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5막. 크리처 돔
“크윽 ···으어억!”
거칠게 비명이 터졌다. 백진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번에는 한 쪽 눈이 파였다.
동혁은 이런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으윽···”
“다시 말해봐. 어쩌면 네 태도가 좋으면 누가 또 알아? 내가 널 살려줄지. 뭐, 죽고 싶다면 그러든지.”
순간 희망을 느낀 백진홍은 멈칫했다.
“죄, 죄송합니다. 가만 생각하니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거 알아? 내가 왜 너희를 살려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후후, 모르겠지. 하긴, 너 같은 놈이 알 리가 있을까?”
“자, 잠깐만!”
“싫은데?”
검이 움직였다.
파천검의 매화결이다.
이미 무겁 사원에 있을 때 성취에 비해 몇 배는 올라 있었던 탓에 이제 공간이란 제약 자체가 없어졌다.
단지 손에 검이 없으면 허전했기에 검을 들었을 뿐이다. 기실 그의 경지는 전설로만 내려오는 심검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원을 그리며 검이 훑고간 궤적은 처참했다.
목이 베어졌다.
모조리, 그리고 남김 없이.
방금 전 팔이 잘렸던 이들이다.
이들은 죽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처음 팔이 잘렸을 때만 해도 원통하고 분했으나, 내심 적의 가공할 능력에 한편으론 안도감을 느꼈던 탓이다.
동혁은 개미를 죽인 것처럼 기이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희가 하던 짓을 한 번 해 봤어. 희망을 줬다가 산산히 부서트리는 놀이 같은 것 말이지. 꽤 재밌던데?”
“설마?”
“어째서 네 놈이 이딴 짓을 하는지 알게 됐지. 후후, 이건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같더군. 나쁘지 않더군.”
뒤늦게야 사실을 깨달은 백진홍은 미친 듯이 분노했다.
“이, 이--!! 개새끼--!!”
놈이 부하들을 일거에 몰살시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놈은 방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따라한 것이다.
이가 덜덜 떨렸고, 피눈물이 흘렀다.
강한 적개심이 솟구쳤다.
백진홍은 절규했다.
“넌 내가 반드시 내가 살아나면 죽인다! 너! 잘못 건드렸어! 백가장이 가만 있을 것 같으냐?··· 크흑!”
그 순간이다. 다시 비명이 터졌다.
하나 남았던 왼팔이 어깻죽지부터 말끔하게 썰린 것이다.
두 팔을 잃고 절규하는 백진홍을 보며 동혁이 냉소를 지었다.
“돼지 같군. 돼지는 도축하면 이렇다던데 맞나? 미안, 잘 몰라서!”
“크흑!”
백진홍은 난도질이 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일부러 피부만 건드리며 마치 껍질을 벗기듯이 썰었다. 온 몸에 하나 둘씩 작은 상처들이 생기는 모습이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백진홍은 장수완이 겪었던 것보다 더 참혹하게 당하는 중이다. 그나마 장수완이나 장세창은 치명상은 피할 정도로 힘 조절을 한 탓에 몇 개월만 요양을 하면 정상으로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백진홍은 달랐다.
이미 두 팔이 잘리고, 한쪽 눈이 실명이 된 데다 온 몸이 난자 당해 피부가 뒤짚어져 있었다.
오죽하면 강골인 배수현조차 핏물로 목욕을 한 이 모습에 고개를 돌렸을까.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폐인이 될 것이 뻔했다.
“끄어어어억, 이토록··· 잔인하다니···”
극심한 고통에 백진홍은 몇 번이나 혼절했는지 모른다.
그나마 안장 때문에 강제로 고정이 되어 추락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피가 왜 붉은 색인지 알아?”
“으으윽.”
“심장을 뛰게 하거든. 한번 뛰면 놈이 폭주를 하지. 근데 보통 때와 달리 거부감이 안 들더라고. 왜 그럴까 잠시 생각해 봤지. 근데 이제 알겠어. 네 놈은 그럴 자격이 있다 고 본거야. 맞아. 넌 자격이 있어. 좀처럼 놈의 자격을 얻는 것은 어려운데 네가 그 힘든 것을 뚫었으니까.”
“살···려줘··· 제발···”
“아마 지금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를거야. 뭐 몰라도 돼. 그다지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니까. 아마 미칠거야.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루가 지옥 같을걸?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테니까.”
검이 드디어 멈췄다.
백진홍은 아마 살더라도 평생을 불구로 살 것이다.
온 몸의 혈맥과 근육, 뼈를 슬쩍 슬쩍 건드려 완벽히 장애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흔적은 충분히 남겼는데 어떨지 모르겠군.’
동혁은 의미가 불분명한 눈빛을 보이더니 시선을 돌렸다.
넝마가 된 백진홍을 태우고 있던 가루라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가루라는 동혁을 마주했다.
가루라는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상대가 항거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능력자임을.
그래서 아예 반항조차 하지 않고 쥐죽은 듯 있었던 것이다.
기실 이 영물의 원래 주인은 백진홍이 아니다. 그저 백진홍은 그의 부탁을 받고 몇 년째 맡고 있는 대리인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 해도 가루라는 백진홍을 지켜줘야 했다.
그가 보살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아마 듣지 않았을 것이다.
가루라는 백진홍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중이다.
아마 그래서 마지막에 검을 멈췄던 것 같다.
시체가 되자 뿔뿔히 흩어진 다른 마수와는 다른 행동이다.
가루라는 동혁이 떠나도 좋다고 심령으로 전하자 황급히 백진홍을 실고 벗어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대단한 능력자였네. 역시 큰이모님이 허튼 짓을 할 분이 아니지.”
가장 멀쩡한 배수현의 첫마디다. 그러면서도 눈가에는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동혁은 덤덤한 말투로 반응했다.
“원래 나서지 않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근데 괜찮아? 백가장이라면 만만치 않을텐데?”
걱정스럽다는 듯 배수현은 물었다.
백진홍의 죽음 뒤에 몰고올 후폭풍이 걱정된 탓이다.
“뭐 자기들 운명이겠죠.”
“그나저나 수완 오빠와 세창 오빠 어떻게 하지?”
그 때서야 상태가 심각한 둘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고, 동혁은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의사가 힘든 직업이긴 하네.’
전생에 못했던 것들이다.
본의 아니게 무시를 당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 것이다.
아버지를 떠올리자 비록 내키지 않았어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장수완이나 장세창의 달라진 눈빛을 보며 동혁은 겸연쩍다는 행동으로 지금의 이 기분을 대변할 뿐이다.
두렵다는 듯 시선을 회피하는 동작.
미미하게 몸을 떠는 모습.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들의 눈에 그는 괴물이었으니까.
딱히 나쁘지 않다 보았다. 어차피 거쳐야 할 관문 아닌가.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크리처 돔의 가드들이 주변을 포위한 탓이다.
“모두 잠깐!”
동혁의 미간이 찡그려진 것은 그 순간이다.
예상 외로 가드의 수준이 높았던 것이다.
‘제법이군.’
의외였다. 아무리 스카이 캐슬이 대단하다 해도 고작해야 민간 업체의 가드들 아닌가.
남자는 마수의 등에 매달린 채 시체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일단 조사를 받아야될 것 같습니다.”
동혁은 의외의 상황에 망설이는 듯 했다.
솔직히 가드의 능력을 보며 살짝 감탄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 해도 그의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허나 예상과 달리 동혁은 부드럽게 말했다.
“조사라? 내가 왜 받아야 하지?”
“살인입니다.”
“그래서?”
“이거 말이 안 통하는군요. 살인은 엄연히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까? 바깥에서 당신들이 뭐를 하든지 내 알 바 아니지만, 이곳은 다릅니다. 관리자인 저로서는 여러분들을 보내면 책임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그러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데? 그보다 동료 둘이 상태가 안 좋아서 일단 치료부터 한 후에 말하지. 만약 이조차 안 된다면 뒷감당 못할텐데?”
“후후, 뒷감당이라? 대단한 배짱이군요.”
“그럼 확인해보든가?”
동혁이 보통 때와 달리 대화를 나눈 이유는 호기심 때문이다.
분명 어디선가 느꼈던 익숙한 기운.
남자는 동혁의 오만한 행동에도 감정 섞인 대응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굳이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일단 그 문제는 접어두죠. 그보다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치유술사를 불러 드릴까요?”
“필요 없어.”
“그러죠. 일단 저를 따라 모두 지상으로 내려가기 바랍니다.”
동혁이 의외로 타협을 하자 배수현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쳐갔다.
혹시라도 아까처럼 무작위로 살인을 할까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오기 전 장수완으로부터 들은 이 곳의 주인에 대한 소문은 과장이 많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껄끄러운 존재인 것은 틀림 없다.
어떤 이는 육대 메이저의 장로가 세웠다는 등, 혹은 황족 중 하나가 낙향하여 소일거리로 만든 곳이란 말도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신분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존재임은 분명했다.
지상에 착륙한 동혁은 장수완과 장세창의 몸에 치유기를 주입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르자 놀랍게도 둘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디 그 뿐인가?
적지 않은 자상을 입은 피부에 새살이 싹트며 회복했고, 오른팔이 꽁꽁 얼었던 장세창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빠르게 되감기라도 한 것일까. 보통이라면 수개월 이상 치료 과정이 필요한 것들을 동혁은 마법처럼 단번에 보여줬던 것이다.
주변에는 혈마비에 묻은 천년지독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둘은 그제서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남자는 불신에 가득찬 표정이다.
그 때문일까. 아까와 달리 좀 더 예의 바르게 동혁을 대했다.
“대단한 능력이군요.”
“본론을 말해.”
“다시 말하지만 죽은 이가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저희로서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동혁은 냉랭한 표정으로 살짝 적의를 드러냈다.
“그래서?”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키미르.
현재 클럽의 오너가 외출 중인 관계로 대리로 경비 업무를 담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내심 후회를 하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굳이 그가 무거운 엉덩이를 끌고 나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살인이나 폭행은 거의 일상 생활의 한 부분이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클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라면 눈을 감아주는 것은 관행이다.
허나 당한 이가 백진홍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백가장은 이 근방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가진 단체다.
물론 백가장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이는 돔의 주인의 내력 때문인데 그녀는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고 클럽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신분을 감춰야 했던 것이다.
일이 커지면 번거로워지고, 이는 그 분께서 분노할 수밖에 없었으니 짜증이 순간 밀려온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놈의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신경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 놈이 뭔 짓을 해도 놔둬.
그 분의 지시.
어쩌면 인과응보일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묻을 수도 없었다. 크리처 돔의 특성상 증인이 없다 해도, 분명 이곳에 오는 것을 아는 인물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까닭이다.
“오면서 공안에 연락했습니다. 알다시피 이대로 돌려보내면 직무유기가 되기 때문에···”
“언제부터 당신들이 법을 그렇게 잘 따랐는데?”
“백가장 뿐만 아니라 죽은 친구들도 지역 유지들의 자식들입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동혁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후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벌써 왔나 보네.”
나타난 이들은 공안의 패트롤카였다.
그것도 무려 여섯 대가 순식간에 날아와 동혁 일행을 향해 무기를 꺼내들며 외쳤다.
“모두 무기 버리고 투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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