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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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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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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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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하멜이 소리를 지르자 바로 옆에 있던 토비의 귀가 쫑긋 솟는 것과 동시에 토비의 인상이 조금 구겨졌다.


"미안하군. 자네에게 화를 내려던 것은 아닐세."


잠시 후 아돌프이 청력에 예민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하멜이 토비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그 말처럼 하멜은 토비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아니, 굳이 어떤 감정이 들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안함이라거나 부끄러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아무튼 하멜은 밀러가 다음에 어떤 말을 꺼낼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염치 없다는 것 외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을 부탁이 분명할 것이다.


한편 밀러는 듀라트 저택의 유일한 집사의 반응을 잔잔히 지켜보고 있었다.

밀러는 하멜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정하게 하멜. 그래... 염치가 없다는 것쯤이야 나도 당연히 알고 있지. 하지만 염치라는 것도 결국 살아있을 때나 중요한 것 아니겠나? 우리는 이 영지와 함께 스러져도 아무런 후회도 느끼지 않을 테지. 그래서 여기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고.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까지 영지의 젊은 놈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자네는 가만히 있어. 어차피 의뢰를 수락할지 말지는 우리가 아니라 이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니까."


그 뻔뻔한 대답에 하멜은 더 이상 상종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 두 노인이 도무지 말할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때까지 가만히 침묵하던 토비가 그제야 대화에 끼어들었다.


"밀러, 네 의뢰라는 것은 아마 저 요괴들로부터 영지를 구해 달라는 것이겠지?"


"응? 이미 알고 있었나?"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구만. 그렇네. 나는, 아니 우리는 자네를 고용하고 싶네."


여태 능글맞게 굴던 밀러가 대화의 마지막 즈음에서 갑작스레 진지한 태도로 확 바뀌었다.

더 이상 식사를 즐기거나 할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낀 토비는 아쉬움을 느끼며 빵을 내려 놓았다.

토비는 고민에 잠겼다.

짧지 않은 해결사 생활에서 여지껏 의뢰를 거절해본 적은 없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결사의 주 업무란 인간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며, 토비에게는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사실 깊게 재고할 필요도 없는 제안이었다.

어제 자신들을 덮치려 했던 파도는 해결사 몇십 명이 들러붙는다 한들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토비는 고작 자신의 손 하나를 얹는다고 해서 영지의 미래가 크게 바뀔 것 같진 않았다.

토비는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제안해 온 밀러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어찌 됐든 영지의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테니까.


토비가 고민 끝에 거절의 뜻을 내비치려던 순간 식당 문이 불쑥 열렸다.

그 바람에 토비는 다시 한 번 말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식당 안의 세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리버와 루나 그리고 길버트였다.

밀러가 세 사람 중 길버트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었다.


"설마 이제야 일어난 건가? 길 자네가 늦잠을 자다니 신기한 일이구만."


간밤에 일어난 사실을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기에 길버트는 잠시 우물쭈물거렸다.

함께 들어온 리버와 루나는 길버트가 어떤 변명을 내놓을지 궁금하다는 식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길버트가 조금 머뭇대며 말했다.


"...어젯밤 우연히 마음에 꼭 드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전부 읽고 나니 밤이 거의 지나가버렸더군요."


리버가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고, 길버트는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그 시선을 외면해버렸다.

잠시 뒤에 모든 사람이 자리에 착석했다.

길버트와 두 노인은 좌측 편에 리버 일행은 우측 편에 앉았고, 세 사람씩 서로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됐다.

꽤 오랜 시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길버트는 망설임 없이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수저를 한 번 놀릴 새도 없이 다시 내려 놓았다.


식당 안에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길버트는 의심쩍다는 얼굴로 두 노인과 아돌프를 살폈다.

팔짱을 끼고 있는 토비는 뭔가 말하고 싶다는 듯 끙끙대고 있었고, 하멜은 왠지 모르게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밀러는 새침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던 길버트는 이내 셋 중 어떤 사람이 가장 객관적인 대답을 들려줄지 파악할 수 있었다.

길버트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하멜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집사님."


"저 주정뱅이가 아돌프에게 염치없는 의뢰를 했네. 영지의 상황을 해결해 달라고 말일세. 그게 혼자는 무서우니 절벽에서 같이 뛰어내려 달라는 것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하멜은 잘 걸렸다는 듯 손가락으로 밀러를 가리키며 불만을 토로했다.

자연스레 식당 안의 시선이 전부 밀러에게 집중되었다.

밀러는 능글맞은 얼굴로 길버트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저 물어본 것 뿐이야. 어차피 길버트 자네도 겨울이 오면 다른 영지에서 용병을 구할 셈이었잖은가. 나는 그것을 미리 한 셈이지."


"물론 그렇기야 합니다만..."


그제서야 길버트는 하멜이 그토록 화나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멜이 말한 절벽에서 손을 잡고 같이 뛰어내리는 행위라는 지적은 타당했다.

확실히 그 파도를 막으려는 시도는 명백한 자살행위에 가까울 것이다.

아무튼 아돌프 해결사 한 명을 고용한다고 해서 해결될 상황은 아니다.


잠시 후 길버트는 슬며시 토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이 거의 비슷했기에 곧 모든 눈이 토비에게로 모였다.

모두 토비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드디어 말할 차례가 왔고, 또 그때까지 말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토비는 정작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대답을 꺼내 놓기가 망설여졌다.

제안을 꺼내 놓은 밀러는 물론이고 길버트와 하멜 또한 '혹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끄응..."


토비가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 불현듯 여태까지 잠잠이 대화를 듣고 있던 리버가 나섰다.


"저...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요. 영지를 구하고 싶은 거라면 간단한 방법이 있지 않나요?"


길버트의 양 쪽에 앉아있던 두 노인이 리버의 말이 끝나자마자 벙찐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짧은 정적이 흐른 후에는 두 노인과 토비는 리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길버트의 반응은 애매했고, 루나는 그 얘기에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이윽고 하멜이 만약 장난이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듯 위협적으로 리버를 다그쳤다.


"간단한 방법이라니. 그게 뭔가?"


순간적으로 리버는 답변을 미루고 싶은 묘한 유혹을 느꼈다.

리버는 만약 이곳이 폴 영지의 술집이었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순진한 친구들을 훨씬 더 골려 먹은 후에 대답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노인과 아돌프는 더없이 진지한 모습이었고, 도무지 장난을 칠 분위기는 아니었다.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리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마차의 뒷창문을 통해 스라바는 멀어져 가는 황궁을 한 번 바라보았다.

스라바는 적잖이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스라바가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역시 수도의 연극이었다.

이제 막 만이 끝난 참이다.

따라서 빠르면 오늘, 늦어도 내일부터는 그토록 기다리던 연극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라바는 황궁 안에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수 많은 귀부인들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차라리 추적에 서둘러 나서는 편이 정신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라바는 마차 안에 구비된 훌륭한 의자에 편안히 몸을 묻었다.

이어서 습관적으로 품 안에서 연초를 꺼내 물고선 손을 까닥여 불을 붙였다.

등받이에 몸을 한껏 기댄 스라바는 연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역할에 대해 상기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북부의 머리에 있는 대주교와 추기경들에게 있어서 자신은 특별한 수가 아닐 것이다.

두터운 수도, 견실한 수도, 하다못해 함정 수도 아니다.

자신은 그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던져 놓은 가벼운 수에 불과했다.

운이 좋으면 바둑판 안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겠지만, 운이 나쁘면 사석으로 쓰이고 버려질 그런 가벼운 수.


"썩 재미없는 역할을 맡게 됐군."


스라바는 그것이 재미없는 역할이라 생각했다.

대주교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느긋하게 연극이나 보고 있었을 것이다.


창 밖을 바라보며 무심히 연기를 내뿜던 스라바가 어느 시점에 품 안으로 다시 손을 집어 넣었다.

다만 이번에 꺼내든 것은 연초가 아니라 두 장의 편지와 만년필이었다.

두 장의 편지 중 한 장은 아직 내용이 적혀있지 않은 백지였다.

그리고 다른 한 장은 황궁에서 떠나오기 전 자드가 자신에게 맡긴 것이었다.


스라바는 빈 편지를 의자 옆에 내버려둔 채 우선 자드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내용이 그리 길지 않았기에 읽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드의 편지를 전부 읽은 뒤 스라바는 편지를 손 위에 올려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편지의 발신인이나 혹은 종이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노려본 것은 아니었다.


스라바의 응시가 이어지던 어느 시점에, 손 위에 놓여있던 종이가 확-하는 불길과 함께 한 순간에 재로 변했다.

회색 가루가 된 편지를 움켜쥔 스라바는 마차의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재를 털어버렸다.

그렇게 자드의 편지를 처리한 후에 이번에는 바로 옆에 놔두었던 편지지와 펜을 집어 들었다.

다리를 꼬으고 허벅지 위에 빳빳한 편지지를 올려 놓은 스라바가 곧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슥슥-하는 소리가 얼마간 울린 뒤 마침내 스라바가 손을 멈췄다.

스라바는 자신이 쓴 편지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글을 쓴 사람이 상당한 악필이라고 생각될 만큼 지저분한 필체였다.

마차의 흔들림과 불안정한 자세를 감안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쓴 편지를 훑어본 스라바가 이내 그것을 편지지 안에 집어 넣었다.

악필이었지만 스라바는 그 사실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 이 종이가 직접 북부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의 수신인은 북부의 머리에 있다.

전서구는 전통있고 훌륭한 전달 방법이지만, 새들은 북부의 추위를 견딜 수 없다.

따라서 편지는 콜텐의 마법사 길드로 보내진다.

마법사들은 거기서 북부의 마탑과 통신하며, 북부의 마법사들이 편지 내용을 대필한 후에 거기서 배달이 이루어진다.


"재미없군."


창 밖을 바라보던 스라바가 중얼거렸다.

스라바가 보기에 남부는 지루한 것 투성이였다.

실실 웃으며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행태나, 귀족들이 필사적으로 명예를 좇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자면 환멸스러울 정도였다.

언제나 그래왔듯 스라바는 재밌는 것을 추구하고 싶었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은 언제나 무가치했고, 지금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란 턱없이 지루한 것이었다.

잠시 동안 찡그린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던 스라바의 입가에 불현듯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스라바는 지금쯤 북부의 머리에 있을 두 주교에 대해 떠올렸다.

교단에서 가장 어린 주교인 그 두 사람의 계획이란 떠올리기만 해도 언제나 유쾌해지는 것이었다.

스라바는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차는 이제 포장 도로를 완전히 벗어난 듯 덜컹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스라바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계획이 얼마나 멋지고 재밌을 것인지를 즐거운 마음으로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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