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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ition : 1988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플나
작품등록일 :
2020.01.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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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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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그릇(Vessel) (4-2)

DUMMY

* * * *


고공에서 회의가 끝난 후, 1987년 12월 21일 월요일 22시 8분.

경기도 성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경부선 위.


승합차를 타고 온 건 잘 한 선택이었다. 뒷좌석 3열 쪽에는 오늘부로 고공에서 이관 받은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올 때는 5명이 여유롭게 왔건만, 갈 때는 2열에만 세 명이 끼어 탄 채로 좁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조수석의 한강진 국장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올림픽도 버거운 마당에 티어 0의 그릇이라니. 도대체 신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런 시련을 내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때 뒷좌석 중간에 앉은 이성진 대리가 말했다.


“그런데 티어 0이 어느 정도인 거죠? 거리만 300km 이상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는 의지흐름 측정기 설명서의 「배 능력에 따른 범위」 페이지의 복사본을 보고 있었다. 사실 페이지에는 범위만 나와 있지, 그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 정확하지는 않지만.”


의외로 한강진 국장이 대답을 꺼내들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뒷좌석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아마 지금 미유키 수준이 티어 4에서 5 정도로 보면 될 거야.”

“4~5요?”

“사실 그릇에 대한 연구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어. 다만 과거 사례를 통해 급을 나눠 놓은 것이 있네. 나도 유학 시절에 본 거라 확실치는 않는데...”


한강진 국장이 고개를 들고 기억을 떠올렸다.


“미군은 0에서 9까지 구분했어. 먼저 전술기(戰術器)의 성능을 가늠하는 기준이야. 얼마나 많은 의지도달공간을 합칠 수 있는 지로 구분한 거지. 7에서 9가 1~4인, 3에서 6이 5~10인, 1~3이 10~30명 숫자의 의지도달공간을 합칠 수 있다고 하더군.”

“그럼 0은 뭔가요?”

“0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하나만 더. 이 티어 구분은 한 가지 기준이 더 있어. 전술기가 아닌, 보통의 그릇에 관한 기준이야.”

“...?”

“7에서 9가 보통사람들 중 특출난 사람, 4에서 6이 뛰어난 정치가와 지도자들, 1에서 3이 위대한 위인들이 그것이지.”

“오...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그럼 0은 무엇인가요?”

“그 0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거지. 워낙 독특했거든.”


여기서 한강진 국장이 조금 고민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납득하기 쉽지 않은 대답이었기 때문이었다.


“티어 0은 양쪽 기준이 공히 같았어. 숫자가 아닌, 오직 두 단어만 있었지.”

“단어요?”

“맞아. 성인(聖人Saint) 혹은 신(神God).”

“네?!”


이성진 대리가 헛웃음을 섞으며 반문했다. 옆의 정은정 과장이나 최문식 과장의 표정도 비슷했다. 성인(聖人)이나 신(神)이라는 단어에 현실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어떤 근거로 티어별 등급을 그렇게 나눠놨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아주 헛소리는 아닐 거라는 게 내 생각이네.”

“하지만 성인이나 신이라니... 현실성이 너무 없는데요? 예수나 부처 같다는 말인가요?”


이성진 대리가 양 손을 으쓱하며 말했다. 이 말에 한강진 국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나도 현실성에 대해서는 할 말은 없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미유키가 전술병기 급이라면, 티어 0은 전략병기 혹은 그 이상이라는 것.”

“말씀하신 기준은 신뢰할 수 있는 건가요?”


정은정 과장의 물음에 한강진 국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치는 않아. 어차피 전술기 관련 자료도 검은 9월단 사건에서 밝혀진 것이 다니까. 하지만 당시 그릇을 확보한 이스라엘 쪽에서 꽤 면밀하게 연구를 한 걸로 알고 있네. 그리고 이 기준도 그곳에서 나온 걸로 알고 있고.”

“음... 그럼 전략병기 수준이라는 건 어떤 정도로 볼 수 있나요?”

“그건 간단해. 30명 이상의 의지도달공간을 하나로 합쳐서 사용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나?”


정은정 과장은 「샛별」 작전 당시 4명의 볼리셔니스트와 티어 4~5의 그릇이 만든 「피지컬 베리어」를 떠올렸다. 재래식 병기로 그들을 막아내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병력이 필요할까? 그때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듯, 한강진 국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샛별 작전 때 교전한 피지컬 베리어를 뚫어내는 것만 해도 최소 주력전차는 필요할 거야. 아냐, 주력전차로 될까? 500kg 정도의 항공폭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는 4명이 만든 거였지. 헌데 30명 정도면... 전술핵은 동원해야 되지 않을까 싶네.”

“...!!”

“그게 아니라도 법칙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활용처는 무궁무진하지. 상대방의 예지 따위는 쌈 싸먹는 작전 전개도 가능할 거고. 나도 우리 8명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뛰는군.”

“하지만 「의지의 합치」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30명을 합치시키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텐데요.”

“그건 해결책이 나왔지 않나. 게다가 나이도 어리지. 최적의 조건이 아닌가.”

“미유키의 사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정은정 과장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티어 0의 힘이라면 그 방법을 선택할 유혹은 충분하고도 남지. 인간이길 포기하면서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사실 나라도 고민할 거야.”

“팀장님!”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 아무튼, 이 일은 커뮤니티든 정부 조직이든 모든 볼리셔니스트들에게 큰 혼란으로 다가올 걸세. 누가 먼저 그릇을 확보하고, 전력화 하느냐에 이 바닥 질서가 완전히 바뀔 거니까.”

“......”


점점 위기감이 커지고 있었다.


사실 볼리셔니스트들이 서로 견제가 가능한 것도 그 힘의 한계가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한 명의 볼리셔니스트가 강하더라도 엄청난 격차를 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서로가 전투를 피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혼자서 세 명 이상을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릇이 끼어들면 얘기가 달라졌다. 그릇은 대단위의 법칙을 운용할 수 있게 하였고, 표막의 방어력을 뛰어넘는 물리력을 확보하게 해 주었다. 이 경우 칼과 표막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대 마법사 전(戰) 전개 양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칼이 통하지 않는 방어력을 몸에 두르고, 표막을 뭉개버리는 공격력은 마법사들에게는 재앙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검은 9월단 사건 직후 각 국이 연구에 매달렸던 이유였기도 했다. 물론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다들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지금 상황은, 많은 위험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이 허들을 낮추고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네만. 그릇의 능력이 강할수록 「의지의 합치」 수준이 낮아도 된다고 알고 있네.”

“네?!”

“동질성이 낮은 의지도달공간이라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는 얘기지. 이건 티어 0을 설명한 성인이나 신이라는 단어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

“위대한 성인이 왜 위대할까? 그들은 차별이 없었고,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무언가를 얘기했지. 그리고 그 침투력은 사람의 차이를 두지 않았어. 그렇기에 불멸로 남을 수 있었고.”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이점을 포용하고, 그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며 받아들인다... 의지도달공간을 하나로 합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정은정 과장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좀처럼 와 닿지 않는 얘기였다.


“... 잘 모르겠습니다.”

“나도 내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이번 경우는 여기까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보네.”


한강진 국장이 말을 이어갔다.


“정 과장도 알고 있겠지만, 그릇은 기본적으로 「의지를 흡수」하는 존재이지. 의지를 흡수한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뜻도 되지. 따라서 만약 일반인의 의지를 흡수한다면 역사적인 위인이 되는 것이고, 볼리셔니스트의 의지를 흡수한다면 전술기가 되는 거지. 그리고 지금까지는,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한강진 국장이 히터 온도를 조금 낮췄다. 대화가 많아지면서 뜨거움을 느낀 듯 했다. 차창 역시 서리가 끼어 희미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 달리 해보자고. 만약 예수나 부처 같은 역사적 성인(聖人)이 현대에 다시 나타났다고 가정해 보게. 우리는 그들의 능력과 성인으로써의 그들을 분리해서 볼 수 있을까?”

“음... 아뇨.”

“비슷한 개념이지 않을까? 전술기인지 아닌지는 관계가 없을 거야. 어떠한 다른 존재라는 거지. 티어 0은 티어 0일 뿐.”

“......”


한강진 국장이 숨을 한 번 내쉰 후 말을 이어갔다.


“세상이 그렇듯, 궁극의 길은 하나로 합쳐지는 법... 이라던가.”


한강진 국장이 소매를 들어 차장의 낀 서리를 닦아냈다. 차창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는 강 너머로 시선을 둔 채, 말을 계속했다.


“인간의 모든 가치관도, 사상도, 방향이 다른 의지도, 볼리셔니스트의 의지도달공간도... 단 한 명의 성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라는 뜻으로 해석하네. 나는.”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정은정 과장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달관한 것 같은 그의 말에 조바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의심이 느껴질 정도의 어투로 되물었다.


작가의말

언제나 읽어주시고 관심 주시는 분들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From PlasmaK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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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5화 : 추적(Pursuit) (1-2) 20.04.27 53 0 12쪽
74 5화 : 추적(Pursuit) (1-1) 20.04.26 54 0 10쪽
73 4화 : 그릇(Vessel) (6-3) 20.04.25 66 0 13쪽
72 4화 : 그릇(Vessel) (6-2) 20.04.24 51 0 12쪽
71 4화 : 그릇(Vessel) (6-1) 20.04.21 61 0 13쪽
70 4화 : 그릇(Vessel) (5-4) 20.04.20 55 0 8쪽
69 4화 : 그릇(Vessel) (5-3) 20.04.16 57 0 15쪽
68 4화 : 그릇(Vessel) (5-2) 20.04.13 55 1 11쪽
67 4화 : 그릇(Vessel) (5-1) 20.04.12 55 0 11쪽
66 4화 : 그릇(Vessel) (4-3) 20.04.11 56 0 9쪽
» 4화 : 그릇(Vessel) (4-2) 20.04.10 60 0 10쪽
64 4화 : 그릇(Vessel) (4-1) 20.04.09 59 0 17쪽
63 4화 : 그릇(Vessel) (3-4) 20.04.08 51 0 15쪽
62 4화 : 그릇(Vessel) (3-3) 20.04.06 58 0 11쪽
61 4화 : 그릇(Vessel) (3-2) 20.04.05 61 0 10쪽
60 4화 : 그릇(Vessel) (3-1) 20.04.04 67 0 12쪽
59 4화 : 그릇(Vessel) (2-3) 20.04.03 70 0 14쪽
58 4화 : 그릇(Vessel) (2-2) 20.04.02 72 0 14쪽
57 4화 : 그릇(Vessel) (2-1) 20.04.01 73 0 13쪽
56 4화 : 그릇(Vessel) (1-4) 20.03.30 71 0 9쪽
55 4화 : 그릇(Vessel) (1-3) 20.03.29 82 0 13쪽
54 4화 : 그릇(Vessel) (1-2) 20.03.28 72 0 16쪽
53 4화 : 그릇(Vessel) (1-1) 20.03.27 72 0 13쪽
52 3화 : 상어(Agent Shark) (6-5) 20.03.25 68 0 18쪽
51 3화 : 상어(Agent Shark) (6-4) 20.03.24 6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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