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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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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최근연재일 :
2024.05.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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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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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3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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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4화 : 그릇(Vessel) (1-4)

DUMMY

* * * *


다음날, 1987년 12월 10일 목요일 02시 58분.

부산직할시 부전동, 서면 일대.


5층 높이의 건물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대로변에 늘어선 여러 상업용 건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주변은 한산했다.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기에 사람은 물론이고 차량도 많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흐르는 공기만이 사각진 거리 사이로 흐를 뿐이었다.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달빛에 반사되어, 푸르스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드러났다. 배낭을 멘 남자였다. 날카로운 인상으로 키는 크지 않았다. 간간히 비치는 달빛에 움푹 파인 볼과 불안정한 시선이 드러났다.


짙은 색의 따뜻해 보였지만 두껍지는 않은 옷차림이었다. 보온보다는 움직임을 더 중시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한참을 건물 벽면에 거의 붙은 채로 이동했다. 그러다 그림자가 가장 짙은 곳에서 멈춰선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건물과 건물이 만드는 다각형의 프레임 속에서, 보름달에 가깝게 찬 달이 눈에 들어왔다.


“......”


남자가 양 손으로 벽을 짚었다.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느릿한 움직임으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남자의 몸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작은 발걸음 소리가 벽면을 타고 올라갔다. 마치 뛰어서 올라가는 것과 비슷했다. 벽을 달려가며 올라가는 모습은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 정도였다.


남자는 순식간에 건물 옥상에 도달했다. 그의 몸이 옥상 난간 위로 튀어 올랐다. 이윽고 남자는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옥상 위에 안착했다.


“......”


달빛이 옥상을 하얗게 칠하고 있었다. 녹색의 방수페인트 색깔이 희미하게 옅어졌다. 남자가 옥상 출입문 앞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렸다. 잠겨있지는 않은 듯, 문고리는 끝까지 돌아갔다. 그 상태로 문을 세게 밀었다.


하지만 쇳소리가 크게 나며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마 안쪽에서 따로 잠그는 장치가 있는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던 남자가 배낭 옆 주머니에서 막대를 꺼냈다. 호텔방에서 조립했던 ‘칼’이었다. 조용한 떨림과 함께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울림이 주변에 퍼졌다.


얇은 칼날이 문과 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걸쇠를 찾기 위해 칼날을 천천히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문고리 근처에서 뭔가가 닿는 느낌이 났다. 남자가 강하게 칼을 밑으로 당겼다. 순간 작은 불꽃이 문고리 부근에서 튀겼다. 푸른색의 작은 조명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칼날이 사라졌다. 그는 왼손으로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철문이 서서히 움직였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시간을 투자해 서서히 문을 열었다. 차츰차츰 열리는 공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문 안쪽 계단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몸이 들어갈 정도로 문이 열리자, 남자가 몸을 들이밀었다. 익숙하면서도 안정적인 움직임이었다. 완전히 안쪽으로 들어온 그는 다시 문을 닫기 시작했다. 걸쇠가 끊어졌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힘을 줘 문을 완전히 닫았다. 내려가는 계단 안쪽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는 마치 주변이 훤히 보이는 듯 움직였다. 계단을 사뿐하게 뛰어 내려가는 모습에서 어둠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 듯 했다. 그렇게 한 층을 내려왔다. 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방범등만 조용히 빛나고 있는 복도 좌우로는, 각종 사무실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셔터가 내려온 곳도 있었고 그냥 잠겨있는 유리문도 있었다.


남자가 자세를 낮추고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힐끗힐끗 고개를 돌려 방 앞쪽에 붙은 간판이나 안내판을 보곤 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작은 사무실들이 모여 있는 복도를 한참 지났다. 남자가 한 유리문 앞에 멈췄다. 「절해(絶海) 여행사」라는 작은 간판이 달린 곳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열쇠뭉치를 눈높이에 맞췄다. 한눈에도 크다고 느낄 수 있는, 굵고 긴 열쇠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


문을 따는 법칙은 그가 가진 능력 중 하나였다. 커뮤니티들은 범죄에 사용될 수 있는 법칙은 거의 개발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이런 법칙만을 전문적으로 연구개발하고 있었다.


덕분에 자체적인 로직(Logic)을 가진, 보통의 자물쇠나 열쇠라면 대부분 적용 가능한 열쇠 따기 법칙을 배울 수 있었다. 따라서 사용법도 간단했다. 손바닥을 열쇠뭉치에 대고 법칙을 가동하기만 하면 끝났다. 나머지는 법칙이 알아서 열쇠의 종류를 특정하고 내부를 확인하여 문을 따주었다.


자잘한 금속 막대가 부딪히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도 같고 젓가락이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잠시 뒤, 잘 맞물린 쇠뭉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역시나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녹색의 피난 유도등만이 사무실 벽면 여기저기서 빛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가 사장 자리로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몇 개의 책상이 만든 길을 지나 테이블 앞에 도착했다. 빠른 움직임으로 커다란 책상 앞에선 남자가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찾는 것은 주소록이었다. 필요한 내용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찾는 것이었다.


책꽂이에 있는 몇 권의 책을 빼서 안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이 장부, 법령, 일반 서류, 신문기사 등이었다. 그러다 제일 끝부분에서 주소책 하나를 찾아냈다.


책상 위에 책을 펼친 남자가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주변 다른 여행사의 번호와, 고객사인 듯 한 역시 인근 물류 회사들의 전화번호, 개인 고객들의 전화번호가 이어졌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에 가까워 갈 즈음이었다. 조금은 이질적인 상호와 전화번호가 몇 개 나타났다. 이곳과는 관계없을 것도 같은, 부산이 아닌 다른 지방 상호들이었다.


“......”


남자가 쪽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찾고 있는 것임이 분명했다. 꽤 긴 시간을 들여 이곳 부산지역 볼리셔니스트 커뮤니티 - 절해(絶海) - 에 잠입시킨 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주소록을 책상 아래로 옮겼다. 그리고 작은 카메라를 들어 주소록의 사진을 찍었다. 플래시 불빛에 책상 아래가 번쩍였다. 수첩을 꺼내서 내용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7개의 전화번호였다.


“...?”


주소록 내용 중에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거림산업㈜ 042-000-XXXX」라는 전화번호 아래로, 「12/18 2:30」라는 글씨였다. 볼펜 색이 뚜렷한 걸로 봐서는 최근에 쓴 것이 분명했다.


“......”


뭔가의 날짜와 시간이었다. 쪽지에 이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따라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의 약속 시간임이 분명해 보였다.


남자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이 내용까지 수첩에 옮겨 쓰고 주소책을 닫았다. 그리고 그것을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꽂고 침입 흔적을 지워나갔다. 처음에 본 것과 같이 책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흩어졌던 필기구 등도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모아두었다.


나올 때는 들어올 때의 역순이었다. 밖으로 나와 다시 문을 잠갔다. 긴장이라는 걸 거의 모르는 남자였지만, 열쇠뭉치의 쇳소리가 들릴 때는 그도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계단을 올라 옥상을 향했다. 아까 끊어놓은 걸쇠를 보며 천천히 문을 당겼다. 관리되지 않은 경첩에서 나는 소리는 계단복도 저편으로 바람 날리듯 흩날렸다. 그러나 아주 천천히 움직였기에 소리는 크지 않았다. 아무도 눈치 챈 사람은 없으리라.


몸이 통과할 정도의 틈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문고리를 당겨 문을 단단히 닫았다. 옥상문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곳의 뚫렸다는 사실은 금방 드러나지 않을 터였다. 걸쇠의 절단면도 깨끗하니 가까이에서 확인하지 않는 이상 잘 잠겨있는 걸로만 보이겠지.


남자가 옥상에서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은 없었고 차량도 많지 않았다. 내렸던 시선을 앞으로 올림과 동시에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몸은 천천히 회전하면서 지상을 향했다.


남자는 아무런 소음 없이 지상에 안착했다. 착지하는 순간 몸에 걸린 중력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천천히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가 옷매무새를 고쳤다. 내려온 점퍼 지퍼를 올리며 고개를 파묻었다. 달빛이 만든 건물 그림자가 얼굴의 표정을 빠르게 지워갔다.


딱딱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2-


다음주, 1987년 12월 14일 월요일 14시 6분.

경기도 성남, 「한국고속선공사」 본사 1층 기획조정실 사무실.


작가의말

선작이 20명을 넘겼네요! 정말 감사드립니다.(--)(__)(--)

언제나 읽어주시고 관심가져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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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5화 : 추적(Pursuit) (1-2) 20.04.27 53 0 12쪽
74 5화 : 추적(Pursuit) (1-1) 20.04.26 54 0 10쪽
73 4화 : 그릇(Vessel) (6-3) 20.04.25 66 0 13쪽
72 4화 : 그릇(Vessel) (6-2) 20.04.24 51 0 12쪽
71 4화 : 그릇(Vessel) (6-1) 20.04.21 61 0 13쪽
70 4화 : 그릇(Vessel) (5-4) 20.04.20 55 0 8쪽
69 4화 : 그릇(Vessel) (5-3) 20.04.16 57 0 15쪽
68 4화 : 그릇(Vessel) (5-2) 20.04.13 55 1 11쪽
67 4화 : 그릇(Vessel) (5-1) 20.04.12 55 0 11쪽
66 4화 : 그릇(Vessel) (4-3) 20.04.11 56 0 9쪽
65 4화 : 그릇(Vessel) (4-2) 20.04.10 60 0 10쪽
64 4화 : 그릇(Vessel) (4-1) 20.04.09 59 0 17쪽
63 4화 : 그릇(Vessel) (3-4) 20.04.08 51 0 15쪽
62 4화 : 그릇(Vessel) (3-3) 20.04.06 58 0 11쪽
61 4화 : 그릇(Vessel) (3-2) 20.04.05 61 0 10쪽
60 4화 : 그릇(Vessel) (3-1) 20.04.04 68 0 12쪽
59 4화 : 그릇(Vessel) (2-3) 20.04.03 70 0 14쪽
58 4화 : 그릇(Vessel) (2-2) 20.04.02 72 0 14쪽
57 4화 : 그릇(Vessel) (2-1) 20.04.01 73 0 13쪽
» 4화 : 그릇(Vessel) (1-4) 20.03.30 72 0 9쪽
55 4화 : 그릇(Vessel) (1-3) 20.03.29 82 0 13쪽
54 4화 : 그릇(Vessel) (1-2) 20.03.28 72 0 16쪽
53 4화 : 그릇(Vessel) (1-1) 20.03.27 72 0 13쪽
52 3화 : 상어(Agent Shark) (6-5) 20.03.25 68 0 18쪽
51 3화 : 상어(Agent Shark) (6-4) 20.03.24 6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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