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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나. 님의 서재입니다.

Volition : 1988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최근연재일 :
2024.05.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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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5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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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3화 : 상어(Agent Shark) (6-5)

DUMMY

* * * *


카츠노 미사키가 카츠노 미유키를 만난 직후, 1987년 12월 4일 금요일 16시 12분.

서울 모처(某處), 국가안전기획부 「제9국」 1층 복도.


정은정 과장이 상황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은 느린 속도로 열렸다. F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침대에 앉아 있었다. 경첩의 마찰소리가 방 안팎으로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F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눈이 먼저 돌아가고 목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리고 열린 문을 통해 F와 미사키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


F의 머리가 무언가에 맞은 듯 튕겨 올라갔다.


“!!!”


구멍 난 F의 이마에서 한줄기 진홍빛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방 안쪽 의자에 앉아있는 김휘승 대리 앞으로, 반짝이는 선혈방울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


김휘승 대리가 스프링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에 차인 의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절칙이 불꽃과 같은 칼날을 토해냈다. 동시에 미사키 뒤쪽 정은정 과장의 절칙에서도 칼날이 솟구쳤다.


이 모든 장면은 마치 슬로모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첫 번째 탄환이 F의 이마를 관통하고 뒤통수로 튀어나올 즈음, 앞으로 뻗은 미사키의 손끝에서 검은색의 탄환 두 발이 연달아 발사되었다. 정은정 과장의 표막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이었다. 탄환은 빙글빙글 돌며 방 안쪽의 A와 E를 향하고 있었다.


두 개의 칼이 내는 포효가 천정의 석고보드에 닿을 때였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탄환 두 발은, 정확히 A와 E의 이마를 꿰뚫고 들어갔다.


“!!!!”


무언가 단단한 것이 깨지는 소리, 뒤이어 물 뿌리는 소리와 함께 피는 바닥에 긴 궤적을 남겼다. 동시에 힘을 잃은 머리 셋이 침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고기 덩어리가 큰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쓰러졌다.


“그만-!!”


칼날 두 개가 같은 타이밍에 미사키의 목덜미를 향했다. 정은정 과장과 김휘승 대리의 절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양 손을 들고 저항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정은정 과장이 칼날을 미사키의 턱에 들이밀며 방 안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방에는, 방금 만들어진 시체 세 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선분홍색 핏물이 붓을 휘갈긴 듯 방바닥을 길게 적셨다. 무광의 바닥 위로 매끈한 피가 거울을 만들었다. 겨울이 만든 낮은 햇빛은 그 표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반짝이는 붉은 거울에는, 당혹한 염하린의 표정이 반사되고 있었다.


“꺄악--!”


낯빛이 새파랗게 변한 염하린이 크게 소리쳤다. 복도를 흔드는 소리에 건물 전체가 어수선해졌다. 정은정 과장이 이를 깨물며 외쳤다.


“데리고 나가!”


복도에 있던 함성필 대리가 염하린을 데리고 복도 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사키는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손을 올린 상태에서 천천히 뒤로 돌았다. 차가운 눈빛이 정은정 과장을 향했다. 무섭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정은정 과장이 긴장에 침을 삼켰다.


이때 미사키가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특유의 악센트가 들어간, 영어였다. (주 : / / 사이는 영어입니다)


/그릇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Would you want to know how to make vessel?/


갑자기 나온 영어에 당황했지만, 오랜 유럽 생활에서 배운 정은정 과장의 영어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칼날을 곧추세우며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도...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같은 편이었잖아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칼은 치워주길 바라요./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있습니다!!!/

/간단한 원리에요. 피의 철분을 기본으로 탄환을 만들어 고속 사출하는 법칙이죠. 표막을 뚫을 수는 없지만, 보통의 인간이라면 충분히 관통할 수 있어요./

/지금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묻지 않습니까!!!/


절규하듯 정은정 과장이 소리쳤다. 반면에 미사키의 행동은 침착했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릇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그게 지금 일과 어떤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영문을 모르는 말이 이어졌다. 정은정 과장은 이를 악 물고 끊임없이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사키는 텅 빈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릇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날선 섬뜩함이 온몸을 관통했다. 협상을 끝내고 방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미사키는 없었다.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한 사람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정은정 과장은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땀방울을 느낄 수 있었다.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때 복도에서 여러 사람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선두의 한강진 국장이 놀란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방 안을 확인하고는 분노에 찬 얼굴로 미사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텅 빈 차가움만을 얼굴에 드러낸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릇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어요?/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에이단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방과 복도에 가득 찼다. 경악, 공포, 분노...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곳에서, 미사키가 입을 열었다. 거기에는 한 치의 떨림도 동요도 없었다.


/간단해요. 자질을 가진 아이를 찾아서, 어릴 때부터 훈련하면 되요. 물론 운이 좀 필요하긴 하죠./

/도대체 무슨 말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하지만 그 다음이 어려워요. 훈련이 되더라도 주변 볼리셔니스트들과 의지를 합치(合致)Volitional Accordance 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단계니까요. 합치 정도에 따라서 의지도달공간의 결합 수준이 결정되니... 가장 중요하지만, 어려운 단계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러나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간단하게 그 수준을 높이는 방법이 있어요./


한강진 국장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키는 차분히 자기 얘기만을 하고 있었다. 복도에 몰려든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미사키의 입을 향해 있었다.


절칙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뚫고, 그녀의 말은 정확하고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간단해요. 감정을 죽이면 되요. 상대방에게 의존하게 만들면 되요. 극단적인 정신적 상처를 줘, 걸림돌을 치워버리면 되죠. 자존감을 제거해서 그릇을 텅 비게 만드는 거예요. 그릇의 의지에 아무런 방향이 없다면, 합치는 원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이루어지니까요./

/...!!/


무언가 일그러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말들이 서서히 강도를 높여갔다. 강도를 높여가는 단어들은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미사키는 만면에 조소를 머금으며 외치듯 말했다.


/쉽게 얘기할까요? 학대하면 되요. 육체적 학대, 정신적 학대, 성적 학대... 학대를 통해 그릇의 마음을 짓밟고, 완전히 파괴해버리면 되요. 괴롭히고,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자살하기 직전까지 끌고 가는 거죠. 그리고 원하는 방향으로 다시 조립하는 거예요. 그릇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인에게 의존하는 상태로, 만들면 되는 거죠!!! 간단하지 않나요?/

/!!!/


미사키의 말에 차츰 분노가 섞여 들어갔다. 푸른 차가움은 시퍼런 불꽃으로 바뀌어, 주변을 삼킬 듯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수월해지죠. 숭고한 이상 따위가 없어도, 작전의 목표 정도만 있어도 의지의 합치가 이루어지게 되요. 의지도달공간은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흘러내리죠./


충격과 경악을 넘어서, 어딘가 멀리 가버린 얘기였다. 한강진 국장도 입을 벌린 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저 말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그릇을 학대하고, 이를 통한 세뇌’로 ‘의지의 합치’를 이룬다는 뜻이었으니까.


‘무슨 이런...!!’


그야말로 인외(人外)의 방법이었다. 정상적인 볼리셔니스트, 아니, 사람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방법이었다. 물론 전시(戰時)의 광기에 사람이나 조직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인체실험을 했던 731부대라던가, 목 베기 경쟁을 벌인 난징 대학살이라던가. 그러나 그 광기에 먹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었다. 지금의 번영은 그런 보통의 사람들이 광기에 먹히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평화와,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건 모든 사람의 바람이기에.


하지만 그들은 지금,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의 마음을 짓밟고 인격을 박살냈다고 말하고 있었다. 미사키의 말대로라면 정서적, 육체적 학대뿐만 아니라, 성적 학대까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지배한 것이었다.


/...좋은 기회였어요. 동생의 몸과 마음을 좀먹던 쓰레기들을 치워버릴. 사실 제일 먼저 야마다의 이마에 똑같은 구멍을 만들고 싶었지만, 누군가 그걸 해버렸군요. 정말 안타까워요./


아쉬움이 가득한 미사키의 말이었다. 아까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죽음을 알렸을 때 보여준 표정은 팀원을 잃은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죽었다는 기쁨과 직접 죽이지 못한 아쉬움의 발로였다.


/그래도 쇼카쿠는 좀 나았는데... 물론 그도 어쩔 수 없었지만요./

/그래서, 그래서 다 죽여 버린 거요?!!/

/물론이죠. 비무장 상태로 방심하고 있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겠어요?/


한강진 국장의 으르렁거림에 미사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순간 그릇을 그녀의 말처럼 키운 것이 사실이라면, 저 정도의 원한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식으로도 전술기 육성이 가능하다는 건가...’


한강진 국장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역발상도 이런 역발상이 없었다. ‘그릇’의 자질을 발견하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릇의 전술기(戰術器) 활용을 가정한다면 ‘의지의 합치’는 제일 중요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리셔니스트들 사이의 ‘의지의 합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같은 커뮤니티나 조직에서 함께 활동을 오래하면, 대개 의지도달공간의 특성이 수렴하는 형태를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합치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의지를 발산’하는 볼리셔니스트 특성상, 일정 이상 수준은 불가능했다.


문제는 그릇이었다.


일단 전술기 사용의 목적이 ‘다수의 의지도달공간을 하나로 묶어 대규모 법칙을 활용’하는 데에 있으므로, 그 능력의 높고 낮음에 대한 판단은 ‘다수의 의지도달공간을 얼마나 잘 묶느냐’에 달려 있었다. 즉, ‘의지도달공간을 순도(純度) 높게, 많이 합칠 수 있다면’ 그릇으로써의 능력이 좋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작용하는 변수가 두 가지 있었다. 먼저 볼리셔니스트들과 그릇 간 의지의 합치 수준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 그대로 그릇의 능력이었다. 만약 그릇 자체의 능력이 좋다면, 볼리셔니스트와의 의지 합치 수준이 낮더라도 의지도달공간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이는 ‘믹서기가 좋으면 다 갈아서 하나로 만들 수 있다’로 비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릇의 능력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합치 수준을 올리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기에 볼리셔니스트 끼리의 합치는 그 한계가 명백한 상황에서, 변수는 결국 하나로 좁혀졌다.


바로 볼리셔니스트들과 그릇 사이의 합치 수준이었다.


이 수준은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감정과 사상의 공유’로만 높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로가 같은 가치를 가지고 달려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최초의 전술기 역시 종교적 신념, 이상 등을 공유하는 작은 볼리셔니스트 조직 안에서 발견 된 것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신념과 이상은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했고 작은 변화에도 틀어질 수 있었다. 팀원의 교체 역시 잦았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이는 많은 국가들이 현실적인 전술기 양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유 중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리스크를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풀어냈다.


감정과 사상의 공유를 버리고, 그릇 자체를 ‘비워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사람이나 조직을 채워 넣었다. 그 사람이나 조직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릇은 이미 거기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것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아무런 주관도 생각도 없기에 신념과 이상 따위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형성된 육체적, 정신적으로 끊을 수 없는 관계는 높은 수준의 의지 합치를 보장했다.


/간단해요. 인형을 하나 만든 거예요. 의지도달공간을 하나로 묶는 인형을./


미사키가 지금까지의 말을 한 마디로 정리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한강진 국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사실, 어제 상부에 보고했어요./

/...?!/

/작전에 참가한 우리 측 볼리셔니스트는 모두 작전 중에 죽었다고 말이죠./

/!!!/


미사키는 웃고 있었다. 한강진 과장은 그 웃음의 의미를 깨달았다. 모든 건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망명부터 복수까지, 전부 계획한 대로였다. 홀가분한 미사키를 보며 한강진 국장이 이를 깨물었다.


“정 과장, 김 대리. 물러서게.”

“팀장님!!”

“나도 알아. 규칙상 현장 사살이지. 하지만 그럴 순 없네.”

“...!!”


미사키의 목을 향했던 두 개의 칼날이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거기에 그녀 역시 손을 내리며 자세를 고쳤다. 이때 뒤에서 문소리가 들리며 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미유키였다.


{언니...!}


문에 기대어 서 있는 미유키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사키는 성큼 다가가서 미유키의 손을 꽉 잡았다.


{빨리 했어야 했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미안해. 이렇게밖에 못해서 미안해.}

{왜 이런 거야...? 왜...?}

{......}


미사키는 동생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눈에 모습을 새기려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몸을 돌렸다.


{주박(呪縛)은 풀었어. 잘 살렴.}

{언니!}

/한강진 국장님, 에이단 중위님. 일을 이렇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돌아선 미사키가 한강진 국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 상황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 하고 있었다. 인간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저들을 죽이고 싶어 했고,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아마 비밀 엄수가 가능할 거라는 말도 거짓이었겠지. 그녀는 처음부터 그들을 살려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혼자 온 것도, 망명 건을 먼저 정리한 것도, 협상을 빨리 끝낸 것도, 다 이것을 위함이었다.


문제는 소중한 보금자리가 남의 손으로 피 칠갑이 된 것이었다. 커뮤니티 규칙을 보더라도 이 상황의 제재는 죽음뿐이었다. 이건 미사키의 상황을 백 번 이해한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거기에 완전히 놀아난 현재 상황까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만약 미사키에게 손을 대면, 남은 건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패전 처리를 위해 홀로 온 적의 사절을 죽이는 행위는 어떤 변명으로도 이해될 수 없었다.


‘멍청이...!’


승리에 취해 앞을 보지 못한 건 자신이었던가. 한꺼번에 큰돈을 불러 현혹된 건, 자신이었던가.


설핏 드러났던 표정에서 저의를 읽어냈어야 했다. 복잡한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어야 했다. 전투 이후 침울했던 미유키에게서 그 이유를 알아냈어야만 했다.


물론 지금 와서 이런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후회일 뿐. 지금 남은 건 오직 이 상황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한강진 국장이 분노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이오?!!/

/저는 일본으로 돌아가면, 책임을 지고 사임할 예정입니다. 이미 사직서도 제출 했습니다. 명목은 이번 작전의 실패죠. 물론 합의서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한 후가 될 것입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

/원만한 마무리를 짓고 자리를 끝내는 걸로, 책임을 질까 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부족한 건 압니다만.../

/....../

/그리고 에이단 중위님./

/... 네./


미사키의 말이 에이단을 향했다. 에이단이 긴장한 표정으로 미사키를 바라보았다.


/옵서버로써 원하신다면, 이번 일의 상세한 사실을 저희 쪽에 통보하셔도 괜찮습니다. SOSS의 증언이라면 이번 일은 야마다와 저의 개인적인 일탈로 처리될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9국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


죽음을 각오한 말이었다. 만약 옵서버인 SOSS의 에이단을 통해 모든 전말이 내각정보조사실로 들어가면, 그녀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특히 생존자를 사살한 행위는 이적(利敵) 행위를 넘어 심대한 배반 행위였다. 필시 그 대가는 죽음이리라.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을 앞에 두고 미사키가 마지막 말을 던졌다.


/다만 망명 건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미사키는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걸음이라도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그것은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강진 국장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중앙 현관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뒤쪽으로는 미유키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상황에서, 한강진 국장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4화 : 그릇(Vessel)


-1-


카츠노 미사키가 떠나고 5일 후, 1987년 12월 9일 수요일 15시 2분.

부산시 북구, 김해국제공항 터미널.


작가의말

드디어 3화가 끝났습니다.

실질적인 초반부가 끝났네요. 계속계속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읽어주시고 관심가져주시는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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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5화 : 추적(Pursuit) (1-2) 20.04.27 53 0 12쪽
74 5화 : 추적(Pursuit) (1-1) 20.04.26 54 0 10쪽
73 4화 : 그릇(Vessel) (6-3) 20.04.25 66 0 13쪽
72 4화 : 그릇(Vessel) (6-2) 20.04.24 51 0 12쪽
71 4화 : 그릇(Vessel) (6-1) 20.04.21 61 0 13쪽
70 4화 : 그릇(Vessel) (5-4) 20.04.20 55 0 8쪽
69 4화 : 그릇(Vessel) (5-3) 20.04.16 57 0 15쪽
68 4화 : 그릇(Vessel) (5-2) 20.04.13 55 1 11쪽
67 4화 : 그릇(Vessel) (5-1) 20.04.12 55 0 11쪽
66 4화 : 그릇(Vessel) (4-3) 20.04.11 56 0 9쪽
65 4화 : 그릇(Vessel) (4-2) 20.04.10 60 0 10쪽
64 4화 : 그릇(Vessel) (4-1) 20.04.09 59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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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4화 : 그릇(Vessel) (3-3) 20.04.06 58 0 11쪽
61 4화 : 그릇(Vessel) (3-2) 20.04.05 6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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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4화 : 그릇(Vessel) (1-4) 20.03.30 72 0 9쪽
55 4화 : 그릇(Vessel) (1-3) 20.03.29 82 0 13쪽
54 4화 : 그릇(Vessel) (1-2) 20.03.28 72 0 16쪽
53 4화 : 그릇(Vessel) (1-1) 20.03.27 72 0 13쪽
» 3화 : 상어(Agent Shark) (6-5) 20.03.25 69 0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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