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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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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최근연재일 :
2024.04.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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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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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프롤로그 : 마법사들

DUMMY

프롤로그 : 마법사들.


「세상을 바꾸는 의지(意志)」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의지가 세상을 바꾼다고.

강철 같은 의지가 자신과, 주변과, 조직과, 모든 인간을 바꾼다고.


의지는 삶의 원천이며 힘이었다. 육체를 이끌어 세상을 바꾸는 것은, 바로 의지였다. 의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항상 전진해 나갔다. 그렇게 의지는 방향과 크기를 가진, 힘을 가진 선(線)이 되어 세상 전체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이 의지를 원천으로 「보통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자들이 존재했다. 인간의 의지를 통해 만들어낸 그 힘은, 의지가 닿는 곳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다채로운 힘을 구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던 이들을, 공포와 경외를 담아 이렇게 불렀다.


「마법사」라고.


그들은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춘 채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힘을 감춘 채 변화에 맞춰 살아왔다. 하지만 이러한 은거도 점차 어려워졌다. 권력과 변화하는 세상이 그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국가는 마법사를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권력에 얽힌 말로를 잘 알고 있었다. 속세의 힘을 추종한 마법사의 끝은 파멸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권력을 피해 더욱 깊은 어둠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 20세기 후반이 되면서 마법사들의 삶은 더욱 큰 도전을 맞고 있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거침없는 혼돈과 환란은 마법사들을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국가에 속한 마법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마법사 세상과 국가 모두에게 백안시 받던 그들 역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어떤 국가에 속한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변화의 갈림길 앞에서 고민했다. 끝을 모르는 무질서의 폭풍 안에서,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면서 최선의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그들이 보여준,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 * * *


1984년 8월 14일 목요일 19시 12분.

대한민국 서울직할시 명동.


누군가의 눈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향해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혼란스러움이 시야를 거칠게 흔들어 놓고 있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급하게 일어선 이 도시에서, 조화로운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저 크기만 다른 상자들이 만드는 선이 있을 뿐이었다. 흡사 어린아이가 블록을 쌓아 만든 것과 비슷했다. 대부분의 건물은 무채색이었지만 변주의 노력이 강하게 묻어났다. 하지만 그런 화사함도 몇몇 고층빌딩만의 특권이었다. 보통의 고만고만한 건물은 그저 고민 없는 회색의 칙칙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우둘투둘한 피부처럼 보일 정도였다. 숨김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그나마 이 시간만은 달랐다. 기울어진 햇빛이 만들어낸 강렬한 콘트라스트는 하나의 그림처럼 시야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같은 높이 하나 없는 건물들로 가득 찼음에도, 그림자는 자를 대고 그린 것 같았다. 눈은 정신없이 움직이며 어떤 질서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포기한 시야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태양이 어떤 건물 옥상에 그린 그림자가 들어왔다. 직선의 그림자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곡선 가득한 사람의 형태였다. 바람이 불자 긴 머리카락이 풀잎 흔들리듯 시야를 가렸다.


“......”


한 명의 여자가 옥상 한쪽 계단실 지붕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붉게 물든 채 지면을 향해 달려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 검은머리가 끈적끈적한 여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붉은 햇빛에 반짝거리며 마치 깃발처럼 흔들렸다. 이때 여자의 옆에서 잡음이 흘러나왔다. 카키색의 작은 플라스틱 상자가 내는 소리였다. 이내 무전기에서 잡음이 뚫고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짐마차 하나. 목표 확인 완료. 곧 건물 밖으로 나올 것 같음.]


그 말을 들은 여자가 무전기를 들고 대답했다.


“당나귀 하나. 출발 준비 완료.”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는 햇빛이 만든 붉은 실루엣이 매끈하게 떨어졌다. 스키니한 청바지와 얇은 백색 티셔츠는 비율 좋은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동시에 일어선 그녀의 뒤쪽으로 긴 그림자가 그려졌다. 여자 치고는 꽤 큰 키였다. 얼굴은 자유분방한 복장과 달리 수수하면서 단아한 미인상이었다. 다만 날카로운 인상 앞에 모처럼의 미모도 조금 묻히는 느낌이었다.


“가 볼까...”


여자가 역시 옆에 놓여있던 배낭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가방 옆 주머니에 있던 물통을 빼서 한 입 마시고는, 계단실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옥상의 한쪽 끝을 향해 걸어갔다. 녹색의 옥상 바닥에는 옆 건물이 만든 그림자가 삐죽삐죽 올라와 있었다. 해는 빌딩 사이사이로 숨바꼭질 하듯 감춤과 드러냄을 반복했다. 묘한 안달이 났다. 하지만 이런 조바심처럼, 그녀를 흔드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칫.”


최근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연쇄살인에 관한 내용이었다. 살인마는 사람을 찢기도 하고 자르기도 하며 수도권 근방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첫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살인마는 여전히 활개치고 있었다. 그 사이 죽은 사람의 수는 여섯 명에 달했다. 그들은 모두 처참하게 사지가 분리되어 살해당했다. 연일 신문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용의자 몇 명이 잡혔다는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사건이 끝나지 않자 질타가 이어졌다. 경찰에 대한 의심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한 조직이 나섰다. 사실 사건 해결이 주된 업무는 아니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여자는 느릿하게 걸으며 이 일의 해결 필요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무전기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보다는 급한 분위기였다.


[목표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지금 출발했음.”


옥상 끝에 선 여자가 난간에 한쪽 발을 올리고 고개를 밖으로 뺐다. 그러자 아래쪽으로 반대편 건물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문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명의 남자가 그녀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남자는 여름이었음에도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몸짓과 움직임에서는 불안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누가 봐도 섞이지 못하는 기름처럼 위화감이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근처의 다른 사람들도 그를 피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


입구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온 남자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큰 길 쪽으로 나가려던 그는 뭔가에 움찔 하더니, 방향을 바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난간에서 발을 내리며 무전기를 들었다.


“당나귀 하나.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확인했다. 추격은?]

“직접 하겠다.”

[좋다. 주의하도록.]

“무선침묵 들어간다. 이만.”


눈으로 남자를 쫓던 여자가 조금씩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남자는 건물이 만드는 골목 사이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여자는 무전기의 전원을 돌려 끄고 등 뒤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금속 질감이 가득한 30cm 길이의 막대 형태 물건이었다. 그녀는 가방끈을 당겨 등에 단단하게 고정한 후, 그것을 왼손에 쥐고 뛰기 시작했다. 오전에 내린 비로 옥상 곳곳에는 물웅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잰걸음이 옥상 가장자리를 향했다. 그렇게 끝에 다다른 때였다. 그녀가 건너편 건물을 향해 뛰어 올랐다.


하늘로 가볍게 솟구친 몸이 무게감 없이 반대편 건물로 날아갔다. 두 건물 사이에는 거리도 높이도 꽤 차이가 있었지만, 훌쩍 날아든 몸은 착지도 가벼웠다. 걷는 것과 비슷한 발소리만 날 뿐이었다. 응당 걸렸어야 할 중력과 관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넘어선 건물 옥상 가장자리를 달리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봐둔 남자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역시 속도를 높인 상태. 거친 발놀림이 만든 물 튀는 소리와 구둣발 소리가 건물 벽을 타고 올라왔다.


그렇게 몇 개의 건물 사이를 넘어간 그녀가 남자를 앞질렀다. 뒤를 살짝 돌아본 여자는, 타이밍을 재다가 옥상 난간을 잡고 건물 바깥으로 뛰어 넘었다. 허공에 날아든 몸은 순식간에 건물의 그림자로 들어가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10층이 넘는 높이였지만 자세는 안정적이었다. 후끈한 공기를 가르고 두 발이 골목 위에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고인물 위에 떨어졌음에도 물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진 그림자가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깜짝 놀란 그가 황급히 뜀걸음을 멈추고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뭐... 뭐냐!!”

“꽤 걸렸네. 찾느라 고생했어. 차환준.”

“누구냐, 넌?!”

“이 일이 우리까지 온 게 다행인가 싶기도 한데... 일단 해결을 보자고.”


여자가 왼손에 쥐고 있던 금속 막대를 고쳐 쥐었다. 그러자 금속 마찰음과 함께 70cm 정도 되는, 짙은 회색의 투명한 칼날이 그 끝에서부터 솟아올랐다. 동시에 낮게 울리는 저주파가 골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칼을 보고 다급해진 남자가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골목 뒤쪽에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었다. 길게 늘어선 그림자의 손끝에는, 여자가 가진 것과 비슷한 칼자루(Hilt)의 형태가 있었다.


“제기랄!”


퇴로가 막힌 남자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 하지만 여자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어딜!”


순간 여자의 몸을 중심으로 어떤 「공간」이 퍼져나갔다. 경계면이 왜곡된 투명한 반구형의 공간은 그 안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며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동시에 옆 건물에 매달려 있던 간판 하나가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마치 누군가가 던진 것처럼 남자의 머리 위로 달려들었다.


“!!”


번잡한 도시의 거리 뒤로 깊게 연결된 좁은 골목. 여름 소나기가 지나 후덥지근함만이 가득한, 인적이 거의 없는 이곳에서 뭔가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큭!!”


남자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간판을 보며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코트 안으로 손을 넣고 뭔가를 꺼내들었다. 남자가 팔을 휘두르자 금속 잘려나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퍼졌다. 여자가 노린 건 이 타이밍이었다. 칼을 꺼내 간판을 잘라낸 남자를 향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다가가 칼을 휘둘렀다. 남자도 괴성을 지르면서 칼날을 치켜들었다.


“우어어!!”


칼과 칼이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보통의 그것과 달랐다. 마치 공기를 찢는 것과 비슷했다. 귀를 때리는 파공음이 짧은 시간에 두세 번 울리며 골목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공중에서 잘린 간판 조각들은 복잡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뜯겨 나온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며 바닥에 흩날렸다. 이제 두 개의 칼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골목 전체가 꽉 찼다. 여자와 남자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꽤... 실력 있는데?


여자의 말에 남자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흑갈색 칼날 끝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래... 들어본 적이 있어. 이번에 안기부에서 만들었다는 조직인가.”

“벌써 소문이 군부까지 퍼졌나?”

“알 놈들은 다 알고 있지...”

“영광인데.”

“며칠 동안 날 추적한 것이 너희들이었나?”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어찌됐건 상관없어. 넌 여기서 죽어야 되니까.”

“...!!”


남자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여유만만한 표정의 여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칼을 한 번 휘 돌리더니, 곧바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곧이어 격렬한 칼싸움이 벌어졌다. 다섯 번 정도의 합(合)이 벌어졌을 때였다. 유연하게 남자의 공격을 흘린 여자의 칼날이 남자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향했다. 순간 남자 몸 표면의 무언가가 사정없이 찢어지며 팔이 잘려 나갔다.


“크아아악!”


오른팔이 어깨부터 위치를 달리했다. 마치 나무토막이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잘려나간 팔이 빙글빙글 돌며 골목 저쪽을 향했다. 원심력에 흩뿌려진 피는 닳아버린 붓과 같이, 검붉은 선을 벽면 이곳저곳에 그렸다. 뒤이어 비릿한 피 냄새가 뜨거운 골목 바닥을 채워갔다. 곧 둔탁한 금속음이 들리며 남자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칼날이 사라진 칼자루는 힘없이 웅덩이 위를 굴렀다. 여자는 칼을 한 번 휘둘러 피를 떨쳐냈다, 바닥에 핏자국이 길게 그려졌다. 여자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뿌리부터 없어진 오른팔의 절단면을 왼팔로 틀어막고 있었다.


“제기랄...”

“보안사 산하 2639부대 소속, 차환준 중사... 아니, 탈주했으니 병적은 없다고 봐야겠군. 아무튼,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똑같은 국가의 개끼리 너무하군 그래.”

“... 개 주제에 도망쳐서 보통 사람을 물면 안 되지.”

“니년이 뭘 알아!! 내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차환준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자, 여자가 칼을 살짝 거뒀다. 파일에서 본 그의 과거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말해 봐. 들어줄 테니까.”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남자의 코트 한쪽 면을 거의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맹렬한 분노를 드러낸 채, 짐승처럼 외치고 있었다.


“이 힘은 저주였다. 저주! 죽으려 해도 죽을 수도 없는!!”

“커뮤... 공동체가 널 거뒀다고 들었는데.”

“망해버린 마법사 공동체처럼 멍청한 것도 없지. 아무 것도 못하고 고작 칼부림이나 하는 놈팽이의 끝이 뭔지 알아?!”

“......”

“그래... 공동체는 없어졌고 결국 살기 위해 군에 들어갔다. 하지만 놈들이 원한 건 도살자였어, 마법사가 아니었다고!!”


신문에서 얘기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죽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보안사 산하 2639부대, 속칭 「V」와 관련된 군인 혹은 일반인들이라는 것이었다. 은퇴했거나 혹은 현역인 그들은, 군부에서 운영하는 마법사 부대인 「V」의 옛날 명령권자 혹은 중간 관리자들이었다. 남자가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더니 여자에게 물었다.


“너... 공동체 출신인가?”

“그래.”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면 너도 미치고 말 거다... 내가 어떤 명령을 받았고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안다면.”


침착해진 남자의 목소리에서 광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대답 없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 놈씩 죽일 때마다 악몽이 하나씩 사라졌지. 너무 기쁜 순간이었어. 평생을 방구석에 쪼그려 자던 내가, 침대에 누워 잘 수 있다니.”


온갖 감정이 폭발하듯 얼굴 위를 흘렀다. 광기와, 슬픔과, 안도와, 기쁨도 보였다. 여자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신문에서는 그저 미치광이 연쇄살인마라고 떠들어 대더군.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난, 난...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니까!”

“......”

“잘 들어라. 이게 국가에 충성한 마법사의 말로다. 네가 있는 조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지 않기를 빈다. 흐흐흐...”

“노력해 봐야지.”


여자는 답변 이후 한동안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느리게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유야 어쨌듯, 보통 사람을 죽인 건 용납할 수 없어. 「제재」는 각오했겠지.”


여자의 칼이 서서히 위쪽으로 올라갔다. 남자 역시 그 뜻을 깨달았는지, 분노도 조소도 아닌 표정을 만면에 띄우며 말했다.


“그래! 다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죽여라!”


말을 마친 남자가 목을 길게 내밀었다. 모든 것을 각오한 몸가짐이었다. 여자는 사형수와 비슷하게 칼을 들었다. 그리고 몸 뒤로 칼날을 한껏 젖혔다. 한 번에 끝내기 위한 준비였다.


“나는 국가안전기획부 제9국 소속의 정은정이라고 한다. 같은 「볼리셔니스트」로써, 일반인 살해의 죄목으로 차환준, 너를 제재하는 바다.”

“예절이 바르군...”


여자의 호흡이 변화하며 칼이 무게감 없이 움직였다. 팔을 자를 때와는 달리 어떠한 저항감도 없었다. 웅덩이 위로 잘려나간 머리가 떨어졌다. 피를 머금은 물웅덩이 위로 검붉은 파도가 쳤다. 한동안 흔들리던 수면이 잠잠해지자, 핏빛 위에 얹힌 붉은 노을이 흡사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렸다.


“......”


정은정이 칼날을 없애고 가방에서 한쪽 어깨를 뺐다. 그리고 지퍼를 열어 칼자루를 넣은 후, 무전기를 꺼냈다. 틱 소리와 함께 전원을 올린 그녀가 말했다.


“끝났습니다.”

[수고했다. 정리해서 복귀하도록.]

“네.”


가방에서 두꺼운 가죽 주머니를 꺼낸 그녀가 잘린 머리를 담았다. 이때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등장했다. 아까 전, 차환준의 퇴로를 막았던 마법사였다. 역광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조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정은정의 앞까지 다가온 그가 입을 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냐. 이 정도야 뭐...”

“나머지는 제가 정리할게요.”

“그래, 고마워.”


잠시 뒤, 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몇 명의 사람이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9국 소속 사람들이었다. 머리 없는 시체가 하나 생겼으니 정리할 것도 많았다. 의료진을 가장한 그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시체 주머니 속에 차환준의 몸을 담고, 들것에 실어 골목 밖을 향했다. 정은정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같은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골목을 나온 그녀 앞에 구급차 한 대가 경광등을 빛내며 서 있었다. 차환준을 실어갈 차였다. 이때 차 옆에 서 있던 양복 차림의 남자가 그녀를 보고 다가왔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강인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가 목소리를 줄인 채 정은정에게 격려를 건넸다.


“고생했네.”


아까 무전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짧게 도리질 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국장님. 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일단 돌아가지.”

“네.”


이렇게 84년 여름을 후끈 달궜던, 「은퇴 군인 연쇄살인사건」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 일은 84년 3월 발족한 안기부 「제9국」 최초의 정규 임무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9국으로 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법사 관련 일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드러내며 향후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첫 발을 뗀 조직이니 만큼 보완해야 할 것이 산더미 같았다. 남자도 그것을 알기에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이틀 뒤. 정은정을 격려했던 남자가 부장실 안에서 며칠 전 있었던 사건의 보고를 하고 있었다. 찬찬히 내용을 듣던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잘했어. 한강진 국장.”

“감사합니다.”

“사실 설명해줘도 잘 모르겠지만... 빨리 해결해 줘서 고맙네.”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었을까. 한강진 국장을 바라보는 부장의 표정은 한결 풀려 있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V놈들, 꽤 놀랐겠군. 암튼 공식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거니 차후에도 좋은 모습 보여주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네.”

“네. 말씀하십시오.”


책상에 앉은 부장이 한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조금 바뀐 분위기였다.


“꼭 죽였어야만 했나? 그 뭐냐... 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네. 잡아둘 환경도 아니었고, 일반인을 살해한 이상 방법이 없었습니다.”

“흠... 그 마법사의 질서라는 것도 꽤 잔인하군 그래.”


갑자기 부장과 한강진 국장 사이에 큰 벽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장 역시 마법사라는 존재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로 이루어진 조직 - 9국 - 은 안기부 내에서도 여전히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숨겨져 있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존재를 아는 상층부는 끊임없이 의심을 보냈다. 그렇기에 시작조차 쉽지 않았다. 아마 미국의 압력이 없었다면 출범조차 쉽지 않았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올해 3월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흘겨보는 눈초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 「은퇴 군인 연쇄살인사건」이 9국 앞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9국까지 올 일도 아니었다. 시작이 안기부와는 대립관계에 있던 보안사, 그 산하 마법사 부대인 「V」에서 마법사가 탈주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뒤처리 역시 응당 「V」에서 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이 당시 「V」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대략 10년도 더 전에 한 번 해체되었다가 재창설 비슷하게 살아난 조직이어서 그런지, 운영 자체도 파행에 가까웠고 인물들의 면면도 질이 좋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젊은 축이었던 - 그래도 10년을 넘게 복무한 - 차환준 중사가 탈주했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이어졌다. 사람을 죽일 줄만 알았지 같은 마법사를 추적해 본 경험은 없었던 「V」로서는, 사실상 대응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대가 동원되었지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차환준은 그들을 치욕스럽게 농락하며 정확하게 목표만을 살해하고 있었다. 마법사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 잠행하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없었다.


세 명이 죽은 후였다. 「수도권 연쇄살인사건」이 신문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마침내 패배를 인정한 보안사에서 안기부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도 안기부 내에 최근 발족한 마법사 조직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국면 전환용 사건이 필요했던 한강진 국장은 기꺼이 사건을 맡았다. 사실 9국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와는 동떨어진 임무였지만, 구축 중인 각종 시스템을 이용해볼 기회이기도 했다.


호기롭게 장담한 열흘의 시간을 채우기도 전이었다. 대략 일주일이 지난 엊그제. 9국 소속의 정은정이 차환준을 죽임으로써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앞선 보고의 반응처럼, 부장을 비롯한 상층부는 대만족이었다. 차환준의 일곱 번째 목표를 지켜냈고 또 범인 역시 깔끔하게 사살했다. 그러나 한강진 국장은 알고 있었다. 입지가 생겨난 만큼,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을. 뒤이어 나온 부장의 말도 그의 이러한 불안감을 대변하고 있었다.


“참, 이번 일로 「V」에 대한 대대적인 감찰이 시작될 걸세.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열 받은 보안사의 화살이 이쪽으로 향할 지도 모르지.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면 좋은 건 없을 거야.”

“......”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긴 하네만... 조심해 주게.”

“알겠습니다.”


부장의 말은 여러 가지 걱정거리를 함축하고 있었다. 보통의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견제, 그리고 그들이 조직화 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차환준의 말처럼 9국 역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참, 이사는 언제인가?”

“10월 예정입니다. 다만 조금 늦어질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음.”


인사를 한 한강진 국장이 부장실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가 길게 날숨을 뽑아냈다. 첫 작전을 무사히 끝내긴 했지만, 부장의 걱정만큼 갈 길이 먼 9국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이상 기필코 끝을 볼 생각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감히 넘을 수 있을까 고민할 정도의, 수많은 과제들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순간 한강진 국장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희미한 꿈을 떠올렸다. 구체성도 뭣도 없는 그저 막연한 미래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을 이루어내고야 말 것이라는, 그 꿈만큼이나 막연한 희망을 한강진 국장은 가지고 있었다. 어느덧 복도 끝에 다다랐다. 아마도 주차장에는 정은정 ‘과장’이 차량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다시 한 번 다짐을 새로이 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멈출 수는 없었다.


작가의말

시작이 부실한 거 같아 새로 써 보았습니다.(20200517) 

중간에 넣어볼까 했던 에피소드였는데, 시작으로 돌려보았습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관심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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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최종화 : 완성(Integration) (2-1) 24.04.17 2 0 14쪽
243 최종화 : 완성(Integration) (1-2) 24.04.09 4 0 13쪽
242 최종화 : 완성(Integration) (1-1) 24.04.07 9 0 18쪽
241 11화 : 폭풍(Storm) (4-3) 23.04.16 25 0 19쪽
240 11화 : 폭풍(Storm) (4-2) 23.04.10 18 0 11쪽
239 11화 : 폭풍(Storm) (4-1) 23.04.02 13 0 13쪽
238 11화 : 폭풍(Storm) (3-5) 23.04.02 17 0 9쪽
237 11화 : 폭풍(Storm) (3-4) 23.03.26 15 0 11쪽
236 11화 : 폭풍(Storm) (3-3) 23.03.26 8 0 12쪽
235 11화 : 폭풍(Storm) (3-2) 23.03.19 17 0 11쪽
234 11화 : 폭풍(Storm) (3-1) 23.03.19 13 0 11쪽
233 11화 : 폭풍(Storm) (2-5) 23.03.12 14 0 12쪽
232 11화 : 폭풍(Storm) (2-4) 23.03.12 17 0 13쪽
231 11화 : 폭풍(Storm) (2-3) 22.08.27 32 0 12쪽
230 11화 : 폭풍(Storm) (2-2) 22.07.30 25 0 14쪽
229 11화 : 폭풍(Storm) (2-1) 22.07.17 24 0 16쪽
228 11화 : 폭풍(Storm) (1-3) 22.07.03 36 0 11쪽
227 11화 : 폭풍(Storm) (1-2) 22.06.26 35 0 15쪽
226 11화 : 폭풍(Storm) (1-1) 22.06.18 44 0 12쪽
225 10화 : 폭격(Bombardment) (6-5) 22.06.06 42 0 19쪽
224 10화 : 폭격(Bombardment) (6-4) 22.06.04 37 0 11쪽
223 10화 : 폭격(Bombardment) (6-3) 22.05.29 38 0 11쪽
222 10화 : 폭격(Bombardment) (6-2) 22.05.15 41 0 12쪽
221 10화 : 폭격(Bombardment) (6-1) 22.05.01 35 0 11쪽
220 10화 : 폭격(Bombardment) (5-7) 22.05.01 49 0 13쪽
219 10화 : 폭격(Bombardment) (5-6) 22.04.10 41 0 11쪽
218 10화 : 폭격(Bombardment) (5-5) 22.04.02 4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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