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쥬단 님의 서재입니다.

회귀자의 소소한 컨츄리라이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완결

쥬단
작품등록일 :
2023.11.28 13:30
최근연재일 :
2024.01.18 18:30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8,387
추천수 :
233
글자수 :
185,684

작성
23.12.08 11:00
조회
231
추천
6
글자
11쪽

12화 하찮은 게 더 힘드네

DUMMY

가을 들판이 온통 황금 빛으로 물결친다.


할 일 많았던 허수아비는 누더기 옷을 입고도 꿋꿋이 마지막 소임을 다했다.


짹짹ㅡ.


참새들이 날아와 귀찮게 해도 기꺼이 제 몸을 내 주었다.


“허허이, 올해도 풍년이여. 좋구나-좋아.”


어른들은 장마가 그리 지독했는데도 풍년이라며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


해선은 변함없이 하재숙과 여자애들의 뒤를 따라 조용히 임무를 수행했다.


재희가 자꾸만 휙휙 돌아다 봐서 가슴이 철렁 하는 것만 빼면 이제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야, 박해선! 너 하재숙 좋아 허냐? 맨날맨날 따라댕기고.”


얘는 뜬금없이 뭐래니ㅡ.


장흑수 한마디에 친구들이 우르르 해선이 옆으로 몰려왔다.


“히히. 그럼 인제 해선이 색시는 하재숙이냐?”


아, 비키라고ㅡ!


순식간에 집중력이 흩어지며 재희가 쑥 밑으로 빠졌다.


“꺄아?...빠?”


재희가 뭐라 옹알이를 하며 휙 돌아다 본다.


아우, 놀래라. 재희 뭘 아는 건가? 근데, 오빠라고 한 거야? 응?아..빤가? 설마??


“니들! 확! 다, 디지고싶냐?”


하재숙이 멈춰 서서 허리에 손을 짚고 소리치자 꽁지가 빠져라 내빼는 친구들.


옳지! 잘한다. 내 친구 하재숙ㅡ.


“야! 박해선!! 니는 왜 자꾸 따라댕기고 지랄이여. 니가 기러니까 애들이 주댕이를 나불대자너.”


하재숙이 성난 하마가 됐다.


“...푸르르르...꺄?...빠!”


재희가 투레질을 하며 제 언니 머리끄덩이를 잡고 말렸다.


'언닌,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오빠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래?' 뭐, 대충 이런 뜻 아닐까 싶지만. 그건 재희와 나만의 진실이니 어쩌랴.


아무튼 이차저차 오늘도 무사히 하재숙 집까지 안전하게 당도했으니 임무 완성이다.


아이고, 이것도 힘드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고 했던 거 취소다.


***


오늘도 하재숙과 그 일당을 무사히 데려다 주고 개울가 사람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개울로 가는 내내 마음속으로 이쁜일 불러본다.


귀신처럼 알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녀석.


저 녀석, 정말 나랑 텔레파시가 통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이시간쯤 오는 걸 알고 와서 기다리는 걸까? 뭐,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게 될 테지.


연습과 훈련은 어느곳에서건 아무 때나 가능했지만 해선은 이곳 개울이 제일 편했다.


아주 한여름만 아니면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직 물 소리와 바람 소리, 물 속에 잠겨 흘러가는 구름이 다였다.


뭐, 이쁜이가 망을 잘 봐주기도 했고.


아침엔 순영이가 옮겨 달라고 했던 돌 위에 편하게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걸로 시작이다.


천천히 호흡하며 기를 모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걸로 시작해, 주변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아만이 느껴지는 순간까지.


처음 몇 번은 참 민망하고 우스웠다.


무슨 사이비 종교 의식도 아니고, 어디서 본 적도 배운 적도 없었지만 그냥 알아서 됐던 이 모든 것들이 말이다.


학교를 파한 오후엔 실전!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거다.


사실, 웬만한 건 마음먹은 대로 거의 다 되어 더는 훈련이랄 것도 없다.


의식하지 않고도 숨이 쉬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게 통제와 강,약 조절이 가능해졌으니, 조금씩 더 정교하게 다듬는 거라고 하는 게 맞을까.



솨아-솨아아ㅡ.


바람을 일으켜 황금 빛 들판을 일렁여 본다.


파드득!


허수아비 어깨에 앉아 졸던 참새가 놀라 파득거리다 이내 날개에 머리를 묻고 다시 잠든다.


아름답고, 평화로워.


무아에 이르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며 마음 먹은 대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자신의 의지.


결코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우연이 아님을 이젠 받아들여야 했다.


잠 안 오는 밤이면 찾아왔던 막연한 두려움이 구름이 걷히듯 서서히 사라진다.


월월ㅡ!


이제 자신의 차례임을 알리듯 이쁜이가 제 주인의 상념을 깨웠다.


이쁜인 훈련의 마지막 순서인 ‘물고기 도넛쇼’를 제일 좋아했다.


사실 망 잘 봐주는 녀석을 위한 이벤트이기도 하고.


선선해진 날씨 탓인지 물고기들이 돌 밑이나 수풀 사이로 다 숨어버려서 눈에 보이는 놈들은 몇 마리 안됐지만.


녀석을 위해서 라면, 기꺼이 수풀과 돌 밑에 숨은 놈들을 모조리 불러냈고.


우르르르-.

퍼드득-퍼드득-.


새까맣게 모여든 녀석들이 전열을 다듬은 후,


둥그렇게 꼬리를 이어 도넛 모양으로 빙빙 돌다가 공중으로 뛰어 오른다.


헥헥-.

와우웅-왈-왈-.


덩달아 치 뛰고 내리 뛰며 신이 난 이쁜이.


저러다 흥분해서 물 속으로 뛰어들어 애들을 물어 뜯는 건 아닐까 싶지만, 기특하게도 그런 일은 없다.


뭐, 그러면 다음부턴 국물도 없다는 걸 알아서 일지도.


[이제 그만.]


기꺼이 명령(?)을 수행했던 물고기들이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가 몸을 숨긴다.


“가자! 엄마 기다리시겠다.”


월-월-.


말 떨어지기 무섭게 벌써 저만큼 앞서 달려가는 녀석, 그리 좋아하면서도 더 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는 아주 착한...개다.


그래도 한번도 양보 안하고 먼저 뛰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


타닥-타닥ㅡ.


마당에 들어서자 잘 마른 나뭇가지 타는 소리와 구수한 밥 내음이 진동했다.


“엄마ㅡ.”


“아긍, 왜 이리 늦게 와. 울 아들, 눈이 십 리는 들어 가고 배가 등에 가서 붙었네.”


네? 설마 그럴리가요.


커다란 무쇠 솥 안에선 연두빛 고구마 순이 들깨를 만나 극강의 구수함을 장착한 채 보글거리고 있었다.


오, 어제 엄마랑 벗긴 거네? 어우, 침 넘어간다.


어제 엄마랑 고구마 순 껍질을 벗겼었다.


엄만 손톱 밑 까매지니 절대 하지 말랬지만, 떼 쓰듯 고구마 순 한 다발을 차지할 수 있었다.


“봐봐? 이렇게 끝을 똑 부러뜨리면서 한쪽 끝을 주욱 아래까지 내리는 거야. 어때. 잘 벗...에궁, 끊겼네? 자, 끊어지면 끊어진 끝을 다시 이렇게...”


“하하. 알았어요. 이렇게요?”


하지만 웬 걸.


부러뜨린 고구마 순은 끝까지 벗겨지지 않고 중간에서 자꾸만 끊겼다.


처음엔 길다랗던 고구마 순이 나중엔 자신의 새끼손가락보다 짧아졌다.


엥? 이게 뭐야...


“호호호홍. 잘 안되지? 그러니까 엄마가 하게 놔 둬요?”


아니요.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무, 아니 고구마 순 정도는 벗겨야죠.


해선은 엄마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조금 기술(?)을 썼다


커다란 돌도 옮기고 들판에 바람도 일으켰는데 막상 이게 뭐라고 긴장됐다.


아이고, 어째 하찮은 게 더 어렵냐.


미세하게 다시!


똑-.

사각ㅡ.

주우욱ㅡ.


“오오. 됐다, 됐다. 엄마. 봐요. 한 번에 다 벗겼어요.”

“어디? 오호흥, 잘했네?”


하찮은 고구마 줄기 하나에 긴장과 환호성이 오갔다.


붉은 자줏빛 껍질이 한 번에 끝까지 주욱 벗겨지니 드러나는 연두빛 속살, 끊기지 않고 벗겨질 땐 속이 다 후련했다.


이거, 은근 재밌는데?


“엄마, 이거 진짜 재밌어요. 오오, 잘된다.”

“호호홍, 정말 잘하네. 아유, 봐. 금방 손톱 밑 까매졌어.”


낑-낑-


이쁜이가 자기도 끼고 싶은지 앞발로 고구마 순 몇 개를 잡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해선을 쳐다봤다.


뭐냐, 너? 떼끼!!


이쁜이의 바람을 눈빛으로 거절했다.


끼...잉...


별것도 아닌 고구마 순 벗기며 까매진 손톱에, 엄마랑 마주 앉아 웃는 한가로움이 눈물 나게 행복했다.


찔끔.


얼마 후 저녁 밥상을 들고 오시는 엄마.


해선이 마주 잡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턱 짓으로 저리 가라 한다.


휴. 좋아요. 그렇다면 기술 시전에 들어갈 밖에....대신에 조금, 아주 조금만.


어때요, 엄마. 깃털처럼 가벼워졌죠?


솥에서 막 푼 뜨거운 밥에 잘 졸여진, 여리디 여린 고구마 순을 올려 한 입 가득 넣었다.


구수하고, 달큰하고, 아삭하고...더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 기막힌 맛이다.


이건 뭐 다른 반찬들은 투명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와앙-

우적,우적ㅡ.


“우리 아들 키 크려나 봐? 요즘 뭐든 정말 잘 먹네?”


“엄청 커서 이뿐 울 엄마 업고 다녀야지요? 히히ㅡ.”


뭐, 지금도 충분히 업을 순 있지만요.


“흐흐흥. 엄만테 농담도 하고. 어른 다 됐다니까?”


아이고, 어머니. 그렇게 웃으면 몇십 년 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 줄 모르죠? 아들 바보예요. 아들 바보ㅡ.


“엄마. 이제부턴 저도 학교 끝나고 와서 엄마 일 도울게요.”

“어이구, 아서요. 할 일이 어디 있다고.”

“친구들은 다 부모님 따라서 들에 나가 일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런데 엄마는 심부름도 한번 안 시키고.”

“안돼. 너는 몸이 약해서 공부만 하는 것도 힘들어. 스무 살, 스무 살 넘으면. 그 땐 엄마가 먼저 도와 달라고 말할 게. 자, 됐지요?”


스무 살 넘으면 아들은 멀리 서울로 공부하러 가고 여기 없을 터, 그 때도 일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거라...는 뜻이었으니. 다 계획이 있는 민경선이었다.


월ㅡ월ㅡ.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으니 어서 먹던 밥이나 마저 먹으란 이쁜이의 일갈.


안되겠어. 뭔가 방도를 찾아야지.


지난 밤에도 몸을 뒤척이며 끙끙 앓는 소리를 하셨잖아. 조금 편안하시도록 손을 써드리긴 했지만.


특별한 건 아니고, 잠드신 엄마 등에 가만히 손을 대고 따뜻한 기운을 끌어올려 전하는 것.


몇 번 해봤는데 엄마의 안색이 밝아지고 덜 힘들어 하시기에 매일 밤 잠들기 전 행해지는, 해선의 하루 중 마지막 일과였다.


***


민경선은 요즘 거의 하루 종일 ‘도마네’집에서 일을 했다.


가을걷이가 한창이라 일하러 온 객식구들로 넘쳐 나니 하루에도 밥상을 열 번 넘게 차린다.


그러다 보니 허리 한 번 피려면 ‘아구구’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녀린 허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곡 소리를 내면 ‘우째 해선엄만 아프단 소리도 그래 이쁘게 한다냐’ 고 놀려 댔다.


그런데, 요 며칠은 희한하게도 자고 나면 몸이 가뿐해졌다.


올해는 화라리 뱀들이 오작교를 놓는 바람에 물맞으러도 못 갔는데 말이다.


밤이면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 낼 아침 못 일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해질 만큼 가볍고 상쾌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찌나 깊고 달게 자는지 해선의 잠든 얼굴을 거의 볼 수가 없다.


언제나 잠든 아들을 내려다 보며 머리카락도 쓸어 올리고, 뺨도 부벼보고, 새벽이면 이불을 걷어낸 채 배를 내놓고 자는 걸 보면 맥 없이 웃음이 났었는데.


이젠 아들보다 먼저 잠들고 나중 깬다.


자다 한번씩 일어나 콩나물 시루에 물도 줘야 하는데, 어째 일어나보면 동이 터 있고,

아들과 이쁜인 벌써 개울가로 나가고 없고, 전에 없이 콩나물은 쑥쑥 잘 크고...


나이가 들어 잠이 많아진 건가?

그러기엔 고작 30대 이니 동네 성님들이 들으면 혀를 찰 일인데.


아무튼 뭐 괜찮다. 농사도 제법 쏠쏠하게 잘됐고. 아들도 아픈 곳 없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민경선은 요즘 아주 살 맛이 난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회귀자의 소소한 컨츄리라이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7 37화 웰컴투 in화라리(完) +1 24.01.18 100 4 13쪽
36 36화 웰컴투 in화라리 (1) 24.01.16 69 4 11쪽
35 35화 화라리 in 화라리 (2) 24.01.15 76 4 10쪽
34 34화 화라리 in 화라리 (1) 24.01.13 79 4 10쪽
33 33화 나비 (5) 24.01.10 94 3 9쪽
32 32화 나비 (4) 24.01.09 90 3 10쪽
31 31화 나비 (3) 24.01.08 92 3 10쪽
30 30화 나비 (2) 24.01.05 116 5 10쪽
29 29화 나비 (1) 24.01.03 125 4 10쪽
28 28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2) 24.01.02 124 4 12쪽
27 27화 미안하다, 선물이야 (1) +1 23.12.31 123 4 9쪽
26 26화 딱 한번만 (2) 23.12.29 127 4 10쪽
25 25화 딱 한번만 (1) 23.12.28 124 4 11쪽
24 24화 또 다른 기억 23.12.26 128 5 12쪽
23 23화 졸업, 그리고 +1 23.12.23 152 4 12쪽
22 22화 북극성 23.12.21 154 5 12쪽
21 21화 파티 (Party 아이엠그라운드 지옥) +1 23.12.20 169 6 12쪽
20 20화 득환이 (2) 23.12.19 170 5 12쪽
19 19화 득환이 (1) 23.12.18 181 5 12쪽
18 18화 '도마네' (3) 23.12.16 191 5 12쪽
17 17화 '도마네' (2) 23.12.15 199 5 12쪽
16 16화 '도마네' (1) 23.12.13 207 5 11쪽
15 15화 송윤정네 할머니 (3) 23.12.12 204 6 11쪽
14 14화 송윤정네 할머니 (2) 23.12.11 204 5 12쪽
13 13화 송윤정네 할머니 (1) 23.12.09 210 7 11쪽
» 12화 하찮은 게 더 힘드네 23.12.08 232 6 11쪽
11 11화 울지마, 누렁소 (2) 23.12.07 240 6 11쪽
10 10화 울지마, 누렁소 (1) 23.12.06 265 6 12쪽
9 9화 순영이, 이사 가던 날 23.12.05 271 8 11쪽
8 8화 입술이 누에 같잖아 23.12.04 301 7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