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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단 님의 서재입니다.

회귀자의 소소한 컨츄리라이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쥬단
작품등록일 :
2023.11.28 13:30
최근연재일 :
2024.01.18 18:30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8,396
추천수 :
233
글자수 :
185,684

작성
23.12.04 10:33
조회
301
추천
7
글자
12쪽

8화 입술이 누에 같잖아

DUMMY

졸-졸-졸-

처얼썩-철석-


개울 물 흐르는 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좋다.


언제부턴가 매미 소리가 뚝 그치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날았다.


고개를 들어도, 물 속을 들여다 보아도 끝 모를 파란 하늘이 있었다.


아, 좋다!


“이쁜아. 오빤 여기서 할 일 있으니까 넌 저 위에서 망 보는 거야. 망이 뭔 줄 알지? 누구 오면 오빤테 알려주는 거 말야.”


왈ㅡ.


이거, 안다는 뜻이겠지? 자, 시작해 볼까.


도랑 속 물고기들이 한 줄로 긴 띠를 만들어 줄을 선다.


구렁이가 유영하듯 서서히 거슬러 올라간다.


멈춘다.


방향을 바꿔 내려온다.


해선의 주문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손을 대지 않고 작은 돌을 들어 큰 돌 위에 얹는 것과 속도, 강, 약을 조절하는 건 이젠 생각 만으로도 가능해졌다.


바람을 일으켜 보려던 그 때,


멀리서 물 위로 머리만 내 논 채 기다란 몸을 좌우로 흔들며 빠르게 다가오는 무자치.


멈춰!


멈춘다.


돌아 가!


씽크로나이즈드 하듯 제자리서 빙그르 돌아 저 멀리 사라진다.


뭐냐, 귀엽네.


월-월-


이쁜이가 신호를 보내왔다.


뭐, 굳이 이쁜이의 신호가 아니더라도 누구도 눈치를 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오직 마음 속으로만 이루어 지는 일 아닌가.



“야, 박해선ㅡ.”

“거 봐라. 내가 여기 있을 거라 했지.”


일기장을 통째로 빌려갔던 원차웅이랑 최호승이다.


“너, 들었냐? 순영이네 서울로 이사 간다드라?”

“흐어어, 인제 박해선 색시 누가 한대?”


원차웅과 최호승이 말을 주고받았다.


음? 순영이가 이사를 간다고? 서울로?


그래서 요즘 그렇게 묵언수행을 한 건가? 물고기 잡기 내기에도 안 나타나고?


원차웅과 최호승이 앞으로 누가 해선이 색시를 할 거 같냐며 아웅다웅 하고 있을 때, 동미가 쭈볏거리며 다가왔다.


툭ㅡ!


해선이 앞에 하얀 쪽지를 휙 던지곤 달아나는 동미.


원차웅이 집으려는 걸 이쁜이가 잽싸게 입으로 물어 와 해선이 손에 쥐어 준다.


“히히. 연애편지다. 같이 보자.”

"빨리, 빨리."


됐거든? 꿈도 꾸지 마라.


공책을 찢어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쪽지엔,


<나. 순영이. 이따 저녁밥 먹고 김영선 오빠네 포도 밭으로 나와. 혼자 와라. 안 오면 오빠 집으로 간다.>


아니, 이 꼬맹이가 뭐래는 거냐. 포도 밭으로 오라고? 그나저나 저녁 먹고는 도대체 몇 신데?’


***


“동미야.”

“어?”

“너, 해선 오빠 좋아해?”


순영이 대청마루에 엎드려 옥수수를 먹다 말고 앞뒤 없이 물었다.


“어?...왜?”

“그냥. 안 좋아 하는 거 아는데. 그래도 궁금해서.”

“...니? 안 좋아해.”


순영인 바보가 아니다.


동미가 해선오빠를 좋아하는 거 벌써 다 안다. 그래도 알고 있다는 걸 알면 안 된다.


“그치? 넌 흑수오빠 좋아하잖아.”


죄 없는 장흑수가 소환됐다.


"..."

“나 오늘 해선오빠한테 침 바를 거야. 너도 흑수오빤테 침 바르게 내가 도와주까?”

“시, 시러. 그냥 니만 해.”

“나, 서울 가도 방학 때마다 올 거야. 내가 편지 할 거니까 편지 받으면 그거 해선오빤테 갖다 줘.”

“...그...래.”

“오빠 지금 개울에 있더라? 이거 좀 오빤테 갖다 줘. 다른 오빠들 있을 때 말고. 오빠 혼자 있을 때.”


동미는 부아가 치밀었다.


순영인 원래도 시골 말씨 잘 안 쓰긴 했지만, 작년에 향미 언니 왔을 때 며칠을 붙어있더니 이젠 서울 사람이랑 똑같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동네 사람들도 다 순영일 며느리 삼겠다고 한다.


자신은 속으로만 몰래 좋아하는 해선오빠를 순영인 해선오빠 각시 될 사람은 저 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시골 촌뜨기도 서울 가면 엄청 예뻐져서 오던데, 이제 순영인 자신이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저 꼭대기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얼마 전 순영이네 집에서 자던 날, 천지가 개벽하고도 남을 기쁜 소식을 들었다.


처음엔 자다 깨서 순영이 목 놓아 우는 걸 보고 같이 울었지만.


울다 생각하니 순영이 서울 가고 없으면 이제 해선오빤 자기 차지가 될 수 있단 생각에 가슴이 마구마구 뛰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래도 순영이가 서울 가는 건 싫다.


봉숭아 물 들이기로 해 놓고 아직 못 들였는데...


숙제 할 때도, 뽕나무 잎 따러 갈 때도, 징그러워서 못 만지는 누에 옮길 때도, 멱 감으러 갈 때도, 닷새 장에 갈 때도, 늘 순영이랑 함께였는데...


난닝구에 난 구멍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좋기도 했다가 싫기도 했다가. 변덕이 죽 끓듯 했다.


그 변덕이 지금은 싫은 쪽으로 끓었다.


동미는 장흑수가 고자질쟁이라 제일 싫었다.


그건 순영이도 다 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오빠가 장흑수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나쁜 지지배ㅡ.’


그래서 복수를 했다.


순영인 해선오빠 혼자 있을 때 주라고 했지만 다른 오빠들 있는 데서 보란 듯 던져버렸다.


‘흥. 방학 때마다 오믄 뭐 어쩐다고. 나는 맨날 마다 해선오빠 볼 건데.’


동미는 다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


“응? 왜 밥을 그렇게 못 먹어?”


이상하게 밥이 맛이 없다.


분명 엄마가 가마솥에 갓 지은 밥인데, 어째 모래알 씹는 것 같은 느낌이다.


들기름에 노릇하게 구운 두부도, 대파 잔뜩 넣고 밥솥에 찐 자반도, 입안에서 겉돌며 왜글거렸다.


“아, 아니에요 엄마. 애들이랑 옥수수 먹었더니 배가 안 꺼졌어요.”

“그래? 그럼 조금 천천히 먹을 걸 그랬네.”

“무슨요. 저는 괜찮으니까 엄마 많이 드세요.”


‘벌써 사춘기가 온 걸까?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 같고...’


원래도 다른 집 아이들과 달리 존댓말을 쓰던 아들이었지만,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들이 아니라 꼭 어른과 대화를 하는 것만 같았다.


민경선은 요즘 아들이 조금, 아니 좀 많이 불편하다.


***


밥을 먹는둥 마는둥 숟가락을 놓은 해선은 갈등에 휩싸였다.


하, 참나. 이걸 가? 말어?


갈등은 짧게 끝났다.


쪽지에 분명 쓰지 않았던가. 안 오면 집으로 오겠다고. 순영인 열 번, 스무 번, 그러고도 남을 아이다.


“가자ㅡ. 가 보자, 이쁜아.”


뭐, 이쁜이까지 데리고 오지 말란 건 아니었으니까.


가로등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시골 길,


창백하리 만치 하얀 달빛 만이 따라 오고, 저만큼 뛰어가던 이쁜이가 제 주인이 천천히 걷자 금세 알아채곤 제 자리에서 기다렸다.


여자애들이 주로 모여 노는 야트막한 돌 산을 지날 때,


월-월ㅡ.


앞서가던 이쁜이가 한 곳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우고 짖는다.


그럼 그렇지.


낮에 동미가 쪽지를 전해주고 간 걸 아는 장흑수와 최호승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어휴, 저놈들 한꺼번에 꼼짝 못하게 붙잡아 둘 순 없을까?


일단 지금 필요한 건 협박 뿐.


“야, 니들. 따라오기만 해. 앞으로 숙제 같은 거 안 도와준다. 울 엄마 김밥도 어림없고.”


“것봠마, 내가 그랬지? 해선인 금방 다 안다니까?”

“그러니까 조용히 하랬자넘마.”

“나두. 나두 그렇게 말했다?”

“흐어어어, 미치겠다. 크크큭.”


수십 년을 살다 와 보니 알겠다.


왜 인진 모르겠으나 아무런 정보도 없고 순진무구한 산골 소년과 소녀들은 서울, 도시의 또래들보다 훨씬 성숙했었음을.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며 거기에서 오는 오묘한 감정들에 비교적 솔직했던, 그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지는, 그저 인간의 본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친구들이 키득거리며 하는 생각들은 무얼까.


하얀 달 빛 아래 서서 순영인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열 두 살, 아무리 당돌하고 거침없는 순영이라지만 그저 아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잘 모르겠다.


저 앞 포도나무 아래 순영이 서있다.


달빛에 멀리서도 앙 다문 입매가 보이는 것만 같다.


우뚝!


순영과 가까워지자 멈춰 서더니 해선일 앞세우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이쁜이.


뭐냐. 이눔자식, 진짜 웃기는 짬뽕이네?


***


돌 부리를 툭툭 차던 순영이가 발을 멈추고 해선의 뒤를 살폈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는데, 커다란 리본이 달린 하얀 원피스에 발 등 위로 끈이 있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꼭 살아서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오빠.”

“어?”

“나 예쁘지.”

“....어.”

“아, 답답해. 왜 오빠 쩌번부터 어 밖에 모르냐고.”

“어. 그러니까.”


달빛 아래 인형처럼 작고 귀여운 순영이를 보자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전의 생에서 이런 상황에 맞닥뜨렸다면, 열 세 살의 나는 어떻게 했을까.


지금처럼 이쁜일 대동하고 순영일 만나러 왔을까? 집으로 찾아오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내버려 뒀을까? 오는 길 돌산에서 만난 친구들과 한 패가 되어 순영일 놀려 먹었을까?


과거의 나로 돌아와 마주한 모든 것들은 익숙하면서도 참 낯설었다.


후, 힘드네. 그래, 어른 답게(?) 좋은 말 많이 해주자.


“흠, 그...순영...”

“오빠. 나, 이사 간다? 서울로.”


그러나 먼저 치고 들어오는 순영이.


“어. 좋겠다. 너 서울 가고 싶어 했잖아.”

“맞아. 엄청 좋아. 좋아서 죽겠는 걸?”


말로는 좋아 죽겠다면서 커다란 까만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


아, 순영아. 우는 것 만은 안돼!


하지만,


“오빠. 이거 봐.”


순영이 까치 발을 한 채 손을 뻗어 연두빛 포도알을 비틀어 땄다.


그리곤 이곳에 오면서 처음 입었을 게 분명한 원피스에 쓱쓱 문지르더니,


아드득ㅡ.


입에 넣고 깨물었다.


“.....???”

"추르릅!!!"

"읍ㅡ!!!!!"


해선은 그대로 얼음이 됐고.


어둠 속으로 달아나며 순영이 소리쳤다.


“오빠ㅡ. 오빤 이제 내 오빠다아ㅡ!!!”


월-월-.


뒤늦게 이쁜이가 짖었는데, 나무라는 건지 잘 가라고 인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이쁜아. 순영이 데려다 주고 와.”


월-


달빛이 순영이와 이쁜이를 따라갔다.


아, 방심했다. 아니, 쟤는 도대체...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헛웃음이 났다.


손으로 뺨을 쓸어 보았다.


새콤하고 달큰한, 초록 빛 포도 내음이 났다.


***


순영인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처음엔 너무 세게 달려서 숨이 찬 줄로만 알았다.


향미 언니가 영화에서 봤다며 알려준 대로 그저 오빠한테 침을 발랐을 뿐인데, 얼굴은 또 왜 이렇게 달아오르는 건지.


'언니는 왜 이런 말은 안해준걸까.'


원래는 뺨에만 살짝 바르려고 했었다.


놀란 박해선이 움찔하며 뒷걸음 하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쏠렸고, 입술을 스치고 말았다.


'오빠 입술이 꼭 누에 같았어. 비단처럼 부들부들하고 말랑말랑 하잖아.’


순영인 누에 애벌레를 징그러워하지 않았다.


친구 동미는 누에한테 뽕잎을 줄 때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채 줬다. 그러다 도리어 손 끝에 애벌레가 닿으면 펄쩍 뛰며 엉엉 울었다.


하지만 순영인 누에 애벌레가 정말 귀여웠다.


사각사각 뽕잎을 갉아먹는 것도, 까맣고 동그란 눈도.


몇 잠을 자고 난 후의 커다랗고 통통한 애벌레를 만져보면 그렇게 부들거리고 말랑할 수가 없다.


조심 조심 손으로 집어 큰 뽕잎 침대에 옮겨 주면 꼬물락거리는 여러 개의 발로 손가락을 꽉 움켜 잡기도 하는데, 꼭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손으로 쓱 입술을 문질러 보았다.


왜 인진 몰랐지만 이건 누구한테도 말해주지 않고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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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5화 화라리 in 화라리 (2) 24.01.15 76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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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3화 나비 (5) 24.01.10 94 3 9쪽
32 32화 나비 (4) 24.01.09 90 3 10쪽
31 31화 나비 (3) 24.01.08 92 3 10쪽
30 30화 나비 (2) 24.01.05 116 5 10쪽
29 29화 나비 (1) 24.01.03 126 4 10쪽
28 28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2) 24.01.02 124 4 12쪽
27 27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1) +1 23.12.31 124 4 9쪽
26 26화 딱 한번만 (2) 23.12.29 127 4 10쪽
25 25화 딱 한번만 (1) 23.12.28 125 4 11쪽
24 24화 또 다른 기억 23.12.26 128 5 12쪽
23 23화 졸업, 그리고 +1 23.12.23 153 4 12쪽
22 22화 북극성 23.12.21 154 5 12쪽
21 21화 파티 (Party 아이엠그라운드 지옥) +1 23.12.20 169 6 12쪽
20 20화 득환이 (2) 23.12.19 171 5 12쪽
19 19화 득환이 (1) 23.12.18 182 5 12쪽
18 18화 '도마네' (3) 23.12.16 191 5 12쪽
17 17화 '도마네' (2) 23.12.15 199 5 12쪽
16 16화 '도마네' (1) 23.12.13 208 5 11쪽
15 15화 송윤정네 할머니 (3) 23.12.12 204 6 11쪽
14 14화 송윤정네 할머니 (2) 23.12.11 205 5 12쪽
13 13화 송윤정네 할머니 (1) 23.12.09 210 7 11쪽
12 12화 하찮은 게 더 힘드네 23.12.08 232 6 11쪽
11 11화 울지마, 누렁소 (2) 23.12.07 240 6 11쪽
10 10화 울지마, 누렁소 (1) 23.12.06 265 6 12쪽
9 9화 순영이, 이사 가던 날 23.12.05 271 8 11쪽
» 8화 입술이 누에 같잖아 23.12.04 302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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