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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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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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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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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빗소리를 제외한다면 서재는 시간의 틈에 갇혀버린 것처럼 고요했다.

두꺼운 책장들은 먼지로 뒤덮인 채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그 속에선 저 마다 몇 세기씩의 역사를 품고 있는 책들이 어서 자신의 비밀을 파헤쳐 보라는 듯 방문자를 유혹하고 있는 듯했다.


서재의 정 중앙에는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가죽에 새겨진 무수한 흔적들은 서재의 소유자가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세 사람은 바로 그 소파에 앉은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길버트와 루나가 정적을 깨뜨리기 싫다는 듯 침묵하고 있었던 탓에 가장 먼저 서재의 적요를 부숴버린 것은 리버였다.


"길버트 맥킨... 그건 분명히..."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리버는 말을 끝 맺지 못했다.

말하던 도중 그 이름 안에 포함된 의미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리버는 본인이 역사나 문화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적어도 자신이 대륙인들이 가지는 기본 상식 정도는 함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부 귀족들의 이름이란 보통 터무니 없이 길고 복잡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문화는 귀족들의 이름을 외우기 힘들다는 문제점을 야기한다.

하지만 얼핏 생각하기에 도무지 효용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작명법에도 장점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어느 귀족의 지나치게 긴 이름을 전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그 귀족의 인생 전반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몇 십자에 가까운 귀족의 이름 속에는 그 귀족의 종교, 다스리는 지역, 출신, 작위, 성별, 결혼 유무, 심지어 즐겨 먹는 음식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버트 맥킨 피오 드 콜텐.


아마 본래의 이름은 그것보다 훨씬 길 테지만 그 축약된 이름 속에서도 리버는 중요한 점 몇 가지를 추론해낼 수 있었다.

사실, 모르는 쪽이 더 이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콜텐은 제국의 수도이며, 맥킨은 현재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아드리안 황제와 같은 성이니까.


따라서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를 알아챈 리버는 말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리버는 마치 불경스러운 일을 저지른 사람처럼 슬쩍 길버트의 눈치를 살폈다.

길버트는 뭔가 포기해버린 사람처럼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입술 주변이 달싹거렸다.

어떤 의지를 가진 생명체의 움직임이 아니라 무정물의 비틀림 같은 움직임이었다.

길버트는 침중하게 말했다.


"더 말할 필요는 없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으니까."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자마자 리버가 경악하며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반면 루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잠시 후 리버가 지금이라도 바닥에 넙죽 엎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망설이기 시작했을 때, 길버트가 루나에게 질문했다.


"황궁에서 날 봤다고?"


"그래, 자드의 방에서 널 봤지."


"자드의 방..."


길버트는 무심결에 그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자신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을 들으며 길버트는 이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한 남자가 떠올랐다.


친구. 라이벌. 숙적. 동료. 배신자.

그 남자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들이야 많겠지만,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는 길버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이 그 이름에서 그리움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미 완전히 소멸해버린 줄 알았던 과거가 갑작스럽게 현재에 개입하자 길버트는 조금 혼란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추스르던 도중, 길버트는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길버트는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루나를 노려보며 자신의 사고에 골몰했다.


황제의 성을 모르는 인간이 없는 것처럼 자드의 이름을 모르는 인간도 없다.

아니, 사실 황제의 성을 모르는 인간은 있어도 자드의 이름을 모르는 인간은 없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그 남자가 쥐고 있는 권력은 장대했으며, 실제 대륙에 끼치는 영향력 역시 막대하다.

따라서 길버트는 루나가 예전에 황궁에 출입한 적이 있었다면, 자드의 방에 몇 번 드나들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민들이 말하는 '자드의 방'과, 황궁 사람들이 말하는 '자드의 방'은 같은 단어임에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루나는 방금 아주 어린 소년들이 성교라는 단어를 말하는 투로 그것을 얘기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은밀했다는 뜻이다.

마치 후자의 의미가 꽤나 비밀스럽게 사용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길버트는 멀거니 루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돌연 길버트의 얼굴에 큼지막한 미소가 걸렸다.

길버트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투로 말했다.


"라르토 루나! 그래, 나 역시 자드의 방에서 널 본 적이 있다. 이제 보니 항상 자드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던 그 꼬마 계집이었군!"


여태 태연했던 루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루나?"


리버는 의구심 섞인 시선으로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날 어두운 숲에서 리버는 자드 공작의 목적을 다름 아닌 루나의 입을 통해 들었다.

때문에 리버는 방금 전 길버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자신을 겁탈하려는 남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일은 비상식적이다.

리버가 계속해서 묻는 시선을 보냈지만 루나는 끝내 리버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리버는 불현듯 숲에서 보냈던 며칠 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편안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환경이었지만 그 열악한 여로의 와중에도 루나는 몸가짐을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소시민이란 롭스 산맥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여로에 그토록 우아한 몸가짐이나, 혹은 식사 예절을 지참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루나의 몸가짐에 대해선 아마 두 가지 정도의 해석이 있을 것이다.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처럼 루나가 지나칠 정도의 예민함이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게 아니라면 루나가 지엄한 예절을 이미 몸에 익히고 있었던 경우.

리버는 딱히 그럴듯한 증거는 없지만 후자의 경우일 거라 생각했다.

그때 두 남자의 집요한 시선 속에서 침묵을 지키던 루나가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를 짙은 후회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맞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자드 그 녀석이 우리 부족을 구해줄 거라고 생각하며 쫓아다녔던 시절이..."


곧 길버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상하군. 자드가 약속을 어긴 건가? 냉혈한이라고 평가 받을 때가 많지만, 내가 알기로 자드는 한 번 했던 약속은 철저히 지키는 남자인데."


"아니, 자드는 약속을 지켰어. 그 자식은 나와 우리 부족을 구해줬지, 절대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말이야. 그보다 과거의 얘기는 이쯤 하는 게 서로에게 좋겠군. 아무튼 서로에게 그리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겁탈당하는 날을 기다려야 했던 소녀에게도,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폐위당한 황태자에게도 말이야."


이번에는 길버트 쪽에서 입을 다물었다.

길버트는 복도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서재 앞에서 루나는 길버트에게 자살하고 싶은 투로 얘기한다고 말했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정확한 안목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길버트는 자신이 루나에게 똑같은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길버트가 보기에 눈 앞의 소녀는 스스로를 더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길버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서재에 흐르고 있던 시간이 냇물처럼 조용히, 또 천천히 흐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재를 둘러보던 길버트는 이내 뭔가 내려놓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도저히 못 알아볼 만큼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군."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하지만 다른 숙녀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일반적으로 여자들이란 남자들보단 훨씬 과거에 민감한 법이거든."


무뚝뚝한 대답에 길버트가 기어코 선웃음을 지었다.


"충고 고맙군. 그래, 네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정말로 이곳에 성물이 있다는 얘기인가?"


"맞아 이곳에 있어. 그리고..."


뒷말을 흐린 루나가 꼼꼼한 시선으로 길버트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선 팔을 들어 올려 길버트를 가리키며 확신한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는 이미 성물의 일부를 흡수했어. 아주 미약하지만 느껴지는군."


길버트가 대번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미 그것을 흡수했다는 말이냐?"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버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어떻게 그런... 물론 내가 그 전승에 관해 전문가라고 자처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이 서재에 몇 년 동안 머물면서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네가 흡수한 것이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만약 전부 흡수했다고 해도 느낄 수 없는 경우가 있어. 성물의 성질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또 전이는 매 세대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 어떤 경우엔 음식에 깃들기도 하지."


"일부분이라, 그렇다면 성물의 나머지는 어디에 있다는 것이지?"


"알고 싶다면 가만히 기다려.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루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루나는 옆에 있던 리버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순식간에 변하고 있는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기에 리버는 당황하며 루나를 쳐다보았다.

루나는 두 사람을 한번 번갈아보며 말했다.


"서로 우호를 다지는 일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이제 밤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두 사람 다 나에게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아무튼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는 걸 명심해. 영지가 그 요괴들의 파도에 휩쓸리고 난 후엔 성물도 찾을 수 없을 테고, 여기서 죽어버리면 우리를 뒤쫓아오는 암살자의 존재도 무의미해질 테니까."


처음의 경고는 길버트에게, 뒤의 말은 리버에게 하는 것이었다.

길버트와 리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확실히 루나의 말대로 죽어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무용해지기는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잠시 후 알 수 없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자의 반응을 확인한 루나는 제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물론 여전히 리버의 한 손을 꽉 쥔 채였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리버는 깍지 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힐끔 루나를 쳐다보자 어느샌가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하 수로 앞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눈을 감은 상태로 얼마간 서 있던 루나가 어느 순간 눈을 떴다.

이어서 루나가 서재의 한 구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꽉 붙잡혀 있던 리버는 어쩔 도리 없이 루나를 따라 움직였다.


넓은 서재 안을 탐색하듯 한참이나 둘러보던 루나가 이윽고 어떤 책장 앞에 멈춰 섰다.

루나는 리버를 붙잡고 있던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책장 앞에서 손가락을 전부 펼쳤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벽을 더듬는 듯한 동작으로 책장 앞에서 서서히 손을 움직였다.


그런 식으로 책장의 이곳저곳을 차분히 훑어대던 루나의 손이 책장의 한 지점에서 멈췄다.

두 남자가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루나가 책 한권을 뽑아 들었다.

그 후에 서재의 중앙으로 돌아온 루나는 뽑아든 책을 탁자 위에 던져 놓았다.


그때까지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길버트는 루나가 던진 책을 집어 들었다.

길버트는 곧바로 책의 표지에 적힌 제목을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현명한 주부를 위한 50가지 가정 요리 특선'


한참 동안 표지를 노려보던 길버트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루나를 쳐다보았다.

탐색을 끝낸 후 헐떡이고 있던 루나의 입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좀 더 기뻐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영 별로군."


"이것이... 성물인가? 이 따위 요리책이?"


황당한 마음에 되묻기는 했지만 길버트는 본능적으로 이 상황이 모두 진실임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때론 너무 황당한 일이어서 오히려 더 진실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있는 법이다. 이 경우가 그랬다.


길버트는 더 이상의 질문을 그만두고 첫 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닭고기와 당근을 이용한 간단한 스튜가 소개돼 있었다.

두 번째 장에는 코리앤더 잎으로 향을 낸 푹신한 계란 오믈렛을 만드는 방법.

세 번째 장에는 치즈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들이 적혀 있었다.


길버트는 도저히 다음 장을 넘길 기분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대로 소파에 주저 앉았다.

허탈한 감정이 밀려 드는 것을 느끼며 길버트는 서재를 한 번 쭉 둘러보았다.

몇 년 동안 머무르며 서재에 있는 책들은 거의 다 읽었었다.

읽지 않더라도 어떤 책이 있는지는 전부 꿰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루나가 고른 이 책 역시 이미 보았던 것이다.

물론 전부 읽지는 않았다. 세상의 모든 요리사와 가정 주부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길버트는 그것이 종이를 지독하게 낭비하는 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길버트가 허무한 얼굴로 책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루나가 질문해왔다.


"이전에 그 책을 읽은 적이 있나?"


"...앞의 몇 페이지 정도 읽기는 했다. 그렇지만 차마 통독하지는 못했군."


"몇 페이지라. 과연, 그래서 일부만 흡수되었던거군. 평소에 책은 빨리 읽는 편인가?"


"느긋하게 읽는 걸 선호하는 편이지만 속독하지 못할 건 없지."


"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빠르게 읽는 게 좋을 거야. 대신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읽어. 정확한 전이 방식이야 나도 모르지만 네 경우는 아마 통독해야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노력해보지."


그 후에는 한동안 차분한 시간이 흘렀다.

아무튼 서재는 길버트의 공간이었다.

길버트는 평소처럼 더없이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빗소리와 쉭쉭거리며 넘어가는 책장 소리만이 서재 내부에 낮게 흘렀다.

두 사람은 길버트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리버는 앞으로 길버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루나는 약간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그 축축하고 농밀한 시간이 끝났다.

내용 탓인지 애초에 책 자체가 그리 두꺼운 편은 아니기도 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길버트는 말도 안되는 시간에 한 권을 독파했다.

책을 탁자 위에 덮어 놓은 길버트가 곧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물론 몸에서 털이 돋아난다거나, 갑자기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 눈에 훤히 보인다든가 하는 식의 극적인 변화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티끌 만한 변화조차 없다는 사실은 길버트를 약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군."


"아무 일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야."


"성물을 흡수하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고?"


"폭포수는 쉼 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래서 장엄함을 느끼는 것일 테고. 하지만 흐르는 강물 위에 새로운 강물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변화라고 할 수는 없어. 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길버트는 그 말에 대해 깊게 고민하는 듯 눈썹을 모았다.

그때 루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재의 입구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리버가 영문도 모른 채 황급히 따라 나섰다.

서재의 문 앞에 멈춰 선 루나는 길버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후면 동이 틀 테니 난 이만 자러 가겠어."


밤이 깊었으니 자러 간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태도였다.

루나가 정말 그대로 서재를 나갈 것 같았기에 길버트는 약간 허둥대며 질문했다.


"잠깐, 그런데 내가 이 힘을 가져도 괜찮은 건가? 고작 책을 읽는 정도로 힘을 흡수할 수 있다면 차라리 네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네가 원해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게 아니야. 성물이 너를 선택한 거지. 그러니까 나는 불가능해. 한 가지 충고하자면 네가 처한 상황에 대해 너무 열심히 고민하지는 마. 어차피 그것들은 우리가 인지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서재에서 완전히 나가버렸다.

길버트는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소파 위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버트는 빗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베르미들은 내일까지는 활동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갑작스럽게 내린 비는 마찬가지로 언제 갑작스럽게 그칠지 모른다는 점이 조금 불안했다.


잠시 창 밖을 바라보던 길버트가 마침내 서재 밖으로 발을 뗐다.

길버트는 생각했다.

루나는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확실히 변한 것은 없다. 자신도 그리고 현재 영지의 상황도.

잠시 후 서재 밖으로 나선 길버트가 우울한 얼굴로 서재 문을 걸어 잠궜다.

서재 안은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적요만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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