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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1 님의 서재입니다.

좀비와 고양이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c61
그림/삽화
c61
작품등록일 :
2024.04.12 22:42
최근연재일 :
2024.05.25 21:05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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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수 :
150,912

작성
24.04.2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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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8화

DUMMY

“잘했어. 참 보기 좋다. 자식이 직접 화장도 해주고 무덤도 해주고 묘비까지 해주는 부모가 요즘 세상에 얼마나 있냐. 하기 싫은 티 풀풀 냈으면서 할 일은 다 했네. 너 아버지랑 사이 나빴던 거 맞아?”


“하라면서요.”


“내가 너무 참견해서 기분 나빴구나. 그건 사과할게. 그래도 귀신 입장에서 그냥 두고 보기는 그렇더라.”



아침에 만들어 먹었던 것보다 지금 먹는 게 더 맛있네. 내 인생에서 아버지를 정리하고 나니까, 음식이 맛있다. 아버지가 살아서 나한테 준 건 상처뿐이다. 부모로서 작은 응원 한마디 해준 적 없다. 뭐 하나 조그만 거라도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트집 잡고 듣기 싫은 잔소리나 지껄였다. 평생 내 자존감을 깎아내렸다. 머리가 약간 길었다고, 피부가 좀 텄다고, 밥 늦게 먹었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내 인생을 개차반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죽을 때가 닥치니까 가족이 아쉬웠나?



“진지한 얘기 하기 좋은 날씨네.”



한참 있다가 최 도령이 꺼낸 대사였다. ENFP답지 않게 오래 고민했구나.



“죽으면 어떻게 돼요?”


“삼도천 건너 저승으로 가지. 거기서 생전 지은 죗값을 치르고 윤회로 돌아가. 이승에서 받는 처벌이랑은 달라. 교화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부정을 털어내서 혼을 깨끗하게 하는 게 목적이야. 윤회가 부정을 타면 큰일 나거든.”


“환생할 때 기억 날아가요?”


“응. 싹 날아가.”


“최 도령은 뭔데요?”


“일부러 환생 안 하는 귀신. 윤회가 부정 타면 큰일 난다고 했지? 그렇게 안 되게끔 관리하는 게 우리 일이야. 당연히 우리도 생전엔 평범한 사람이었어. 일도 많이 해본 놈이 잘하잖아. 그러니까 몇백 년씩 하는 거지.”


“큰일은 어떻게 나는데요?”


“부정한 혼이 환생한다, 말인즉슨 이승이 지옥이 된다는 뜻이야.”


“별로 차이 없을 것 같은데요.”


“하이고······누가 인프제 아니랄까 봐 신랄한 소리만 하네. 지금 이 상황도 부정 탄 게 원인일지 모른다고.”


“네. 별로 차이 없잖아요.”


“이놈이 진짜. 표정 풀린 거 보니까 무거운 생각은 떨쳐냈나 보네.”


“네. 덕분에요.”


“슬슬 움직이자. 아직 해가 중천이다.”



절은 좀비 무리를 감당할 준비가 됐을 때 가기로 했다. 시간이 좀 애매해서 도시로 가는 대신 빨래를 했다. 이 집 전지판으로는 세탁기가 잠깐 돌아가다 멈춰버렸다. 지붕엔 전지판을 더 놓을 자리가 있었다. 근데 설치하려면 드릴로 지붕을 뚫어야 해서 엄두가 안 났다. 대안을 생각해봤다. 집 옆에 조립식 비계를 올리고 거기다 설치하자. 철사 같은 거로 묶기만 해도 충분히 고정될 거야. 비계는 뭐, 건설현장에 있겠지.


고무통에 빨래랑 세제를 넣고 발로 밟았다. 발이 시렸지만 재밌었다. 탈수가 안 되는 게 아쉬웠다. 무거운 빨래를 버티지 못한 장대가 부러질 뻔했다. 빨랫줄은 전선이라서 괜찮았다. 귀한 구리를 이런 데다 낭비하다니······. 장대를 쇠파이프로 바꿔 해결했다.


고등어 고양이는 내가 먹을 것을 주기 시작하자 닭을 건드리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닭을 보고서도 심드렁했다. 거의 잠만 잤다. 진짜 쉽게 사는 생물이야. 불린 북어포를 놔주었다. 굶으면 닭 잡아먹을지도 몰라.


저녁엔 집 청소를 했다. 음식물쓰레기, 고물, 폐품 같은 걸 골라내 밖에 모았다. 그리고 한꺼번에 태웠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연기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은 이번에도 없었다. 저녁밥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밖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싸우는 소리였다. 목검을 들고 찾으러 갔다. 고등어 고양이가 닭장 앞에서 엄청 큰 지네랑 싸우고 있었다. 닭을 잡아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 큰 지네였다. 때려죽이려고 했는데, 사람 머리 지네가 아니었다. 그냥 크기만 컸다. 목검으로 들어 통에 넣었다. 쓰레기 태우던 불에다 던져버릴까 고민했다. 나한테 이로운 생물은 아니다. 고양이나 닭한테도.



“죽일까요?”


“물어봐 줘서 고맙다. 어디다 버리고 오면 돼. 불가피한 게 아니라면 살생은 피해라. 그게 다 죄다.”



아 그렇지. 인면지네는 되기 싫어. 저승이 진짜 있다는 게 예전에 알려졌다면 사람들이 더 착하게 살았을 텐데. 그게······좀비 사태랑 관련이 있을까? 그냥 내 망상이겠지?


대왕지네는 다른 마을까지 가서 풀어줬다. 느릿느릿 움직여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이제 오지 마라.


집으로 돌아왔는데, 고양이가 쓰러져 있었다. 입을 지네한테 물려 퉁퉁 부어 있고 게거품도 흘렸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건만 가슴이 아팠다. 방으로 데려와 수건을 깔고 눕혀줬다. 숨 쉬는 게 너무 느렸다. 발도 차가웠다. 따뜻하게 데운 물을 품에 안겨주고 수건도 덮어줬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밤새 물을 갈아주며 돌봤지만, 고양이는 새벽에 죽었다.


화장해서 앞마당 구석에 묻어줬다. 작은 돌무덤. 이 산골에서 처음 만난 죽음. 고양이는 상서로운 동물이 아니라며 피했던 최 도령도 중얼중얼 염불을 외웠다.



“이승에서 연을 맺은 것들은 언젠가 다시 만나기 마련이다. 다음엔 네가 고양이고 그 녀석이 사람일 수도 있어.”


“고양이로 사는 게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요.”


“하긴 너처럼 고민만 많은 놈은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똥오줌만 잘 가려도 아이고 이쁘다 해줄 테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거봐,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농담 자주 해줘야겠다. 괜찮지?”


“네.”



피곤해서 일찍 잤다. 새벽에 깼다. 자긴 잤는데 더 피곤해진 느낌이야. 비타민 먹는 걸 깜박했구나. 하나 삼켰다. 현대 과학의 힘을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날짜를 안 세서 오늘이 며칠인지 모르겠다. 인터넷 끊긴 핸드폰은 시계도 달력도 안 된다. 나침반, 손전등, 지도. 그리고 메모장 정도. 솔직히 핸드폰을 손전등으로 쓰는 건 불편해. 그래서 자전거 전등을 쓴다. 이게 훨씬 낫다.


날이 어둑어둑했다. 배가 고파 라면을 끓여 먹었다. 김치가 있었으면 좋겠다. 직접 담그는 것도 문젠데, 보관이 더 까다롭다. 김치냉장고를 24시간 작동시킬 만큼 전기가 들어와야 한다. 낮이면 몰라도 밤은 힘들다. 아 맞다, 바로 옆에 계곡 있잖아. 수력발전기를 설치할까? 근데 어떻게? 그런 영상도 몇 번 봤었다. 시멘트랑 프로펠러로 잘 하면 될 것도 같은데. 겨울이 좀 걱정이긴 해. 겨울은 물이 얼어서 거의 안 흐른다. 그 정도로 추운 날엔 김치를 창고 같은 데다 보관하면 되려나. 항아리 많이 있으니까 땅에 묻을까?


아니 근데 수력발전소 멀쩡하게 있잖아. 그 근처에는 전기가 들어오고 있을지 몰라. 아니면 풍력발전기. 그것도 아니면 태양광 발전소 찾아보는 것도 괜찮아. 그렇지만 혼자 전기 만지다 훅 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더 좋은 방법······우리나라 어딘가에는 100% 재생에너지로 유지되는 집이 있을 거다. 분명히 있어. 위치를 모를 뿐이지, 누가 만들어놨을 거야. 그런 집을 찾는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하냐?”


“재생에너지요.”


“풍력발전 같은 거? 여기다 놓게?”


“아뇨. 그런 게 있는 집을 찾아볼까 생각하는 중이에요.”


“오 괜찮네. 좋은 생각이야. 물만 근처에서 구할 수 있으면 걱정이 없겠어.”



인터넷 될 때 검색해둘걸. 후회하긴 너무 늦었고, 있을 만한 곳을 추려내는 작업을 해야지. 아마······관공서에 문서가 있지 않을까? 집에 전기 관련해서 뭐 설치하려면 신고해야 하잖아. 그래, 관공서를 털자. 차 타고 무작정 돌아다니는 것보단 훨씬 나은 방법이야. 어쩌면 이 주변에서 바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라. 역시 막연하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보단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훨씬 힘이 난다.


이제 겨우 봄이고 집 찾을 시간은 충분하다. 우선은 최 도령과 한 약속을 먼저 지키는 게 순서다.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꿈에 고등어 고양이가 나왔다. 한참 동안 내 손을 핥아주다가 슬그머니 떠났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찬물로 세수를 했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귀찮았다. 이발기 구해야지. 그냥 확 밀어버리자. 시원한 게 좋아. 밥을 해 먹고 감자랑 고구마를 삶았다. 점심이다. 도시에서 파밍할 준비는 금방 끝났다. 목검 말고는 특별한 것도 없었다. 비상용 무기로 삽도 하나 화물칸에 실었다. 닭장을 열고, 고양이 무덤에 북어포를 놔준 다음 출발했다. 닭들은 나오자마자 북어포로 달려가 쪼아 먹었다.


아버지 친척 중에 도시에 사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됐는진 당연히 모른다. 정확히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알아서 대피했겠지. 루팅 품목을 다시 훑어봤다. 고양이용품. 이건 취소. 조립식 비계. 이발기. 끝. 어차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임기응변으로 해야 한다. 한 시간을 달리는 동안 최 도령은 또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기차역도 있고, 나름 큰 도시다. 여기도 군대가 바리케이드로 길을 막아놨다. 좀비 대응 훈련을 언제 받았다고 이렇게 열심히 해놨냐. 그래도 이번에는 바퀴 달린 A형 바리케이드였다. 옆으로 밀어 치웠다.


나한테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느낌이다. 좀비들이 꽤 있긴 했는데 엄청 약했다. 살이 썩어 뼈가 보였고 움직임도 느렸다. 영화나 게임 같은 좀비가 아닌 게 정말 다행이다. 아니······잠깐만, 하반신밖에 없는데 움직이는 좀비가 있네? 위험한 건 아닌데······얼굴 없는 괴물을 조심하라고 최 도령이 그러지 않았나? 좀비는 저승에 없댔으니까 논외겠지?



“큰놈이 있다. 조심해라. 좀비 상체를 뜯어낼 정도로 큰놈.”


“낮에도 나와요?”


“모르겠다. 이승에 있으면 안 되는 놈이야. 어두운 데는 들어가지 마라.”



아까까진 좋아지는 느낌이었는데, 큰놈 하나 때문에 다 망해버렸다. 길 가다 눈에 띈 미용실에서 새 이발기를 찾아냈다. 두 상자 챙겼다. 가위랑 빗, 샴푸도 신세 졌다. 절 공략에 필요한 것. 뭘까. 이 도시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 오면 안 돼. 작은 마트에서 행주를, 철물점에서 전동 공구를 구했다. 공구는 집에도 웬만큼 있긴 한데, 낡았다. 아직 써본 적도 없고. 고장 났을지도 몰라.


건설현장은 못 찾았다. 새 건물을 짓는 곳이 없었다. 문서도 찾아보려 했었지만, 시청 내부가 어두워 들어가지 못했다. 거기다 위험을 알리는 직접적인 증거도 찾아냈다. 큰 발에 밟혀 부서진 계단. 무시무시한 발자국. 이게 뭐야? 거인이야? 이 덩치로 시청엔 어떻게 들어갔어?



“진짜 큰일인데. 이거 발목괴물이다. 소리 들으면 쫓아와서 막 밟아버려. 발목에 귀가 달렸어.”


“그런 귀신이 왜 있는데요?”


“귀신이 아니라 씻겨나간 부정이 고여서 생긴 괴물이야. 퇴치해야 하는데 우리 힘으론 안 돼. 이 도시에 무슨 일 있었나? 다시 보니 분위기가 이상하네. 부정한 기운이 남아있다.”


“예전에 이 동네에서 누가 부동산으로 사기 쳤대요.”


“아 그래? 당한 사람 많아?”


“네. 뉴스에 한 번 크게 났었어요.”


“그럼 그게 원인이겠네. 억울함 풀어줄 방법은 딱히 없고······이만 가자. 괴물도 햇빛 못 받는 건 똑같긴 한데 그런 걸 생각할 머리가 없다.”


“햇빛 아래로 나오면 죽어요?”


“죽지. 몇 시간 걸리지만.”



유인 작전은 안 되겠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내가 그러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청 쪽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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