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인간농장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새글

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최근연재일 :
2024.06.30 23:56
연재수 :
164 회
조회수 :
10,772
추천수 :
573
글자수 :
1,068,691

작성
23.09.21 18:35
조회
36
추천
3
글자
12쪽

다면기 (4)

DUMMY

자드는 꺼내기 싫은 말을 억지로 끄집어 내는 듯한 투로 얘기했다.


"혹시 그 일로 나를 원망하고 있나?"


"설마."


길버트는 무덤덤하게 대답했고, 그 대답에 자드는 빙긋 웃었다.

자드는 지금 길버트의 대답이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연기를 몇 번 내뱉은 뒤에 자드는 소파에 몸을 깊이 묻었다.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드는 지난 몇 달 동안 황궁에서 벌어졌던 일을 상기했다.


몇 년 전부터 전쟁을 주장하던 것은 수 많은 관료와 귀족들 중 자신 뿐이었다.

물론 자드는 그 사실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차피 황궁의 바보들은 자신과 길버트의 정치적 대립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할 테니까.


다만 바보들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았어도, 같은 입장을 표명하는 귀족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기는 했다.

같은 주장을 하는 정치인이 없다는 말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다.

당연한 수순처럼 자드는 몇 달 전에 경질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위기에서 구한 것은 여태 정반대의 주장을 외치던 자신의 오랜 친구였다.


길버트는 자드를 경질의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길버트의 입지는 좁아졌고, 길버트를 강경하게 지지해왔던 몇몇 인물들은 그에게 완전히 등을 돌려버렸다.

최종적으로는 유력한 황태자의 정치 감각이 의심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길버트는 그 모든 일을 감수하면서 자신의 경질을 막아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드는 자신의 경질을 온 몸으로 막아준 친구를 배반했다.

그 과정에서 자드는 진실성을 다분히 의심 받았고, 평판이 낮아졌으며, 자드 본인과 그의 친척들이 지니고 있던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경멸까지 받게 되었다.

하지만 자드는 그 모든 일을 감내하면서 길버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참고로 이 일련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자드의 친척들이 모두 뛰어난 사업가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동안 자드가 황궁에 소비한 돈은 대신들과 관료들에게 어떤 의문을 품게 할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이 경우 어떤 의문이란 '굳이 길버트가 차기 황제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라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런 요인들로 인해, 형세가 역전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세 달 정도였고, 마침내 어제 어전 회의에서는 모든 대신들이 자드의 북부 개척론을 찬동하고 나섰다.

어떤 깐깐한 정치인이 평가하더라도 석 달 동안 이루어진 이 과정은 성공적인 정치 전략이었다.

그리고 자드는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매수된 모든 인물들을 주저 없이 비난했다.


'멍청한 놈들.'


그 치들은 아마 전쟁의 목적을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금도 모른 채.


하긴 생각해 보면 남부에서 전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기야 하다.

가끔 영지들 간에 이루어지는 영지전은 전쟁이라기보단 투닥거림에 가깝다.

영지전이란 지극히 신사적이고, 또 차분하게 이루어지는 일종의 유흥거리에 불과하니까.

가끔 제후들이 시비를 걸어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평온한 시대였고, 전쟁은 낯선 단어였다.


따라서 전쟁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자신과 길버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고 해서 그 향방과 반향에 대해 추측하지 못할 건 없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된다.

사실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아무튼 전쟁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이유 만으로 전쟁을 재현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자드는 현 시점에서 최고의 역사 학자로 불리는 수잠조차 자신보다 정확하게 역사를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 사실이 자드에게 기쁨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자드는 차라리 자신이 아예 몰랐다면 전쟁을 주장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길버트는 방금 전에 이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길버트는 정치적 라이벌이 아니라, 오랜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오고 있었다.


문득 자드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자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털어 놓게 되면 이해는 받을 수 있을지언정 공감은 얻지 못할 것이다.

자드가 보기에 자신의 친구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였다.

어딘가에는 반드시 올바른 정의가 있을 거라 믿는, 그런 순박한 이상주의자.


그쯤에서 자드는 자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책장에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드는 시선을 애써 다시 테이블 맞은 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길버트의 지적에 대해 대답했다.


"그래 길. 네 말대로 북부는 남부를 증오하게 되겠지. 부정하지 않겠다. 나라고 해도 내 가족을 죽인 녀석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적이라는 말은 위협이 될 때에나 붙일 수 있는 말이겠지. 약간 성질이 사나운 베르미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적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그냥 언제든 밟아버릴 수 있는 것들을 우린 적이라고 부르지 않아. 북부도 마찬가지지. 적이라고? 아니, 북부는 절대 남부를 침략할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카니쿨라 십 만 마리라도 끌고 내려올 텐가? 네 말처럼 척박한 땅은 그들에게 항상 생존을 강요하고 있지. 그래서 그들이 가난한 것이기도 하고. 길, 전쟁이라는 것은 결국 돈이야. 돈이 없는 북부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어. 이건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이번에는 길버트 쪽에서 잠깐 동안 입을 다물었다.

길버트는 자신의 친구에게 원인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자드의 말은 얼핏 들으면 틀린 구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길버트는 자드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우울한 얼굴로 자드가 간과하고 있는 점을 설명했다.


"지금은 그렇겠지. 현재의 북부는 지독하게 가난하니까. 하지만 자드, 일방적인 거래란 없다. 거래란 그런 거야. 누군가 빵을 사면 그 누군가는 빵으로 주린 배를 불릴 수 있고, 반대로 빵을 판 상인은 돈을 벌게 되지. 그래, 거래란 어느 쪽도 손해 보지 않는 행위야. 양 쪽 모두에게 자그마한 이득이라도 반드시 돌아가게 되지. 전쟁이 끝나고 나면... 남부의 막대한 부가 북부로 흘러 들어가게 되겠지. 그 부로 인해 북부는 성장할 거야. 무벤을 생각해 봐라. 무벤은 지금도 건드릴 수 없는 중립 도시지, 피오 교단이 그 도시를 지키고 있으니까. 전쟁 후에 무벤은 더욱 번성할 거야. 공고한 중립 도시로 남게 되겠지. 그리고 무벤을 통해 이뤄질 그 막대한 부의 흐름은 네가 통제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야. 전쟁은 결국 북부를 살찌우고 강인하게 만들겠지. 그리고 잔뜩 비대해진 그들이 창 끝을 들이댈 곳은 명백해."


길버트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자드의 얼굴 근처를 가만히 응시했다.

자드는 길버트의 시선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 알아챘다.

자드는 발작하는 사람처럼 크게 웃고 나서 말했다.


"내 목이란 말이군?"


"그래."


자드는 그간 피워 대던 연초를 비벼 껐다.

이어서 소파에 몸을 깊게 묻은 채 양 팔을 각각 소파의 등받이 위에 올려 놓았다.

거만한 자세였다.

잠시 동안 소파 등받이 위에 고개를 올려 놓은 채로 천장을 응시하던 자드가 잠시 후에 왠지 모를 후련한 말투로 말했다.


"상관없다.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희생은 치러야 하는 법이지. 내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게 얼마나 높은 곳인지 아마 너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군. 아무리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의미가 없어. 역사는 네가 통제하고 싶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흐르는 강물을 저지하고 싶다고 해서 강물에 뛰어들어 몸으로 막으려는 바보는 없어. 아무리 물길을 틀어도 강은 흘러, 다만 방향이 바뀔 뿐이지."


자드는 대답 대신 빙그레 미소 지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는 태도였다.

언제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끝이 그런 식이었기에 길버트 역시 굳이 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자드는 소파의 머리 부분에 뒤통수를 붙였다.

한없이 편해 보이는 자세로 기댄 채 자드는 책장의 한 부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다음 순간 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드는 복장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군. 길 네 생각은 잘 알겠다. 그래... 너라면 이후에 네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겠지. 나를 구해준 것은 고맙다고 말해 두지.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아. 그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니까. 그리고 말이지.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내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고 난 후엔, 그리고 이곳이 길버트의 방에서 마침내 완벽하게 자드의 방으로 바뀌고 난 후에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정말 아무것도 말이야. 나는 그때가 되면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에 올라가 있을 테니까."


길버트가 뭔가 대꾸하려고 했을 때 갑작스레 방문이 열렸다.

오전에 면담을 요청한 사람은 자드밖에 없었기에 길버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방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고작해야 열 살이나 될까 싶은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여리여리한 몸, 작은 얼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얀 피부를 하고 있었다.


길버트는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으며 소녀를 주시했다.

겉모습도 특이했지만 그보다 길버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소녀의 눈이었다.

소녀의 눈빛에는 어린아이들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발랄함이나 유쾌함이 조금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소녀의 눈은 바람 없는 날의 호수 표면처럼 차분하고 고요했으며, 그 눈빛은 타인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순간 소녀의 꿰뚫는 듯한 시선과 길버트의 시선이 공중의 어느 지점에서 부딪혔다.

시선을 마주한 길버트는 불현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분명 처음 만난 아이였다.

하지만 길버트는 왠지 소녀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는 이름까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신적이지만 한없이 강렬한 어떤 예감이 길버트를 덮쳤다.


길버트가 그렇게 소녀를 바라본 채 굳어 있자 자드가 잠깐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잠시 후 자드가 길버트를 뒤로 한 채 소녀에게 다가갔다.

자드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어서 자상한 표정으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미안하구나.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려버렸다. 먼저 방으로 돌아가 있으렴. 곧 뒤따라갈 테니."


자드의 말에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대로 몸을 돌린 채 복도로 빠져나갔다.

길버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을 느끼며 자드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누구지?"


"대륙의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아이지. 너와는 관련이 없어. 그보다 길, 이건 친구로서 해주는 마지막 충고야. 아마 오늘 밤이 적당하겠군. 연회에는 거의 모든 대신들이 참석할 테고, 시민들은 전부 술에 잔뜩 취해 있을 테니까. 아무튼 오늘은 만이 끝나는 즐거운 날이잖나? 그럼 자네의 여정에 무운을 빌겠네. 맥킨 길버트."


그 말을 끝으로 자드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밤, 길버트는 이후 몇 년 동안 이어질 순행 길에 첫걸음을 올려 놓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인간농장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6 다면기 (9) 23.10.03 18 3 14쪽
75 다면기 (8) 23.09.28 31 3 13쪽
74 다면기 (7) +1 23.09.28 27 2 17쪽
73 다면기 (6) 23.09.24 55 3 13쪽
72 다면기 (5) 23.09.23 31 2 12쪽
» 다면기 (4) 23.09.21 37 3 12쪽
70 다면기 (3) 23.09.18 34 3 16쪽
69 다면기 (2) 23.09.17 36 3 18쪽
68 다면기 23.09.16 33 3 13쪽
6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3) 23.09.16 36 3 17쪽
6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2) 23.09.15 37 4 12쪽
6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1) 23.09.09 39 3 16쪽
64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10) 23.09.09 35 3 17쪽
63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9) 23.09.05 42 4 17쪽
62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8) 23.09.03 45 4 16쪽
61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7) 23.08.31 44 4 15쪽
60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6) 23.08.30 45 4 14쪽
59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5) 23.08.29 39 4 15쪽
58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4) 23.08.28 46 4 21쪽
57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3) 23.08.27 41 3 21쪽
56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 +1 23.08.10 62 6 19쪽
55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23.08.10 52 5 17쪽
54 착석 (15) +2 23.08.08 65 5 15쪽
53 착석 (14) 23.08.07 78 4 15쪽
52 착석 (13) +2 23.08.03 137 6 19쪽
51 착석 (12) 23.08.03 63 6 17쪽
50 착석 (11) 23.08.01 60 8 15쪽
49 착석 (10) +1 23.07.31 69 7 17쪽
48 착석 (9) +1 23.07.30 69 6 20쪽
47 착석 (8) +1 23.07.27 64 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