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득환이 (2)
득환인,
화라리 아이들 중 유독 박해선을 아꼈다.
고만 고만 한 아이들이 작대기 들고 다니며 동네 장 항아리 들 쑤시고 말썽이나 피울 때,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 아이.
겨우 다섯 살 아이가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사람들이 신동이라 했었다지.
또래 아이들보다 속이 깊고 똑똑했으며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쳤다.
다만, 유독 몸이 허약해 엄마인 민경선의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는 데.
어쩐지 최근에 본 박해선은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아이긴 하였으나, 그냥 말이 없다기 보다는 좀 대하기 어려운 느낌이라고 할까.
‘도마네’ 집에 머물러 일을 한 지 십 여 년, 주인의 두터운 신임을 얻긴 했지만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 가.
정직하고 우직하게 일했기에 믿고 심부름을 맡길 뿐, 그 이상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부자가 아랫사람에게 돈 심부름을 시킨다는 건 식구나 매 한 가지라 여기기 때문이라고.
돌이켜보니 처음 돈 심부름 시켰을 때 나름 시험이란 걸 치른 것도 같다.
어느날,
'도마 아버지'가 저를 앞에 두고 돈을 셌고, 득환인 지폐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셌는데,
“오십 만원일세. 장원이 한테 전해주기만 하면 되네. 조심히 다녀오고.”
그 액수가 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셌을 때 분명 한 장이 더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같이 셌다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분 때문이었다.
신문지로 한 번, 누런 종이로 또 한 번, 둘둘 말아 주면서 군청에 근무하는 조카 류장원에게 전하라고 했다.
가는 내내 갈등이 일었는데,
‘내가 잘못 세었을 거다. 그렇게 정확하신 분이 잘못 세었을 리 없어. 아니, 나도 분명 잘못 세지 않았다. 설마 나를 시험하는 걸까. 열어서 세어볼까.’
결국 득환의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도마네 아버지’ 가 준 돈뭉치를 그대로 류장원에게 전달하는 거였다.
진실은 모른다.
다만,
그날 이후 ‘도마네 아버지’ 는 득환이 앞에서 따로 돈을 세거나 하는 일 없이 돈 심부름을 시켰다. 전달하는 것은 물론, 어디선가 받아 오는 것 까지도.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는 것도 득환이였으니,
지난번 해선일 ‘도마’에게 붙여주려 했을 때도 저를 먼저 불렀었다.
“자네, 동네 아이들이랑 동무처럼 지낸다 들었는데...”
“...예, 그저...”
대뜸 그리 물었을 땐 당황스러웠다.
어찌 다 큰 어른이 되어 코흘리개 아이들과 어울려 아이들이 함부로 이름을 부르게 하느냐 책망 할 줄 알았으니까.
아이들을 좋아해 그런다 대답하려 했으나, 곧바로 물어 온 말은,
“그 아이 말일세. 해선인 어떤가. 어떤 아이인가.”
그리 물으며 무릎을 바짝 붙여 오길래 이리 대답해 주었다.
“아, 예. 속이 깊은 아이입니다요. 책 읽는 걸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고, 제 엄마밖에 모르는 효자이지요.”
“그런가. 내, 그 아이 아주 어렸을 적에 보곤 못 본 것 같네 만. ‘도마’ 랑 만나게 해주면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가?”
“...?”
“하하, 사람 하고는. 알았으니 해선에미한테 돌아가는 길에 좀 보고 가라 이르게.”
친구라고요? ‘도마’ 나이가 예닐곱은 더 윕니다요. 게다가 ‘도마’ 가 말을 못하는데 친구를 하라시면...‘도마’ 가 원하지 않을 것인데...
호탕하게 웃긴 하지만 읽히지 않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도마네 아버지’ 에게 득환은 다만,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
해선이 처음 ‘도마’를 만나러 왔던 날,
해선 엄마 민경선이 준비해준 다과 상을 들고 마당을 들어섰을 때 득환은 이상한 경험을 했다.
이쁜이에게 무어라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돌아서는 해선과, 감나무 꼭대기를 하염없이 올려다 보던 ‘도마’ 가 마주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멈칫 했는데,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공기가 밀려와 앞을 막아 섰기 때문이다.
몇 발자국 앞에 있는 두 아이가 마치 딴 세상에 있는 듯 멀게 느껴졌다.
하얀 개, 이쁜이를 보던 ‘도마’의 표정에 웃음이 얹혀지는 듯 했으나 이내 슬픔으로 물들었고, 그런 ‘도마’ 에게 보내는 해선의 눈빛이 일렁이며 자신에게 까지 전해져 왔다.
왜 그랬는지 알 순 없으나 득환은 그대로 걸음을 돌렸고, 저를 불러 아이들의 동태를 묻는 ‘도마네 아버지’ 에게 이리 대답했다.
-그 하얀 개, 예, 이쁜이요. ‘도마’가 그 개를 한참 동안 봤습니다요.
그리고,
세 번째, ‘도마’ 가 해선일 처음으로 방안으로 들였던 날,
‘도마’는 말문을 닫은 지 십 여 년 만에 울음과 함께 입 밖으로 말을 토해냈다.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수백, 수천의 실타래가 공기를 휘감아 쥐어 짜다가 부풀린 후 터지기 직전 밀어내듯 문 밖에 서 있던 저에게 까지 전해져 왔을 뿐.
득환인,
이 아이, 박해선이 점점 궁금해졌다.
***
“해선아ㅡ.”
“...예?”
“이따가 점심 먹고 애들 썰매 탈 건데, 너도 와라?”
“예...”
“썰매는 없어도 된다. 내가 벌써 다 갖다 놨으니까?”
“...예.”
월-월-왕-왕-
썰매 탄다는 말을 듣고 기뻐 날뛰는 이쁜이와 달리 해선은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
아니, 왜 자꾸 내 주변을 맴돌지? 신경 쓰이네.
보통은 이럴 때 박재학이나 장흑수가 와서 시끄럽게 전해줘야 하는데, 지나는 길이라며 툭 던지고 가는 득환이.
해선은 득환이를 보는 게 ‘도마네 아버지’ 가 깊고 깊은 갈색 눈으로 저를 들여다 보는 것 만큼이나 편칠 않았다.
마치,
‘나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라는 표정과 눈빛 아닌가.
언제 한번 제대로 눈싸움을 해봐야 하나.
***
스르릉-
가마솥 뚜껑을 밀어내자 구수한 향과 함께 허연 김이 피어오른다.
앗, 감자 범벅?
점심 간단히 먹고 썰매 타러 간다고 했더니 엄마가 감자 범벅을 했다.
그래서 아까 감자를 그렇게 많이 까셨던 거네.
엄만 허연 연기를 손으로 휘휘 내 저어 쫓으며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퍽퍽 으깨 살살 섞은 감자 범벅을 함지박 가득 퍼 담았다.
“엄마, 엄마. 저 이거 정말 정말 먹고 싶었어요.”
“에긍, 그럼 진즉 해 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러게요, 엄마. 사실은 까맣게 잊고 살았거든요.
“뜨거우니까 조금 식혀서 먹어야 해. 그래야 더 쫀득하거든”
“엄마, 저 그냥 먹을래요. 못 참겠어요.”
입 데이니 조심하란 엄마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선은 크게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욱여 넣었다.
으깨어진 감자의 포슬하고 구수한 맛과 감자에 붙어있는 투명한 감자 가루의 쫀득함이 주는 식감이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아, 이걸 잊고 살았다니.
별 맛 아닌데 별나게 맛있는 맛, 어쩌면 이건 엄마와 함께 했던 추억의 맛인 걸까.
“켁-!”
순간 목이 메었는데, 엄마는 그걸 뜨거워서 데인 줄 아셨는지 깜짝 놀라 동치미 국물을 들이 미신다.
“아유, 어떡해. 그것 봐. 뜨겁다니까. 빨리, 이거 마셔.”
아, 엄마. 이러지 마요. 엄마가 이러면 정말 눈물이 흘러 버린다고요.
“이쁜아- 일로 와.”
이럴 땐, 이쁜이를 적극 이용할 밖에.
왕-왕-
눈치 빠른 이쁜이가 꼬리를 사정 없이 흔들며 뛰어와 해선이 공중에 던져 준 범벅을 점프해서 받아 먹는다.
“어머, 이쁜이 잘하네. 엄청 높이 뛰네? 호흥”
“그럼요. 누가 훈련 시킨 건데요. 자, 한 번 더!”
“썰매 타면 배 금방 꺼지니까 이거 다 먹고 더 먹어?”
하하, 엄마, 그럼 제 배도 박재학처럼 빵그래질텐데요?
하마터면 터질뻔한 눈물을 웃음으로 승화 시켜준 이쁜이 덕에,
썰매 타다 보면 배가 금방 꺼지니 다 먹고 더 먹으란 엄마 말에,
해선은 맘 놓고 함지박에 푼 걸 다 먹고도 가마솥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었고,
사이다처럼 톡 쏘는 동치미 국물까지 한 대접 다 마셨더니 어째 지금은 박재학 보다 배가 더 빵그래진것만 같다.
***
며칠째 매서운 추위가 몰아쳐 망치로 두들겨도 깨지지 않을 만큼 두껍게 언 개울은 썰매를 타는 아이들로 시끌벅적 했다.
“야, 박해선! 빨리 와라이?”
토끼 털로 만든 귀마개까지 하고 썰매 위에서 얼음을 지치던 김영선이 해선을 향해 고함을 질러 댔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인마. 해선이 귀 안 먹었어.”
“야, 니는 해선이 엄마냐?”
“지랄 허네. 그럼 니는 팥쥐 엄마냐?”
“히히, 그럼 콩쥐 엄마는 누구냐?”
아이고, 쟤네들 또 시작이네. 당최 뭐라는 건지.
친구들이 뭐라고 하든 유유자적 걷는 해선과 달리 두 귀를 뒤로 젖힌 채 썰매 사이를 요리조리 뛰어 다니는 이쁜인 세상 신이 난 모습이다.
“해선아, 이거. 드카니가 니 오면 주라고 하더라?”
“어, 고맙다.”
“히히. 고맙긴.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삼촌은 근데 어디 간 거냐.”
“삼, 촌이 누군데?”
“드, 아, 아니다.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 이 순간,
박해선은 친구들에게 이제 득환이 이름 부르지 말자는 걸 어떻게 말해야 할 지를 생각했고,
박재학은 해선이 임마는 요새 왜 이렇게 대하기가 어려운 지를 생각 했다.
그때,
“어이, 드카니ㅡ. 나 좀 밀어줘.”
김영선이 고함을 지르곤 썰매 위에 무릎 꿇은 자세로 앉아 쇠 꼬챙이로 얼음을 지치며 미끄러져 갔다.
김영선이 미끄러져 간 방향을 보니 어느새 득환이 서 있었고, 얼음 파편이 튀었다.
“야, 씨! 그러다 꼬챙이에 찔려. 상놈시키야!!”
입에서 나온 쌍 욕과 달리 얼굴은 하회탈 웃음을 담고 있다.
바본가?
이전 생에선 자신도 득환이 이름을 저렇게 불렀을까? 기억이 잘 안 난다.
나 뿐만 아니라 친구들 누구도 이젠 득환이 이름을 다시는 못 부르게 해야겠단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드카니ㅡ! 간다아!!!”
이번엔 장흑수와 최호승,
딱 봐도 물을 묻혀 뭉쳤을 법한 돌덩이 같은 눈을 썰매 가득 싣고 와선 득환일 향해 던진다.
슈웅ㅡ!
"어우. 나, 저눔시키들이!"
퍼억ㅡ!!!
"커어엌-켁!!!"
아니, 왜 안 피하고 저걸 그대로 맞는 건 뭔데.
득환인 마치 전장에서 총알이라도 맞은 거 마냥 눈을 뒤집고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며 경련 하다 그대로 축 늘어졌다.
장흑수와 최호승이 긴가 민가 하며 서로를 바라 보다 득환이에게 다가 간다.
“드, 드카니-??”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콧구멍에 손가락을 갖다 대려 던 순간,
“크아아아아아악!!!!!!”
득환이 괴물 같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장흑수를 들어 목마를 태워 빙빙 돌자, 아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썰매를 마구 두드리며 웃어 댔다.
그러나,
무심히 저들을 바라보는 해선의 심상은 검은학이 내려와 춤을 추다 날아간 거문고의 현처럼 곧 튕겨 끊어질듯 했고,
“와하하하, 드-끅?”
“아, 씨ㅡ! 죽은 줄 알았잖어! 드-끅??”
“또 하자, 또 해봐라이? 드-끅???”
“야, 이시키들. 왜 그래? 니들 또 뭔 장난이야?”
“어? 그게 드-끅??”
“아니, 드-드-끅???”
친구들이 갑자기 득환이를 부르는 대신 단체로 딸꾹질을 시작했다.
이젠, 너희들도 삼촌이라고 부르게 될 거다.
해선은 딸꾹질을 해 대는 장흑수, 최호승, 김영선에게 숨을 쉬지 말고 참아 보라며 등을 문질러 주는 득환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쩐지,
불편하고 성가셨던 득환이 해선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와 앉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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