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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단 님의 서재입니다.

회귀자의 소소한 컨츄리라이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쥬단
작품등록일 :
2023.11.28 13:30
최근연재일 :
2024.01.18 18:30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8,391
추천수 :
233
글자수 :
185,684

작성
23.12.18 21:00
조회
181
추천
5
글자
12쪽

19화 득환이 (1)

DUMMY

사르락-사락-사락-


밤새도록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늦잠도 자고 여유를 부려 보려고 했으나, 꼭 감은 두 눈이 자꾸만 떠졌다.


창호문 손바닥 만한 유리로 비치는 하얀 세상이 빛 반사를 쏘아 대며 유혹하기 때문이었다.


방문을 활짝 여니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찬바람이 사정 없이 들어온다.


어이쿠, 춥다!


애벌레처럼 이불을 돌돌 말아 굴러서 문지방에 턱을 괸 채 문 밖 하얀 세상을 바라봤다.


온통 하얀 들판과 논 위로 수정처럼 부서져 내리는 햇살,


잎을 다 떨군 감나무 가지 끝 주홍빛 감을 살포시 덮은 하얀 눈,


지붕 끝에 거꾸로 매달려 햇살을 받아 똑, 똑 눈물 흘리는 투명한 고드름,


당장 도화지를 펼쳐 놓고 그림으로 남기고 싶지만, 재주가 메주이니 눈에만 담아 둘 밖에...


헥헥-

월-월-왈-


솜 이불을 깔아 놓은 듯 하얀 눈 위를 어지럽게 뛰며 발자욱을 내는 이쁜일 보려니 실없이 드는 생각,


저리도 좋을까? 쟤는 좋아서 뛰는 걸까? 발이 시려서 뛰는 걸까?


망-망-


제 꼬리를 잡으려 빙글빙글 돌며 뛰던 이쁜이가 웃기는 생각 따위 집어 치고 그만 이불 속에서 나오라는 듯 짖어 댔다. 평소에 잘 안 내는 아주 경망스런 소리로 말이다.


사실 오늘은,


이대로 배 깔고 하루 종일 있고 싶네.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떡 먹고, 그러면서 말이지.


뜨끈한 방바닥이 좋아서, 빳빳하게 풀 먹인 이불호청 냄새가 좋아서, 눈 내린 하얀 풍경이 너무 예뻐서...


하지만,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 해선은 돌돌 만 이불 속에서 몸을 빼야 했다.


“응? 동미구나. 아이고. 코가 빨갛네.”

“안...녕..하세유? 해선오빠 아직 안 인났어유?”


갑자기 동미가 마당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후다닥-!


허둥대며 몸을 숨기는 해선이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입꼬리를 씩룩이는 동미.


초록색 바지에 빨간 짧은 코트를 입고 실로 뜬 장갑까지 낀 동미는 눈에서 굴러도 안 추울 것 같은 게, 꼭 재희가 크면 저런 모습일 것처럼 귀여웠다.


“해선오..빠. 안직두 잤어?”

“자긴. 추운데 왜 온 거야? 엄마 심부름?”

“아...니?”


몸을 꼬면서 쭈볏대는게 뭔가 해선에게 볼일이 있는 듯 했는데,


“오빠...이거!”


툭-!


대청마루 끝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해선 앞으로 종이 접은 걸 던지고 뒤돌아 뛰어간다.


아니, 쟤는 뭘 맨날 던지고 가냐? 그냥 주면 될 것을.


“어머, 동미야-.”


엄마가 부엌에서 나와 동미를 불렀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동미 왜 그냥 갔어? 밥 먹고 가라 할 참이었는데.”

“네? 네-.”


엄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 다 이해한다. 자신이 생각해도 대답이 참 이상했으니까.


동미가 던지고 간 종이를 펼치자 익숙한 글씨체.


<오빠. 나 순영이.

이거 오빠한테 직접 보내려고 하다가 동미한테 보내는 거야. 나, 겨울방학 하자마자 갈 거다. 그때 만나. 안녕.>


참 한결같네. 지 할 말만 딱 하고. 궁금하긴 하다. 어찌 변했을지. 몇 달 사이에 뭐 크게 달라지기야 했겠냐 만.


잠도 다 깼고, 마당이나 쓸어볼까.


싸리 비를 들고 마당 안쪽부터 바깥으로 쓸어 나갔다. 습기를 많이 머금은 눈이라 눈싸움 하다 맞으면 제법 아프겠다.


신작로 한쪽으로는 벌써 다니기 좋게 길이 나있는 게, 이장님 방송에 득환이랑 청년들이 부지런을 떨었나보다.


눈을 다 쓸고 나니 등도 후끈, 이마엔 송글, 땀이 맺힌다.


가슴을 활짝 열고 깊이 호흡하며 찬바람을 들이키니 콧구멍이 쩍 붙었다 떨어진다.


쨍하게 차가운 느낌, 정말 좋아. 겨울에 태어나 그런가? 이상하게 겨울이 좋더라.


겨울엔 낭만이 있어야지. 그래, 낭만!


더운 바람을 일으켜 눈길을 조금 더 넓히려던 박해선이 마음을 접은 이유였다.


***


“이눔 지지배. 식전 댓바람부터 밥도 안 먹고 어딜 갔다 이제와?”

“아, 몰라. 밥 안 먹어유.”

“저, 저눔 지지배가?”


쾅-!


식전 댓바람부터 어딜 갔다 오냐고 한 소리 들은 동미는 방문이 부서져라 닫고는 아랫목에 깔린 이불 위에 그대로 엎어졌다.


‘빙신같어, 증말. 오빠 얼굴도 한번 똑바로 못 보고.’


순영이가 서울 가고 나면 맨날 맨날 해선오빠 실컷 보면서 좋기만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지도 않을 만큼에 서있는 해선의 뒷모습만 봐도 심장이 콩콩 뛰며 나대는 통에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다른 오빠들은 코 앞에서 봐도, 웃통을 벗고 있는 걸 봐도 놀려 대기만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 속인지. 속이 상해도 이만저만 상한 게 아니다.


‘순영이 고것이 오빤테 침 발라 놔서 그런 거야.’


애써 그리 다독였지만, 향미 언니가 그때 말하지 않았던가.


"언니. 그럼 좋아하는 사람한테 침 바르면 아무랑도 안 좋아하고 나만 좋아하는 거지?"

"하. 나 참. 야! 서순영!! 축구에서 골키퍼 있다고 공이 안 들어가냐?"

"아, 언니!! 그럼 침을 뭐 하러 발러?"

"...뭐, 그건 나도 잘 몰라. 암튼 좋아하면 확 침부터 발라야 해."

"언니!! 무슨 말이 그래???"

"아! 깜짝이야. 그러니까... 일단, 침을 확 바르고...응? 그리고...알아서 잘 지켜야지."

"언니이이이이!!!!!"


이사 가던 날,

순영이가 그렇게 해선오빠 집 담장 밑에서 통곡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앞으론 오빠를 지켜볼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어찌된게 순영이가 없는데도, 해선오빠 옆엔 이쁜이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도 빙신처럼 오빠 얼굴 한번을 똑바로 못 봤다.

서울 물 먹고 오면 다들 예뻐진다던데. 순영이 지지배, 얼마나 더 예뻐져서 올까.


엄마가 아침밥 먹으라고 큰소리로 불렀지만,


"아!! 안먹는다고요!!!"


엄마보다 더 큰소리로 대답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는 동미였다.


***


며칠째 달큰한 냄새가 온 집안을 뒤덮고 있다.


“엄마. 조청은 원래 이렇게 며칠씩 걸리는 거에요?”

“흐흥, 그럼. 이제 다 됐으니 조금만 참아? 오늘은 먹을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고. 엄마 그저께부터 이거 하느라 잠도 잘 못 주무시잖아요.”

“응? 그러게. 그런데 하나도 안 졸리고, 안 피곤한 걸.”

“이제부턴 조청 만들지 마요, 엄마. 이렇게 시간 많이 걸리고 힘든 건 줄 몰랐어요.”

“에궁, 참말로? 요거 없음 긴 긴 겨울밤을 어찌 참으려고?”


하, 그건 맞지만요.


해선은 삼일 낮, 밤을 조청을 고으며 고생하는 엄마를 도와 어떻게든 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게, 안되는 것도 있었네.


가마솥 안에서 궁극의 다갈색 조청이 될 때까지 필요한 건,


느리게 느리게 가는 시간과, 밀려오는 졸음, 꺼지지 않게 장작불을 때야 하는 것, 끝도 없이 저어야 하는 정성과의 싸움.


이 힘들고 귀한 걸 엄마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셨구나.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건, 주걱으로 계속 저어야 하는 엄마의 힘을 덜어 드리는 것과 피로를 풀어 드리는 일이었다.


***


한겨울 눈보라 치고 찬바람 매섭게 울어 대는 밤,


따뜻한 방 구석에서 배 깔고 엎드려 책을 보노라면 여지없이 입이 궁금해졌다.


그럴 때면 어찌 알고는 슬그머니 나가셔서 쟁반 가득 찰떡과 무를 들고 오시는 엄마.


화롯불을 돋우어 불씨를 올라오게 하고, 석쇠를 올려 달군 후 꽝꽝 언 찰떡을 얹고 기다리면,


뽁,뽁 소리가 나며 찰떡 표면에 기포가 생기고, 노릇노릇 구워져 석쇠 밖으로 뽀얗고 부드러운 속살을 늘어뜨린다.


노랗게 잘 구워져 김이 나는 걸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갈색 조청에 푹 찍어 몇 바퀴 돌려 먹는 맛은 정말 환장할 만큼 맛있었다.


목이 마를 때 쯤이면 엄마는 시원하고 아삭한 무를 깎아 입에 넣어 주셨는데,


조청 만드는 게 그리 힘들단 것도, 무가 배보다 달고 맛있다는 것도 이전 생에선 알지 못했다.


겨우내 가래떡과 찰떡이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 그 많은 쌀을 구하려면 얼마나 일을 하셨을까. 엄마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사셨던 걸까.


엄마는 조청이 달여지는 사흘 내내 가마솥 안을 들여다 봤고, 해선은 그런 엄마의 얼굴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봤다.


***


짧아진 겨울 해가 어스름을 내려놓고 칠봉산 뒤로 숨을 무렵,


엄마는 예쁜 단지에 보물 담듯 조청을 담아 ‘도마네’ 집으로 가셨고, 득환인 지게 한가득 가래떡과 찰떡을 지고 해선의 집으로 왔다.


"자! 해선아. 이거, 겨우내 먹을 네 주전부리다."

“안녕하세요? 삼촌...”

“그래. 음? 뭐, 삼촌? 삼촌이라고?”

“네. 그, 엄마가 이름 막 부르고 그러면 안된다고 하셔서요.”

“하하. 그래? 뭐, 삼촌도 듣기는 좋다만.”


사람 좋은 웃음을 웃던 득환이 해선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했다.


***


득환이,


그 또한 화라리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성이 무언지도.


화라리, 개나리, 수오리를 통틀어 제일 부자 ‘도마네’ 집엔 일손이 부족할 땐 건너 건너 소식을 듣고 외지 에서도 일꾼들이 왔다.


짧으면 열흘에서 길면 한 달, 어떤 이는 집안 식구가 모두 와 사랑 채에 머물며 먹고 자고 했는데, 다른 어느 집보다 품 삯을 후하게 쳐 준 때문이었다.


밥상엔 보통의 집들이 보리밥에 풋고추, 오이나 찍어 먹었던 것과 달리 두리반 가득 찬과 쌀밥이 올라올 때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밥 때문에 일하러 온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득환이도 어느핸가 그렇게 ‘도마네’집에 일하러 왔다가, 가을 추수가 다 끝나고도 떠나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아예 눌러 앉았다.


삼십 대의 나이로 아직 젊은 득환이 가족도 없이 떠돌이로 들어와 도마네 외양간 옆 사랑 채에 머물다 정착했지만,


부지런함과 우직함에 ‘도마네 아버지’ 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특이한 건,


득환인 어떤 사고로 왼쪽 손목을 잃었다는 데, 오른손 하나로도 남들 두 배 만큼 일손이 빨랐다.


왼손의 힘이 다 오른손으로 간 건지 웬만한 무거운 건 오른손과 겨드랑이, 양쪽 허벅지로 다 해결했다.


비단 ‘도마네’ 집 일만 한 게 아니었는데,


경운기가 고장 나도, 탈곡기가 엉켜도, 소가 새끼를 낳아도 사람들은 득환일 찾았다.


“드카니, 기따가 우리 집 경운기 좀 봐주라이. 시동이 안 걸려.”

“드카니, 우리 집 소가 며칠째 앓기만 허고 통 새끼를 못 낳는데, 기따가 밤에 좀 와줄 수 있겠는가?”

“드카니, 내일 지붕에 이엉 새로 얹을 것인데. 좀 와, 이?


이야기는 또 어찌나 구수하고 찰 지게 하는지,


여름 밤이면, 일찌감치 저녁밥을 먹은 해선과 또래 아이들은 마을에서 제일 오래된 호두나무 아래 평상에 모여 득환이의 옛날 이야기 듣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어른들을 따라 아이들도 ‘드카니’ ‘드카니’ 하고 불러 댔지만, 그는 한번도 화를 내거나 얼굴조차 붉히는 일이 없었다.


어른들을 대할 땐 한없이 어른스러웠고, 아이들과 놀 땐 딱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해선의 눈을 들여다 보는 이 사람, 득환의 눈빛도 참으로 이채롭다.


해선의 기억 속 득환은 힘 세고 정 많은, 동네 바보 형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뭐랄까?


목소리에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왠지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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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5화 화라리 in 화라리 (2) 24.01.15 76 4 10쪽
34 34화 화라리 in 화라리 (1) 24.01.13 79 4 10쪽
33 33화 나비 (5) 24.01.10 94 3 9쪽
32 32화 나비 (4) 24.01.09 90 3 10쪽
31 31화 나비 (3) 24.01.08 92 3 10쪽
30 30화 나비 (2) 24.01.05 116 5 10쪽
29 29화 나비 (1) 24.01.03 125 4 10쪽
28 28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2) 24.01.02 124 4 12쪽
27 27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1) +1 23.12.31 124 4 9쪽
26 26화 딱 한번만 (2) 23.12.29 127 4 10쪽
25 25화 딱 한번만 (1) 23.12.28 125 4 11쪽
24 24화 또 다른 기억 23.12.26 128 5 12쪽
23 23화 졸업, 그리고 +1 23.12.23 152 4 12쪽
22 22화 북극성 23.12.21 154 5 12쪽
21 21화 파티 (Party 아이엠그라운드 지옥) +1 23.12.20 169 6 12쪽
20 20화 득환이 (2) 23.12.19 170 5 12쪽
» 19화 득환이 (1) 23.12.18 182 5 12쪽
18 18화 '도마네' (3) 23.12.16 191 5 12쪽
17 17화 '도마네' (2) 23.12.15 199 5 12쪽
16 16화 '도마네' (1) 23.12.13 207 5 11쪽
15 15화 송윤정네 할머니 (3) 23.12.12 204 6 11쪽
14 14화 송윤정네 할머니 (2) 23.12.11 205 5 12쪽
13 13화 송윤정네 할머니 (1) 23.12.09 210 7 11쪽
12 12화 하찮은 게 더 힘드네 23.12.08 232 6 11쪽
11 11화 울지마, 누렁소 (2) 23.12.07 240 6 11쪽
10 10화 울지마, 누렁소 (1) 23.12.06 265 6 12쪽
9 9화 순영이, 이사 가던 날 23.12.05 271 8 11쪽
8 8화 입술이 누에 같잖아 23.12.04 301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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