지는 않겠죠. 조작할 수 있는 사진은 아닌 걸로 봤습니다.]

[하지만... 나문가 머시긴가 그건 말짱 거짓말 아니어라?]


나무라는 말이 나오자, 다시 한 번 남자의 표정이 팽팽해졌다.


[그건 확인 중에 있습니다. 조금 된 이야기라서 말이죠...]

[......]

[아무튼, 저는 상어의 위협에 자체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협조를 구하고자 여러분들을 모신 겁니다.]

[우짜란 말입니꺼?]

[... 현재 제일 중요한 건 예지망의 보강입니다. 의지봉인도 만능은 아니죠. 스스로 허점을 드러내도록 예지로 압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겁니다.]


다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수장의 말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시고 관심가져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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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5화 : 추적(Pursuit) (1-2) 20.04.27 53 0 12쪽
74 5화 : 추적(Pursuit) (1-1) 20.04.26 54 0 10쪽
73 4화 : 그릇(Vessel) (6-3) 20.04.25 66 0 13쪽
72 4화 : 그릇(Vessel) (6-2) 20.04.24 51 0 12쪽
71 4화 : 그릇(Vessel) (6-1) 20.04.21 61 0 13쪽
70 4화 : 그릇(Vessel) (5-4) 20.04.20 55 0 8쪽
69 4화 : 그릇(Vessel) (5-3) 20.04.16 57 0 15쪽
68 4화 : 그릇(Vessel) (5-2) 20.04.13 55 1 11쪽
67 4화 : 그릇(Vessel) (5-1) 20.04.12 55 0 11쪽
66 4화 : 그릇(Vessel) (4-3) 20.04.11 56 0 9쪽
65 4화 : 그릇(Vessel) (4-2) 20.04.10 60 0 10쪽
64 4화 : 그릇(Vessel) (4-1) 20.04.09 59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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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4화 : 그릇(Vessel) (3-3) 20.04.06 58 0 11쪽
61 4화 : 그릇(Vessel) (3-2) 20.04.05 6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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