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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단 님의 서재입니다.

회귀자의 소소한 컨츄리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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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쥬단
작품등록일 :
2023.11.28 13:30
최근연재일 :
2024.01.18 18:30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8,402
추천수 :
233
글자수 :
185,684

작성
23.12.26 17:40
조회
128
추천
5
글자
12쪽

24화 또 다른 기억

DUMMY

엄마의 장사를 치른 석 달 쯤 후,

찬바람이 으스스 불던 늦가을 어느 날,


노랑 머리에 파란색 짧은 원피스를 입고 손바닥 만한 가방을 옆구리에 낀 여자가 찾아왔다.


해선의 이모라고 했다.


여자는 수군대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해선의 손을 잡고 화라리를 떠났다.


기차에 탔을 때,


아저씨들이 여자의 짧은 치마 아래로 나온 다리를 몰래 힐끔거렸고,


손바닥 만한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아줌마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기차 통로를 다니며 먹을 것을 파는 남자에게 찐 달걀과 사이다를 사서 해선의 무릎 위에 올려주곤 이내 잠이 들었다.


노랑 머리의 여자를 따라 간 곳은 철로 옆 조그만 동네였는데,


기차에서 내려 처음 본 풍경이 참 예뻤다.


하늘은 끝도 없이 파랬고, 곧게 뻗은 철로와 길다랗게 휘어진 철로가 교차되는 곳곳 자갈 돌 사이로 코스모스가 한들거렸다.


해선이 따라가기를 주저하자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이리와. 얼른.”


철로 몇 개를 건너 뚝방길을 내려가니 옹기종기 허름한 집들이 모여있는 작은 동네가 나왔다.


큰 골목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막다른 길이 나왔고, 그 길의 끝에 대문도 없는 어두운 집으로 들어갔다.


해선은 여자가 들어간 그 집 앞에서 또 한참을 망설였다.


“안 들어오니?”


주춤주춤 한발씩 다가가 방 안에 들어서니,


언제부터 차려져 있었는지 모를 밥상 위엔 말라 비틀어진 김치 쪼가리, 방바닥엔 빈 소주병이 뒹굴고, 반쯤 열려진 서랍엔 동그랗게 부푼 빵 같은 하얀 털 뭉치가 있었다.


여자는 밥상을 한쪽으로 밀고 앉더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콜록ㅡ.


해선이 기침을 하자 밥상 위 빈 그릇에 비벼서 껐다.


“저기 빨간 거 보이지? 저거 열면 밥 있으니까 퍼서 먹고. 이모, 나갔다 올 거니까. 아, 학교는 며칠 더 있다가 가자.”


여자가 나가고 아무도 없는 방에 어둠이 깃들었다.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운 채 붙박이처럼 앉아있던 해선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


“야!! 일어나봐.”


뺨 한쪽에 꿰멘 자국이 있는 남자가 해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툭 차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르...크르르!!!


열려진 서랍 안에 있던 하얀 털 뭉치가 이빨을 드러냈지만,


퍽ㅡ!!!


캐액-!


남자의 발길질에 저만큼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안들리냐? 일어나라고!!!”


....끼이이-낑


털 뭉치가 해선에게로 와 안겼다.


“하! 이젠 개새끼까지 날 무시해?”


남자가 바닥에 뒹굴던 소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수, 수원씨! 하지 마. 얘 내가 말한 그 애야. 내 조카.”


어젯밤 해선을 두고 나갔던 여자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조카? 조카아? 이거 혹시 니가 싸 지른 애 아냐?”


“수원씨. 왜 그래. 아닌 거 알면서.”


“됐고.”


남자가 손을 내밀자 여자는 가방에서 돈을 꺼내 남자 손에 쥐어 줬다.


“이게 다야? 어디다 꼬불친거 아냐?”


대답 대신 여자는 남자의 손에서 소주병을 슬며시 빼냈다.


“내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 참는다. 저 새끼 내 눈에 안 보이게 치워라?”


“알았어. 수원씨. 잘 갔다 와. 차 조심하고.”


남자가 해선과 털 뭉치를 향해 눈을 부라리다가 등을 돌리고 나가자 여자는 담배를 꺼내려다 해선일 보더니 다시 넣었다.


“밥 안 먹었구나? 배고프겠다.”


여자가 방 한구석에 놓여있던 상을 들고 나갔다.


딸그락 딸그락 그릇 소리와 물소리가 났고, 잠시 후 밥상이 다시 들어왔다.


콩나물 국에 만 밥이었다.


“이리 와. 밥 먹자. 도그, 너도 와.”



***


여자는 낮에는 자고 밤에만 일하러 나갔다.


노랑 머리가 까매지면 대야에 맥주를 부어 머리를 감았는데, 그러면 다시 노랑 머리가 됐다.


남자는 며칠에 한번씩 와서 돈을 받아갔다.


돈을 조금밖에 못 주는 날엔 발길질에 욕설을 퍼부으며 살림을 부쉈다.


여자는 남자가 오지 않는 며칠 동안은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콧노래도 부르고, 웃기도 하고, 해선의 손을 잡고 철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해선은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햐얀 털 뭉치가 다가와 툭툭 건들면 한번씩 발도 잡아 주었고,


언제부턴 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여자를 이모라 부르고 있었다.


아침이면 철 길을 몇 개 건너 집으로 오는 이모를 마중 나갔는데, 이모한테서는 늘 술 냄새가 났지만 손에는 꼭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어떤 날은 붕어빵, 어떤 날은 호떡, 또 어떤 날은 군고구마.


회색빛 하늘에서 주먹 만한 눈송이가 흩날리던 날,


이모는 마중 나온 해선의 손을 잡고 철 길을 걷다 말고 이렇게 물었다.


“해선아, 넌 꿈이 뭐야? 밤에 잘 때 꾸는 거 말고. 이다음에 크면 하고 싶은 거 말야.”

“...”


꿈은 잘 모르겠고 그 새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마음속으로 그리 말했다.


“음, 해선아. 꿈 생기면 이모한테 말해줄래? 그럼 이모 꿈이 뭐였는지도 말해줄게. 자, 약속.”


이모가 해선의 손을 끌어다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흐흥, 약속 한 거다? 어머, 해선이 코 빨개졌네? 춥다. 들어가자.”


품속에 털 뭉치가 꼭 안겨있어서 하나도 안 추웠지만 이모 귀가 빨갛게 얼어서, 이모가 추울까 봐 고개를 끄덕였다.


“흐흥. 우리 해선이, 이제 이모가 하는 말에 고개도 끄덕여주고. 기분 최곤데?”



***


중학교 입학할 때 이모는 해선을 양복점에 데리고 가 몸에 딱 맞게 교복을 맞춰 줬다.


‘쟤, 엄청 부잣집 앤 가 봐’


깡통 로봇처럼 아버지 양복을 걸친 듯 비슷 비슷한 반 애들이 부러운 눈길로 해선을 봤지만,


학부모 상담 날 노랑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한 이모가 학교에 왔다 간 후,


‘천박해. 술집 나가나 봐.’


삼삼오오 모여 속닥거렸고, 해선이 개의치 않자 나중엔 대놓고 떠들어 댔다.


하지만,


시험 때마다 전 과목 만점으로 단 한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데다,


교사 생활 20년 넘도록 박해선 같은 애는 처음 봤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 담임 신정헌 선생님 덕에 수군거림은 점차 사라졌다.


해선이 처음 전교 1등을 하던 날,


“세상에! 세상에! 이게 뭐야? 우리 해선이 엄청 똑똑했구나? 공부를 이렇게 잘했어? 해선이 대학교까지 보내려면 이모 돈 엄청 벌어야겠는데?”


이모는 너무 좋아 기찻길 위에서 춤이라도 출 수 있겠다면서 해선의 손을 꼭 잡고 기차역 맞은 편에 있는 ‘이화반점’ 을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사줬다.


태어나서 그렇게 맛있는 건 처음이었다.


“짜장면은 말야, 원래 졸업식 날 먹는 거거든? 그런데 지금 이모가 너어무 기분 좋아서 특별히 사 주는 거야. 많이 먹어?”


에? 졸업식날요? 그럼 3년이나 기다려야 돼요?


해선이 당황하며 마음속으로 그리 외쳤다.


“흐흐흥, 해선이가 1등 할 때마다 짜장면 먹을까? 우리?”


끄덕!끄덕!끄덕!!


해선이 고개를 마구마구 끄덕였다.


1등! 그게 뭐 어렵다고요.


“꺄아아악!! 너는 천재야. 천재!!”


성적표를 볼 때마다 이모는 만세를 부르며 돌고래 소리를 냈고,


왕!왕!왕!


뭉치도 덩달아 해선의 무릎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피웠다.


이 무렵 하얀 털 뭉치는 드디어 뭉치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가끔 사고도 쳐서 사고 뭉치란 의미가 더 컸는데, 녀석은 그것도 모르고 이름을 불러주면 엄청 좋아하며 우다다다 달려왔다.


“아, 해선이 뭐 먹고 싶니?”

“...짜장면!!”


이모는 1등 할 때마다 먹자 했던 짜장면을 늘 까먹고 매번 물었다.


“흐흐흥. 맞다. 짜장면. 가자. 도그, 넌 집에 있어.”


...시무룩.


이모는 뭉치를 뭉치라 부르지 않고 계속 ‘도그’ 라고 불렀지만, ‘도그’ 가 영어로 개라는 걸 해선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


남자가 와서 돈을 뺏고 때리는 날만 아니면 제법 행복했다.


해선은 항상 의문을 가졌다.


이모는 왜 저 악마 같은 새끼한테서 도망을 치지 않는 걸까. 왜 저렇게 맞으면서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걸까. 이모는 정말 술집에 나가는 걸까. 이모는 내 친 이모가 맞을까.


저 새끼, 내가 죽여버릴까.


가슴에서 뜨겁고 끈적한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끼잉-낑-낑-


그럴 때마다 뭉치가 다가와 울끈불끈 힘 줄이 튀어 오른 주먹을 뭉툭한 앞발로 토닥여 줬다.



***


중학교 졸업을 하루 앞둔 날,


이모는 미장원에 가서 까만 머리로 염색을 하고 왔다.


“이모 어때?”


검은 머리에 검은색 벨벳원피스를 입은 이모가 한 바퀴 빙그르 돌자 순식간에 마릴린먼로에서 소피마르소로 변신했고,


해선의 엄지 손가락이 저절로 척 세워졌다.


“해선아. 너 근데 아직도 꿈 못 정했어? 생각해봤는데, 꿈 그거 없어도 되겠더라? 넌 그냥 아무것도 정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어. 그랬음 좋겠어.”


이모, 그럼 이모 꿈이 뭐였는지도 말 안 해줄 거에요?


“아, 참. 이모가 소원이 생겼는데...”


이모. 걱정 마요. 고등학교 가서도 전교 1등 무조건 할게요.


“흐흥, 궁금하지?”


해선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냐면...울 해선이가 이모한테 ‘이모’ 라고 불러 주는 거.”


네? 겨우요? 겨우 그게 소원이라고요?


“그리고...”


그렇죠? 빨리 진짜 소원을 말해요. 그게 뭐든 다 들어줄 거라고요.


“해선이가 행복해 지는 거...친구들이랑 축구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시험에서 몇 문제 틀리기도 하고. 평범하게...”


해선인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모가 말한 것들이 다 해선이한테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호흥. 쉽게 대답해주면 박해선이 아니지. 아, 우리 내일 짜장면 먹는 거 알지? 낼은 졸업식 날이니까 특별히 탕수육도 먹자.”


해선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응? 왜?”

“짜장면 곱빼기.”

“흐흐흥. 좋아. 짜장면 곱빼기에 탕수육. 어때?”

"좋아요."


좋아요...이모.


이모는 벨벳원피스를 벗어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쓸어 내곤 소중하게 옷걸이에 걸었다.


그날 밤 해선은 오랫동안 가져왔던 의심을 풀어냈다.


이 사람은 내 진짜 친 이모가 맞다고.

이모는 엄마가 보내준 천사라고.

백만 번, 천만 번도 더 ‘이모’ 를 불러 줄 거라고.

어서 커서 힘을 키워 남자에게서 이모를 구해 행복하게 살 거라고.



***


다음날,


해선이 졸업생 대표로 나가 졸업장을 받고, 표창장을 받기 위해 단상을 내려왔다가 올라가기를 몇 번,


분명 이모라면 해선이보다 먼저 해선일 찾아 폴짝폴짝 뛰어 오르며 손을 흔들었을텐데,


졸업식이 다 끝나도록, 친구들이 제 부모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선생님과 인사하고 밥 먹으러 흩어져 갈 때까지도,


이모는 보이지 않았다.


품에 졸업장과 표창장을 안고 찬바람만 휑한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있는 해선에게 담임이 다가왔다


“...해,선아.”

"..."


***


사람들이 그랬다.


머리카락이 검은색이어서 그 여잔 줄 처음엔 몰랐다고.

다른 땐 그렇게 죽은 듯이 맞더니 만 오늘 따라 도망을 갔다고.

왜 하필 도망을 가도 철 길로 갔느냐고.

짐승보다 못한 놈 뒤지게 내버려 둘 것이지 어째서 황천길 동무를 했냐고.

아직 어린 것이 학교 가고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눈앞에서 봤으면 평생 살아가기 힘들 거라고.


뭉치는 어디로 간 걸까.


사람들 누구도 뭉치 얘기는 하지 않았다.


***


동사무소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시설 같은데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해선은 고개를 저었다.


살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살아지더라.


밥도 먹어졌고 밤이 되면 졸렸고, 잊지 않으려 애쓴 만큼 한쪽에서는 잊혀졌다.


신정헌 선생님이 가끔 해선일 찾아왔다.


가신 뒤엔 항상 집 어딘가 해선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봉투를 놓고 가셨는데, 얼마의 돈과 몇 글자의 당부였다.


[선생님은 널 믿는다. 나중에라도 꼭 선생님을 찾아주길 부탁한다.]


해선이 선생님을 찾는 일은 없었고, 방황이 오래 가진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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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화 웰컴투 in화라리(完) +1 24.01.18 100 4 13쪽
36 36화 웰컴투 in화라리 (1) 24.01.16 69 4 11쪽
35 35화 화라리 in 화라리 (2) 24.01.15 76 4 10쪽
34 34화 화라리 in 화라리 (1) 24.01.13 79 4 10쪽
33 33화 나비 (5) 24.01.10 95 3 9쪽
32 32화 나비 (4) 24.01.09 91 3 10쪽
31 31화 나비 (3) 24.01.08 93 3 10쪽
30 30화 나비 (2) 24.01.05 116 5 10쪽
29 29화 나비 (1) 24.01.03 126 4 10쪽
28 28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2) 24.01.02 124 4 12쪽
27 27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1) +1 23.12.31 124 4 9쪽
26 26화 딱 한번만 (2) 23.12.29 128 4 10쪽
25 25화 딱 한번만 (1) 23.12.28 125 4 11쪽
» 24화 또 다른 기억 23.12.26 129 5 12쪽
23 23화 졸업, 그리고 +1 23.12.23 153 4 12쪽
22 22화 북극성 23.12.21 154 5 12쪽
21 21화 파티 (Party 아이엠그라운드 지옥) +1 23.12.20 169 6 12쪽
20 20화 득환이 (2) 23.12.19 171 5 12쪽
19 19화 득환이 (1) 23.12.18 182 5 12쪽
18 18화 '도마네' (3) 23.12.16 191 5 12쪽
17 17화 '도마네' (2) 23.12.15 199 5 12쪽
16 16화 '도마네' (1) 23.12.13 208 5 11쪽
15 15화 송윤정네 할머니 (3) 23.12.12 204 6 11쪽
14 14화 송윤정네 할머니 (2) 23.12.11 205 5 12쪽
13 13화 송윤정네 할머니 (1) 23.12.09 210 7 11쪽
12 12화 하찮은 게 더 힘드네 23.12.08 232 6 11쪽
11 11화 울지마, 누렁소 (2) 23.12.07 240 6 11쪽
10 10화 울지마, 누렁소 (1) 23.12.06 265 6 12쪽
9 9화 순영이, 이사 가던 날 23.12.05 271 8 11쪽
8 8화 입술이 누에 같잖아 23.12.04 302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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