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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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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괴
작품등록일 :
2023.05.2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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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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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먹는 것과 뱉는 것의 차이

DUMMY

이름 없는 숲의 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종류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방풍복처럼 두껍고 튼튼한 옷을 입고 있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여름철 휴양지에서 보이는 인간들처럼 헐벗고 있는 나무들도 꽤 있었다.

은색 달빛은 잘게 저며져 숲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그 달빛의 파편들 중 일부는 낙엽에 스며들어서 그것을 마치 얇은 은편처럼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밤의 한 가운데에서 리버는 묵묵히 토비의 뒤를 쫓아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걷는 일에 치중하던 리버는 고개를 들었다.

빛의 편린이 토비의 등허리에 잔뜩 스며들어 있었다. 토비의 뒤쪽 갈기 털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것이 꼭 버터 같은 모습이었다.

리버가 그 부근의 갈기 털에 손을 파 묻어 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고 있었을 때 불쑥 토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리버는 어쩌면 아돌프들은 거짓말 뿐 아니라 인간의 속마음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함께 걷는 것을 멈췄다.

자리에 멈춰선 토비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이내 어느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나무를 유심히 매만지던 토비는 한참 동안 가지를 살피고 나서 리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착했다."


토비의 말에 리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버는 여태 걸어온 길을 한번 되돌아본 후에 이윽고 토비가 매만지고 있는 나무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그 나무가 확실해요?"


"그래 확실하다. 길버트가 말한 것은 틀림없이 이 나무다."


리버는 토비 옆으로 다가가 그가 지목한 나무를 관찰했다. 가지들은 제 각기 수백 개의 잎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고 그 사이로는 옅은 달빛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훌륭한 수형인 것은 틀림없지만 리버는 그것이 여태 찾고 있던 나무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나무를 이리저리 노려보던 리버는 결국 토비에게 되물었다.


"저기요 토비?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요, 제 눈엔 그 나무가 다 그 나무로 보이는데요. 아무튼 이 근방엔 수천 그루의 나무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혹시 당신이 나무를 잘못 골랐다거나 할 수도 있을 거란 합리적 의심이 드는데요."


의심 가득한 질문이었지만 토비는 유쾌하게 웃어 넘겼다. 이어서 토비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은 아직까지 낮은 위치에 걸려 있었다. 밤의 초입 단계인 것 같았다. 토비는 리버에게 친절한 설명을 해 줄 시간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밤이 긴 계절이다. 시시껄렁한 잡담을 조금 나눈다고 해서 그 사이 밤이 훌쩍 지나가버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토비는 팔짱을 꼈다.


"리버, 너는 만약 수백 명의 아돌프가 네 눈 앞에 있다면 그들을 전부 구별할 수 있겠냐?"


"음. 글쎄요? 수백 명의 아돌프라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은데요. 제 직업 덕에 눈썰미는 남들보다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지만요, 그래도 수백 명을 구분하자면 어쨌든 각자에게 개성을 부여해야 하잖아요? 어, 그러니까... 이런 말은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신들은 전부 털에 덮여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구분이 어렵다구요. 뭐, 그 수백 명 중에서 토비 당신을 찾으라고 한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요."


리버가 마지막에 은근슬쩍 덧붙인 대목에서 토비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네 감식안을 탓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인간들 수백 명이 모여 있으면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나는 수백 명의 아돌프 쪽이라면 당연히 전부 구분할 수 있다. 어떠냐. 너도 수백 명의 인간들이라면 전부 구분할 수 있겠지?"


"그야 그렇죠? 실제로 저는 폴 영지에 있는 몇 백 명이나 되는 제 고객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것과 마찬가지야. 네가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나무들을 구분할 수 있다."


알듯말듯한 기분에 리버는 생각하느라 잠시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달이 몇 발자국 움직인 후에 리버는 의문이 가시지 않은 투로 다시 질문했다.


"하지만 토비, 사람은 일단 살아있잖아요. 사람은 움직이거나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을 수도 있죠. 나무는 달라요. 음... 그러니까 만약 강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쳐 보자구요. 제 생각에 그 사람은 강변에 무수히 깔린 자갈과 돌멩이를 전부 다른 객체로 인식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뭐 그야 그중에 특이한 모양을 가진 몇몇 자갈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겠지만요."


"돌멩이는 구분할 수 없겠지. 그것들은 무정물이니까. 하지만 나무들은 전부 살아있잖냐. 그러니까 구분할 수 있다."


리버는 신음을 뱉으며 다시금 생각에 빠진 모습으로 돌아갔다.

리버의 모습을 바라보던 토비는 한번 피식 웃어버리고선 더 이상의 설명은 관두기로 했다.

아마 더 설명해도 앞서 했던 말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요컨대 회중시계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설명하기란 지난하다.

정확하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생각의 그 지점에서 토비는 언젠가 루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날 지하수로 앞에서, 루나는 단지 할 수 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토비는 그것이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토비는 당시 루나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토비는 발견한 나무를 쳐다보았다. 그 나무는 잎이 다른 것보다 아주 조금 더 뾰족하고, 가지와 잎의 수형이 오리를 닮은 나무였다. 한마디로 확실한 개성을 가진 나무였다.

토비는 그런 식으로 나무에 저마다의 개성을 부여할 수 있었지만 당연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물론 토비는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길버트가 지목한 나무는 분명 그 나무였으며, 그것을 찾아냈고 앞에 섰다면 더 이상의 부가적인 설명은 필요 없다.


토비는 나무와 리버에게서 시선을 떼고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토비가 묵묵히 숲의 향취나 즐기려고 마음먹었을 무렵, 불현듯 한쪽 구석에 있던 수풀이 스르륵 좌우로 갈라졌다. 그때까지 토비 옆에서 고민에 잠겨 있던 리버가 화들짝 놀라며 수풀 쪽을 응시했다.

수풀 속을 비집고 나온 것은 루나였다.

이미 한참 전부터 발소리를 듣고 있던 토비는 유쾌한 투로 인사를 건넸다.


"여어 루나, 그쪽 작업은 전부 끝난 모양이로군."


루나는 옷에 묻은 잔가지와 나뭇잎들을 툭툭 털어냈다. 그러고선 찡그린 얼굴로 토비와 리버 그리고 주변 풍경을 훑어 보며 말했다.


"...그러는 너희들은 아직인 것 같군. 잡담할 시간에 서둘러 움직여. 어떤 특별한 밤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버리니까."


루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었다.

물론 평소에도 퉁명스럽긴 했지만 현재는 마치 날이 벼려진 검처럼 사나운 태도여서 토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토비의 옆에서 루나를 지켜보던 리버는 루나의 거친 태도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버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고 있었다. 리버는 어째서 루나가 그토록 화난 사람처럼 굴고 있는지 십분 이해했다. 리버는 며칠 전 일을 회상했다.



*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듀라트 영지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겁니다."


길버트는 좌중을 둘러보며 그간 일어난 일을 죽 정리했다.

불현듯 시작된 요괴들의 습격. 요괴의 파도를 받아내야 했던 영지의 비참한 상황.

해결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경위.

마지막으로 길버트는 바람의 방향이 바뀐 지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까지 전부 설명했다.


"이 부근의 끔찍한 강수량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시기에 비가 내린 것은 천운입니다. 바람이 영지를 향해 불고 있다면 대륙의 동부를 통째로 태워 먹을 일은 없을 겁니다."


"잠시 기다리게 길버트, 아직 기름을 구하는 문제가 남아있지 않나. 저 청년이 말한 것처럼 나무에서 채취한다고 쳐도 그것이 단기간에 가능한 일인가?"


"카투스 나무에서 테레핀을 추출하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이미 지쳐있는 병사들에겐 가혹한 일과겠지만 어쩔 수 없겠지요. 그 일은 가능하면 전선에 직접 서지 않는 사람들에게 맡기겠습니다. 두 분께선 마을에 있는 기름을 전부 모아 주십쇼."


"스퀼라의 문제는 어떻게 할 텐가? 그것들은 밤에도 활동하잖나."


"...그 부분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이 시기가 아니면 안됩니다. 설령 우리들이 산과 함께 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계획을 성공하고 나면 영지에는 다시 미래가 생깁니다."


회의는 해가 완전히 질 무렵까지 쭉 이어졌다.

회의는 꽤나 열성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당 안에 여러 목소리가 오가지는 않았다.

애초에 계획을 창안한 것은 길버트였으며, 영지의 유일한 백인장 만큼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의 대부분은 길버트의 설명이 차지했다. 가끔 길버트의 계획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도 했지만 질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적한 부분들은 이미 길버트가 전부 고려해 놓은 것들이었다.


밤이 되어서 길었던 회의가 끝났다.

루나는 회의가 처음 시작되자마자 숙소로 돌아간 상태였고, 리버와 토비 역시 지루한 회의가 끝나자마자 크게 하품을 쏟아내며 숙소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식당을 빠져나가자 밀러는 식당 한 구석에 놓인 찬장에서 포도주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평소라면 책망했을 하멜 집사는 잔을 세 개 들고 와 밀러의 맞은 편에 앉았다. 길버트는 그 모습에서 오늘 밤 지하실의 가장 비싼 포도주 몇 병이 사라질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밀러가 술병을 흔들며 길버트에게 남으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길버트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할 일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길버트는 식당을 빠져나왔다.

길버트는 언제나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서재로 발을 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버트는 서재에 도착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눅눅한 종이 냄새가 그를 맞이했다. 길버트는 가만히 서재 중앙으로 이동해 그곳에 놓인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오늘 하루 거의 몇 주치에 해당하는 말을 쏟아낸 탓인지 진득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길버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의식의 바다 위에 지난 날의 일들이 부표처럼 부상하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그 수많은 기억의 부표들 중 몇 가지를 골라 뒤집어 보았다.


첫 번째 부표에는 공습 첫날 친구들을 잃은 월렛의 비명소리가 담겨 있었다. 길버트는 다음 부표를 뒤집었다. 그 두 번째 부표에는 남편과 부모 그리고 애인과 자식을 잃은 시민들이 부르짖는 모습이 새겨져있었다.

길버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의식 이곳저곳을 뒤적이고 또 헤집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뒤집어 본 부표에서 길버트는 처음으로 서재에서 나와 성벽 위에서 창을 꼬나 쥐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길버트는 눈을 떴다. 길버트는 무심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을 집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헤르바지(紙) 위에 글을 써내려갔다.

헤르바지는 금세 빼곡한 글씨로 가득 찼다.

그곳에 적힌 것들은 작전에 필요한 병력의 수. 구체적인 실행 단계. 그 실행 단계마다 소요되는 시간. 그것들을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 마지막으로 도중에 발생할 각종 변수에 대한 대처 방안 같은 것이었다.

일필휘지한 후에 길버트는 자신이 써내려간 것들을 유심히 검토했다.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길버트는 그것이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이라고 확신했다.

길버트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헤르바지를 내려 놓았을 때, 갑자기 서재의 문이 벌컥 열렸다.

적잖이 놀라며 길버트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재 입구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길버트는 의문과 함께 물었다.


"리버군과 루나양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서재 주인의 질문에 리버는 곤란한 표정으로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음... 그게 말이죠 황태자님..."


리버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겠다는 듯 옆에 있는 루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루나는 앞으로 나서지 않은 채 짜증 섞인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결국 리버가 발을 뗐다. 리버는 서재 중심으로 걸어가 길버트의 옆에 섰다. 그러고선 테이블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것들을 가리켰다.


"저 황태자님? 이것들 좀 잠시 옆으로 치워도 될까요?"


"예 뭐, 그러십쇼."


길버트가 얼떨떨한 얼굴로 승낙하자마자 리버는 모든 서류를 탁자 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이어서 리버는 그제까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양피지를 테이블 위에 쫙 펼쳐 놓았다. 양피지의 내용물을 확인한 길버트가 곧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리버를 바라보았다.


"이건 대륙 지도잖습니까? 리버군이 대륙 정세에 관심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마땅한 겨울 휴양지라도 추천해주길 바라는 겁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길버트는 리버가 어려워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길버트는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격식 없이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이미 폐위 당한지 한참이나 지났으니까요."


"...좋아요 길버트씨. 그럼 바로 본론을 말할게요. 저 그러니까, 길버트씨? 아주 잠깐이면 되니까 루나의 손을 잡아줄 수 있나요?"


길버트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길버트는 손을 잡아 달라는 말이 한패가 되자는 전통적인 관용구인지, 혹은 실재적인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곧 리버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리버는 자신의 정보 전달력이 형편없었다는 점을 인정하며 서둘러 부연했다.


"동료가 되어 달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이건 그러니까... 성물에 관련된 일이에요. 정확히는 설명할 수 없지만 루나의 말에 따르자면 길버트씨가 꼭 손을 잡아줘야 한다고..."


그쯤에서 말을 멈춘 리버는 다시 처음처럼 루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루나가 입을 뗐다. 루나는 마땅찮다는 투로 말했다.


"어젯밤의 일은 기억하고 있겠지."


"어젯밤 일이라면... 예, 당신이 리버군과 손을 꼭 잡은 채 어두운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것 말입니까?"


길버트의 능글맞은 태도에 루나는 순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뭐라 항변하려 꼼지락대던 루나는 그러나 이내 침착을 되찾았다. 루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그건 성물의 위치를 정확히 탐색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어. 이 녀석이 성물을 흡수해버린 탓에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지. 이 서재에서 길버트 너와 했던 일도 같은 과정이었어."


루나의 말이 끝나고 길버트는 한참 동안 묵묵하게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서 루나의 눈을 직시했다.


"음 그렇군요. 대강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혹시 그 탐색 작업이라는 것이 대륙 단위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겁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군. 맞아 할 수 있어. 그래서 말인데..."


거기까지 말한 뒤에 루나는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길버트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루나는 지극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획 돌려 길버트의 시선을 외면했다.

루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잠시 후 길버트는 모든 인과관계를 깨달았다. 테이블 위의 지도와 대륙 단위에서의 탐색. 야심한 밤에 있었던 일과 자신의 손을 잡아 달라는 말. 루나가 어떤 심정으로 서재에 찾아왔는지 추측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루나양은 다음 성물을 찾기 위해 이번에는 제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군요. 어젯밤 여기서 리버군의 손을 잡은 것처럼 말입니다."


길버트는 싱긋 웃으며 말했고 반대로 루나의 인상은 처음보다 약간 더 구겨졌다.


"...그래 맞아. 정확한 요인은 알 수 없지만 이 녀석을 사용해도 다음 성물의 위치를 찾을 수 없더군.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길버트는 말없이 루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응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오래 이어졌다. 어느 시점에 루나가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한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긴 루나는 내뱉듯 말했다.


"이 쪽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겠다는 말은 아니야. 네가 내 수탐을 도와준다면, 나도 그 빌어먹을 계획에 동참하지."


길버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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