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송윤정네 할머니 (1)
추석이 얼마 안 남았다.
황금 들녘이 조금씩 비어가는 대신에 집집마다 곳간이 그득하게 채워졌다.
동네 엄마들 대부분은 ‘도마네’집 사랑 채에 모여서 추석에 쓸 과즐이며 먹을거리를 만들었다.
“참말로. 이쁜 사람은 송편도 이쁘게 빚는다니깐?”
“아이, 성님. 무슨 그런.”
“우리 성님이 언제 틀린 말 하는가? 이거 봐라. 이? 기냥 딱 봐두 표시가 나는 기.”
깔깔깔-
호호호홍-
일이 산더미여도 끊이질 않는 웃음소리.
엄마들은 정말 무쇠처럼 일만 한다.
그렇게 며칠 내내 ‘도마네’집 일을 거들고 나서야 각자의 집 음식을 장만하느라 엄마들 손은 쉴 틈이 없었다.
***
떡을 좋아해 별명조차 떡보인 해선을 위해 추석은 며칠 더 남았지만 민경선은 감자 송편을 빚어 한 솥 쪄냈다.
“엄마. 우린 식구도 없고, 올 손님도 없는데 뭘 이렇게 많이 해요.”
“호호홍, 우리 아들 먹이려고 그러지요.”
아이고, 어머니. 그렇게 좀 웃지 마시라니까요. 그리고 이걸 제가 어떻게 다 먹어요.
하지 지나 캐는 감자는 쪄서 먹어도, 반찬으로 먹어도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가루를 내어 만들어 먹는 송편이다.
항아리에 감자를 넣고 썩히면 온 동네에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썩힌 감자를 주물러 체에 거르고 맑은 물로 여러 번 가라앉혀 말린 하얀 가루는 전으로, 떡으로 재 탄생해 겨울 양식을 책임 졌다.
엄마가 만드는 감자 송편은 정말 최고다.
야들야들 탱글한 피 안에 꽉 들어찬 하얀 팥은 그야말로 궁극의 맛.
한 김 나가야 더 맛있는, 매끈매끈한 송편이 베 보자기 위에서 식어갔다.
식을수록 투명해지며 꽉 찬 속이 다 보이는 송편이 어서 자기를 시식해보라며 유혹한다.
해선이 참지 못하고 냉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응? 뜨거운데. 입 데어.”
하하. 제가 벌써 다 식힌걸요.
우물우물.
찹찹-
우웅, 맛있다.
자고로 무슨 음식이든 만들면서 낼름낼름 집어먹는 맛이 최고지.
“이거, 재학이네 집에 좀 갖다 주고 오련?”
“읍읍...! 네, 엄마.”
꿀꺽ㅡ!
“아긍, 천천히 먹어요. 급하게 삼키다 목에 걸리면 어쩌려고.”
하하. 절대 그럴 일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세요. 엄마.
“가자! 이쁜아, 뛰어!”
월월ㅡ.
자기만 송편 안 준다고 삐졌던 이쁜이가 나가잔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앞서 뛰었다.
아니, 쟨 우리가 어딜 가는 줄 알고...?
가다 서서 돌아보고, 가다 서서 돌아보길 몇 번. 알아서 박재학네 집으로 향하는 녀석.
확실히 텔레파시가 통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찹쌀떡 뽀얀 궁둥이를 흔들며 뛰는 이쁜이와 달리 해선은 조금 괴롭다.
소쿠리에 가득 담겨 베 보자기로 덮은 송편 냄새가 자꾸만 코를 자극했기 때문.
먹고싶다. 먹고싶....다.
하지만, 아무리 떡보라 해도 박해선은 염치와 예의범절을 잘 아는 어린이.(아니, 어른이지)
게다가 무려 엄마의 첫 심부름 아닌가? 이건 무조건 참아야 한다.
헥헥-
월!!
먼저 내달렸던 이쁜이가 정확히 박재학의 집 앞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있다.
“안녕하세요. 엄마가 갖다 드리라고 해서요.”
“아이고, 해선이 왔구나. 니는 여름철 호박맹키로 우째 이리 컸다냐?”
“네? 호, 호박이요?하하...재학인요?”
“그 우라질 넘. 시방 저기 웃방에서 자빠져 잘기야. 아마.”
“네에. 그럼 전 그냥 가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 기래. 잘가라이? 참말로 떡도 이쁘게 빚었네. 근디 쟈는 왜 저렇게 어른스럽다냐. 참말로...”
박재학 모친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열려진 방 문 틈으로 박재학의 빵그란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걸 보니 싱긋 웃음이 났다.
박재학의 배는 삼 일을 굶어도 언제나 저렇게 빵그랄 것 같다.
그래도 송편 들어갈 배는 따로 있겠지? 나중에 한번 들여다 봐야겠어. 정말 뱃속에 뭐가 있나.
***
돌아오는 길,
논두렁을 따라 일직선으로 가면 지름길이지만 송편 먹은 것 소화도 시킬 겸 마을 끝자락 야트막한 산 아랫길을 택했다.
어슬렁 걷던 이쁜이가 금세 눈치채고 신이 나서 또 저만큼 앞서 뛴다.
마을의 북쪽 끝자락인 이 야트막한 산엔 밤나무가 많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이면 온 산이 밤나무 꽃으로 하얗게 덮였고, 바람이 불면 시큼한 꽃 내음이 개울까지 날아왔다.
이쁜인 신기하게도 밤 송이가 떨어진 곳은 잘도 피해 갔다.
땅에 떨어진 밤송이 벌어진 사이로 갈색 밤톨이 보였다.
이건 못 참지.
“이쁜아, 기다려.”
기술시전에 들어가면 밤 송이 속 밤 톨 까는 거야 눈 깜짝할 사이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토실한 알 밤을 쏙쏙 빼낼 때의 짜릿함을 어찌 포기하겠는가.
겉옷을 벗어 손에 말아 쥐고 밤송이를 주웠다. 잠깐 사이 수북하게 모아졌다.
“자. 오빠가 실력 발휘를 좀 할 테니 잘 봐?”
밤 송이를 양쪽 발로 꽉 누른 다음 탄탄한 나뭇가지로 가시 옷을 살살 밀어낸다.
수북했던 가시 옷이 벗겨지고 윤기가 도는 진 갈색 알 밤 3형제가 또르륵 굴러 나온다.
이야. 때깔 죽이네.
어찌나 통통하고 예쁜지, 잘생긴 사람을 보면 왜 밤톨 같다고 하는지 순식간에 납득이 됐다.
대부분 3형제가 많았지만 어떤 건 혼자 외돌토리인 것도 있었다.
외톨이로 있는 알밤은 크기는 훨씬 컸지만 윤기가 조금 덜 도는 것처럼 보였다.
너도 혼자서는 외로운가 보구나?
그래 설까? 3형제, 또는 사이좋게 두 형제가 나올 때가 훨씬 재밌다.
“하하하. 이거 엄청 재밌는데? 이쁜아, 너도 해볼래?”
그때까지 덩달아 신 나서 펄쩍 거리던 이쁜이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한걸음 물러섰다.
짜식, 겁은 많아 가지고.
“이 녀석, 일로 와 봐.”
커다란 밤나무 아래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모르니 뱀들은 얼씬도 못하게 조치했다.
이 무렵 뱀들은 겨울 잠 들어가기 전 배불리 먹어두어야 하고, 좋은 잠자리도 찾을 겸 활발히 돌아다닐 때니까.
하지만 다람쥐나 청설모는 대환영! 가까이 와 준다면 기꺼이 내 수확물 중 일부를 투척 해줄 셈이다.
“이쁜아. 우리 한 개씩만 까 먹고 엄마 갖다 드리자?”
왕왕-
뭐야. 너 왜 귀엽게 짖냐?
밤톨 윗부분 오톨도톨한 부분을 이빨로 물고 당기니 야들야들한 껍질이 쉽게 벗겨졌다.
그 안엔 다시 갈색의 얇은 피가 덮여 있고, 손톱으로 살살 밀자 드러나는 주름 잡힌 황금 빛 노란 속살.
아드득ㅡ.
한입 깨물자 연하디 연한 살집이 부서지며 달큰함이 퍼진다.
“자! 이쁜아.”
휘이익ㅡ!
펄쩍ㅡ.
공중으로 던져주니 멋지게 점프해서 나꿔채 잘도 먹는다.
아드득! 아드득!
아, 이거 한 개로는 안되겠네.
그 뒤로도 몇 개를 더 먹고 나머지는 옷으로 싸서 허리에 맸다.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산 아래 집집마다 굴뚝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밤 까먹는 삼매경에 빠져 시간이 이리 된 줄도 몰랐네.
“이쁜아, 빨리 가자. 엄마 걱정하시겠다."
월-월-.
하하. 녀석, 배가 뽈록 해도 아주 잘 뛰네.
따라잡을 요량으로 해선도 전력을 다해 뛰었다.
아주 드물게 한번씩은 이쁜일 제자리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건 왠지 반칙일 것 같아 참았다.
고갯마루를 넘어 서낭당에 이르자 턱까지 차오르는 숨.
헉헉ㅡ.
잠시 허리를 굽혀 무릎을 잡고 숨을 골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 산 꼭대기에 걸쳐있던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둑어둑하다.
엄마가 걱정하실 거란 생각에 이르니 마음이 조급해져 허리를 펴는데,
...??!!!
서낭당 옆 조그만 초가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해선의 감각을 붙잡았다.
뭐지? 빈 집인가? 여기 빈 집이 있다는 건 몰랐는데.
어스름이 밀려오고 엄마가 걱정하실 거란 생각에 마음은 집으로 향하는데, 몸은 반대로 초가를 향했다.
앞서 뛰던 이쁜이도 멈춰서 돌아보더니 해선 쪽으로 뛰어왔다.
삐거거걱ㅡ.
털썩!
대문이랄 것도 없이 반쯤은 누운 문을 밀자 앓는 소리를 내더니, 그마저 바닥에 쓰러졌다.
빈 외양간엔 소 대신 거미줄이 걸려 있고, 마른 잎들이 여기 저기 뒹구는 흙 마당은 을씨년스럽고 스산했다.
그런데,
새액-새액-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이 곳, 어딘 가 에서 들려오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 소리.
사념을 재우고 집중하자 숨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다름 아닌 사랑채.
문 고리 동그란 손잡이엔 숟가락을 꽂아 밖에서 잠근 상태였다.
저 안에 누군가 있어.
커엉ㅡ.
이쁜이가 누구 없냐 묻기라도 하듯 사랑채를 향해 낮게 짖었다.
해선은 이쁜이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 밖을 지키게 했다.
바람을 일으켜 쪽 마루 위 수북한 먼지를 날리고 허리에 묶었던 알밤 싼 옷을 풀어 내려 놓았다.
발을 땅바닥에 붙인 채 기를 모아 온기와 숨 소리가 느껴지는 사랑채 쪽으로 집중했다.
이건 분명 사람의 숨소리야. 위험이 느껴지진 않아.
손잡이에 걸린 숟가락을 공중으로 살짝 띄웠다.
스윽-
휘익ㅡ탁!
문 고리를 움직여 앞쪽으로 당기자 눈앞에 보이는 건,
아ㅡ!!
숨소릴 느끼지 못했다면 미이라 인줄 알았을 것이다.
비틀어져 돌아간 발목이 누렇게 빛바랜 광목 천에 칭칭 감겨 천장의 서까래에 묶여 있는 그것은, 차마 사람이라 하기 어려운 형상.
세상에ㅡ!!!
해선이 뛰어 들어가 발목에 묶인 광목 천을 풀었다.
털썩ㅡ.
허리가 반으로 접혀진 채 웅크렸던 형상이 그대로 바닥에 스러졌다.
풀어 헤쳐져 얼굴을 덮은 몇 가닥 하얀 머리카락 사이 얼굴의 반을 차지한 퀭한 동공, 허연 비늘처럼 일어난 살 가죽, 벽과 바닥을 긁어 부러진 손톱.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지만,
아직 숨을 쉰다. 죽지 않았어.
살면서 단 한번도 마주해 본 적 없는 상황.
그럼에도 해선은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망설임 없이 생각보다 앞선 의지가 자신을 움직였다.
기역자로 구부러진 몸을 그대로 옆으로 누이고 밖을 내다봤다.
어스름이 지기 시작한 데다 외진 곳이라 인적은 없다.
안심하란 듯 이쁜이가 하얀 꼬리를 일렁여준다.
서둘러 배꼽 아래로부터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려 손 끝에 모으려 했으나 헝클어져 요동치며 모아지지 않는 기운.
침착하자,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다시!
자세를 고쳐 앉고 집중한 채 요동치는 기운을 당겨 하나로 모은다.
제멋대로 날뛰던 기운이 일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손끝으로 당겨져 온다.
마치 따스한 바람을 손에 쥔 느낌, 이 순간 해선은 엄마를 생각했다.
밤이면 끙끙 앓으며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엄마를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이끌었던, 그 느낌을 떠올리며 손끝을 움직인다.
옆으로 뉘어진 형상의 정수리에서부터 바싹 말라 서걱거리는 발끝까지.
천천히...간절히...
낑-끼이잉-
어느새 이쁜이가 옆으로 와 검불같은 몸뚱이를 연신 핥으며 저 또한 온기를 전해주려는 듯 애를 쓴다.
잠시 후,
접혔던 허리가 펴지면서 한결 편해진 숨소리.
옆으로 뉘어졌던 몸을 바르게 눕히고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비로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할머니...?”
며칠 전 쥐도 새도 모르게 야반도주한 송윤정네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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